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듭난다는 의미와 관련하여 | 원종호 | 2022-08-2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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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난다는 의미와 관련하여
오늘은 거듭남에 대하여 중복되는 점이 적지 않을 것이지만 다시 한번 더 말하여 보려고 한다. 먼저 "주님은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수 없다"(요3장3절) 하셨는데 이것이 성경상으로 거듭남에 대하여 최초로 하신 주님의 말씀이다. 그런데 바리새인이며 유대인의 지도자인 니고데모는 어떻게 그렇게 날수 있는가 라면서 "사람이 모태에 들어 갔다가 다시 날수 있는가?" 라고 물었던 것이다(요3장4절). 그러니까 산해드린 공의회 의원이라고 불리울수도 있다는 유대인의 지도자인 니고데모도 거듭남에 대하여 처음 들었던 것이니까 거듭남을 모태에 들어 갔다가 다시 나는 정도로 이해 할수 밖에 없었다는 사실이었던 것이다.
I, 그렇다면 거듭난다는 의미는 과연 무엇인가를 물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말이다. "주님께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수 없다"(요3장3절)고 하셨으니 거듭남은 구원을 받는 절대적인 조건임을 나타내셨다. 그것도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아예 볼수 조차도 없다고까지 말씀을 하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거듭남이 그만큼 구원의 절대적인 조건이 되는 이유를 물어야 할 차례에 온 것이다. 그 이유를 말하기 위하여서는 인간의 타락이 무엇인가를 물어야 한다. 인간의 타락이 무엇인가를 모르면 인간의 구원도 정확하게 알수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선악과를 따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을 것이라"(창2장16절-17절)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대로 선악과를 따먹고 인간은 죽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무엇이 죽었는가에 대하여서도 육신이 죽게 되었다는 입장(창5장5절)과 허물과 죄로 죽었다는 입장(엡2장1절-2절)등, 몇가지 입장들이 있어왔지만 결론은 영이 죽게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여기에 해당 되는 말씀으로는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찿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19장10절)는 말씀인데 여기서 잃어버린 자란 인간이 걸어가야 할 참된 길을 잃은 자들이라고 보편적으로 말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인간 자기를 잃어버린 자기 상실자를 의미하는 것이 더 옳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심을 입은 존재이기 때문에 영이신 하나님의(요4장24절) 지상의 피조물 가운데에는 유일하게 영이 있는 존재이니까, 영 주체적으로 살아야 참된 인간으로 사는 것인데, 뱀 곧 마귀의 미혹에 걸려들어(창3장4절-5절)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서 영이 죽게 되었고, 이것이 인간 자기를 상실한 타락인 것이었다.
그렇다면 영 자체가 죽었다면 그 영이 없어 졌다는 말인가를 물어야 한다. 결코 그렇지는 않다. 만약 영이 없어 졌다면 육신도 시체가 되고 말았을 것인데 영은 우리들 인간속에 그대로 있지만 그 근원이 되고 뿌리가 되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을 뿐이다. 따라서 육신적 시각으로만 보면 영의 죽음이 감지 되지는 않고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는 인간 자체인 것이다. 이것이 비 기독인들의 입장일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본원 되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기 때문에 능동적으로 하나님을 찾아 갈수도 없고 하나님 편에서도 인간과는 그 어떤 관계도 가지지 않게 되었으므로 인간은 영적으로는 완전히 죽은 자이기 때문에, 모든 인간은 오직 육신으로만 살아가는 존재가 되고만 것이었다. 다만 하나님을 올바로 찾아 갈수는 없는 인간의 영 때문에, 철학에서는 이것을 인간에게는 종교성이 있다고 말하는 바와 같이, 다양한 종교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는 것이 타락한 인간들의 모습인 것이다. 이것을 하나님을 찾아 가고 싶은 인간의 영적 갈망이 미미하게라도 남아 있다는 의미로서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인간에게는 있다"(전3장11절 하반절)고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II, 영이 죽은 상태의 인간
물론 이것은 타락한 인간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롬6장6절)는 말씀은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을 하지 아니하려는 것이라는 것은, 실상은 죄에게 종노릇을 하였다는 말이다. 언제 말인가? 우리의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에 말이다. 그러니까 구원받기 이전의 타락한 상태의 우리들을 말한다.
필자가 여기에 대하여서는 계속적으로 말하는 바이지만 타락한 상태의 사람들 곧 지금도 불신자들은 다 죄에게 종노릇을 한다는 의미인데 과연 동의 하기가 쉽겠는가를 제기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불신자들도 완전치는 못하다고 하더라도 어느 정도는 선행도 한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 성경 말씀은 타락한 상태의 모든 사람들은 예외 없이 다 죄의 종노릇을 한다는 것이다. 지극히 작은 선행도 아주 없이 오직 죄에게 종노릇만 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밝히는 확증인 것이다. 물론 불교도들이나 유교도들을 비롯한 불신자들도 윤리적으로는 우리들 기독인들 보다 더 선하게 사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있을수 있는데도, 하나님은 그들 모두를 죄의 종들이라고 한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기독인들로서 우리들도 선과 악에 대한 참된 의미를 다시 한번 더 깊이 생각 하여야 할 것이다. 물론 윤리도 선과 악의 근거가 아주 아니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보다 우선되고 우위에 있는 선과 악의 근거는 영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깨달아야 할 것이다.
즉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서 영혼이 죽은 자들은 그들이 아무리 윤리적으로 선하게 산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선행으로 간주 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 모두를 죄의 종들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망각하지 말아야 할 것이라는 말이다. 그 이유를 여기서도 한번 더 말한다면 윤리는 대 인간관계에 해당되는 선과 악의 근거이고, 영적인 것은 영이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의 본질적 법 질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독인들로서 우리들도 눈에 보이는 대인 관계에만 충실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소홀하게 하면 결코 안된다. 부부 관계나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비롯하여 그 어떤 인간관계도 잘 하여야 하겠지만 그 모든 인간관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정상화 함을 근거로 하여야 하는 것이다. 아무리 가까운 인간관계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해치거나 손해가 나게 하는 관계가 될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독인의 참된 삶은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를 정상화 하는 것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키는 것이 사람의 본분인 것이다. 이 본분을 벗어나는 것은 사람답지 못하다는 의미를 넘어서서 사람일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없거나 비정상적인 관계에 있어서의 모든 인간관계는 그것이 죄악일 뿐인 것이다.
III, 그렇다면 인간의 구원은 실로 어떻게 이루어 지는가?
이미 앞에서도 말하였지만 인간에게 구원이 필요한 이유는 인간이 타락 하였기 때문이다.
A, 그렇다면 인간의 타락이란 무엇인가부터 물어야 한다.
물론 타락이란 범죄 하였다는 말인데 그 범죄를 인간 스스로는 도저히 회복 할수 없기 때문에 그것을 타락이라고 하는 것뿐이다. 범죄와 관련하여서는 언제나 거기에 법 질서가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즉 법이 없었다면 범죄도 발생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나라의 시민으로 인간을 만드시려는 하나님으로서는, 인간을 자기의 형상대로 지으셔서 영적 인격적 존재로 창조 하셨던 것이고, 그들에게 주신 법은 오직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따먹지 말라는 것이었는데, "그것을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2장16절-17절)는 것이었다. 대 인간관계 있어서의 윤리적 차원의 법은 악을 저질러도 직접적으로는 죽는 일은 없는 법이지만, 하나님이 최초로 인간에게 주신 법은 지키지 않으면 죽는 것이었기 때문에, 죽느냐 아니면 사느냐와 관계된 법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윤리적 차원의 법 질서가 아니고 영적 차원의 법 질서이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최초의 인간 아담과 하와는 분명히 죽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는데도 그 선악과를 따먹었고 자기들에게는 무엇이 죽었는지를 정확하게 느낄 수가 없었기 때문에, 영이 죽었다는 사실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살지 않았는가 싶기도 하다. 이것은 아담의 후손들 전체가 영의 죽음은 고사하고 인간에게는 영이 있다는 사실 자체까지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살아온 것이 안타깝다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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