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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의 근원 원종호 2023-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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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의 근원 

 

성경본문 창세기 12장 1절-3절

 

 

Ⅰ. 들어가는 말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이라 했다. 

복의 근원이란, 자기도 복 받고, 남도 복 받는 자가 된다는 말이다. 

실제로 본문에는 "모든 족속이 너로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했다. 

이 말씀을 갈라디아서 3장8절에서 보면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고 하였다. 

복음이란 영과 육이 다 복 받는 길이다. 

그런데 이 말을 받아들인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 하였는데, 조상이란 "견본, 근원, 줄기나 뿌리”를 뜻한다. 

다시 말하면 믿음의 뿌리나 줄기라는 뜻이다. 

우리들은 믿음의 후손, 곧 그 줄기에서 발생한 가지나 잎사귀들이라는 의미인 것이다. 

그렇다면 뿌리나 줄기나 가지나 잎사귀는 그 성분이 같다. 

따라서 우리도 아브라함과 믿음에 있어서 성분이 같아야 한다. 

즉 질이 같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과 질적으로 같은 믿음의 수준에 있어서 그와 같아진다면, 아브라함이 받았던 축복을 우리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믿음의 조상이고, 우리는 믿음의 후손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 되는데 있어서, 하나님이 그에게 명하신 선행조건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이제부터 그것을 찾아가며, 복의 근원이 되는 길을 찾아가도록 하자!!

 

Ⅱ. 첫 번째로는 “떠나라”는 명령이었다.

 

 무엇을 떠나라는 것인가?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는 것이다. 

이것은 지연과 혈연과 전통을 떠나라는 것이다.

 

A. 본토를 떠나라.

 

 본토란 살던 곳, 자기가 태어난 곳, 자기의 고향이다.  그리고 그 고향을 떠나라는 말이다.

 따라서 하늘 길을 가는 자는 하나님께서 떠나라고 하시면, 이런 것에 머물러 있지 말고 떠나야 한다. 

또 이 본토란 의미 속에는, 네가 뿌리박고 살던 곳을 떠나라는 뜻이 숨겨져 있다.

 지금까지 내가 뿌리를 박고 살던 곳이란 반드시 나의 고향은 아니다. 

어디든지 그곳이 자기의 삶의 본거지이면 거기가 자기의 본토이다. 

영적으로 볼 때, 돈이나 물질일 수도 있다. 

문자적으로 본토는 땅이니까 땅은 곳 재산 덩어리인 재물이기 때문이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재물에 뿌리를 박고 산다. 

재물이 자기들의 본토이며 본거지이다.  사람들은 거기를 떠나면 죽는 줄 안다. 

거기에 목숨 박고 산다. 그러기에 재물 때문에 죽고 죽이는 비극이 얼마나 많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른다. 

또한 어떤 사람은 명예나 권세에 뿌리박고 살아가며, 또 다른 사람들은 학문이나 기술 등에 뿌리박고 산다.  즉 그러한 것을 자기의 본토나 본거지로 삼고 산다.

 이러한 것들은 한마디로 표현 한다면 이 세상에 뿌리박고 산다는 것이다.

 곧 이 세상을 본토로 삼고 살아간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본토를 떠나라는 것을 명예나, 권세나, 재물이나, 지식이나, 이 모든 것들을 완전히 내버리라는 뜻은 아니다. 

다만 그러한 것에 자신의 운명을 걸거나, 뿌리박고 본거지로 삼지 말고 살라는 의미이다. 

그러한 것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인간의 운명을 좌우 할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

 

B. 친척을 떠나라, 이는 혈연과 핏줄을 떠난다는 것이다.

 

혈육의 정을 떠나라는 것이다. 

인간 세계의 문제 가운데 하나는 지방색도 문제지만 혈연적인 정신도 문제가 된다. 

혈연적인 정신이 신앙보다 앞서거나 신앙을 지배하면 안 된다는 말이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고 아들이나 딸을 나 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않다”(마10장37절)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또 주님은 “누가 내 모친이며 동생들이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들이 모두 내 모친이며 형제라”(마12장50절)고 하셨다.  

이것은 주님을 제일로 사랑하라는 뜻이다. 아니 성경은 하나님만을 사랑하라고 요구하신다. “마음과 뜻과 성품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라” 하였기 때문이다(마22장37절-39절). 

하나님께 마음도 다하고, 뜻도 다하고, 성품도 다하고, 힘도 다 하였는데 어찌 다른 것을 사랑할 수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하나님만을 사랑한다는 의미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대로 행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만을 사랑한다는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는 모든 것을 참으로 사랑한다는 의미가 된다.  즉 부모를 사랑하여도 자녀를 사랑하여도, 민족이나 나라를 사랑하여도, 그리고 인류를 사랑하여도, 또 다른 어떤 것들을 사랑하여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랑하는 것이기에 그러한 대상들을 참으로 사랑하는 것이 되겠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막10장29절-30절)고 주님은 선포하셨다. 

그렇다면 부모나 형제나 자매나 집이나 전토를 정말 버려야 한다는 뜻인가? 

결코 그렇지는 않다.  다만 하나님만을 절대 의지하고 믿으며, 하나님의 뜻이 아닌 길은 아무리 혈연이라 하더라도 따라갈 수는 없다는 의미이다. 

그렇기 때문에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가 될 것이라”(마10장36절)고까지 말씀하셨다.

 따라서 우리는 혈통이 아니라 영통 위주로 살아가야 한다. 

우리는 주님의 피로 맺어진 형제들이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가 영원히 살아가야 할 천국은 혈연이란 전혀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거기에는 흑인이나 백인의 차별도 없고, 인종이나 민족 간의 차별도 없고, 남녀노소나 유, 무식의 차별도 없으며 동서고금의 문화적 차이도 없고, 물론 혈연의 차별도 없고 그 어떠한 차별도 있을 수 없는 세계이다. 

그 하늘나라에 실상을 이루어 가는 것이 이 세계 안에서의 신앙생활이기 때문이다.

 

육적 혈통은 같은 형제라 하더라도, 부모의 슬하에서 30년 정도 함께 살다가 흩어진다. 

그러나 영통은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함께 살 것이니까 훨씬 더 가까운 것이다. 

오늘 우리의 실정은 믿는 혈연이라 하더라도 그들을 더 가까이하는 것은 혈연을 완전히 떠난 것이 아닌데, 아예 불신의 형제나 친척임에도 거기를 더 가까이하며 주일 성수를 못하면서도 불신 친척의 잔치에는 가버리고, 믿음의 형제간에는 못하는 말도, 안 믿는 친지친척들에게는 한다.  이것도 잘못되었다.

자기 집 하녀 이스라엘 소녀의 말대로 엘리사를 찾아가야 하였던 나아만은 아람나라 임금의 소개장을 가지고 이스라엘 왕을 찾아갔었다. 

까닭은 강대국 왕의 소개편지를 가지고 이스라엘나라 왕을 찾아가면 더 유리할 줄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일은 더 복잡해지고 지연되었다(왕하 5장1절 이하).

 또한 요셉과 마리아는 잃어버린 예수를 친족과 아는 자 중에서 찾았으나 찾지 못했다(눅2장44절-45절).  그러므로 안면이나 인정을 떠나야 한다. 

이와 같은 일들은 다 안면 위주로 하는 것이다. 

주님은 십자가에 달리시지 말라는 베드로를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마16장22절-23절) 라고 하셨다.

베드로가 주님께 십자가에 죽지 말라고 한 것은 주님에 대한 베드로의 지극한 사랑이었다. 

그럼에도 사탄의 행위가 되고만 것은 하나님의 뜻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인정적인 즉 육적인 사랑이었기 때문이다.

 

C. 아비 집을 떠나라.

 

윗대로부터 내려오던 전통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 것이면 떠나라는 것이다. 가문의 전통도 민족적 풍습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것에 얽매이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기 어렵고 주님과 동행하기가 어렵다. 

하물며 하나님의 뜻에 어그러지는 전통이겠는가? 조상들에게 제사 드리는 행위가 왜 그릇된 것인지 깊이 생각해 보지도 않고, 단지 오랜 동안의 전통이라는 이유만으로는 정당화 될 수는 없다.  아무리 위대한 전통적 유산이라 하더라도 폐기 할 수 있어야 한다. 

아브라함의 본토는 우상의 고장이었는데(수24장2절) 그는 이 지역을 과감하게 떠났다. 

구약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라!  

여호와를 떠나 다른 신을 받아들이고 경배할 때 하나님은 여지없이 징계하였던 역사가 줄기차게 흐른다.  그것은 영적 간음으로 묘사되었다(렘31장32절). 

자기 남편 아닌 다른 남자와 놀아나는 것 같은 죄악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제일 제이 계명의 핵심은 바로 그런 것을 금하는 것이, 다른 신을 섬겼을 때 삼사대까지 저주받고, 하나님만을 섬기는 자는 수천대까지 복 받는다(출20장3절-6절)고 하셨던 것이다.

 

D.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라는 이 말씀은 문자 적으로 나그네 삶을 살라는 의미이다.

 

부족국가 시절에 자기의 본토나 친척을 떠나 다른 곳으로의 이민은 생명을 내건 모험이었다. 이것이 영적인 의미로는 이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아야 했던 아브라함의 삶이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하늘에 예비한 성을 바라보며 전진하던 세상 나그네였다.

 즉 이 세상은 객지요 타향이었고, 아브라함의 본토는 하늘나라였다(히11장13절-16절). 

이러한 사람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 것이며(빌3장20절) 하나님은 이러한 자의 하나님이라 일컬어지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자랑으로 여기신다(히11장16절). 

그렇다면 이 말은 모든 것을 다 버리라는 뜻인가? 

이미 앞에서도 언급되었듯이 그렇지 않다.  다만 이 땅의 모든 것에 그 마음과 인격을 정착하게 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서 하늘나라 시민으로서의 우리는 이 세상의 그 어떤 것에도 생의 뿌리를 박아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이 세상은 다만 통과하여 지나가는 타향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모든 것을 떠난다는 것은 인간성들에 들어 있는 병을 고치는 것이다. 

이 세상에 그 마음이 완전히 뿌리를 박고 정착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인간성 자체가 병 들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병 들었다는 것은 양심이 병들고, 인격이 병들고, 인간성이나 영혼이 병든 것을 말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육체적인 이 고깃덩어리의 병만 고치려 한다. 

문제는 세상 사람들이야 제쳐놓는다고 하더라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까지도 영이나 인간성에 병든 것에는 관심도 없고, 아니 병 들었는지 조차도 모르고, 육신의 병만 고치려 한다. 

육체의 병을 고치기 위하여 병원에 입원하고 수술도 받는다. 

즉 그것을 고치기 위하여서는 돈을 들여 수술 받는 고통도 감내하여야 한다.

 영이나 양심, 그리고 인격에든 병을 고치기 위해서는 어떤 고생이라도 감내하고 하나님의 수술대 위에 올라가야 한다.  이런 사람이 형통한다. 

이러한 사람은 하고자 마음먹은 것을 하나님이 모두 다 뒷받침하여 성취케 한다. 

이런 사람이라야 하나님과 마음이 같아진 사람이며 자기와 타인의 인간 병을 고치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그 사람의 하는 일 모든 것을 뒷받침하여 주신다. 

그 사람의 일이 곧 하나님 자신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 돈이 필요하면 돈을 주시고, 명예나 권세가 필요하면 명예나 권세를 주실 것이며, 건강이 필요하면 건강을 주시고 무엇이든지 필요하면 필요한 만큼 아니 그 이상이라도 넉넉하고 충만하게 베풀어주실 것이다.

 

Ⅲ.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결국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 나그네로 사는 삶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의미한다. 진정한 의미에서 하늘의 본향을 바라보며 이 세상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 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동행하여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A. 지시할 땅으로 가라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는 것이 신앙생활의 첫출발이다. 

이를 떠나야 하나님이 인도하신다. 즉 함께 동행 해 주신다. 

가야할 땅이 어디인지는 알 수가 없다. 

떠나라는 것은 무엇이든지 떠날 때에 그 다음에 어디로 가야할지 알려 주시겠다는 말씀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다(히11장8절).

인간은 자기 길을 계획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길은 어디까지나 사람의 계획일 뿐이지 하나님은 한 걸음을 전진할 때 그 다음 길을 알려 주신다. 

 때문에 “사람이 자기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여호와시라”(잠16장9절)고 하셨으며 일의 시작은 사람에게 있어도 그 성취는 하나님께 있다 고 하셨다. 

하나님은 한 걸음 한 걸음을 우리와 함께 해 주신다. 

그렇다면 지시할 땅으로 가라는 뜻이 무엇인가?

 

B.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가는 삶 (히11장8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서 명령하실 때에 떠나야 할 것은 무엇인지를 분명히 하였으나, 어디로 가야 할지 목표는 분명하게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다만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 하셨다. 

이는 떠나야 할 것을 떠날 때라야만 어디로 가야 할지를 말씀하시겠다는 의미이다.

 이 같은 삶은 이 세상에 목표가 없다. 나그네이기 때문이다.  노아의 방주도 그러하였다.

 방향을 잡고 있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물에 떠 있으면 된다. 

어디로 가든지 그 다음은 하나님이 인도하신다.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겨 놓으면 모든 일 처리는 하나님이 하실 것이다.

 갈 바가 없다는 말은 정착할 곳이 없다는 뜻이다. 그것은 곧 뿌리내릴 곳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 세상은 거쳐서 지나가는 광야와 같은 곳이다. 그것이 나그네의 길이다. 

권세나 명예, 재물이나 돈, 학문이나 기술, 가문, 민족, 국가 등에 뿌리박고 그러한 것에 삶의 근거를 두고 사는 삶은 다 이 세상에 뿌리박고 사는 이 세상 본토박이이다. 

그러한 자는 하늘나라가 그들의 본향이나 본토가 될 수 없다.

 그렇다면 그러한 것들을 완전히 떠나라는 것인가?  아니다. 

아브라함도 하란에서 떠날 때에 그 소유를 가지고 떠났으며 조카 롯도 함께 떠났으니 본토(물질)나 친척을 떠난 것은 아니다.  버린 것도 아니다.

 자기를 따라 올려는 것은 함께 떠나와도 상관없다. 

 

하나님의 지시대로 가는 길 곧 하나님을 따라가는 사람은 어떤 것이라고 하더라도 거기에 마음과 생의 뿌리를 박지 않을 때에는 그것은 나의 본토가 될 수가 없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에 뿌리를 박을 때에 그런 것이 있다고 하여 목과 어깨에 힘주고 살게 되고 따라서 그렇게 될 때에 그것은 이 세상 본토박이로서의 텃세가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것이 아무리 많이 있어도 텃세하지 않는 자는 하늘나라에 뿌리를 박고 사는 하늘나라 본토박이 이다. 

그의 목표는 저 천국이기 때문에, 이 세상 것은 다 거쳐서 지나가는 것들일 뿐이다. 

혈연이나 혈육은 거기에 전적으로 뿌리박고 의존하고 살 때에, 즉 그 가문적인 것이 많고 높으면 텃세 한다.

모든 원리가 이와 같다. 하나님 따라가는 나를 따라오겠다는 것은 물질이던지 친척이던지 간에 얼마든지 어디든지 함께 가지고 가도 좋다. 

전통도 그러하다.  하나님 따르는 물질과 전통이 되는 것이니까 말이다. 

하나님 따르는 재물이 사망을 이루겠는가? 생명을 이루겠는가? 생명을 이룰 것이다. 

이렇게 될 때 그 재물은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망을 이룬다든지 생명을 이룬다든지 하는 뜻은 결국 무엇을 기준으로 하는 말인가?  그 재물 가진 자가 그 기준이다.  그가 생명에 속한 자면 그 사람에게 속한 물질은 생명을 이룰 것이고 사망에 속한 자면 사망을 이룰 것이다. 

이것은 물질만 아니고 모든 것에 대한 원리이다.

 소질, 취미, 건강, 젊음, 학식, 명예, 권세도 그러하다. 

노래의 소질을 가진 자가 나이트클럽에서 노래 부르면 육적 욕구를 자극하고 충동하므로 그런 방향으로 인간들의 마음을 끌어가는 일을 하니까, 이것은 생명운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망운동을 하는 것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되어져야 한다.

 

C. 여호와의 말씀을 쫓아가는 삶 (창12장4절)

 

하나님이 인도하는 임마누엘의 길이다. 

하나님이 동행하는 길은 하나님의 말씀만을 따라가는 삶이라는 것이다.

 하늘나라가 목표이므로 하나님 말씀만을 따라야 한다. 떠나는 것이 제일 첫 번째 일이다. 

이 첫 번째를 떠나지 않으면 두 번째가 오지 않는다. 떠나야 한다.

 떠나지 않으면 하나님이 인도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다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ㄱ. 성경을 알아야 한다. 

성경을 알지 아니하고는 그 말씀을 따라갈 수는 없겠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많이 읽고 들어야 한다. 가까이 해야 한다.

 

ㄴ. 믿고 순종해야 한다. 

행함으로 온전해 진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기 때문이다(약2장26절)

 

ㄷ. 가감하지 말아야 한다.

 

  ⓵성경에는 빠진 것이 없다(사 34장16절).

 ⓶그러므로 기록한 말씀밖에 넘어가지 말라(고전 4장6절).

 ⓷까닭은 말씀이 너희를 지킬 것이기 때문이다(행 20장32절).

 

Ⅳ. 복의 근원이 된다.

 

 이렇게 떠나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 하나님과 동행하면 복의 근원이 된다.

 

A. 큰 민족을 이루고 이름이 창대해 진다.

 

 ㄱ. 큰 민족을 이룬다.

 

“너를 안 따라 오려 하거든 다 내어 버려두고 오라” 결코 외롭게 되지 않는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너를 따르게 될 것이다. 이는 자식도 없는 아브라함에게 엄청난 축복이었다. 내가 하나님을 따라 간다고 많은 사람이 나를 버리더라도 두려워하지 말라.

 오히려 그들과 어울리기 위해 가까워지면 외로워지고 버림받는다.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지 않기 위해 적당히 어울린다면,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다. 

맛 잃은 소금이 되지 말라. 하나님이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할 것이다.

 

 ㄴ. 이름이 창대해 진다.

 

머리가 될지언정 꼬리가 되지 않는다(신28장1절 이하). 

속된 말로 아브라함은 “촌놈 핫바지” 이었는데 이름이 창대해졌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까지도 널리 알려졌다.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났더니 그렇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선조들이라도 3천년 전의 조상을 우리는 모른다. 

그러나 저 갈대아 우르라는 곳에서 지금부터 3천 수백 년 전에 출생한 그를 우리는 안다.

 얼마나 유명하여졌는가 하는 것은 그 이름을 본 따서 이름을 지은 자가 세계 안에 몇인가! 말이다.   

우리나라에도 제법 있다는 사실이 그것을 입증하지만 그 중에 대표적인 예가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이다.  호랑이는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있다. 

요즘 사람들은 이름을 남기려 하지 않고 돈(재물)만 남기려 한다. 

지옥에 가도 돈만 남기면 되는 것인지?

 

B.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 저주하고 축복하는 자에게 복을 내리겠다.

 

아브라함의 비위를 건드리지 못하게 한 것이다. 그에게 잘 보여야 한다는 말이다.

 65세나 되었던 할머니에게 바로 왕이 반할 정도로 사라 할머니는 아름다운 여자이었다. 

마누라를 빼앗길 뻔한 잘못은 전적으로 아브라함에게 있었는데도 바로를 하나님께서는 책망했다.  아브라함을 해롭게 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그를 해롭게 한다는 것이 이 사실로 드러난 것이다(창12장11절-19절). 

초강대국의 왕인데도 아브라함을 건드릴 수 없었다. 

아브라함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서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생명 길을 걷는 자이기에 그를 대적하거나 해치는 자는 스스로에게 사망과 저주를 자초하는 일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를 거스리는 것은 자기에게 화가 된다.

예수님은 "산 돌"로서 (벧전 2장4절) 건축자들이 버렸으나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된 자이다(행 4장11절).  그런즉 이 돌에 부딪히는 것은 자기만 깨어지는 것이다(마21장44절).

 "말이 가시 채를 뒷발질하는 것은 자기 발만 깨어지는 것이다"(행26장14절).

옳은 길을 축복하는 것은 거기에 박수를 보내는 것이다.

 아브라함을 향하여 저주하면 아브라함이 저주를 받겠는가? 저주받지 않는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으면 그에게 복이 있다"(마5장10절)고 하신 말씀에 따라 보면 아브라함은 저주받아도 자기에게는 복이 된다.

 따라서 참으로 믿으면 아브라함같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될 때에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고, 이래도 저래도 복 받는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을 향하여 저주하는 자는 자신에게 그 저주가 돌아오는 것이다.

 

C.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이미 들어가는 말에서 지적하였듯이 이것은 아브라함의 자손(씨)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전 세계가 복 받을 것을 두고 하신 말씀이다(창22장18절, 갈3장16절 참조). 

아브라함은 그 자손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을 믿었다. 

하나님은 이것을 그의 의로 여겼다(창15장5절-6절). 

이 자손은 직접적으로 이삭에 대한 약속이지만, 영적으로는 예수그리스도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다. 이 믿음의 조상이라는 사실이 유대인들의 혈통적 조상이라는 의미를 넘어서서 이방인과 유대인을 망라하여, 모든 믿는 자의 조상이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아브라함이 걸었던 믿음의 자취를 따르는 자는 아브라함이 받았던 복을 받게 된다(롬 4장12절).  이와 같이 예수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한 복이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는다는 사실로서 아브라함은 실로 복의 근원이다.

 

Ⅴ. 나오는 말

 

 하나님께서 “떠나라” 하는 것을 떠난다는 것은 이 세상에는 정착지가 없는 나그네가 된다는 것이고 그럴 때에 하나님이 걸음마다 동행하여 주시는 사람이 되고 또한 그럴 때에 복의 근원이 된다.  나와 당신은 어떻게 살고 있는가?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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