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야의 찬송 | 원종호 | 2023-01-2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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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야의 찬송
성경본문 사도행전 16장 25절-40절
Ⅰ. 들어가는 말
우리의 성경 본문 25절은 “한 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옥에 갇힌 그들이 한밤중에 찬송을 하였기에 우리의 제목을 “심야의 찬송” 이라고 정하였다. 성경에 있어서 밤의 의미는 지구의 자전과 공전에 의해서 발생하는 자연의 밤보다는 영적인 의미에서의 밤을 강하게 시사하고 있다. 로마서 13장 11절 이하에서는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워진 때가 이 때 라면서 이 때는 “밤이 깊고 낮이 가까운 때” 라고 선포한다. 역사의 종말 곧 주님의 재림이 가까운 때이니까 밤이 깊었다는 것이다. 열 처녀의 비유에서도 신랑 곧 주님이 오시는 때는 한밤중(마25장6절)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밤은 다 영적인 의미에서 역사의 밤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밤은 신앙 행군에 있어서 환난과 고통과 핍박과 수난의 때를 의미한다. 종종 말하는 바이지만 천국은 밤이 없는 영원한 낮이며(계21장25절) 따라서 지옥은 빛이 전혀 없는 영원한 밤이다. 그러므로 지옥은 영원한 고통이 있고 천국은 영원한 영광이 있는 곳이다. 어떻든 어두움과 밤은 고난의 때를 말한다. 따라서 심야의 찬송이란 심한 환난과 핍박의 때에 부르는 찬송이라는 의미이다. 찬송이란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하는 것일 수도 있고, 베푸신 은혜와 받은 축복과 사랑에 대한 응답일 수도 있으며, 신앙체험을 간증하며 자신의 소망을 아뢰는 곡이 붙은, 기도 일수도 있다. 따라서 그것은 영혼을 소성케하며 건강케하는 신앙과 인격의 외침인 것이다.
Ⅱ. 고난 속의 찬송
여기 성경 본문에 나타난 바울과 실라의 기도와 찬송은 확실히 고난속의 찬송이었다. 그렇다. 찬송은 즐거울 때에만 하는 것이 아니다. 욥이 그 혹독한 시험 속에서도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으로 그리로 돌아갈 것 이니까 주신자도 여호와시요 거두어 가신자도 여호와시니 여호와의 이름이 가히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1장21절)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고난의 찬송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더욱이나 이 말은 하나님을 “경배하며” (욥1장21절 하반절) 말한 것이며 욥이 “이 모든 일에 범죄하지 않았다”(욥1장22절,2장10절)고 성경은 확증한다. 주님께서도 십자가의 수난을 감당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긴 하지만 우리와 똑같은 인성을 지니셨기에 그 십자가의 죽음을 앞에 놓고 겟세마네 기도에 들어가기 직전에 고민하고 슬퍼 하셨으며(마26장37절)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심히 고민하고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나와 함께 깨어있으라”(마26장38절)고 하실만큼 두려운 고난이었다. 그러나 주님은 이 겟세마네에 들어오시면서 찬송을 하셨다(마26장30절). 이 역시 명백한 고난의 찬송이었다.
A. 이유 없는 고난
바울과 실라가 매 맞고 옥에 갇히고 손과 발이 쇠사슬에 묶인 것은 실로 이유를 알 수 없는, 아니 이유 없는 고난이었다. 귀신들려 점치는 여인을 귀신을 쫓아내어 줌으로 더 이상 귀신의 노예로 살지 않고 가장 정상적이고 온전한 사람으로 살게 해 주었는데 이것 때문에 그 같은 고난을 겪게 되었다. 물론 그녀가 귀신의 영향을 입지 않기 때문에 점을 칠 수가 없고, 따라서 그녀를 끌고 다니며 점을 치게함으로 물질적 이익을 챙기던 사람에게는 손해가 난 셈이긴 하다. 그러나 그도 사람이라면 자신의 이익이 거기서 끝난다고 하더라도, 그녀가 온전한 사람으로 돌아왔다는 사실 때문에 오히려 크게 기뻐하며 바울에게 대단히 감사하였어야 마땅하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영구히 온전한 인간이 아닌 악령의 노예로 살게 하면서라도 그러한 그녀를 이용하여 자신의 현실적이고 물질적인 이익을 추구하기만 하면 된다는 거기에서, 어찌 하던지 자기의 육적인 이익을 위하여 상대를 이용만 하려는 오늘 우리 시대를 보는 것 같아 서 슬퍼진다. 어떻든 바울은 진정 좋은 일, 옳은 일을 하였는데도 엄청난 고난을 받게 되었으니 과연 이유 있는 고난이라 할 수 있을지?
B. 하나님의 인도하신 고난
성령이 아시아에서 더 이상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셨으며(행16장6절), 비두니아로 가고자 하였는데도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고(행16장7절) 소위 마케도냐 환상(행16장8절-9절)을 보여 주시면서 바울의 일행을 유럽 땅인 빌립보로 건너오도록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것이 분명한데, 그 빌립보에서 그토록 고난을 당하고 있으니 바울의 입장에서 보면 찬송이 나오기는커녕 원망과 불평으로 가득 차 있었어야 정상일 것 같은 상황이 아니었던가? 그가 고정적인 선교비를 받는 것도 아니고, 오직 복음적 사명 때문에 거기까지 하나님께서 가라하신 그대로의 길로 왔고, 그것도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으로 악령(귀신)을 쫓아내어 준 것 때문에 상처가 날 만큼 매 맞고(맞은 자리를 씻겼다는 것으로 보아) 감옥에 갇혔다. 중죄인처럼 손발이 쇠사슬에 묶인 채로 말이다. 그 상황 속에서 어찌 찬송이 나올 수가 있었는지? 더욱이나 유럽 땅인 그 곳은 초행길인지라 친지, 친척, 아는 사람이라곤 전혀 없는 그곳에서 언제 감옥에서 다시 나올 수가 있을려는지 그 어떤 가망성도 없는 역경 속에서의 찬송, 곧 심야의 찬송이었던 것이다. 그 밤은 자연의 밤이기도 하였지만 바울에게 있어서는 고통의 밤이었다. 쓰라린 상처에서는 아직 피가 덜 말랐을 것이며, 쇠사슬에 묶인 몸이 부자유스러웠을 것은 너무 명약관화한 일인데도 그들은 찬송을 불렀던 것이다.
C. 영광의 찬송
아마도 욥처럼 바울도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았다면 재앙을 받는다 해서 어찌 불평할 수가 있겠는가(욥2장10절). 오히려 자신은 비록 감옥 안에 갇히는 몸이 되었지만 한 여인을 악령의 사슬에서 해방시키도록 해 주신, 아니 그러한 길로 인도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 영광을 찬송하는 가슴이었을지 모른다. 그렇다. 모든 크리스찬의 찬송은 자신이야 어떠한 고난 속에 들어간다 하더라도, 나를 통하여 한 영혼이 악령의 사슬에서 해방되는 일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전혀 이유를 모를 고난이라 하더라도 그 역경 속에서도 찬송을 부를 수 있는 것이 크리스찬의 본연일 것이다. 순경에서만 찬양하고 역경에서는 불평만 한다면 비기독인들과 다를 것이 무엇이겠는가? 절대 좋으신 하나님을 의지한다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을 믿어야 할 것이다.
Ⅲ. 찬송의 결과
모든 일은 결과를 가져온다. 그러나 모든 것이 다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일은 반드시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 이 심야의 찬송도 그러하였다.
A. 모든 것이 풀리고 열렸다.
옥터가 움직이는 지진 같은 현상이 일어남으로 바울과 실라의 손과 발에 묶였던 쇠사슬이 풀렸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의 인격이나 양심, 그리고 정신이나 마음이 사욕이나 건전치 못한 사상과 철학에 묶여 있지는 않는지? 기도하고 찬송하라. 그리하면 그 모든 사슬은 풀릴 것이다. 또한 감옥 문이 열렸다. 우리를 가두어 놓는 감옥이란 쾌락에 갇혀 있을 수도 있으며 명예나, 권세나 부귀영화의 감옥에 인간의 내면의 세계가 갇혀 있을 수 있다.
역시 기도하고 찬송하라, 열릴 것이다. 기도의 문도 찬송으로 열고, 전도의 문도 찬송으로 열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유의해야 될 사실이 하나 있다. 그 감옥 안에는 다른 죄수들도 있었다(행16장25절). 바울의 기도와 찬송을 그들도 듣고 있었다는 것을 성경본문은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감방 문은 열리지 않았고 그들의 사슬은 풀리지 않았다. 까닭은 만약 그들의 감방이나 사슬들이 풀렸다면 그들은 다 탈옥하였을 것이고, 바울의 전도를 받아 구원 받은 그 간수가 복음을 들으려고 하지도 않았을 것이며, 아니 살아남지 못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같은 감옥에 있었으나 기도하고 찬송한 사람들의 모든 것만 풀리고 열린다는 사실을 말하여 준다. 찬송의 위력, 아니 그 찬양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이다.
B. 간수와 그 가족이 구원받았다.
다 풀리고 열렸지만 도망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죄수들이 도망한 줄 알고 자살하려 하는 자기마져도 살려 주는 바울의 마음! 거기에 압도되었을 것은 너무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간수는 내가 무엇을 하여야 구원을 얻겠느냐고 물었더니 바울은 "주 예수를 믿어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16장31절)고 하였더니 간수는 과감히 죄수인 바울과 실라를 그 감옥에서 이끌어 내어다가 말씀을 듣게 되었던 것이고, 믿음이 생긴 간수와 그 가족들은 밤 그 시에 다 세례를 받고 구원을 받았다는 이 사실은, 결국 전혀 여망이 없는 상황 속에서도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기도하고 찬송하였던 결과이었다. 그런데 그 "감옥의 간수는 자기와 온가족이 믿었으므로 크게 기뻐하였다"(행16장34절)고 하였는데 그것은 단순히 온가족이 믿었다는 의미만은 아니고 세례까지를 받은 것을 믿었다고 함으로서 믿음이란 거기에 세례까지가 포함된다는 사실을 여기서도 확증하여 준다.
Ⅳ. 나오는 말
날이 새었다(행16장35절). 밤은 영원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즉 밤은 날이 새는 때가 오기 마련이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바울은 감옥에서 출옥한다. 당당하게 말이다. 이로써 빌립보에 대단한 복음의 거점을 확보하였다. 합동 유익이다. 캄캄한 절망적 고난속에서도 찬송을 부른 결과이다.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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