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복음 | 원종호 | 2022-11-3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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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 복음
성경본문 행20장24절
Ⅰ. 들어가는 말 바울 사도는 복음을 은혜의 복음이라 한다. 그렇다 율법은 은혜가 아니라 복음이 은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은혜의 복음은 그리스도교의 특징이며 특권이다. 아니 유일한 구원의 길이다. 자기들의 의로운 삶을 통해 구원 받는다는 타 종교에 비해,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로 받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복음의 의미가 무엇인가? 오늘은 잘못되었다고 판단되는 복음의 방향에 대하여 생각하고자 한다.
Ⅱ. 은혜로의 구원
행함으로는 구원 받을 수가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한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을 받는다. 이것이 복음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리스도의 대속의 효능을 우리가 입어 구원을 받는가? 여러 가지 서정(序程)을 말할 수 있겠으나, 여기서는 믿고 세례 받고 성령 받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특히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하는 것이기에, 십자가의 대속의 효능이 구체적으로 전가되는 길이다(롬6장3절-4절,골2장12절). 따라서 세례가 죄 사함인 것이다. 그러한 자에게 성령이 구원의 보증으로(고후1장22절, 엡1장13절) 그 안에 임재하시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다. 우리는 여기까지가 칭의라고 믿고, 구원은 이미 이루어졌다고 믿는다. 이와 같이 듣고, 믿어, 세례 받고, 성령 받은 자는 하나님의 자녀이다. 즉 거듭난 영적 유아인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기에 하나님 나라 생명책에 그 이름이 등재된다. 곧 하나님의 호적에 아들, 딸로 녹명되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 상속권이 확보된다. 구원이 확정된 것이다.
Ⅲ. 성령과 말씀으로서의 성숙
하나님의 자녀로 출생한 영적 유아는 성장해야 한다. 이것이 성화이다. 어떤 이들은 이 성장의 과정까지를 구원에 포함시키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다. 물론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셔서 이 세계를 심판하실 때까지는, 그 누구의 구원도 미완성이라고 할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믿어 세례를 받고 성화되어 가야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세계에 살아가는 과정이다. 따라서 이 삶의 과정이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어 가는(갈4장19절, 롬8장29절) 성장의 과정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기에(히1장3절) 그의 형상을 이루어 가는 이것이, 곧 아담의 범죄로 붕괴 되었거나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라가야 한다(엡4장15절). 곧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엡4장13절) 말이다.
Ⅳ. 은혜와 복음의 범주
그렇다면 복음과 은혜는 어디까지인가? 성경에는 원리적으로 율법은 없다. 그러나 율법은 있다. 그 율법의 목적은 인간들이 그것을 지켜서, 죄에서 완전히 해방시키려는 데 있지 않고 오히려 죄를 깨닫게 하려는데 있다(롬3장20절, 5장20절). 그렇게 하여 죄인을 부르러 오신 그리스도 앞으로 오게 하려는 것이(갈3장24절) 그 궁극적 목적인 것이다. 그렇다면 복음은 칭의 곧 거듭남까지인가? 왜냐하면 성화는 행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롬3장31절)고 증거 한다.
그렇다면 믿음은 결국 율법으로 되돌아간다는 말인가? 그렇지는 않다. 때문에 구원은 거듭남으로서 완전히 이루어지는 것이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것이지 행함으로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행함으로 성취되는 성화가 구원의 범주에 포함된다면, 행함으로의 구원인 율법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되고 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성화는 구원받은 자로서의 삶의 과정인 것이다.
그러나 그 삶의 과정이 율법을 지켜 가는 길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제기되는 의문은 본래 율법을 지킬 수가 없기에, 은혜로 구원받는 것인데 지킬 수 없었던 율법을 지켜가는 것이 영적 성장의 길이라 하니 가능한 일인가? 라는 것이다.
이에 대한 정답은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는 순수 타락한 인간자력으로 율법을 지키려는 것이고,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자력만이 아니라, 다시 살아난 영과 함께, 성령의 주체적 사역에 의해서 되어지기 때문에, 성화 곧 그리스도의 형상을 온전히 이루어 가는 일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 과정에 있고, 그 성숙의 정도에 있어서 개인차가 있는 것이다. 또 여기에서 제기되어야 할 질문은, 이미 구원받은 자로서 지켜가는 율법의 과정이기 때문에 이것은 복음과 은혜의 범주 밖에 있는 것인가 라는 것이다. 물론 아니다. 전술된 바와 같이 지킬 수 없었던 그 율법을 지킬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 그것도 다시 살아난 영권과 함께 받은 성령에 의하여 되어진다는 사실이 그것을 입증한다.
왜? 우리는 이런 논의를 해야 하는가? 오늘날 교계의 전체적 흐름이 행함을 설교하는 것은 율법이고, 복음이 아니라는 관점에서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은 사죄나 용서와 사랑 같은 주제들만이 복음인 것처럼 되어져 가기 때문이다. 따라서 책망 같은 것은 하지 않아야 하고, 위로와 격려와 소망만을 설교해야 한다는 풍조가 이미 만연 되었다.
다시 말한다. 과연 그러한 것만 복음이고 은혜이겠는가? 성경은 결코 그렇지 않음을 확증한다. "모든 성경은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딤후3장16절)는 말씀에서 “책망”이라는 말을 빼어 먹지 말아야 한다. 모든 성경은 “책망”이 그 목적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또한 그리스도 자신이 가시고야, "보내실 보혜사 성령께서 오셔서 할 일을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리라"(요16장8절)고 하셨다. 곧 성령의 사역은 세상을 책망하시는 일이라는 것이니, 이 같은 성경의 목적이나, 성령의 사역을 복음과 은혜의 범주 밖의 것이라고 누가 감히 생각이나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그를 믿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함이라"(빌1장29절)고 함으로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고난도 은혜이고, 그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삶에 포함된 필연임을 의미한다. 까닭은 "자녀이면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이니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지니라"(롬8장17절)고 말씀하기 때문이다. 또한 바울 사도는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 하면서 그 자신에게 주신 그리스도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그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를 하였어도 그 모든 것은 자신과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고전15장10절)라고 간증한다.
우리가 잘 아는 바대로 다른 모든 사도들보다 바울 사도는 엄청난 고난을 겪으며 복음을 위해 수고한 것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이며, 자기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헛되지 않은 까닭이라는 것이다. 그 뿐 아니다. 마게도냐 교회에 하나님이 주신 은혜는 그들이 환난의 시련 가운데서도 기쁨이 넘쳤다는 사실과, 극한 가난 속에서도 풍성한 연보를 넘치게 하였는데 그것도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하였다(고후8장1절-4절)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고난도 더 많은 수고와 봉사도, 극한 가난 속에서도 힘에 지나도록 한 연보도 하나님이 주신 은혜다. 따라서 복음이다.
Ⅴ. 나오는 말
마땅히 교회의 강단은 위로와 격려도 하여야 하고, 소망과 꿈의 메시지도 선포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것만이 은혜이고 복음일 수도 없고, 따라서 그러한 메시지만 선포된다면 이는 이미 진정한 의미에서 교회가 아니다. 불신자들에게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복음이 선포되어야 한다.
그러나 교회는 이미 그리스도인들인 지체들로 구성된 그리스도의 몸이다. 그들은 성화의 과정에 있기 때문에 여기에는 행함이 더 강조되어야 한다. 책망도 성경이고 복음이다. 성령의 역사다. 고난도, 충성도, 봉사도 넘치는 연보도 은혜이다. 현세에서의 복이나 삶에서의 유익을 비 복음적이라고 배타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것이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의 목적일 수는 없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의 목적은 땅이 아니라 하늘이다. 세상이나 육은 하늘과 하나님 나라와 영의 수단이어야 옳다. 땅의 것이나 세상 것 그리고 육적인 것 때문에, 영적인 것이나 하늘의 것이 잠식당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니다. 현실은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그 현실은 우리의 수단이지 목적이 될 수는 없다. 위로와 격려만 복음이라고 생각하여 책망 같은 것은 배제된 강단은 복음 선포의 강단이 아니다. 성경을 가감하는(창3장4절 이하) 사탄의 속임수에 걸려든 인간 타락의 진상이다. 깨닫고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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