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분량 | 참빛-박영순 | 2023-11-3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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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하고 싶은 말
20대부터 시작한 목회를 마치고 이제 원로라고 대접받는 80대로 살다 보니 과거의 목회와 내 믿음의 분량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이 지면에 쓸 내용이 바로 그것이다. 목회든, 삶이든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삶의 기준은 ‘믿음’이었는데 과연 스스로 매긴 점수는 얼마나 될까? 필자에게는 나의 신앙 점수를 한 마디로 짐작할 수 있는 호칭이 하나 있다. ‘원숭이!’이 말은 한때 내가 들었던 별명이다. 하나님께서 어린 학생들을 통하여 듣게 하셨던 이름이다. 하나님께서는 왜 나에게 원숭이라는 말을 듣게 하셨을까?
학생들의 말에 의하면 원숭이는 땅 위에서 살지 않고 나무 위에서 살 듯이, 우리가 땅 위에서 살지 않고 땅 아래 굴속에서 살기 때문이란다. 훗날 그 시절을 회상해 보니 그들이 ‘원숭이’라고 한 말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기도 중에 내게 주신 약속은 ‘부유한 기업농’이었는데 나는 그 말씀을 온전하게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때 내 믿음의 분량은 원숭이의 수준 딱 그 정도였다. 하나님께 기도했을 때 응답으로 내게 주신 지혜는 ‘무를 잘 재배하여 그 수익으로 농장을 사는 것’이었다. 그런데 무를 심어 재배하려 했으나 조건이 대단히 열악하였다.
그 밭은 전년도에 약초를 재배했다가 실패하여 묵혀 놓은 땅인데 밭 전체에 퍼진 잡초는 무성하다 못해 가득했다. 게다가 날씨가 너무 더웠다. 더운 정도가 아니라 뜨거웠기에 작업하기에는 애로사항이 너무나 많았다. 고용한 일꾼들과 소가 힘에 겨워서 헐떡거리며 지쳐 작업에 진척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당황하고 초조해져 ‘이러다 포기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불길한 생각까지 들었다. 그렇게 마음이 약해지다 보니 30cm 정도 간격이 되어야 정상인 무심는 고랑을 60cm 정도 간격으로 심었다. 손해를 덜 보려고 내린 결정이었다. 따라서 예상대로라면 다 자란 후의 수익도 반 토막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그해에 가을장마로 인해 전국적으로 채소가 흉년이었는데 우리 무는 비만 오면 무럭무럭 잘 자랐다. 얼마나 잘 자랐는지 마치 아기가 밭에 앉아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성장하여 최상품이 되었다. 그리하여 그 무를 팔아 8,000평의 농장을 소유하게 되었는데 하나님께서 농장을 주겠다고 약속하신 지 3개월 만에 이루어진 놀라운 기적이었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농장은 샀으나 거주할 집이 없어서 농장 한쪽에 땅굴을 파고 살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좋은 농장을 주신 하나님께서 거주할 좋은 집도 순식간에 주실 것을 믿었어야 했는데 그때는 왜 반쪽만의 신앙을 가졌었는지 아쉽기만 하다. 이제는 원로가 되어 들려주는 옛이야기지만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가 얼마나 대단한지를 온전하게 믿고 가슴 깊이 새겼으면 하는 마음으로 사연을 적는다.
미지의 세계에서 받은 응답
1961년 늦가을, 내 나이 만30세 되던 해 석양 노을이 짙게 물들 무렵 손수레 한 대에 단출한 이삿짐을 싣고 두 번째 교회를 개척하기 위하여 ‘전라북도 김제시 금구면 산동리’를 향했다. 이사를 하는 연변(沿邊)에 펼쳐져 있는 농장들이 어찌나 황홀하게 가슴에 와 닿든지, ‘야∼ 나도 저런 농장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복음 전파에 큰 힘이 될 텐데’ 하고 생각했지만, 가능성은 단 1%도 없는 꿈이었다. 당시의 필자는 무일푼에 쌀 2가마를 빚내어 개척을 시작하는 형편이었기 때문이다. 흔히들 교회 개척을 위한 필수조건을 ‘장소, 재정, 교인’이라고 하는데 단 한 가지도 갖추지 못했고 한 가정의 성도가 있을 뿐이었기에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기도뿐이었다. 그런데 그 기도마저 여의치 못했는데 기도할 장소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니라”(마 14:23) 했던 말씀과 같이 새벽이면 길을 걸으며 숲을 헤치고 들어가 기도하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그 후 뜻이 맞는 몇 사람이 교회 개척을 위한 집회를 준비하며 기도하던 중, 당시 성경통신 교육원 전도부장이셨던 고(故) 정히건 전도자님께서 보여주신 열정을 통해 큰 은혜를 받은 성도들이 모임을 갖게 되었다. 첫 예배는 어느 성도의 집 마루에서 드렸고, 후에 초등학교 현관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드디어 토담으로 된 3칸 집을 매입하였다. 벽을 헐고 바닥에 왕겨를 펴 그 위에 가마니를 깔고 예배를 드리게 되었는데 얼마나 감사하고 기쁘던지 눈물이 날 정도였다. 그런데 집 3칸 중에 2칸(약 20평)을 예배 처소로 사용하다 보니 60-70명의 어린이가 뛰고 놀면 바닥에 깔아 놓은 왕겨가 가마니 사이로 비집고 올라와 실내가 온통 먼지로 가득하여 숨쉬기조차 어려울 정도여서 해결책을 찾아야만 했다. 그리하여 예배당의 가로 세로를 측정하여 실내에 꼭 맞는 돗자리를 근처의 가마니 공장에서 특별 주문 제작하여 깔았다. 먼지도 덜 나고 얼마나 깔끔하던지, 오늘날로 치면 최고급 카펫을 펼친 것처럼 산뜻하여 너무나 행복했었다. 돗자리 제작대금은 적지 않게 부담이 되었으나 교회를 위한 일이었기에 큰 보람을 느꼈고, 하나님께서도 크게 기뻐하실 것 같아 너무나 즐거웠다. 교회 건물도 생겼고, 성도도 30여 명이 되자 교회의 변화를 위해 기도하게 되었다. 이 정도면 개척자가 떠나야 성도들이 더욱 책임감 있게 봉사하여 교회도 더 건전하게 성장할 것 같아 15일을 목표로 먹지도 마시지도 않는 단식기도에 들어갔다. 그런데 겨우 3일이 지났을 뿐인데 배는 등에 딱 붙고 탈진이 되어 몸을 가누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상한 것은 기도하려고 눈만 감으면 생생하게 하나의 장면이 떠올랐다는 점이다. 즉 교회 개척을 위해 이사하던 날 석양 노을 아래 아름답게 눈에 비치던 8,000평의 그 농장 모습이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그 땅을 나에게 주시겠다는, 참으로 말도 안 되며 터무니없어 보이지만 강렬한 확신이 들었다. 기도하면 할수록 그 농장이 자꾸 떠올라서 더는 기도할 수가 없을 정도가 되었다. 그즈음 호남 고속도로 공사가 한창일 때, 전주 나들목 자리에 자기의 농토가 들어있어서 보상을 받게 된 지인이 있었는데 내가 호감을 느낀 그 땅을 사줄 테니 관리를 해 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거절했었지만 기도하며 생각해 보니 ‘그 땅을 관리하며 몇 년 경작하여 얻은 이익으로 그 땅을 사라는 하나님의 응답인가보다.’라는 생각이 들어 15일 작정했던 단식기도를 3일 만에 접고 땅을 사주겠다는 그분을 찾아갔다.
부도 맞은 기도
그런데 그분을 만나서 보니 지난번과는 다른 말을 하는 것이었다. 순간 얼마나 허망하던지, ‘기도의 응답을 받았다는 것이 액면 그대로 다 믿을 것이 못 되는구나!’ 하며 힘이 빠져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런데 그분이 ‘밭을 사는데 중도금만 지급하고 잔금은 가을에 지급했으면 좋겠다’라는 것이다. 그 말을 듣자 오히려 새로운 희망이 생겼다. ‘아, 저분이 무를 심고 그 이익으로 밭을 사려는구나. 그건 나도 할 수 있는데?’ 하는 생각이 들면서 내가 직접 부딪쳐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었다. 얼마 후 땅 주인에게 그 계획을 전하니 “어떻게 땅을 외상으로 팔 수가 있는가?” 하며 노발대발하더니 의외로 나를 한번 만나나 보자는 전갈이 왔다. 땅 주인이 익산(당시 이리)에 거주해서 14km를 자전거의 페달을 밟으며 “주여, 믿습니다! 농장을 주시면 복음을 위해 잘 사용하겠습니다.”라는 기도를 반복하고 또 반복하였다. 그때가 7월 중순의 한여름이라서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초라했지만 도착한 후 기도하는 마음으로 땅 주인과 대화했는데 나에게 호감을 보이더니 ‘무상으로 밭을 경작해도 된다’ 는 것이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그러나 나도 하나님으로부터 기도의 응답을 받아 밭을 살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진 터라 무상으로 경작하는 것을 거부하고 쌀 2가마니를 임대료로 드리겠다고 하니 흔쾌히 승낙하였다. ‘이것이 현실인가?’라고 할 정도였는데 당시 8,000평 땅의 정상적인 임대료는 적어도 쌀 40가마니는 족히 지급해야 했기 때문이다. 내게 이 일은 기적이었다. 훗날 농장을 매입할 때 대금을 지급하는 자리에서 땅 주인이 이렇게 말했다. “처음 나를 보던 그때, 온몸은 땀에 흠뻑 젖었으나 그 용모가 마치 천사와 같이 보여 마음이 끌리고 감동이 되어 조건 없이 돕고 싶었다”라는 것이다. “참 이상도 하다. 온몸에 땀 냄새가 진동하는 촌놈이 천사로 보이다니!” 필자는 지금도 성령께서 그때 그분의 마음을 감동하신 것이 확실하다고 믿는다. 모든 것이 은혜였다. 영화같이 놀라운 이 이야기가 나의 간증이다. 그때 무를 심었을 때 가을장마로 인해 비가 계속 내려 채소에 병이 많이 발생했는데 놀랍게도 우리 무는 무럭무럭 잘 자라 대풍을 거뒀다. 전국적인 채소의 흉년 중에 우리 밭은 풍작이 되고 무 가격은 폭등하여 그걸 팔아 8,000평의 농장을 소유하게 되었다. 지금은 그 농장 자리에 쌍방울 메리야스 공장이 들어서 있는데, 현 시가로 땅 1평에 50만 원씩만 계산해도 40억 원이 된다. 산동 교회를 개척하는 동안 단 3개월 만에 현시가로 40억을 번 이 믿기 힘든 일은 사실이다. 이 일은 무에서 유가 되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다. 당사자인 나도 이것이 ‘꿈인가, 생시인가?’ 한 적이 여러 번 있다.
잘 될 때 잘했어야 했는데···
젊은 시절의 나는 기업농을 하면서 산업 전도를 하기 원했으며 교회를 개척하긴 해도 목회자가 될 생각은 없었다. 언젠가 심희선 전도자님께서 “박형제는 목회보다는 농장을 해야 했는데···” 라고 말씀하시던 적이 있었는데, 산동 교회 집회할 때 당시의 활동상을 보셨기 때문일 것이다. 시작이 어렵지, 막상 시작하니 참 수월하였다. 농장은 승승장구하여 점점 더 확장되었다. 처음 농장이 8,000평이었는데 그 후에 3,000평을 더 보태고, 그 옆에 전라북도 종축장 부지 61,000평까지 합하여 7만2천 평의 기업이 되다 보니 교회 개척에 농장 운영까지 겹쳐 너무너무 벅차고 힘든 일상이었다. 교회 개척자들이 공통으로 겪는 애로사항은 모든 예배를 혼자서 감당해야 한다는 일일 것이다. 농장 일을 하다 보니 시간이 없어서 주일 새벽에 일어나서 오전 설교를 준비하고, 점심 후에는 어린이 예배, 오후에는 밤 예배, 토요일이면 학생예배, 수요 설교 준비는 그날 새벽에 준비하였다. 그러다 보니 피로에 지쳐 보통 3번 정도는 쓰러져 잠들기 일쑤였는데 또 일어나 준비하다 잠들곤 하다 보면 준비는 항상 부족했다. 피로에 지쳐 잠들어 흘린 침에 성경책이 흠뻑 젖는 일이 허다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신학 공부도 안 한 나를 통해 성도들이 은혜를 받게 해 주셔서 너무나 감사했다. 나름대로 열심을 다 해 교회를 섬겨 초대 교회를 닮아 가는 모습이 보일 때는 참으로 보람차고 흡족했다. 그렇게 교회 개척과 농장을 운영하다 보니 너무 벅차서 건강에 이상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하나님께서 은밀하게 “농장! 농장! 하더니 힘들어 죽겠지? 농장을 경영했던 그 정력으로 이제 영혼을 위해 쏟아 보는 것 어때?” 하시는 것 같았다. 그래서 농장을 정리하기로 했다. 노후를 생각하여 2,000평을 남겨 놓고 신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노후는 보장되어 있으니 남들이 어려워하는 교회에 가는 것이 나의 사명인 것 같았다. 그것이 여러 곳의 개척교회를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참으로 마음 아픈 일이 있다. 지금은 그 교회가 환원운동을 포기하고 장로교회로 갔다는 점이다. 이유인즉 그리스도의 교회가 장로교회와 유사하다면 장로교회를 하는 것이 자신들에게 유익하기 때문이란다. 충격이었다. 그들이 이렇게 믿도록 만든 책임을 누구에게 물을 것인가? 필자는 알고 있다. 개척자인 나 역시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교회를 세우되 겉모양만 생각하고 진리로 내실 있게 하지 못한 책임을 통감한다. 잘 될 때 잘해야 했는데 아쉬움을 금할 수 없다. 사실 필자가 하고 싶은 말이 바로 여기에 있다.
만천하에 알려진 그리스도의 교회
성경은 그리스도의 교회에 대하여 분명하고 많은 정보를 주고 있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엡 1:23)라고 하여 교회의 위대성을 보여준다. ‘그리스도의 교회’란 만물을 충만케 하는 살아서 움직이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살아 움직이는 운동이란 말이 아닐까?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마 5:19)고 하셨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가르치는 사람들의 그 세세한 가르침 하나하나가 얼마나 소중하고 막중한 일인지를 보여주는 말씀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성경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교회를 알고 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 11:1)는 말씀처럼 내가 먼저 실천하는 본을 보여 성경에서 말하는 교회를 만들어 가야 한다. 특히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임받은 지도자들이 먼저 주님의 모습을 삶으로 보여줘야 한다.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행 17:30) 라는 말씀처럼 성경적인 교회는 이미 만천하에 알려져 있다. 오직 우리는 그 교회와 그 진리를 전하고 외쳐야 한다.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느니라”(히 10:7)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왜 하셨을까? 우리도 주님처럼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라는 뜻일 것이다. 필자가 떠나버린 산동 교회를 다시 되돌릴 수는 없다. 그러나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나마 위로가 되는 것은 열매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기흥 그리스도의 교회의 최필순 사모님과 동성 그리스도의 교회의 담임이자 대학의 현 이사장인 최이규 목사님이 산동 교회에서 자라나 교계에 크게 이바지하고 있으니 말이다.
은퇴목회자의 희망과 기도
필자는 이제 현장에서 은퇴한 몸이지만 현재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교계의 문제를 보면 마음이 많이 아프다. 목회 자체가 어렵고, 사회적으로 보았을 때 인구가 줄어들면서 교인 수가 줄어드는 것은 이해가 가지만 내부적으로도 힘이 많이 빠져 있는 것 같아서다. 중심이 되어야 할 교역자들은 분열되어 있고, 성도들은 힘이 빠져 있으며, 확신에 차서 우렁차게 진리를 외치던 환원운동의 함성은 점점 소멸해 가고 있는 것 같아서다. 이럴수록 우리 모두 개척자의 자세로 희망을 잃지 않고 기도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눅 9:62)고 말씀하셨듯이 다시 도전하자. 다시 기도하자. 그러나 더더욱 진리에 거하며 다시 해보자.
박영순 전도자 산돌(충남), 의정부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목회한 후 은퇴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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