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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동교회 이준 2020-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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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창기

성산동교회는 1965815, 공삼렬 목사와 함께 교회개척에 뜻이 맞는 사람들이 김태수 형제의 집에서 주일예배를 드림으로 시작되었다(마포구 서교동 198번지). 교회는 급속도로 성장하여 두 달 만에 장년 20, 학생 15, 어린이 40명이 교회에 나오기 시작하였다. 더 이상 가정에서 예배를 드릴 수가 없게 되었다. 그래서 옮겨간 곳이 방 두 칸으로 된 기와집이다(서대문구 성산동 237). 이때부터 가정집의 면모를 벗어나 예배당의 모습을 갖출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5만원의 빚을 지게 되었지만 처음으로 침례자가 생기는 등 하나님의 은혜가 풍성했다. 세 번째로 옮긴 예배당은 천막교회(마포구 서교동 247번지)였다.

당시 예배당은 15평 규모의 천막이었지만 최수열 선교사가 미국교회에 호소하여 교회개척에 필요한 자금을 빌려주었다. 성산동교회는 도움 받은 725,976원으로 구획정리가 끝난 134평의 땅을 구입했다. 공삼렬 목사는 선교사에게 경제적으로 의지하기는 했지만, 교회만은 친히 자신들의 힘으로 지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건축에 필요한 벽돌 4천장을 교우들과 직접 찍어 천막교회를 세웠다.

당시의 교회를 보면 모든 면에서 활력이 넘쳤다. 예배당 부지가 마련되었으며, 천막교회로서 누추하기는 했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살아 숨 쉬는 공간이었다. 처음으로 성경학교를 열어 어린이전도를 시작했다. 2년 과정의 중등학교를 개설하여, 불우한 환경으로 공부를 하지 못한 이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주었다. 당시 학생들은 30여 명이고, 그리스도대학교 학생들이 교사로 수고해 주었다. 이때 교회는 5명의 집사를 세움으로 조직적으로도 더 탄탄한 체계가 잡혔다.

서교동의 천막교회가 부흥하면서 교인수도 늘어갔지만 교회가 구입한 대지의 지가도 덩달아 올랐다. 구입한지 얼마 되지 않아 개발지역으로 선정되어 길이 나고 주택이 들어선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땅 값이 10배나 올랐다. 교회는 부지를 팔아 지금의 교회 위치인 성산동 254-6번지로 옮겨왔다.

1968418, 교회 기공식을 가짐으로 교회 이전을 시작하였다. 예배당을 건축하는 과정이 쉽지 않았다. 당시 성산동교회는 땅만 있었고 건축비는 오로지 성도들의 손에 맡겨졌다. 이 때문에 공삼렬 목사는 1967년부터 예배당 건축자금 마련을 위해 지방교회들을 순회하였다.

교회를 건축하는 동안 너무나도 어려운 역경이 따르고 실망과 낙심의 파도가 여러 번 닥쳐왔다. 건축비가 부족하여 지붕도 올리지 못한 상태에서 예배를 드리기도 했다. 지붕 없는 교회는 여름철 장마가 큰 문제였다. 이런 딱한 사정이 전국 그리스도의 교회에 알려지자 짧은 시일에 기적적인 성금이 걷히기도 했다.

교회는 17만원의 융자를 받아 지붕을 올리고 나서야 온전한 예배당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1968년에 헌당식을 가졌다. 건축으로 생긴 75만원의 채무는 교회부지 163평 중의 일부인 65평을 매각하여 청산하였다.

성산동 교회가 안정적으로 성장하는 데에는 이봉훈 목사(72. 11. 5-90. 12. 2), 정춘석 목사(78. 5. 28-82. 4. 4), 백부열 전도자(83. 7. 17-88. 1.10) 등을 비롯한 많은 부교역자들의 수고가 있었다. 공삼렬 목사는 19924, 27년간의 목회생활을 정리하고 원로목사로 물러났다. 비교적 이른 나이에 목회에서 은퇴한 것은 젊은 사역자를 세워 교회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였다.

 

과도기

1992412일에 최화희 목사가 두 번째 담임목사로 부임하여 약 11년 동안 목회를 하였다. 당시 교회 안에는 여성 직분자나 악기사용과 같은 그리스도의 교회 전통에 대한 변화를 요구하는 목소리들이 있었다. 변화를 맞이하면서 새롭게 변모하기도 하고 갈등하기도 하였지만 어려움을 통해 인내를 배우고 그 인내로써 연단되는 시기였다. 최화희 목사는 본래 음악에 대한 관심이 많아서 화곡동교회 시절 명동의 투자금융회사 합창단의 지휘자도 겸하였다.

찬양에 대한 그의 관심은 성산동교회에서 이어져 찬양단이 결성되었다. 그리고 음악사역에 필요한 여러 악기와 앰프 시설을 구입하였다. 무악기나 여성 직분자를 인정하지 않는 그리스도의 교회 보수적 전통 때문에 지역 교회에서 성산동교회가 이런저런 오해가 생긴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또한 여성 직분자 양성은 사람을 키우는 일, 즉 일꾼 양성과도 연결되었다. 이러한 일은 교회를 활성화하고 교회 분위기를 쇄신시키려는 의도로 시작되었지만 교회 갈등의 원인이 되었다.

성산동교회는 전통적으로 아카펠라 찬양을 지향하는 교회였고, 교회 리더 중에는 이런 방향을 반대하는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성산동교회는 악기를 사용하고 있다. 물론 여성 직분자도 세웠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오늘날 성산동교회의 모습은 그러한 과도기 단계를 거쳤다. 물론 성산동교회는 아카펠라 찬양이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참된 찬양이라고 믿고 있다. 그런 면에서 그리스도의 교회 환원운동의 전통을 지켜가는 이들에 대한 빚진 마음을 가지고 있다.

 

회복기

2003, 이준 목사가 세 번째 담임목사로 부임하였다. 부임했을 당시 교회의 상태는 여의치 않았다. 교회에 나오는 성도는 20명 안팎으로, 믿음이 좋은 이들은 좋은 대로 갈급함을 이기지 못하여 교회를 떠났고, 믿음이 좋지 않았던 이들은 그들대로 교회를 떠났다. 당시 교회는 긴장과 불안의 연속이었다.

이준 목사는 부임하자마자 심방에 주력하였다. 전화 심방은 물론이고 여러 성도들의 문을 두드려 다시 교회에 나오게 하였다. 교회의 갈등으로 떠난 어느 장로의 가정을 찾아 경기도 이천까지 심방하였다. 또 암에 고통하고 있던 성도의 문을 두드려 그의 아내를 교회로 다시 인도하였다.

심방에 치중하면서 교우들 간의 편안한 교제를 위하여 같이 축구를 하였다. 교회가 운동에 너무 몰두하는 것은 좋은 현상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당시에는 학생들과 청년들을 다시 붙들어 교회를 회복할 계기가 필요했다.

이준 목사는 여러 청년들을 독려하여 동성교회, 화곡교회 등과 운동경기를 하면서 젊은이들을 활성화시키려 노력하였다. 또한 문병하 교수 사모님과 함께 3년 동안 시행한 영어 캠프는 주일학교 활성화에 크게 기여하여 주일학교와 학생부의 재건에 큰 역할을 하였다.

지금은 첫 믿음을 회복하기 위해 말씀과 성찬이 회복되는 교회, 지역사회와 함께 하는 공동체, 21세기 꿈나무를 양성하는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부족하지만 해마다 지역사회와 본 교회의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으며, 복음의 빚을 갚기 위하여 전성용 선교사께서 수고하고 계시는 캄보디아를 방문하고 있다.

성산동교회 창립 50주년을 기념하여 껌똥톰 바랑에 선교관을 짓는 일에 동참하였다. 2019년 그리스도의 교회 선교사대회 때는 길호만 선교사가 수고하는 태국에 김영하 집사께서 헌물한 수건 200장을 전달하였다. 또한 농촌교회를 섬기고 서울지방회에 선교헌금을 보내고 있다.

성산동 교회에 당장 시급한 일이 한 가지 있기에 기도를 부탁할 일도 있다. 교회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성산동 21번지와 23번지의 대지를 통과해야하는데 안타깝게도 경제적인 문제로 매입을 못하고 있다. 아직은 이루지 못하고 있으나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이 기도해 주신다면 빠른 시일 내에 매입을 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여호와 이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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