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의 노래 | 원종호 | 2022-11-1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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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의 노래
성경본문 출15장1절-13절
Ⅰ. 들어가는 말
본문의 말씀은 이 세상에서 살지만 세상에 속한 삶이 아니라, 하나님나라로 향하여 전진하는 성도들의 삶을 상징하는 출애굽의 절정!! 홍해를 육지로 건넌 기쁨과 감격에 벅찬 감사의 노래이다. 더욱이나 이 노래는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을 향한 찬양으로는 처음의 노래이다. 이 노래의 장엄함은 말로 다 할수 없을 것이다. 장정만 60만이니, 출애굽한 사람은 모두 추산하여 200만도 넘게 될 그 많은 사람들이 함께 홍해 바닷가에서, 그것도 힘차게 불렀을 그 찬송을 상상해 보면 실로 장관이었을 것이다.
단순히 뒤따라오던 애굽 군대 모두가 물에 휩싸여 몰사하고 자기들이 이기었다는 승리의 감격만이 아니었다. 그 고통스럽던 애굽의 노예 생활에서 완전히 벗어났다는 사실과 하나님께 마음 놓고 제사 곧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열조 때부터 약속 받았던 가나안으로 행군 할 수 있다는 사실 등, 때문에 이 세상 종말까지 아니 천국에 가서까지도 영원히 불러야 할 구원의 노래인 것이다. 그러면 언제 이 노래를 불렀는가?
Ⅱ. 본문 1절 “이 때에 모세와 이스라엘이 이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니” 라고 하였으니 “이때” 는 이스라엘이 애굽의 손에서 완전히 해방 되어 구원 받은 때이었다.
물론 양의 피를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지나던 그 밤이 새자, 당당한 모습으로 애굽을 출발하던 때도 물론 감사의 노래를 부를 수 있었을 것이고, 첫날 밤 진 쳤던 숙곳에서도 감사의 찬양을 부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그러한 때나 그러한 곳에서 그들이 감사의 노래를 불렀다는 기록이 없다. 오히려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울 것이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 지니라”(출14장14절)고 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뒤따라올 애굽 군대도 없고, 그들과 애굽 사이에는 홍해라는 망망한 대해가 가로 놓여 있었기에, 다시 애굽의 노예가 될 일은 전혀 없었기에, 침묵을 지켜야 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애굽에서의 삶이란 두려움과 억울함과 한숨의 삶이었지만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마음껏 찬양할 수 있었으며 아니 감사의 노래를 불러야 했다. 맺혀있던 모든 한이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터져 나오는 통곡의 찬양이었던 것이다. 우리의 영적 생활도 마찬가지이다. 죄와 사탄과 죽음의 노예로 살 때에 찬양이 있을 수가 없다. 허무를 노래할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감사의 노래는 있을 수가 없다.
그러나 애굽과 완전 분리 되는 홍해 이후에는 감사 찬송을 하게 된다. 홍해 도하는 세례를 상징한다(고전10장2절). 완전히 거듭남의 단계인 세례를 받고 난 다음에는 구원의 찬송, 곧 감사의 노래가 터져야 한다. 애굽의 치하에서 헤매이던 때가 아니라 이때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행군의 때이기 때문에, 감사와 감격의 노래를 불러야 한다. 이때는 하나님이 승리한 때이다. 의가 이긴 때이다.
그러나 그것은 정치력이나 외교력이나 핵의 힘으로 이긴 것이 아니다. 믿음의 노래, 순종의 노래이다. 그러므로 이 노래는 영원한 노래가 되어야 한다. 구원은 영원한 것이기 때문이다. 개인 날만 찬양하고, 궂은 날은 감사치 않는 것은 영원한 감사가 아니며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아니다. 구원 받았다는 것이 이 땅의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귀하고 큰 것이라는 것을 확신한다면, 이 땅위에서의 여건이 좋지 못하다고 해서 감사를 잊거나 그럴 수는 없는 것이다. 가나안 행군 길이 아무리 어렵다 하더라도 애굽의 노예살이로 돌아갈 수는 없는 것이라면 출애굽한 감사가 현실적 어려움을 압도하기 마련인데, 이스라엘 백성은 그렇지 못했다.
실컷 매 맞고 감옥에 갇혀서도 찬송할 수 있었던(행16장25절) 바울과 실라의 빌립보 감옥에서의 찬송은 감사의 찬양이었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인의 참된 감사는 고통 속에서도 하는 것이다. 그럴 때에 빌립보 감옥에 기적이 일어났듯이(행16장26절) 더 큰 축복이 있을 것이다. 어떤 이는 “주위에 있는 모든 것들이 나를 슬프게 하더라도 내가 살아 있는 동안 주를 찬양하리니 나는 구원의 샘에서 즐거움으로 물을 길으리로다.” 고 말하였다. 시편 기자는 말한다.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에 빠지든지 바닷물이 흉용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쳐서 산이 요동할지라도 두려워 아니하고 찬송하리로다”(시46편2절-11절)
Ⅲ. 그러면 어떻게 이 노래를 불렀는가?
매우 열심히 불렀다. 본문 중에는 전혀 침울한 빛은 없다.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가슴이 터지도록 불렀다. 애굽의 노예 생활 400여 년간의 한이 폭발하며, 아니 그 한이 감격으로 승화되어 부르는 찬송이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시며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하며 나의 아비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시리로다” 여기 “나는” 혹은 “내가” 라는 말이 계속된다. 이는 자기의 신앙 표현이다. 즉 다른 사람은 어떻든지 “나” 는 하나님께 감사의 찬양을 드리며 영원히 드릴 것이라는 의미이다. 하나님을 절대 신뢰하는 신앙에 참 감사의 고백이다.
여호와는 나의 힘, 나의 노래, 나의 구원이다. 영국의 유명한 성가 지휘자 렉궐 경은 해마다 성탄 때가 되면 헨델의 메시야를 연주하였는데 한번은 그 연주를 위한 총 연습 중, 많은 사람들이 입장료 없는 거기에 참석하였는데 할렐루야 대목 다음 부분 “나의 구주는 살아 계시다” 는 대목을, 한 단원이 아리아로 부르는데 너무 잘 불러서 감탄 중인데 렉궐 경이 지휘를 딱 멈추고는 그에게 "너 주님이 살아 계심을 믿는가?" 라고 물었다고 한다. 얼떨결에 대답한 그가 노래를 다시 시작했을 때 음정이나 박자나 음색이나 그런데 신경 쓰지 않고 주님 살아 계심을 고백하는데, 마음을 집중시켜서 노래를 불렀다. 앞에서 보다 더 감동이 된 청중들이 눈물을 쭉쭉 흘리면서 노래를 들었다고 한다.
Ⅳ. 또한 그러면 누구를 노래하였는가?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이 노래에는 바로의 교만도, 모세의 업적도, 미리암이나 아론을 노래하는 내용은 전혀 없다. 사람을 노래하지 않는다. 오직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구원이 하나님께로부터 왔기 때문이다. 초자연적 능력으로 하나님이 홍해를 가르셨다. 애굽 추격 군대를 모두 몰사 시켰다. 우리는 평생토록 아니 영원히 감사의 찬양을 하나님께 올려드리자. 찬송하는 곳에 이적이 일어난다. 하나님이 함께 하여 주신다.
Ⅴ. 나오는 말
전적인 은혜로 구원을 받은 기독자의 삶은 시종일관 감사 이외에 다른 것은 있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범사에 감사하시는 나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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