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서제일교회 | 권문주 | 2020-12-2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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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로 회심하다 어린 시절, 내 고향은 전형적인 농촌마을로 기독교는 전파되지 않아 마을 사람들은 불교 아니면 무속 신앙이었다. 대체적으로 무속신앙을 갖고 있었는데, 우리 부모님은 불교를 믿으셨지만 열성적인 불자는 아니셨다. 가정의 신앙분위기가 불교이었기에, 나 역시 다른 선택 없이 불교를 믿었으나 일 년에 한두 차례 부모님을 따라서 사찰에 구경삼아 가는 정도였다. 그 후 고등학교 때에 가까운 크리스천 친구로부터 교회참석을 권유받았으나, 처음에는 쉽게 수락하지 않았다. 친구의 계속적인 권유와 독촉에 못이겨 전주에 있는 금암교회에 나가게 되었다. 처음에는 다양한 기독교 문화와 여러 친구들을 사귀면서 재미를 붙여 신앙생활을 지속하였다. 꾸준히 예배와 여러 모임에 참석하면서 차츰 신앙의 깊이가 더해지고 학생회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철야기도와 새벽기도에 참석하는 속에 신앙의 불길은 내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뜨겁게 달아올랐다. 이즈음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진로와 방향이 당면문제로 다가왔다. 대학에 진학하면 어떤 학과를 지망할 것인지에 대하여 고민하던 중에 신학과를 지망하는 것도 하나의 길로 마음속에 두었다.
그리스도의 교회 신학을 공부하다 그와 같은 상황에 있을 때, 어느 분의 소개로 그리스도의 교회를 알게 되었고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순수한 신앙정신과 초대교회를 지향한다는 비교파 정신이 마음에 와 닿았다. 서울로 상경하여 효창동 그리스도의 교회에 다니게 되었고, 그곳에서 선교사와 목회자의 설교를 들으면서 성경을 깊이 있게 공부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면서 기도 속에 불분명하였던 신학공부에 대한 방향을 확실하게 정하였다. 1976년 그리스도신학대학(현 케이씨대학교)에 입학하여 본격적으로 신학수업을 시작하였는데, 그 당시 대학은 작은 규모이지만 사랑과 따뜻함이 있는 학교이었다. 교수님들의 성경적인 가르침과 신앙적인 지도, 선배들의 따뜻한 후배사랑, 동급생들의 우정은 어느 대학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최상의 분위기였다. 학업 중에 군대에 다녀왔고, 고학년이 되면서는 신앙의 깊이가 더해져 평생을 주의 일을 위해 헌신할 것을 굳게 다짐하였다. 1982년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서울에서 잠시 사역을 하다가 고향 마을이 가까운 산서제일 그리스도의 교회에 전도사로 부임하였다. 교회에서 주어진 사역을 열심히 하면서도 늘 고향 마을의 복음화가 마음 한 구석에 똬리를 틀고 있었다.
고향마을에 교회를 개척하다 고향마을에서 교회를 개척하는 문제를 놓고 많이 기도하였다. 태어나고 성장한 고향에서 교회를 개척하는데 에는 긍정적인 면보다는 어렵고 힘든 것이 더 많을 것을 예상하였다. 예수님께서도 고향 나사렛에서 배척을 받으면서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눅 4: 24)”고 말씀하셨다. 그럼에도 고향마을 복음화에 대한 열망과 부모님을 보살펴야 한다는 책임감이 교회를 개척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마을회관에서 예배를 드렸으나 예배장소로 사용하는 데에 여러 가지 예상치 않은 문제가 생겼다. 생각 끝에 고향집 누에치던 방을 개조하여 예배처소를 만들고, 정식으로 오산 그리스도의 교회를 출범하였다. 처음에는 마을 사람들의 무관심과 비협조로 어려움이 있었으나, 어린이들과 학생들 중심으로 열심히 사역을 계속하였다. 농촌마을에는 놀이문화가 없어 교회에서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진행하자 어린이들과 학생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이 같은 과정에서 케이씨대학교의 후배들과 서울기독대학교 학생들이 매년 방학 때이면 내려와서 여름성경학교와 학생수련회를 인도했다. 신학생들의 다양한 프로그램 진행과 야외활동은 어린이와 학생뿐 아니라 지역 복음화에 지대한 역할을 하였다. 차츰 마을사람들이 교회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되면서 회심자가 생기기 시작하였고, 하나님의 은혜로 교회가 성장하여 주일학교 70여명, 중고등학생 30여명, 장년 70여명으로 부흥했다. 교회에는 사례비에 대한 부담을 지우지 않고, 손수 땀 흘려 농사 짓고 과수원을 하면서 근면성실함으로 자비량 목회를 하였다. 교회가 성장하면서 넓은 예배공간이 필요하게 되자 교인들 스스로 예배당 건축을 결정하였다. 농사일을 하면서 아침, 저녁으로 한마음이 되어 한 칸씩 벽돌을 쌓고 지붕을 올려 자력으로 완공하게 되었다. 드디어 1984년에 아담한 예배당을 건축하고 감격적인 봉헌예배를 드렸다.
지역사회 기독교 지도자가 되다 고향마을에서 교회를 개척한 것은 단지 복음사역만 하려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통하여 낙후된 농촌마을을 개선하여 근대화시키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평일에는 나의 농사만 짓는 것이 아니라 일손이 부족한 이웃을 돕고, 동네 분들이 하지 못하는 일들이 있으면 열과 성을 다하여 보살폈다. 시간이 지나면서 동네 분들이 마을을 섬기려는 나의 진심을 이해하고, 마음 문을 조금씩 열어갔다. 그 후로는 어려운 일이 있으면 나에게 의논과 부탁을 하여왔다. 기꺼운 마음으로 마을의 문제들을 돕고 해결하니 자연히 교회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면서 교회는 크게 성장하여 갔다. 오산교회의 마을봉사와 성장이 장수군 전체에 알려지면서 초교파적으로 많은 활동을 하게 되었다. 장수군 기독교연합회회장, 장수군 향목회장, 장수군 경목회장 등을 역임하면서 교회와 지역사회 간에 소통의 장을 열어 지역복음화에 지대한 역할을 하였다. 장수군은 지역특성과 인구비율이 적어 교회수가 많지 않지만, 장수군 전체 52교회에 주도적 역할을 하므로 서 그리스도의 교회의 위상을 크게 드높였다.
새로운 사역지로 옮기다 2천 년대가 되면서 농촌의 이농현상이 가파르게 진행되어 농촌인구의 수도 줄고 타 지역으로 이사 가는 성도들이 많이 생겼다. 오산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20여년 사역에 매진할 때, 어느 날 “때가 되었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 음성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였지만 나중에 새로운 사역지로 옮기라는 뜻임을 깨닫게 되었다. 같은 면에 소재한 산서제일 그리스도의 교회를 담임하던 정상택 목사가 2004년 9월에 급자기 뇌출혈로 세상을 떠났다. 담임목사가 공석이 된 산서제일교회에서 청빙이 왔으나 쉽게 오산교회를 떠날 수가 없었다. 개척한 후 20년의 세월동안 열심히 목회를 하였고, 특히 마을의 중심적 역할을 하는 상황에서 다른 교회로 사역지를 옮기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판단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떠날 때가 되었다는 하나님의 음성을 생각하면서 최선의 길을 놓고 기도하는 중에 좋은 방법이 떠올랐다. 오산교회와 산서제일교회는 거리가 그리 멀지 않기에 두 교회를 묶어서 사역하는 방안을 강구하였다. 그래서 산서제일교회는 그대로 교회로서의 기능역할을 하고, 오산교회는 교회와 지역사회를 위한 공간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학생수련회, 교회연합수련회, 은퇴목사 휴식공간, 어르신들의 나눔의 집 등으로 다양하게 활용하여 교회와 지역사회에 유익함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이렇게 결정한 후에 산서제일교회의 청빙을 받아들여 2004년 10월 13일 제 8대 담임목사로 취임했다. 산서제일교회 50년의 역사를 쓰다 취임한 후로 교회당을 새롭게 리모델링하여 깨끗한 공간을 만들어 예배와 교육하기에 적절하고 편안토록 하였다. 또한 이웃 주민들의 필요에 따라서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도록 지역사회에 개방하여 좋은 호응을 얻고 있다. 이로 인해 교회와 이웃 사이에는 담장 없이 편안하게 교통할 수 있는 관계가 되어 복음전도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이 같은 선교사역과 함께 나눔의 집과 어린이 집(원장 김영선)을 개원하여 이웃 섬김을 통한 봉사로 지역사회에 좋은 평판을 받고 있다. 금년은 산서제일교회 창립 50주년이 되는 뜻 깊은 해이다. 창립기념일(9월 23일)에 맞춰 새로운 교회일군을 임명하는 임직식을 가질 예정이다. 그 외에 다양한 행사를 갖고 100년의 역사를 향한 선교 계획을 수립할 것이다. 현재 출석성도는 70여명이며, 각부서가 원활하게 주어진 선교활동을 열심히 수행하고 있다. 오산 그리스도의 교회와 산서제일 그리스도의 교회를 합하여 목회한지가 36년이 되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산서제일교회에서 사역을 16년째 수행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부족한 종을 그의 도구로 사용해 주심에 감사할 뿐이다. 주의 종으로서 지금까지 주어진 사역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한 것처럼, 남은 사역기간동안 산서제일교회와 함께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갈 것이다. 두 교회를 섬기면서 여러 형제들의 사랑과 도움을 많이 받아 감사하다. 특히 모교인 케이씨대학교의 총장, 교수 그리고 후배 학생들에게 감사한다. 농촌교회를 위해 방학기간 때마다 내려와서 주일학교, 학생회 그리고 지역사회 봉사를 하였다. 그분들의 노고와 헌신은 하나님의 나라 확장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두 교회의 역사 속에 길이 기록될 것이다. 산서제일 그리스도의 교회 연혁 1970년 9월 23일 이기형 집사 외 5명이 산서면 신창리 정미소에서 최초로 예배드리다. 1971년 15평 예배당을 건축. 1972년 초대 강대혁 목사 취임하고, 제일고등공민학교 운영 1977년 예배당 20평과 사택 건축 1977년 2월 강대혁 목사 사임 1977년 6월 제2대 김길성 전도자 취임, 9월 사임 1978년 2월 제3대 장준영 목사 취임 1982년 1월 3일 장준영 목사 사임 1982년 1월 20일 제4대 김운각 전도자 취임, 5월 30일 사임 1982년 7월 20일 제5대 서바울 전도자 취임 1983년 7월 10일 권문주 전도사 취임 1983년 10월 9일 예배당 대지 계약 1984년 9월 6일 권문주 전도사 사임 1984년 11월 18일 서바울 전도자 사임 1984년 11월 19일 제6대 정기원 전도사 취임 1985년 2월 25일 예배당 대지 206평을 250만원에 매입 1987년 3월 11일 예배당 건축 기공예배 1991년 9월 24일 예배당 헌당 예배 1993년 4월 18일 정기원 목사 사임 1993년 11월 20일 제7대 정상택 전도사 취임 1995년 5월 9일 산서어린이 선교원 개원 1997년 5월 21일 사회복지법인 혜화원 인가 1997년 10월 14일 산서어린이집(125평) 착공 1998년 3월 7일 산서 어린이집 보육시설 인가(원아7 2명, 교사6명) 1998년 3월26일 산서 어린이집 준공 2001년 3월 29일 산서 어린이집 초등학교 방과 후 인가(학생 27명, 교사 1명) 2003년 1월 23일 교회 홈페이지 제작. 2003년 3월 17일 산서제일 문고 설립 2004년 9월 1일 정상택 목사 소천 2004년 10월 13일 제8대 권문주 목사 취임 2004년 3월 20일 산서제일 나눔의 집 개원 2005년 5월 10일 교회당 내부 리모델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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