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의 흉년 | 원종호 | 2022-09-3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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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흉년 성경본문 아모스 8장 11절-13절
Ⅰ. 들어가는 말
또 한 번 가을을 맞는다. 결실의 계절이기에 얼마나 결실 있는 삶을 살았는지를 생각하는 것은 비단 그리스도인만의 마음은 아닐 것이다. 가을이라는 자연 법칙이 하나님의 창조 질서라는 시각에서 생각한다면 거기에는 보다 깊은 영적 의미가 들어 있다는 것이다. 역시 그리스도인에게는 거의 상식에 속하는 일이다. 이 가을에 왜 그렇게 말씀의 흉년이라는 생각이 마음을 떠나지 않는 것일까? 오늘 우리 시대가 말씀의 흉년이라는 사실은 비단 나만이 아니고 이미 제법 많은 기독인들이 느껴 오던 바이다. 강단 메시지가 될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생각이 흐르는 대로 따라가려고 한다.
Ⅱ. 말씀의 흉년
말씀이 흉년들은 지 이미 오래 되었다고 하면 거세게 반론을 펼 자들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CBS와 CTS 두 곳의 기독교 T.V 방송과 기독교 라디오 방송이나 극동 방송의 각 지역국과 각 교회의 강단의 설교와 성경 공부와 각종 세미나와 수련회, 연합 대 집회와 유튜브, 인터넷을 통한 무제한적으로 들을 수 있는 설교와 쏟아져 나오는 설교집과 C.D등 말씀에 관한 출판물 등 실로 말씀은 풍년(?)이 계속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말씀의 흉년이라면 이것은 역시 역설일까? 성경 말씀이 영의 양식이라는 것을 부인할 그리스도인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렇게 쏟아지는 말씀이 과연 이 나라 백성, 아니 한국에 있어서의 기독인들에게 얼마나 그 영혼을 배불리고 있는지 의문이기 때문이다. 그 범람하는 말씀들이 전혀 영적으로 아무 구실도 못한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또한 적지 않은 말씀들은 대단히 영적이라는 사실도 부인치는 않는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한국교회 강단은 이미 영적인 측면보다는, 육적인 축복이나 실존적인 안정과 현세적인 영광 같은 것에 초점이 있지 않는가 생각한다. 십자가 없는 기독교가 되어 가고 있다. 물론 여기에 인간을 영과 육으로 구분하지 않고, 전인적으로 보아야 된다든지 또는 구분하는 경우에도 과연 영적이라는 것이 무엇이며 육적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논란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쟁점은 접어 두고라도 이 나라의 현존하는 교회나 교인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천국이라는 찬송가의 가사와 같이 영적 배부름에 만족하며 사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하는 말이다. 오히려 그러한 것보다는 이미 지적한바 대로 이 세상에서의 번영과 출세 등을 더 갈망하는, 아니 이미 그러한 방향으로 푹 빠져 있는 실정이 아닌가 싶다. 누가 이렇게 하였는가?
오늘 우리의 성경 본문은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찌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8장11절)고 하신다.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그런 기근을 보냈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다만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롬1장28절) 하신 것처럼 세상의 흐름을 그대로 내어버려 두셨다는 의미로 이해한다. 그 기근은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고 마실 물이 없어 갈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근 곧 이것이 말씀의 흉년이다.
Ⅲ. 영적 갈증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근(갈증)이라 하였는데 오늘 이 시대 인들에게 이러한 갈증이 있는 것일까? 지식, 명예, 권세, 재물, 쾌락 등의 갈증은 극심하게 느끼면서도 과연 영적인 갈증이 있는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다(마5장6절)면서도 의에 얼마나 갈증을 느끼는가?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히12장4절) 하였는데, 우리는 우리 자신 밖의 죄와는 싸우면서도, 자신 안의 죄와는 싸우지 않는 오히려 그것을 커버(cover)하는 것은 아닌가? 아니 오히려 죄를 즐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현실을 무시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이 제기 된다. 무시할 수 없다. 기독교의 복음은 현실에서 성취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의미는 기독교 신앙이 현실에 동화된다든지 현실에 의해 좌우되는, 현상에 먹히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그 현실을 지배하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제기되는 물음이 육신을 무시할 수 있는가? 물론 없다. 육신이 없으면 이미 인간이 아니다. 때문에 영적인 것도 육적인 것도 필요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양자는 나란히 서는 것이 아니다. 전인 개념은 인간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영과 육에 각각 50%씩 나의 관심과 노력을 기울인다든지 아니면 영이 보다 더 중요하니까 영에다 보다 더 마음을 기울인다든지 하는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완전한 영적 삶도 육적 삶도 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영이 육을 다스리는 그러한 삶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은 인간은 영은 죽고, 육이 주체가 되어 인간을 다스리고 있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이 육 주도적 인간에서 영 주체적 인간으로 변화되는 것이 거듭남이며 인간의 구원인 것이다. 따라서 성화란 육적 소욕은 점차 죽어 가고 영적 소욕이 강화되고 확대되는 것인데 오늘날 일반적인 현상은 기독교인들마저도 육적 소욕대로 살고 그것의 성취를 성공과 행복이라고, 아니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근본적 목적인 것처럼 흐르고 있다.
당연히 죽어 없어져야 할 옛사람을 더 키워 가는 것이 이 시대의 교회라면 누가 단죄할 것인가?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미련한 것”(고전3장19절)이다. “아무도 자기를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미련한 자가 되어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고전3장18절).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1장21절).
Ⅳ. 갈하여 피곤한 젊은이들
그 날에 곧 말씀의 흉년 때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하며 피곤하리라고 성경은 선포한다. 왜 그런가?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에서 동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빨리 왕래하지만 얻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 날이 언제인가? 오늘 이 시대라고 생각한다. 세상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없다. 정의로운 말씀이 있고, 거기에도 도덕적인 말씀이 있다. 또는 이기적인 것을 버리고 이타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말씀 등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거기에 영적인 것은 없고 도덕적 차원만의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 따라서 영의 양식이 아니다. 그러한 것은 영을 살릴 수도 없고 영을 잘 되게 할 수도 없다. 거기에는 성령의 영감적 역사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교회의 강단에서도 오늘날 공자나 석가의 도덕적 교훈들은 성경의 말씀과 동일한 것처럼 선포되어지는 일이 적지 않다.
만약 성경의 말씀을 선포한다 하더라도 거기에는 성령의 영감적 역사를 배제해 버리면 그것은 단순히 이성적 교훈이거나 윤리적 메시지에 머물게 된다. 오늘의 젊은 남녀가 쾌락주의로 흘러가는 것은 그들에게 영적 공허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영적 충족이 되어야, 현실과 자신의 육적 상황이 어떻게 되든지 간에 그들의 심령에 참 배부름이 있을 것인데, 그것이 영적 공허라는 사실을 모르니까 육적 쾌락 같은 것을 추구하면서도, 허전함과 고독이 메워 질 줄로 생각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할수록 그 심령의 허무와 고독은 더 깊어 간다. 마치 배탈 난 사람이 찬물이 더욱 마시고 싶어서 마시면 마실수록 배탈이 심화되는 것과 같다. 병든 몸이 해로운 것에 더 갈증을 느끼듯이, 병든 영혼도 자신에게 해로운 것에 더 갈하게 된다. 한 사람의 영은 천하보다 더 크기 때문에, 이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충족될 수 없다. 오직 영의 양식인 말씀에 의해서 곧 영적 말씀에 의해서만 된다. 현실과 육적인 것도 분명히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의 목적은 이 세상의 축복은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순교자들이나 엘리야나 엘리사, 예레미야, 모세, 베드로, 바울 같은 신앙의 영웅들은 다 바른 신앙에 서 있지 못한 사람들이 되고 만다. 이 세상의 축복은 영혼이 잘 됨만큼 덤으로 오는 것(요삼1장2절)이라는 것이 성경의 확증이다. 설교자로서 우리의 메세지는 영적인가? 윤리나 도덕이 아니면 이성적인 교훈이거나 더 아니면 기복 정신이나 고취시키는데 초점이 있는 것은 아닐까?
Ⅴ. 나오는 말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요일2장15절) 또한 “이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 하느뇨”(약4장4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니라”(고전15장58절)는 말씀들을 언제나 어디서나 무슨 일에서나 마음에 새기는 나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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