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 원종호 | 2022-12-2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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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성경본문 요한복음3장14절-15절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장14절-15절)는 주님의 말씀은 하나님을 원망한 범죄 때문에 뱀에게 물려 죽게 되었을 때에, 그들 이스라엘 백성이 범죄 하였음을 자백하고, 뱀을 그들에게서 떠나게 해 달라는 호소에 따라 그 백성들을 위하여 부르짖었던 모세에게 응답하신 하나님의 처방은, 높은 장대에 놋으로 뱀을 만들어 달아 놓고 그것을 바라보는 자는 뱀에게 물렸어도 죽지 않고 오히려 뱀독이 해독이 되었던 역사적 사건을(민21장4절-9절)두고 하신 말씀이다.
그런데 이 말씀에서 주님은 그 사건을 특히 높은 장대 위에 놋으로 만들어진 뱀이 달린 사건을 자신이 십자가에 달릴 사건과 연결시켜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당하였던 그 사건이 자신이 당할 십자가 구속의 예표이었음을 증거 하시는 것이었다. 그러하다. 둘째 아담으로서의 예수그리스도의 구속 사건은 첫째 아담의 범죄와 타락을 회복하는 것이라면, 뱀에게 물려서 죽을 수밖에 없었던 광야의 사건은 뱀(마귀)의 미혹에 걸려들어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타락되었던, 인류의 타락 사건과도 확실히 연결된다고 하겠다(고전15장45절-49절,롬5장14절 참조) . 일반적으로 우리는 속아서 어떤 일에 잘못 걸려들었을 때 “물렸다”고 한다. 특히 빌려 주고 싶지 않은 돈을 거짓말에 속아서 빌려주고 받기가 어려워졌을 때, 일반적으로 “더럽게 물렸다”고 말한다. 이와 같이 뱀의 거짓말에 속아서 선악과를 따먹게 되었던 하와와 아담의 범죄는 뱀에게 물린 사건임이 틀림없다. 이때로부터 인간은 뱀독이 오르기 시작했고, 그 삶이 뱀의 독성에 의해 지배를 받게 되었다. 그 심사는 물론이고 그 말과 행동에도 뱀의 독성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 같은 사실은 뱀 즉, 마귀가 세상 임금(요12장31절,16장11절)이기에 그 아래에 속하여 그 영향을 절대적으로 받고 살아야 했을 인간이라는 의미에서도 더욱 확실하여진다.
그런데 이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결정적으로 세상 임금인 마귀의 권세를 깨뜨리신다. 그는 진짜 뱀 아닌 놋뱀이 장대에 달리듯이, 진짜 죄인 아닌 죄인으로서 십자가에 달리셨다. 따라서 실제로 죽는 것은 죄와 사망이며 진짜 깨뜨려지는 것은 마귀 곧 뱀 자신이었다. 마귀는 예수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 자기가 이기는 줄 알았으나, 실제로 못 박히는 것은 뱀의 머리였다(창3장15절). 예수께서 부활하심으로써 이는 더욱 확증되었고 죄와 사망과 마귀는 자기의 처소인 무덤에 영원히 매장(갇히게) 되게 된 것이다.
왜냐하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죄와 사망과 마귀를 이기고, 이 땅에 확실하게 임하였기 때문이었다. 또한 이 같은 사실을 하나님께서는 일찌기 “여자의 후손”(동정녀 탄생의 예수)이 "네 머리 곧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실 것이다"(창3장15절)라고 하심으로서 벌써 거기서 그리스도가 세상 임금 마귀를 이기실 것을 예시하여 주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뱀에게 물렸으나, 장대에 달린 놋뱀을 바라보면 뱀독이 더 이상 오르지 않을 뿐 아니라 도리어 이미 올랐던 뱀의 독마져 해독이 되었던 것처럼, 그 뱀의 세력을 결정적으로 파괴시킨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자 곧, 믿는 자는 뱀독이 해독되게 한다. 지성에서도, 감성에서도, 의지에서도, 덕성이나 또 다른 인격 기관에서도 그리고 삶과 삶의 현장에서도 뱀의 독성은 빠지게 된다.
그러나 이는 한 순간에 모두가 완전히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다. 거듭난 이후 영적 성장에 따라 점차적으로 되어지는 일이다. 오늘 우리가 설교 본문으로 삼은 주님께서 하신 이 말씀(요3장14절-15절)이 “거듭남”에 관한 니고데모와의 대화의 결론적 말씀(요3장3절-13절)이라는 사실이 이 같은 의미를 더욱 확실하게 하여준다.
어쨌든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는 그리스도의 피가 그 몸 전체에 흘러야 명실상부한 그리스도의 몸일 것이다. 몸에는 그 어떠한 부분이든지 피가 흐르지 않으면 거기에는 생명이 죽어가기 때문이다. 그러하여야 그리스도의 생명이 충만한 교회 즉, 몸의 여하한 구석이나 부위에든지 그리스도의 피가 가지 않거나 흐르지 않으면, 거기는 썩기 시작하며 부패하여 사망에 이르게 된다. 그리스도의 피가 흐르는 곳에라야 그리스도의 생명력이 나타나며, 그리스도의 생명력이 나타나는 곳에서라야 그리스도의 능력도, 그리스도의 의도, 그리스도의 사랑도, 그리스도의 겸손도, 나타나는 등 그리스도의 정신이 강하게 움직일 것이며 그리스도의 생리와 체질적 삶이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날 이 지상의 교회들은 그리스도의 피가 메말랐다. 인간들의 현실적 필요에 의하여, 강단을 비롯하여 교회의 모든 경영이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이적이나 기복을 갈망하며 그래도 건전하다는 교회들이 사회 정의나 도덕적 삶을 추구하는 정도에 머물러 있다고 한다면 필자 혼자만의 판단이나 느낌일련지? 거기에 그리스도의 피는 거의 없다. 어쩌면 한국교회에는 그리스도의 피보다 석가의 피나 공자의 피가 더 흐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니 아직도 그 뱀의 피가 더 많이 작용하는 교회도, 성도도, 성직자도, 신학도 적지 않은 것이 아닌가 싶다. 그리스도의 피가 그 혈관에 흐르지 않는 사람은 이교도들은 물론이고 무신론자들도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의 밖에는 이적은 없는가? 현세적 축복은 없는가? 정서적 안정이나 심리적 치료는 없는가? 있다. 세계 평화나 사회정의나 의미있는 봉사도 있다. 그리스도의 피 없는 그 모든 것은 성경도 복음도 기독교도 아니다. 신약교회 곧 초대교회는 그리스도의 피가 뛰는 교회이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그 몸의 심장에 그리스도의 피가 맥박치고 있는지? 물어야 할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이여! 나와 당신의 가슴에는 십자가가 서 있으며 나와 당신의 혈관에 정녕 그리스도의 피가 흐르고 있으며 나와 당신의 염통과 심장에 지금도 그리스도의 피가 뛰고 있는가? 깊이 묵상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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