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
필자는 1939년에 강원도 시골 농촌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제 강점기, 6·25 사변, 4·19, 5·16등 이 나라의 근대 격변기를 겪어왔기에 삶이 참 고단하였다. 어려서부터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몇 번에 죽을 고비를 넘어 온갖 고된 단련을 다 받으며 모질게 성장해 왔다. 그러다가 참 우연스럽게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서 인생이 바뀌었다. 사실 세상에 우연이 어디 있을까? 그것은 하나님의 은총이었다.
1. 빌 램시 선교사를 만나다
1967년 늦은 가을 어느 날, 외국인 한 분과 한국인 한 분이 우리 마을에 찾아오셨다. 인사를 나누고 보니 미국인은 성경통신 교육원 원장이신 빌 램시 선교사이셨고, 한국인은 함께 일하시는 정히건 전도부장이셨다. ‘여기까지 오셨는데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라고 하니깐 ‘집회를 한번 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해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때의 나는 예수를 모르고 있었지만, 외국인과 손님을 접대하는 마음으로 도움을 주기로 했다. 정히건 전도부장과 일정을 잡고, 추운 엄동설한(嚴冬雪寒)에 천막을 치고 등불을 켜고 전도 집회를 시작했다. 정히건 전도부장의 열화 같은 설교 말씀과 성령의 역사로 한 주간의 집회를 통하여, 참석한 주민들 70여 명이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눈물로 회개의 찬양을 부르며 손들고 나와 세례를 받았다. 서면교회가 그렇게 하여 세워졌다. 그래서 교회를 섬길 청년을 뽑아 신학(성경) 공부를 시키기로 약속하고, 원장과 전도부장은 떠나가셨다. 그런데 약속한 청년이 성경통신교육원으로 출발하기 전날, 나에게 와서 못가겠다고 하였다. 선교사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된 나는, 미안한 마음에 서울 강서구 공항동에 소재한 성경통신교육원까지 직접 찾아가서 원장과 전도부장을 만나 전후 사정을 말씀드렸다.
2. 전도자가 되는 과정과 서면 그리스도의 교회
정히건 전도부장이 말씀하기를, “신학교에서는 시골교회까지 전도자를 보내기가 어려워서 내일부터 2주간 동계대학 교육과정을 개강하니 교육을 받고 가서 세례받은 사람들을 모아서 예배를 인도하라”는 것이다. 지역주민들에 대한 나의 책임도 있어 거절할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내가 일하고 있던 관계 기관에 전화하여 양해를 구하고, 강사들의 신학(성경) 강의를 듣게 되었다. 정히건 전도부장은 실천신학의 전 부분을 밤마다 밤을 새워가며 2주간에 걸쳐 하나하나 가르쳐 주셨다. 그렇게 2주간 밤낮없이 열심히 공부하고 돌아와 주일마다 우리 집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부모님께서도 가만히 계시지 않으셨다. 500여 평의 대지를 헌납하셔서 흙벽돌을 찍어 예배당을 건축하기로 결정하고, 1968년 3월 1일부터 건축을 시작했다. 온 주민들이 벽돌을 찍으며 도와주어 조적 공사가 완료됐다. 이 소식을 들으신 빌 램지 선교사께서 당시 처음 생산된 한국 슬레이트 160장을 보내주셔서 지붕을 덮고, 1968년 9월 26일에 헌당예배를 드렸다.
그 당시에 나와 관계를 가지고 있던 강원도지사와 홍천군수, 홍천경찰서장을 비롯한 관내 기관장들이 참석하셨고, 빌 램시 원장과 직원들, 선교사들 그리고 서울의 여러 목회자를 비롯한 지역주민과 함께 200여 명이 참석하였다. 헌당예배는 정히건 전도자의 설교와 도지사의 축사로 말 그대로 성대하게 드려졌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홍천 서면 그리스도의 교회가 세워졌다.
3. 서대문 그리스도의 교회
13년이 흘렀다. 미국에서 이민 생활을 하시는 정히건 전도자로부터 눈물 없이는 읽을 수 없는 편지가 왔는데, 서울 서대문교회를 섬겨달라는 내용이었다. 기도하는 중에 이것이 주님의 부르심인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큰 결단을 하고 1년만 있다가 돌아오려고 생각하고, 모든 직장과 사업을 버리고 사모와 함께 3살, 5살 된 딸들을 데리고 서울로 떠났다. 1980년 11월 29일 토요일 아침, 연로하신 어머님과 어린 자식들을 떼어 놓고 서울로 향했다. 서울에 도착해보니 성도님 두 분이 나와 맞아주셔서 숙소를 정하고 하룻밤을 자고, 주일 오후에 알려준 주소로 택시를 타고 찾아갔다. 마포구 신수동 신수시장 골목에 있는 작은 건물 2층이었다. 서울지역 전도자님들이 오후 시간에 오셔서 취임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내가 아는 목회자들 말고 30여 명이 모여서 예배를 드렸다. 이분들이 다 서대문교회 성도들인 줄 알았다. 그런데 수요일 예배도 3명만 참석을 하고, 다음 주일에도 3명 외에는 더 오는 사람이 없었다. 당황스러운 상황이었지만, 하나님이 맡겨주신 사명인가 생각하고 열심히 최선을 다했다. 숙소는 금호동이고 교회는 마포구 신수동이었다. 대중교통으로 오가는 길이 멀고 힘들었지만, 충성하고 또 충성했다. 이렇게 2년이 지나니 40여 명의 성도가 모여 예배를 드렸고, 3년이 지나니 60여 명의 성도로 성장했다.
4. 방화동 그리스도의 교회
1984년 5월 중순에 방화동 그리스도의 교회(현 치현교회)의 초청을 받았으나 정중히 사양하였다. 그러나 제직들의 서명날인이 된 청빙서와 함께 세 번째의 청빙이 왔다. 그 청빙서를 받아들고 며칠을 금식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했다. 결국, 하나님의 뜻으로 확신하게 된 나는 그다음 주일 예배를 드리고 교회에 사정을 말하고 떠나기로 결정했다. 후배 목회자를 후임으로 정한 후 1984년 6월 19일 목요일, 눈물의 송별을 받으며 방화동 그리스도의 교회로 가게 되었다.
어느 곳이든 마찬가지겠지만 이 교회에서도 쉽지 않은 문제가 많이 있었다. 이전 담임 목회자가 13년 목회한 후에 교인들을 데리고 나갔다는 말을 들었는데 와 보니 불과 30m도 안 되는 거리에 새 건물을 지어 성도들을 싹 데리고 나가서, 1984년 4월 30일에는 교단까지 바꾸고 새로운 교회를 시작한 것이다. 당시 방화동교회 건물은 흙벽돌 건물로 지은 18평 건물인데 20여 년이 지나자 지붕은 비가 새고 바닥은 습기가 차는 열악한 상황이었다. 취임 당시 교회에는 연로하신 집사 4분, 할머니들, 그리고 젊은 집사 2분, 청년 학생 합하여 남은 성도들은 약 30여 명 정도였다.
하루는 권영국 장로께서 심방을 요청하였다. 권 장로의 사촌 형님이 이 지역의 유력 인사였는데 결혼한 딸이 대학병원에 입원했으나 치료에 진척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후 일자를 정해서 예수의 ‘예’자도 모르는 가문에 병원 심방을 하게 되었다. 병상에 누워있는 환자의 모습을 보니 매우 몸이 쇠약해 보였다. 나는 환자에게 “기도합시다.”라고 말하고는 생면부지의 환자 손을 잡고 머리에 손을 얹고 간절하게 기도를 드렸다. 그런데 며칠 뒤 병자가 건강이 회복되어 간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그 가정이 예수를 믿겠다며 예배를 드려 줄 수 있느냐는 요청이 왔다. 심방을 가보니 5대에 걸쳐 신주를 모셔놓고 제사 지내는 집안이었고, 터주 신을 섬기는 가문이었다. 이것을 보고도 그냥 예배를 드릴 수가 없어서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려면 이 모든 우상을 다 불태우고 예배를 드려야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십니다”라고 담대히 말했다. 하나님께서는 기적 같은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 그 즉시 그 가정은, 모든 우상을 불태우고 경건하게 예배를 드렸다. 그리고 그다음 주일부터 두 내외분과 4남매 가정들이 교회에 나와서 신앙생활을 시작하였다. 지역에서 영향력 있던 그 가정의 변화는 지역주민들의 주목을 받게 되었고, 그로 인하여 교회가 서서히 부흥하기 시작했다.
5. 예배당 건축
부임 4년째인 1988년 중반 어느 날이었다. 권영국 장로께서 ‘내게 어머님께서 물려 주신 유일한 유산이 있는데 이것을 가지고 예배당을 건축하면 어떻겠느냐’라고 하셨다. 나는 ‘그렇게 하면 좋겠다.’라고 말씀을 드렸다. 당시 교회의 대지는 130평인데, 권 장로의 자택 대지가 교회 대지와 경계를 하고 있는 250평이었다. 권 장로께서 자택을 헐고 대지 일백 평을 교회 대지로 합병을 해서 230평 대지를 확보해 주셨다. 나는 토지 매각대금 1억6천여만 원 중에서 1억 원을 건축 헌금하시도록 하고, 6천여만 원을 가지고 먼저 권 장로의 자택을 건축하여 입주하도록 하고, 예배당 설계를 시작했다. 당시 최대 용적률은 270평이 되었다. 설계상의 건축비는 2억4천만 원이었다.
순탄치 않은 건축 과정 중에 경험한 멋진 은혜 체험을 잊을 수 없다. 처음의 체험은 건축허가였다. 강서구청에 허가신청을 했으나 군작전 담당 지역이어서 군의 별도 허락이 필요하였다. 그 기간이 짧으면 한 달, 길면 몇 달이 걸릴 수도 있다고 한다. 그런데 깊이 기도하고 군부대를 찾아가서 담당자인 작전 과장을 만나서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는데 놀랍게도 3일 만에 승인이 떨어졌다. 하나님께서 담당자인 부사단장과 책임 장교의 마음을 움직여 주신 것이다.
그다음의 체험은 건축자금의 문제였다. 건축금액이 너무 부족하여 하청 맡길 처지가 되지 않았다.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하고 여러 경로를 통해 알아본 결과 직영으로 시작하여 부족한 금액으로도 건축할 수 있었다. 또 다른 체험은 건축자재의 구매 문제였다. 당시 88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있어서 대한민국은 건설이 한창이어서 자재, 특히 철근 구매가 큰 문제였다. 역시 기도하며 하나님의 도움을 구한 후 ○○〯〮제철공장 본사로 직접 찾아갔다. 본사는 조달청이나 도매상 외에는 판매하지 않고 있었는데 간곡한 부탁을 듣더니 부사장의 결재를 받아 2시간 만에 구매가 승인되었다.
마지막 체험은 치유의 은총이었다. 건축 도중 허리를 다쳐서 병원에 입원하였다. 검사결과 수술을 해야 하고, 수개월의 치유 기간이 필요하며, 치유된다고 하더라도 허리 장애가 올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한 후 다음 날 퇴원하였다. 그런데 그 허리가 그냥 치료되었다.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치유의 은혜였다.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방화동 그리스도의 교회 예배당이 완공되었다.
치현교회는 주님 은혜로 서서히 부흥하여 120여 명의 성도가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2002년 6월에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에서는 최초로 원로목사로 추대를 받아 은퇴하고, 교회 성도들의 간곡한 권유를 받아들여 교회 옆의 사택에 입주하여 지금까지 살고 있다.
태초에 하나님이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의 모양대로 인간을 창조하시고 우주 만물을 인간에게 의식주로 주셨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원수로 행하는(롬 5:19) 인간들을 사랑하시고, 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구약시대에는 흠 없는 양을 잡아 속죄 제물을 삼았다. 그러나 인간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서는 죄 없는 사람이 필요했다. 세상에는 죄 없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죄’ 없으신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사람의 모양으로 보내셔서 속죄 제물로 삼으시고 인류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 위에서 죽게 하셨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한다. 예수께서는 친히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니라.”(마 20:28, 막 10:45)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다.
예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기 전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질문하셨고, 사랑하는 제자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라고 고백을 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너는 베드로(반석)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내 교회”라는 단수 명사를 써서 하나의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셨다. 주님께서 이 땅에 세우신 하나의 교회, 주님께서 머리가 되시고 주님의 몸 된 교회가 주님께서 말씀하신 최초의 교회이며 “그리스도의 교회”(Χριστός της ʹϵκκλησία)이다.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진리의 말씀을 가감 없이 순종하고 실천하여 성경에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않는 주님의 몸 된 “그리스도의 교회”를 헌신과 충성으로 세워가야 한다.
그리스도의 교회란 무엇인가?
첫째로,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구주로 모시고 그분의 교훈을 따라 그 사랑의 계명을 가감 없이 지켜 실천하며 살아가는 공동체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한다. 주님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대하여 마태복음 22장 37~4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사도 바울은 로마서 13장 10절에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교회는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사랑의 공동체이다. 사랑이 없는 집단은 그리스도의 공동체라고 할 수 없다.
둘째로, 맡겨주신 사명에 충성하는 주님의 몸의 지체들이다.
몸이 없으면 지체도 없다. 지체들은 몸을 안전하고 편안하게 잘 보호해야 한다. 몸이 건강해야 지체들도 건강할 수 있다. 지체들이 건강하기 위해서는 몸의 건강을 잘 관리해야 한다. 오늘 우리는 주님의 지체로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안전하게 보호하고 내 몸 같이 사랑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2장 4~5절에서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요, 지체들이다. 지체들은 머리에서 명령하는 것을 가감 없이 실천해야 건강해진다. 이것이 우리 성도의 사명이다. 사명이란 맡겨진 임무, 혹은 사신(使臣)이 받은 명령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므로 어떤 일이 있어도 주님의 명령은 반드시 지켜 순종하고 실천해야 한다. 요한계시록 2장 10절 하반 절에서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라고 하셨다. 충성이란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맡겨주신 사명에 죽을힘을 다해 생이 다하는 그 순간까지 변함없이 헌신해야 한다는 말이다.
셋째로, 그리스도의 교회를 섬기는 목회자의 충성심이다.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교회를 섬기는 사명을 받은 목회자는 충성심이 충만해야 한다. 많은 사람 중에 특별히 주님의 부름을 받아, 주님의 몸 된 그리스도의 교회를 섬기는 주님의 종으로서, 죽도록 충성하겠다는 결단력이 없이 목회자가 돼서는 안 된다. 개척교회나 어려운 교회를 자원해서 부흥시키겠다는 결단보다는 어떻게 하면 안정된 교회에 가서 대접받고 편안하게 목회할 수 있을까 혹은 다른 사람이 눈물 흘려 기도하고, 땀 흘려 헌신하고, 충성해서 성장시킨 교회에 가서 편안하게 대접받는 목회를 꿈꾸는 목회자들이 있다면 목회를 하지 말아야 한다. 어떤 교회도 그런 목회자를 원하지 않고, 우리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또한 그런 종을 원하지 않으신다.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 목회자가 그 교회에 가서 2~3년 이내에, 갑절의 부흥을 시킬 자신이 있다면 가라. 마태복음 25장 14절 이하에서 볼 수 있듯이 갑절의 이익을 남긴 종은 주인에게 칭찬을 받았지만, 본전만 가지고 있던 종은 그것마저도 빼앗기고 쫓겨났음을 기억해야 한다. 이 말씀은 단순히 돈에 대한 문제가 아니다. 과연 나는 내가 받은 달란트를 가지고 얼마의 이익을 남겼는지 돌아보자.
1960년대 미국 선교사와 선배 목회자로부터 그리스도의 교회를 배울 때만 해도 오늘의 그리스도의 교회의 모습은 상상할 수 없었다. 그 당시에는 배우고 성경에서 확인한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려고 많은 노력을 했다. 동네 주민들을 다 동원해서 전도 집회를 하고 세례를 베풀었다. 하나님께서 홍천 서면교회를 개척하여 예배당을 건축하게 해 주셨고, 13년을 섬기게 하셨다. 1980년 12월 30일에는 3명의 교인이 있는 서대문 교회로 부르셔서 3년 반을 섬기며 60여 명의 성도가 모이는 교회로 성장시켜 주셨다. 1984년 6월 23일 방화동 그리스도의 교회에 부임해보니 13년 동안 이 교회를 섬겼던 목회자가 100여 명의 교인을 데리고 교회 앞 20~30m 거리에 새 예배당을 건축한 상태였다. 간판도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닌 대한예수교 장로회를 달고 있었다. 방화동 교회는 당시 노인과 청년을 모두 합해도 30명이 안 되었다.
필자는 방화동 교회로부터 청빙을 받아, 서대문 교회에 대한 애착도 있었지만, 주님의 뜻으로 믿고 순종했다. 당시에 방화동 교회에는 어떤 사역자도 가려고 하지 않았다. 방화동 교회는 서대문 교회보다 더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었다. 필자도 여러 번 사양했음에도 불구하고 수차례 초청장과 청빙서를 발송해 왔다. 그래서 주님의 뜻으로 믿고 부임하여 열심을 다했다. 그 결과 주님의 은혜로 3년 만에 120여 명 정도의 규모로 교회가 성장하였다. 나는 어느 교회를 섬기든지 그리스도의 교회라는 이름이 교회 성장에 장애가 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악기를 사용하지 않고 여성 직분자를 세우지 않아서 교회 성장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주님의 말씀을 따라 죽도록 충성하면 주님이 교회를 성장시켜 주신다는 일념으로 진리 안에서 배우고 확신한 일에 최선을 다했다.
내가 배우고 깨달은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고, 진리에서 가감하는 것은 죄요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고전 4:6)고 하였다. 기록된 말씀 밖에 벗어나는 것이 죄요,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말씀을 항상 가슴에 품고(롬 6:23), 오직 주님의 말씀 안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무한 노력을 다하며 교회를 섬겼다. 1975년에는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최초로 목사 안수를 받았고,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성도들의 사랑으로 18년의 사역을 마치고 2002년 6월에 원로목사 추대를 받아 은퇴했다. 후임 목회자는 그리스도대학교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고, 방화동 교회에서 5년 동안 부목사로 함께 사역했는데 담임으로 취임 후 바로 예배 중 악기를 사용하고, 여성 직분자를 세우며 교회의 부흥을 시도했다. 2023년 현재도 그와 같은 방식으로 예배 의식이 진행되고 있고, 여성 직분자를 세우고 있지만, 좀처럼 부흥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요즈음,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그리스도의’가 빠진 간판들을 많이 보게 된다. ‘그리스도의’라는 이름이 빠지면 부흥할 수 있을까? 왜 유일하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 있게, 담대하게 외치지 못하는가? 그리스도가 없으면 교회가 아니다. 주님의 종으로 부름 받은 목회자는 주님의 몸 된 주님이 세우신 단 하나의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하여 생명이라도 바칠 각오를 하고 목회자의 길을 가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셨다. “그러나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나의 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 내가 땅끝에서부터 너를 붙들며 땅 모퉁이에서부터 너를 부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나의 종이라 내가 너를 택하고 싫어하여 버리지 아니하였다 하였노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보라 네게 노하던 자들이 수치와 욕을 당할 것이요 너와 다투는 자들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이 될 것이며 멸망할 것이라, 네가 찾아도 너와 싸우던 자들을 만나지 못할 것이요 너를 치는 자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고 허무한 것 같이 되리니, 이는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이 네 오른손을 붙들고 네게 이르기를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도우리라 할 것임이니라”(사 41:8-13). 우리를 부르심이 하나님의 계획과 뜻임을 믿고 주님께 맡기고 순종하자!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보호자이시다.
필자는 믿음의 선배들에게서 배우고 성경에서 확인한 주님의 몸 된 그리스도의 교회가 사도 시대의 초대 교회처럼 진리의 말씀으로 회복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하나님이 세우시고, 많은 선배가 사랑하며 지켜온 진리가 퇴색되지 않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또한 그리스도의 교회가 주님의 마음에 합당한 주님의 몸 된 교회로,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그날까지, 인류를 구원하는 교회로 크게 부흥하고 보존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그래서 내 생명이 다하는 그 날까지,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일지도 모른다는 각오로 살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주님의 몸 된 그리스도의 교회가 어떤 어려움이 닥쳐와도 항상 인내하며, 장차 주님을 만날 소망 중에 즐거워하는 교회가 되기를 우리 구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한다.
오봉식 목사
홍천서면(강원), 서대문(서울), 치현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목회한 후 은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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