아름다운목회(은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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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목회(은퇴)
은혜로 부르시다. 참빛-조영호 2023-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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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부터 45년 전인 1978년 11월 4일 영양교회 개척을 시작해서 41년을 목회하고 2019년 12월 첫 주에 춘천교회에서 은퇴하였다. 생각해 보면 참으로 빠른 시간이요, 세월이 아닐 수 없다. 「참빛」에서 부탁한 은퇴 목회자 회고담을 어떻게 쓸까 하다가 부름을 받은 나의 삶과 교회에 대한 생각을 몇 자 옮겨놓는 것으로 대신하려고 한다. 짧지 않은 목회자의 길에서 별별 일들이 다 있었지만 돌이켜보면 모든 것이 은혜요. 은총이 아닐 수 없다.

내 어린 날

① 부산으로

나는 경상북도 시골에서 태어났다. 1950년대 말 우리 집은 그 시골에서 부산으로 이사해서 초량 4동의 산비탈 달동네에서 살았다. 그때가 초등학교 1학년을 마쳤을 때였다. 당시 우리 집은 물론이고, 그 시대는 무척이나 어렵고 힘들 때여서, 나는 고생을 많이 하면서 어릴 때를 보냈다. 신문을 돌리고, 시장에 장사하는 어머님을 돕기도 하면서 자란 것이다. 초등학교는 부산 중앙 국민학교를 다녔는데 사친회비를 못 내 집으로 쫓겨오기도 하고, 수학여행으로 경주 갔는데 갈 수 없을 만큼 가난했다. 나는 군대에 갔다 와서 결혼할 때까지 부산에서 살았지만, 부산에 대한 낭만이나, 그리움은 고사하고 힘들게 자라고 고생한 지긋지긋한 도시로 기억에 남아있다. 그런데 이 고정된 생각은 근래에 부산에 가끔 내려가면서 변화가 왔다. 작년에 한 주간 부산에 있으면서, 친구 최 목사와 송정에서 해운대 바닷가를 걷고, 맛있는 음식과 전망 좋은 카페에서 차를 마시며 새로운 부산을 맛보았다. 광안대교를 오가면서 해안의 즐비한 빌딩과 한밤의 찬란한 불빛을 보면서 천지개벽이 된 부산, 미국 뉴욕의 맨해튼이나, 중국의 상하이 이상의 도시로 변했고 발전한 부산을 느꼈다.

② 교회로

그 당시 초등학교를 졸업할 즈음에 내 삶에 가장 큰 일이 일어났는데 그것은 초량시장에서 장사하면서 우리 5남매를 키우던 어머니가 교회 기관에 도움을 입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 일로 나는 생전 처음으로 교회에 나갔는데 그곳이 바로 부산 성지 그리스도의 교회였다. 어려운 내 어린 날 분노가 가득한 사춘기로 막 접어들 때 교회에 발을 딛게 된 것은 은혜요, 하나님의 특별하신 한 수였다. 아마 내가 그때, 그 모양 그대로 살았다면 지금의 나는 결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때 성지교회는 김광수 전도자가 목회자였는데 얼마 후 20대 후반의 젊은 전도자가 왔는데 그가 원종호 목사님이었다. 원 목사님은 당시 신학교를 다니면서 우리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놓았던 시절이었다. 저녁 예배 마치고 대화하다가 그것이 열정의 강연이 되면, 결국 끝이 나지 않아서 집에도 가지 못하고 교회 기도실에서 밤을 새운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아마 그때 원 목사님의 열정과 우리의 순수성이 조우(遭遇)하였던 것 같다.

③ 은혜로

나는 초등학교 4학년 때 달동네 판잣집 방에서 죽음을 생각한 적이 있었다. 어른들은 돌아오지 않고, 해는 지고 어두워 갈 때 혼자 빈방에서 ‘왜? 사는가?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 하는 생각에 숨이 막히는 절망을 삶으로 체득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초등학교 졸업 후 교회에 나갔는데, 가기만 하면 엄마 옆에서 졸며 잤다. 어머니가 창피하다고 교회에 나오지 말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런데 16~17세가 될 즈음에 우연히 새벽에 교회에 갔다가 그때부터 습관적으로 새벽에 나가기 시작했다. 이때 기도한다고 엎드려있는데 ‘내가 세례를 받았는데 과연 믿음으로 받았는가?’ 하는 생각이 스멀스멀 피어나는 것이 아닌가? 한동안 답을 얻지 못하다가 세례 고백을 할 때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묻는 말에 “내 죄를 사하실 유일할 구세주”라고 내 입으로 말했던 것이 생각이 났는데 이 고백한 것이 나에게 확신을 주었다. 이것은 누가 시킨 것이 아닌, 스스로 고백이었기 때문이다. 그 후 조금씩 기도 시간이 늘어났다. 그런데 어느 날 하루 새벽에 기도하다가 예수님 십자가의 마지막 말씀이 불현듯이 떠오른 것이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ηλι ηλι λεμα σαβαχθανι)‘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라는 말씀이 나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누구 때문에, 왜 하나님의 아들이 이런 고통에 처하였는가 하는 질문이었는데 그때 ‘나 때문에, 나의 죄로 말미암아서.’라는 깨달음이 온 것이다. 이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성령의 역사였다. 나는 그때로부터 매일 새벽에 교회에 나가 몇 개월을 회개하며 울었다. 그리고 변해갔다. 그때부터 주일학교 반사를 하고, 청년 활동을 하고, 교회에 충성하기 시작했다.

내 청년기

① 일과 신앙

나는 어머니의 고생을 덜어드리고 동생들을 책임지고 가정을 일으켜 세워야겠다는 각오로 정말 열심히 일했다. 교회와 직장밖에는 모르고 살았던 시절이었다. 그때 자전거를 타고 다녔는데 수요일 예배를 마치고 산등성이를 넘어서 집으로 갔는데, 자전거를 붙잡고 길에 서서 잠이든 적이 많을 만큼 피곤한 청년이었다. 그날도 수요일이었는데 회사 책임자가 내일 물건출고를 해야 하니까 늦게 잔업을 하라는 지시가 있었다. 나는 수요일 예배하러 가야 한다며 책임자의 듣기 싫은 소리에도 불구하고 자전거를 타고 교회로 향하는데 눈물이 났다. ‘이렇게 사는 것이 최상의 삶인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서울로 가는 고속버스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당시 성산동 교회에 있던 친구 신주범 전도자에게 기도원을 한곳 소개해 달라고 했다.

신주범 전도자는 원지동에 있는 청계산 기도원을 소개해 주었다. 나는 부산을 떠날 때 금식하며 출발해서 4일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기도원에서 내 삶을 위해서 기도했다. 하나님이 어떤 음성으로 말씀하시지 않았지만, 확실한 깨달음이 마음속에서부터 왔는데, 그것은 가장 중요한 것을 위해서 살아야 하겠다는 생각이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이고, 사람의 영혼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난 그 기도원에서 직장으로 사직서를 발송하고 집으로 돌아와서 어머니와 동생들을 모아놓고 내 뜻을 말하고 신학을 하겠다고 했다. 그때 어머니는 “네가 뜻이 있어서 그렇게 하겠다면 해라, 우리가 고생을 좀 더 하면 되지”라며 허락을 해주셨다. 나는 다음 해 3월에 부산신학교에 들어가고, 원 목사님은 초량에 있는 한 교회에서 학생들을 지도하도록 알선해 주었다. 1학년 때인 그해 10월에 아무런 대책이 없었지만, 결혼도 했다. 나는 신학을 하고, 교회를 섬기고, 집사람은 살림을 살면서 3년이 흘렸을 때 경북 영양으로 개척을 떠나게 된다. 이것은 본격적인 내 사역의 출발이요, 시작이었다.

② 영양교회

영양, 봉화, 청송, 울릉도는 경상북도에서 가장 어려운 지역으로 공무원들이 가기 싫어하는 곳이다. 내가 영양으로 가게 된 이유는 이렇다. 당시에 왜관 그리스도의 교회의 청년으로 경북대학을 졸업한 김충기 형제(현 경산교회 전도자)가 영양 중고등학교에 초임 교사로 발령받아 근무하면서 학생들을 전도하여 성경을 가르쳤다. 그래서 영남지방 교역자회에서는 이들을 대상으로 개척할 전도자를 요청하였고 내가 그곳으로 가면서 나의 목회 인생이 시작되었다. 당시 영양교회는 김충기 형제의 전적인 헌신으로 유지되고 있었는데 특별히 예배드리는 장소가 마땅치 않아서 장춘상회 2층, 문 닫은 결혼식장, 탁구장 등을 전전하였다. 우리는 기도를 드릴 안정된 처소도 없이 교회를 시작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했다. 손바닥만 한 땅이라도 마련해야 하겠다고 결심한 후 영남지방 12개 교회와 서울의 9개 교회를 방문해 설교하면서 모금한 돈으로 90평의 땅을 구입해서 35평의 예배당을 1년 만에 완공하고, 당시 대구교회 심희선 목사님을 강사로 초청하여 헌당 감사부흥회를 개최했다. 4년 후 나는 양양교회를 떠나서 부산중앙교회, 서울 번동교회, 청량리교회를 거쳐 춘천으로 내려왔고, 춘천교회에서 목회 일생을 마무리 하였다. 그리고 4년 전 은퇴를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나와 그리스도의 교회

① 처음부터 지금까지

나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성지 그리스도의 교회에 발을 디뎌서 69세로 춘천교회에서 은퇴했으니 평생을 그리스도의 교회에 있었고, 또 앞으로도 여기서 주님을 만날 것이다. 초기의 그리스도의 교회 사역자들은 절대적인 진리를 외치고 또 믿었다. 모든 교회가 그리스도의 교회로 환원해야 한다고 외쳤다. 여기는 인간의 구원으로 시작하여 교회의 직제나, 성경의 이해, 그리고 신학적인 모든 것이 그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때는 강단의 설교가 오늘날처럼 종교 일반이나 보편적 가치가 아니라 세례나 만찬, 환원, 속히 없어져야 할 교파,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가와 같은 교리(dogma)적인 메시지가 주를 이루었다. 신앙의 근본적인 것들을 설교하고 가르쳤다. 심지어 다른 교파에는 구원이 없다고 외쳤고, 또 대부분 목회자가 그런 확신을 가지고 목회했다. 나도 처음 영양에서 개척할 때 교파교회 목사들과 또 이단에 속한 사람들과 공개적 혹은 비공개적으로 많은 교리 논쟁과 토론을 하며 그리스도의 교회를 알렸다.

② 현재 처한 자리

그러나 지금의 그리스도의 교회 목회자들의 칼날은 무디어지고 확신이 사라졌다. 신학대학교에서는 성경이나, 그리스도의 교회보다도 신학 일반을 가르치기에 급급하고, 교리나 환원에 대한 자부심이나 꿈을 이미 잃어버린 것 같다. 말로는 그리스도의 교회나 교리를 운운하지만, 지식일 뿐이요 구호에 그치고 또 자신을 보호하거나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는 등 허울 좋은 이름에 불과한 것으로 보인다.

나는 그 이유가 사역 현장 경험에서 온 좌절이요, 실패라고 본다. 소위 진리를 가지고 성공하거나 이렇게 하면 된다는 모델이 되는 교회나 목회자가 없고, 또 본인이 해보니 잘 안되는 것이다. 성장과 확신의 초대교회는 고사하고, 최소한의 현상 유지도 급급한 현실에 직면하면서 교리적인 확신이 시험대에 오르고, 또 교리는 지식과 이론의 장에 유폐가 되고 만 것이다. 여기서 나타난 극단적인 경향 중의 하나는 열매나 결과는 내 책임이 아니고, 내 것만 옳고, 내가 믿는 것 외에는 무엇도 용납할 수 없다는 극단주의와 또 한편은 종교 일반의 한 분파로서 그리스도의 교회는 순수한 성서주의를 고수하는 것에서 만족하는 부류의 탄생이다. 물론 또 어떤 이들은 자신의 정체성 자체를 잃고 한 교파의 일원처럼 살기도 한다.

③ 내 생각

사도행전의 초대교회는 우리가 추구하는 교회상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것은 초대교회가 어떤 교리를 가지고 출발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러나 너무나 당연한 것들이 있었는데 그것은 세례를 준다든지, 떡을 뗀다든지, 복음을 전하는 것이 그들의 일상이 되었고, 그것 때문에 추방당하고, 감옥에 가고, 순교자들이 등장하는 교회가 초대교회이다. 그리고 모든 현장에 기도가 있었고, 성령의 역사가 어김없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이런 실제적인 교회를 하고 있지 않으면서 초대교회나 그리스도의 교회를 말하는 것은 공허할 뿐만 아니라, 사도행전의 초대교회를 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사실 세례와 성찬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은 사도행전의 사역자들이 아니다. 사도행전에는 세례를 받고, 떡을 떼는 사람들을 예루살렘에서 로마까지 만들어내는 사건이 넘쳐난다. 시간과 세월이 흘러가는데도 복음은 확산되지 않고, 세례자들은 없고, 곳곳 처처에 전도자들이 교회를 세우고, 진리가 가르쳐지고 전파되고 있지 않다면 이것은 이미 초대교회를 재현하는 데 실패했다고 보아야 한다.

결론

방탄복이 발명되었을 때 사람들은 총알이 뚫지 못하는 옷을 입으니 전쟁에서 두려움이 없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방탄복이 자기를 지켜줄 것으로 알고 조심하지 않고 전투에 임하게 되었다. 방탄복의 위력은 대단했지만, 오히려 더 많은 사람이 죽게 되었다. 방탄복이 중요한 가슴 부분을 감쌀 수는 있지만 전체를 보호하지는 못한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너무 과신했다. 그것은 바로 머리에 총을 맞아서 죽었다는 것이다. 우리의 교리나, 진리는 탁월하지만, 그 자체가 모든 것을 해결해주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 우리 사역자들의 과제가 있고 책임이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많이 배우고, 많이 알면 뭐가 자연이 잘되는 줄 안다. 그래서 교육에 열을 올리고, 책을 읽고, 지식을 습득하고, 학위를 따려고 시간과 돈을 쓴다. 이것은 그 자체로는 전혀 잘못이 없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어떤 지식을 가지는 것과 자신이 그런 사람이 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는 점이다. 법학 교수나 신학자라는 것과 법을 가장 잘 지키는 사람, 가장 신앙적인 사람이 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이것은 지식이 곧 그 사람이요, 그의 생활이 아니라는 말이다. 지식이 자신이 되고 삶이 되려면 치러야 할 값이 있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치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저 잘 알거나, 잘 가르치는 것으로 자신의 완성이 일어난 줄 착각하는 것이다.

"성경으로 돌아가자”라는 말은 초대교회의 가르침을 문자적으로 수용하고 지키자는 의미를 넘어, 당시의 질서와 결별하고 성경의 가르침에 기반을 둔 새 종교, 새 구조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주장이 주변의 타자(他者)를 배제하고 혐오할 근거로 사용되고, 오늘 우리가 서 있는 컨텍스트(context)를 읽어내는 것에서 출발하지 않는다면, 성경을 붙들고 정통을 향한다는 주장이 오히려 반사회적 행태를 여과 없이 노출하게 된다. 이는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성경으로 도피하는 것이다. 기독교가 공인된다는 것은 특수해 보이는 기독교의 진리가 사회 보편의 가치로 인정받는 것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오늘에 여기에 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교회 정체성이고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한다.

 

 

조영호 목사/ 영양(경북), 청량리(서울), 춘천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목회한 후 은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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