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주제 | 원종호 | 2022-06-1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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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가 무엇인가를 알고자하면 그리스도 교회의 경전인 성경을 알아야하고 성경을 알려면 그 성경의 주제부터 알아야하기 때문에 이미 보내어 드린 카톡과 중복되는 내용들도 약간씩은 있는 것을 동역자 여러분들의 너그러운 이해를 바란다. 그리스도교 신앙과 신학의 근거가 성경이 틀림없다면 어떠한 신학이든지 성경에 의하여 비판, 평가되어야 한다. 그런데 마치 신학이 최고의 기준인 것처럼 그 신학에 의해서 신앙도, 교회도, 그리고 성경까지도 평가하려는 신학자들이 적지 않을 뿐 아니라 그렇게 되는 것을 당연한 일로 여기는 목회자나 신도들도 있어 신학! 그러면 꼼짝달싹 못하고 신학만 부러워하는 자들이 많다.
심지어 성경만을 거론하는 자들은 시대에 뒤떨어진 무식한 자들로 무시하는 경향도 짙다. 물론 2천년 동안 쌓여온 신학적 체계를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지만 성경에 의해서 그 기본적 틀이든지 어떠한 면에서이든지 간에 신학은 재평가되어야 한다. 이것이 진정한 신학의 발전이며 또한 이것이 환원운동이다.
즉, 여기서 제기하는 문제는 신학이 과연 성경적인가? 하는 것이며 또한 성경 외적인 것들이 지나치게 첨가되지는 않았는가 함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교의 신학(교리)체계를 순수 성경적으로 세우려하는 우리의 입장에서는 가장 우선적으로 성경의 주제부터를 물어야 한다. 신학이 반드시 교의 신학적 구조나 체계를 고수하거나 답습해야 할 이유는 없다. 지금도 신학은 교의신학 이외에 신, 구약성서 신학과 역사신학, 실천신학, 그리고 선교신학 등이 상존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성경의 66권 중 어느 한 권이나 아니면 성경의 저작자 별로 묶어서 이야기하는 신학이 아니라 성경 전체를 총체적으로 망라하여 통일성 있는 체계를 세워야 한다. 그러한 것이 가능하겠는가? 라는 의문을 제기할 사람들도 있겠지만 가능하다고 믿고 감히 출발한다.
물론 유한한 인간으로서는 절대 불가능하겠지만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는 성령(고전2장10절)의 인도를 받으면(요16장12절-13절) 절대 가능하다고 믿기 때문에 성경의 주제를 묻는 데서부터 출발하는 것은 너무 당연하고 올바른 출발인 것이다. 이 세계 안의 그 어떤 종교도 이 역사의 목적을 알지 못한다. 창조주를 모르기 때문이다. 아니 인정치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실로 성경의 주제는 무엇인가?
(A) 예수그리스도이시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 하는 것 이니라”(요5장39절)고 하심으로서 그리스도께서는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 하는 것, 곧 자신에 대한 증거임을 명백히 밝히셨다. 따라서 성경의 주제는 그리스도 자신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성경”이란 과연 어떤 성경을 의미하는가? 물론 신, 구약 성경전체를 말하는 것이라고 이해하여야 하겠지만 여기 그리스도께서 직접 언급하신 “이 성경”이란 구약성경을 뜻한다.
까닭은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실 동안에는 아직 신약 성경은 없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신약성경은 그리스도에 대한 기록이라고 생각하지만 구약성경은 그렇지 않는 것으로 생각한다. 왜냐하면 거기 구약성경에는 예수그리스도께서 화육하기 이전이었으므로 그리스도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 없거나 예언적 기록도 매우 적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자신은 그 구약성경이 자신에 대한 증거라고 확언하신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알다싶이 구약성경에는 "예수님 "이라든지 "그리스도"라는 이름은 직접 언급 되지 않지만 의미상으로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들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즉 구약 성경은 오실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이고, 신약 성경은 오신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이며 신구약 성경을 막론하고 다시 오실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도 있기 때문에 성경 전체는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라고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담은 오실자의 모형"(롬5장14절 하반절) 이라고 하는 것이다. 즉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범죄로 말미암아 아담의 후손들인 모든 인간은 타락 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렇게 될 것을 미리 아시고 그리스도를 보내실 계획을 세우셨기 때문에 아담은 오실 그 그리스도의 모형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무죄자로 왔던 아담은 선악과를 따먹는 범죄로 말미암아 그 후손들인 모든 인간들이 지옥갈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에 그 인간들을 구원 시키기 위하여 자기 아들 그리스도를 아담처럼 무죄한 인간으로 보내셨다는 것이 아담은 오실자 그리스도의 모형이라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아담이 그리스도의 모형이라는 의미를 성경의 어떤 말씀에서 찾을 수가 있겠는가를 물을 차례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담의 아내 곧 신부를 만드실 때이었다. 즉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의 갈빗대 하나를 취하시고 살로 메꾸신 다음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들어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이는 내 뼈중의 뼈요 살중의 살이라 이는 남자에게서 취하였으니 여자라 하리라"(창2장21절-23절)고 하신 말씀이다. 이는 상식적으로 이야기 하더라도 꼭같은 사람인데 남자를 흙으로 만드셨다면 당연히 여자도 흙으로 만드셔야 할 것이었는데 아담의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셨으니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와 그의 신부들이 될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말이다.
그것도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셨다는 것은 주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실 것을 예표하는 것이고 갈빗대 하나를 빼내었으니 피가 흘려졌을 것인데 물론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흘리실 십자가의 피를 말하는 것이니까 그렇게 되면 그 십자가의 은혜로서 그리스도를 신랑으로 맞이하는 신부들이 발생할 것을 예시 하신 것을 의미하는 사건이었던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아담은 그리스도의 모형이고 따라서 지구를 중심으로 하는 이 세계의 창조와 아담과 하와라는 인간 창조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십자가의 구속사역이 이 세계 창조의 목적이라는 것이 밝혀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 이외의 다른 동, 식물들을 포괄하는 모든 존재들이야 자기들이 존재하는 이유를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제외 되지만 인간들은 자기들이 왜 존재하는지를 알아야 하고 그 존재 목적대로 살아야 인간답게 사는 것이기 때문에 오늘의 이 말씀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신랑으로 맞이 하여야하는 것이 사람이 사는 목적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기 위하여 사는 것이 생의 목적이라는 사실을 망각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B)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혀 주셨다(창3장21절).
하나님이 자기의 형상대로 지으신 인간은 남녀가 다같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하지 않았다"(창2장25절). 그런데 뱀 곧 마귀의 미혹에 걸려들어 선악과를 따먹고 났더니 "벌거벗은 것이 부끄러워졌서 무화과 나무 잎으로 옷을 만들어 입었었다"(창3장7절). 그리하여 하나님은 그들 아담과 하와를 위하여 가죽옷을 만들어 입혀 주셨던 것이다(창3장21절). 즉 벌거벗은 것은 선악과를 따먹기 전후가 꼭 같았는데 선악과를 따먹고 나니까 부끄러워졌다는 것은 선악과를 따먹은 죄 때문에 부끄러워졌다는 의미이니까 확실히 죄에 대한 수치 의식인 것이다. 인간은 죄에 대한 수치 의식이 있어야 인간이다. 그것도 죄의 종류나 그 죄의 크기에 따라서 수치 의식도 크기가 달라야 한다.
그런데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서 영이 죽은 에덴 이후의 인간들은 육 주체적 존재가 되었기 때문에 물질 문명에 보다 더 많은 노력과 방법을 기우려 우리 인간들의 삶을 육신적으로는 대단히 수준있고 풍요롭게 만들기는 하였지만 죄에 대한 수치의식은 거의 없거나 완전히 사라진 시대가 현대라는 문명 시대가 되고 만 것이 아니겠는가 그 말이다. 하나님께서 제일 처음 창조하신 본래의 인간은 아무것으로도 자기를 가리우지 않고 벌거벗었으나 전혀 부끄럽지를 않았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는 명예나 권세나 물질이나 또 다른 신분이나 인기나 또 다른 사회적 영향력등을 가지고 자기를 가리워야 안전도 있게 살아 갈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벌거 벗었다고 하더라도 즉 명예나 권세나 인기나 사회적 영향력이나 물질이나 그 외의 그 어떤 것으로도 자기를 가리울수 없는 가난뱅이라고 하더라도 부끄러울 것이 없는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도 반드시 짚어야 하는 것은 아담이 부끄러워졌던 죄가 그 어떤 윤리적 차원의 죄이었던가? 그말이다. 즉 그 어떤 나라의 법을 어긴 죄가 아니고 윤리적 차원의 죄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저질러진 죄악인 것이었다. 그것도 보다 구체적으로 표현하여 본다면 선악과를 따먹고 영이 죽은 죄이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부끄러워졌다는 것이다. 오늘날 최첨단 문명속에 산다는 그리스도인들로서 우리는 윤리적 차원의 죄에 대한 수치의식도 거의 없지만 더 더욱 영적인 죄에 대하여 죄책감 자체 마저도 사라진지가 오래되지 않았을가를 생각하여 본다. 어떻든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서 발생한 부끄러움을 가리워주시기 위하여 가죽옷을 만들어 입혀 주신 하나님의 처사는 그것이 앞으로 십자가의 속죄를 통하여 인간이 그리스도로 옷 입을 것을 미리 거기서 벌써 나타내어 주셨다는 말이다.
"오직 주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13장13절-14절)고 하셨는데 구체적으로 그 말씀은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는 것이다. 즉 이 말씀들에서 열거된 죄된 행위들은 다 정욕을 위한 육신의 일들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죄들을 범하지 않기 위하여 그리스도로 옷 입을 것을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는자는 그리스도로 옷을 입었느니라"(갈3장27절)고 확증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선악과를 따먹고 벗은 것이 부끄러워졌던 아담과 하와가 그 부끄러움을 가리우기 위하여 자기들의 방법으로 만들어 입었던 무화과 나뭇잎의 옷을 벗기시고 가죽옷을 만들어 입혀 주셨던 하나님의 처사가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혜로 구원 받을 것을 의미하여 주셨던 것인데(창3장21절) 그것이 바로 세례를 받음으로 그리스도로 옷을 입는 것이라는 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세례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합하여 우리가 죽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부활과 합하여 우리가 새생명으로 거듭나는 일인 것이고(롬6장3절-4절) 따라서 죄 사함이 되는 것이기도 하고 성령을 선물로 받는 일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행2장38절-39절).
그러므로 다시 말하게 되는 바이지만 이 땅위에 오셨던 그리스도가 이 땅위에 오셨던 자기의 목적인 십자가의 구속 사역을 다마치시고 하나님 우편으로 돌아 가시면서(막16장19절) "너희는 온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요 믿지않는자는 정죄를 받으리라"(막16장15절-16절)고 하심으로서 믿고 세례를 받는 것이 성경이 확증하는 기독교의 절대적인 구원론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에서 벗어나는 구원론은 참된 성경적 구원론이 아니기 때문에 거짓된 구원론이며 따라서 기독교라고 할수 조차도 없는 것이다. 기독교의 존재 목적이 인간의 구원인데 그 구원론이 거짓 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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