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분설과 관련한 인성구조 | 원종호 | 2022-08-2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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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분설과 관련한 인성구조
a. 인간의 영과 하나님의 영이 원어상으로 같은 낱말이라는 것을 근거로 그 두가지는 같은 것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렇지않다. 인간의 영이 영이신 하나님으로부터(요4장24절) 온 것은 틀림 없지만 하나님과도 같은 하나님이시기도 하신, 영이신 성령님과도 같은 것일수는 없다. 그렇기에 바울사도는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 하시나니"(롬8장16절)고 함으로서 인간의 영은 성령과 같은 것은 결코 아님을 확증한다. 동질적인 것임은 틀림 없겠지만 동일한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전능자의 기운"(욥33장4절)인 것이다. 그렇다고 실체가 없는 단순한 기운은 아니고, 영적 실체가 있는 성부 하나님과도 동일한 존재 인 것이다.
인간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인간답게 살아도 살수가 있는 법이다. 가장 확실한 인간은 성경이 말하는 인간이다. 창조주 하나님이 인간을 다 자기의 형상대로(창1장26절-27절) 창조 하셨는데 창세기 2장7절에서는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 고 한다. 흙은 육체이고 생기는 영이고 생령은 혼이다. 여기서 "혼"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말 성경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창2장7절)고 하였는데 이 말씀에서 생령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네페쉬"라는 말인데 히브리어 구약 성경을 최초로 번역한 헬라어 성경 70인 역에서는 "푸수케"라고 하였다. 그런데 헬라어로 되어 있는 신약성경 데살로니가전서 5장23절에서는 주님이 재림 하실 때까지 "우리들의 온 영과 혼과 몸이 흠 없이 보전 되기를 원한다"고 하였는데 거기서 "혼"이라는 말이 네페쉬 이기 때문에 창세기 2장7절의 네페쉬를 푸수케 곧 혼이라고 하게 되는 것이다.
혼에는 지성과 감성과 의지의 기능이 있다고 한다. 창세기1장26절에서부터 28절에서는 하나님이 자기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 하셨다고 되어 있는데, 창세기 2장7절에서는 하나님께서 흙으로 인간을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고 하니까 하나님이 인간을 두 번씩이나 창조하신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가질수도 있지만, 결코 그렇지는 않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다는 사실을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한 것이라고 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형상이라고만 하면 그것이 사람이라는 의미가 불분명하여 지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자들도 그러할 수도 있겠지만 성경을 처음 대하는 자들에게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 되었다는 것이 이해 되기가 무척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졌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말씀하신 것이 창세기 2장7절인 것이다. 그러니까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다"는 것은 물론 육체를 말하는 것이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셨다"는 것은 영을 넣어 주셨다는 것이다. 여기서 짚고가야 하는 한가지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불어 넣어 주셨다는 "생기"는 이 땅위에 있는 그 어떤 재료를 가지고 만드신 것이 아니고, 하나님 자체속에서 나온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영이신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영혼이라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영과 육체로 창조 되었는데, 생기로 말미암아 "생령" 곧 혼이 있게도 되었는데, 그 혼에는 지성과 감정과 의지의 기능이 있게 하셨다는 말이다. 앞으로 계속적으로 말하여질 것이긴 하지만, 혼은 영에 소속이 될수도 있고 육체에 소속이 될수도 있기 때문에 인간이 영적 인간이 되는가 아니면 육적 인간이 되는가에 따라서 그렇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자기의 자유의지를 가지고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말미암아 영은 죽게 되고 육체가 그 주체가 됨으로서, 인간의 혼 곧 지성과 감성과 의지는 육체에게 속하게 되었던 것이다. 육체도 영도 의식이 있다고 하여야 하는 것은 육신도 영도 생각이 있다(롬8장6절-8절)고 하기때문이다. 그러나 지성과 감성과 의지는 어디에 속하는가를 물어야 한다. 지성과 감성과 의지는 독자적인 기관들이 아니기에 어디엔가에 의하여 다스림을 받는 기관들이다. 영과 육이 합하여져서 발생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인간이라고 할수도 있다. 그것이 인격기관들이기 때문이다. 즉 어떠한 인간인가를 그 인격기관이 밖으로 노출되게 하고 나타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ㄱ, 혼 안에서 영과 몸이 합병되었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영과 육의 합병으로 혼이 발생 한 것이기에 혼은 영에 속할수도 있고 육에 속할 수도 있다고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창조 하신 인간은 그 자체로는 불완전한 사람이라는 주장이 가능할 수도 있다. 즉 영적인 사람인지 육적인 사람인지가 아직 분명하게 결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 하여야 한다. 어찌하여 인간은 영적 인간 곧 영주체적 인간이 아니면 육적 인간 곧 육주체적 존재가 되도록 하셨는가를 물어야 한다.
먼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 하셨다는 의미의 한가지는 인간을 자유의지가 있는 인격적 존재로 창조 하셨다는 것인데 그 인격적 자유의지로 선과 악을 판단 분별하여 자기의 삶을 결정 할수 있어야 하였던 존재이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 자유의지로 선과 악을 결단 하면서 살아가야 할 법이 반드시 있어야 하였는데, 그것이 곧 선악과 이었다. 만약 자유의지만 주시고 거기에 따르는 법이 없다면 그 자유의지는 방종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악과 라는 법은 인간을 창조함과 동시에 주신 하나님의 법이었던 것이다. 다시 한번 더 설명 한다면 자유의지적 존재에게는 그 자유의지를 남용하지 않고, 정당하게 사용 하여야 할 법이 필연적으로 주어져야 한다. 하나님도 인간을 인격적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로 창조 하셨기에 그 자유의지를 올바르게 사용 하여야 할 법을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선악과라는 것이다.
다음으로 어찌하여 선악과가 선과 악을 분별 판단하는 기준과 근거가 된다는 말인가? 우리가 일반적으로 선과 악을 판단하는 근거로는 도덕적 성품을 말하는데, 그것도 인간의 본성 속에 창조주가 주신 본질이니까 바로 그 도덕적 본성이 모든 선과 악을 판단하는 근거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비 기독인들일 뿐 아니라, 기독교 신자들과 신학자들까지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필자는 그러한 입장을 부정한다. 왜냐하면 만약 도덕적 본질과 본성이 인간에게 주신 선과 악을 판단하는 총체적 근거라고 한다면 어찌하여 하나님은 선악과라는 법을 그 기준과 근거로 주셨겠는가에 대한 해답을 찾을 길이 없기 때문이다. 즉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것은 그 어떤 도덕적 명령도 아니기 때문이다. 무슨 나무의 열매를 따먹고, 따먹지 않는 것이 선과 악의 근거라는 말인가? 라는 의문은 도덕적 본성으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되는 법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선악과의 의미는 실로 무엇이겠는가를 당연히 물어야 한다. 필자는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도덕적 본성은 아담과 하와에게도 주셨을 것이 틀림 없는데, 그도덕적 본성으로 인간의 자유의지를 남용하지 않도록 하는 도덕적 법을, 아담과 하와에게 주시기 전에, 어찌하여 그보다 먼저 선악과라는 법을 주셨겠는가라는 물음을 제기 한바 있는데 여기서도 제기하는 바이다.
왜냐하면 인간이란 하나님의 인격적 피조물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의 인간관계보다 우선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보다 근원적이기 때문에, 선악과라는 법이 그 어떤 것 보다 우선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선악과의 의미를 정확하게 짚지 못하면 기독교의 신학은 그 기초부터가 올바르게 출발 하지 못하는 것이 되고만다.
여기서 미리 말하여도 상관 없으리라고 생각되어, 말하는 바이지만 윤리나 도덕은 대 인간관계에만 적용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전제되지 않으면 모든 대 인간관계는 의미가 없을 뿐 아니라 그 모두가 죄의 종들로(롬6장6절) 살게 되고 말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서 타락한 인간은 영이 죽은 자들이기 때문에, 영과 육이 결합되어 발생한 것이 혼 곧 지,정,의 이기 때문에, 영에 속할 수도 있고 육에 속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것이 인간에게 주신 자유의지이다. 물론 하나님이 원하신 것은, 인간이 영을 선택하여 지성과 감성과 의지라는 혼의 기능들이 영의 다스림을 받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제 선악과란 어떠한 성질의 것인가를 이해 하여야 할 차례이다. 그것은 선악과를 따먹으면 반드시 죽을 것이라(창2장17절)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대로 아담과 하와가 따먹었는데도 육체는 죽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발견된다. 따라서 육체는 죽지 아니하였으니까,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신 것이고 "결코 죽지 아니 하리라"(창3장4절)고 한 사단의 말이 참말이라고 할수 있겠는가? 우리는 그 누구도 그렇게 생각 할 수는 없다.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실수 없기 때문이다(히6장18절). 그러므로 인간이 추구하여야 할 "선"은 영적인 것이라는 사실이 확인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선악과를 따먹은 영의 죽음이 도덕적인 범죄를 비롯하여 모든 죄의 원인이 되는 것이었다. 그 총체적인 이유는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의미를 다양하게 말 할수도 있지만, 그 핵심은 인간은 영을 가진 존재라는 것인데, 그것은 하나님도 영이시기(요4장24절)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적인 것은 "선" 이고 육적인 것은 죄악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롬8장5절-8절)고 성경은 확증하는 것이다.
ㄴ, 타락하기 전 아담은, 지금 구원받은 우리에게는 계속적으로 있는 영과 육의 끊임없는 투쟁을 전혀 모르고 살았다. 그때에는 지성과 감성과 의지 라는 세가지 인격기관이 아직 영이나 육신의 어느 쪽에든지 속하여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영과 육이 합하여져서 생긴 "혼"(창2장7절)이기 때문에 혼이 인격적 개성의 원인이 된다는 것도 아직은 아니다. 그 혼이 영에 소속이 되던지, 아니면 육에 소속이 되던지 하는 것은, 인간이 영적존재가 되던지, 육적존재가 되던지에 따라서 결정 되는 것이었다. 되풀이 되는 말이지만 선악과가 인간의 자유의지를 통제하는 법이 틀림 없다면 그것에 의하여 인간은 영적인 사람이 될 것인지, 아니면 육적 인간이 될 것인가가 결정되게 되어 있었을 뿐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여기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의 오해는 그 때에는 인간이 완전 하였기 때문에 당연히 영이 주체로 살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완전 하였다면 범죄도 하지 않아야 할 것인데,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는 죄를 저질렀던 것이다. 그러므로 원초적 인간은 무죄자일 뿐이었지 결코 완전한 존재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창조가 불완전 하였다는 말인가? 이역시 결코 그렇지 않다. 인간은 선도 악도 가능한 무죄자 이었을 뿐이다. 만약 하나님이 선이 악보다 더 가능 하도록 하셨다면,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 되지 못하며 인간의 창조도 불완전케 된다. 그러므로 선도 악도 공평하게 가능한 존재로, 그것도 선도 악도 아직 없는 가장 기초적인 단계에서 출발 하도록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 하신 것이었다. 이것이 완전한 인격적 존재이며 참 자유의지적 존재인 하나님의 완전한 창조인 것이었다. 이와 관련 하여서 보다 더 알고 싶은 분은 필자의 책 "신학적 마귀론"을 보라.
ㄷ, 성경에서 때때로 인간을 혼으로 지칭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이유는 사람의 됨됨은 혼(인격)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혼이 그 사람을 대표하고 혼이 그 사람을 표현해 주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물론 이것은 2천여년 간의 기독교 전체의 오해이며 오류이었다고 말할 수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영이 주체로 살아온 일이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영이 주체가 될지 아니면 육체가 주체가 될지, 아직 인간의 자유의지가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은 상태가 원초적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이미 앞에서 말하여졌듯이 영도 육신도 의식이 있기 때문에(롬8장5절) 원초적 인간은 영이나 육을 선택 할수 있었던 것이고, 혼이라는 지성과 감성과 의지라는 인격기관들은 영이나 육을 선택함에 따라서 영적 인격이 되기도 하고, 육적 인격이 되기도 하는 것이었다는 말이다. 따라서 이미 아담으로부터 영이 죽었기 때문에, 영이 배제된 타락이후의 인간에게 어떻게 사람됨이 있을수가 있겠는가? 아니 인간이 타락하기 이전에도, 이를 다른 측면으로 설명하면 인간은 영을 선택 할수도 있고, 육을 선택 할수도 있었던 이것이 인간의 자유의지이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의도 하시고 원하신 것은 물론 인간이 영을 선택하여 그 영이 혼을 다스리고 지배하는 존재가 되기를 원하신 것인데, 인간은 육을 선택 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육이 혼을 다스리고 지배하는 존재가 되고만 것이었다. 이것이 인간의 타락이다. 인간의 혼이 지,정,의를 가진 인격기관인데 그것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것이 육이 되었기에 인간은 모두 육적존재가 된 것이다. 비인격적으로 사는것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인격적으로 산다고 하는 경우라고 하더라도 그 궁극적 목적은 육적인 것이기에, 거기에는 영적인 것을 관심 가지는 자체가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교도들 뿐 아니라 무신론자들까지도 곧 그리스도 밖의 모든 비기독인들은 욕심을 버려야 한다는 삶에 목적이 있는 사람들도 적지 않고 비리와 부정을 없애야 한다는 철저한 삶의 철학으로 살며, 타인들에게도 존경을 받는 수준있는 지도자들이 얼마든지 있기도 하다. 그러나 그렇게 사는 그들의 궁극적 목적은 사회의 정의나, 세계적인 평화나 경제적인 유토피아정도 일뿐이고, 하나님을 사람의 본분으로 섬기는 일을 목적으로 삼는 자들이(전12장13절) 거기에 있는가? 그러한 일에 관심조차 없는 것이 인간의 역사가 아니고 무엇이었던가?
그러니까 너도나도 잘사는 사회나 국가 그리고 세계를 만드려는 것이 궁극적 목적이 아닌가 그말이다 그래서 그것을 win,win 전략이라고도 하며 well bing 이라고 하기까지 하는 것이다. 육신이 인간의 주인이 되어서 인격기관인 혼을 지배하고 다스릴 때에 영의 기능은 완전히 말살 된 것은 물론 아니지만 영은 그대로 인간 안에 있다. 그러나 영은 그 육의 지배를 받지는 않는다. 다만 하나님 아닌 것을 섬기려는 기능이 남아 있다는 것이 영의 기능이 완전히 말살되지 않았다는 증거이고, 즉 사후의 세계를 갈망 하거나 추구한다는 사실이 그러하고, 그렇게 하나님 이외의 것을 섬긴다 하더라도 전부가 육을 위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육적존재로 타락한 인간의 모습이다.
이와 반대로 만약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지 않고 생명과를 따먹었다면 영이 인간의 주체가 되는데, 그 인간은 하나님과 지속적인 관계를 가지게 됨으로 그 영이 점점 하나님의 능력으로 곧 영력과 영권으로 혼 곧 지성과 감성과 의지를 지배하고 다스리게 됨으로 인격이 영적인격이 되며 그 영적인격이 된 그 혼이 인간의 육체를 지배하고 다스리게 되고 그 육이 육 밖의 모든 피조물의 세계를 지배하게 될 뿐 아니라, 그러한 영적 힘으로 사회를 만들고 지배하며 그러한 문화까지도 창출하여 가게 되는 것이다.
과연 사람의 됨됨이 혼에 달려 있는 것인가? 지성과 감성과 의지와 같은 인격기관이 혼에 속한 것은 인정 할수 있으나, 인간의 됨됨이가 그 혼에 의한 인격으로만 완성 될수 있는가? 저자는 그럴수 없다고 확신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특성과 본질은 영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영적인 것이 배제된 거기에는 진정한 의미에서 사람됨이란 있을수 없는 것이다. 우리 인간들이 지금 인격이라고 하는 개념은 도덕적 차원의 높은 수준을 말하는 것인데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사람됨이라고 할수 있겠는가 그말이다. 인간성의 보다 올바른 본질이 영인데 그 영이 배제 되고도 올바른 인간됨이 거기에 있을수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영주체적 인간이라야 참된 인간됨이 되어도 되는 것이지, 그 영이 죽어 있는 상태 곧 주체적 위치를 상실한 상태에 있는 사람을 사람 됨됨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 밖의 사람들 곧 불신자들에게도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인격은 있다고 할뿐 아니라 우리 그리스도인들 보다 더 인격이 수준 높은 사람들이 많은데, 즉 그들은 아직도 구원 받지 못한 타락한 상태에 있는 자들인데, 그들에게도 사람됨의 길이 열려 있다면 이것이 성경의 진리가 될수 있겠는가 그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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