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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 원종호 | 2021-07-1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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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성경본문“ 막6장45절-52절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 타고 앞서 건너편 벳새다로 가게 하시고 무리를 작별하신 후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니라 저물매 배는 바다 가운데 있고 예수께서는 홀로 뭍에 계시다가 바람이 거스르므로 제자들이 힘겹게 노 젓는 것을 보시고 밤 사경쯤에 바다 위로 걸어서 그들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시매 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 오심을 보고 유령인가 하여 소리 지르니 그들이 다 예수를 보고 놀람이라 이에 예수께서 곧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하시고 배에 올라 그들에게 가시니 바람이 그치는지라 제자들이 마음에 심히 놀라니 이는 그들이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
Ⅰ. 들어가는 말 인생은 항해입니다. 세상이라는 바다의 이편에서 건너편까지 건너가는 항해 입니다. 그런데 이 항해는 망망대해에 떠가는 일엽편주와 같은 것이며 세상 이라는 바다는 거칠고 바람이 심하여 그 풍랑에 생이 파선하여 표류하는 자들도 많이 있고 오늘 우리의 본문에 나타난 제자들처럼 심한 격랑에 시달리는 자들도 있습니다. 풍랑이 없는 바다란 없습니다. 그러므로 풍랑을 겪으면서도 어떻게 파선되지 않고 안전항해를 할 수 있는지 오늘 우리의 성경 본문을 통해서 찾아보기로 하겠습니다.
Ⅱ. 현재적 상황 물론 본문의 제자들이 당한 상황은 오늘 현대인들의 처지일 수도 있습니다. A. 때는 날이 저물어(47절) 어두워진 밤사경(49절) 즉, 사방이 캄캄한 한 밤중이었습니다. 그들은 지금 칠흑같이 어두운 캄캄한 밤에 처하여 있었다는 것입니다. 밝은 대낮에도 풍랑을 만나는 것이 쉬울 수는 없지만 캄캄한 밤중이었기에 그들은 더욱 고통스러웠고 힘겹게 노를 저으며 몸부림쳤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현실은 북한의 포기 하지 않는 핵무기의 개발로 말미암아 허리 짤린 분단 조국의 통일의 꿈은 자꾸만 멀어지는 것 같고 오히려 6,25동란보다 상상 할 수 없으리만큼 큰 전쟁의 공포가 우리들의 가슴에 깔리는 것 같고 가장 안전한 나라라고 생각하던 우리나라에도 지진이나 태풍이 다가올지도 모르는 상황속에서 코로나 바이러스를 통한 고통도 심화되어져 가는데도 불구하고 육적이고 세속적인 욕망의 충족과 실현을 위한 인간의 행진은 불가 항적 힘으로 가속화 되어지는 어두운 죄악과 역사의 밤은 0시를 향하여 질주 하여 가고 있는데 나와 그대의 가슴은 몇 시를 가리키고 있습니까? 아니 우리 인간들이 최첨단 자연 과학 기술 문명을 만끽 하는 현대라는 시점은 진정한 의미에서 역사적으로 과연 몇 시나 되어겠습니까? 시간에는 자연의 시간, 마음의 시간, 역사의 시간이 있습니다. 나와 당신의 마음의 시간은 몇 시를 가리키고 있으며 오늘의 역사는 과연 어느 시점에 와 있습니까? 죄악의 밤이 깊은 한밤중 이라는 사실을 부인 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B.장소가 바다가운데(47절)이었습니다. 즉 그들이 처하여 있는 곳은 바다의 한 복판이었다는 것입니다. 육지 즉, 땅에서 가까운 바닷가가 아니고 수심이 깊은 바다 한가운데에 그들의 배가 있었습니다. 하늘을 향한 인생 항해는 땅(세상)에서 당연히 멀어져야 합니다. 깊은 데로 가야합니다. 그러나 깊은 데로 가면 갈수록 풍랑은 더욱 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땅에서 멀리 떠나 깊은 데로 간다고 하여 무조건 가는 것은 방향을 잃어버리기가 쉽고 그렇게 되면 깊은 바다 한 가운데서 방황할 수밖에는 없게 됩니다. 오늘날 무조건 깊은 데로 간다고 하여 철학이나 도덕적 수준의 깊이를 따라가는 자들도 많이 있고 은혜나 영의 깊은 세계라 하여 말씀의 푯대 없이 유리하는 자들도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 드리는 바이지만 그리스도 밖의 사람들이야 어쩔 수 없지만 그리스도인들마저도 이 땅의 어떤 것을 목적으로 살면서 세상적인 부귀영화를 최고의 가치로 삼고 사는 사람들은 다 바닷가에서 촐랑 대는 가벼운 영적 어린 아이들입니다. 깊은 데로 가야만 그 건 너 편의 천국으로 가도 가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미 말씀 드린 대로 깊은 데로 간다는 것은 이 땅 곧 이 세상에서 멀어 진다는 것을 의미하고 깊은 데로 가지 못하고 바닷가에서 촐랑 댄다는 것은 세상에 붙어서 산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다(요일2장15절)고 할뿐만 아니라 세상과 벗이 되는 것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약4장4절)고도 성경은 확증 하는 것입니다. C. 그들은 풍랑을 만났습니다. 때가 저물어 사방이 캄캄한 밤중이라는 것과 바다의 깊은 곳에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는 별로 두려워 할 상황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다가 강력한 풍랑을 만났다는 것이 그들에게는 대단히 어려운 상황 곧 배가 침몰 당하여 죽을 수도 있다는 공포와 두려움이 가득찬 상황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바다에 풍랑이 있으리라는 것은 항해하는 자라면 각오해야 하는 일이지만 오늘 본문의 상황은 좀 달랐습니다. 방향을 분별하기 힘든 한밤중인데다가 바다 한 복판에서 격랑을 만났던 것입니다. 더욱이나 그 바다에서 잔뼈가 굵어온 그들! 고기잡이나 풍세에 따라 배를 다루는 기술 같은 것은 자신이 만만했던 그들의 힘으로도 즉, 바다에 대한 지식이나 기술과 경험으로도 어쩔 수 없어서 “힘겹게 노를 젓고”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이라는 바다에서 나고 자라고 살아가는 인간들! 거기에 그물을 던지거나 낚시를 던져서 어획고를 울리는 것으로 성패를 판가름하는 우리 모두는 이 세상 바다에 대한 풍부한 지식, 경험, 기술 즉 처세술 같은 것에 능난 능숙한 자들이지만 그 세상에서 일어나는 풍랑에 어떤 때는 도저히 견디지 못하고 지치고 좌절하여 힘겹게 노를 젓는 때가 있는 것입니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지는 때가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때문에 인간은 세상에 대한 지식이나, 기술, 그리고 자신의 경험만을 절대적으로 의지하는 것은 가장 어리석고 불행한 일입니다.
Ⅲ. 이 같은 상황에서의 제자들의 태도 속수무책인 그들은 두려워하였습니다. 풍랑도 무서웠는데 설상가상으로 유령(?)까지 출현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실은 예수님이 걸어오셨는데 그것도 제자들이 당한 그 어려움을 보시고(48절) 오셨는데 그들에게는 유령으로 보였던 것입니다. 풍랑을 보고 무서워하는 것은 믿음이 적은 연고이며(마8장26절)본문 52절에서 그들이 놀란 것은 마음이 둔하여져서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5천명을 먹이시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던 일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하였으니 이것 역시 불신앙이었습니다. 인간이란 자기의 지식에 의해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즉 사고방식이나 가치관이 형성되는 법인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지금까지 유령에 대하여 한 번도 가르치신 일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이 예수님을 유령으로 본 것은 그들의 이전 지식 즉, 예수님을 알기 이전에 그들을 지배하던 지식이 발동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날도 많은 성도들이 주님이 가르쳐 주신 말씀과 지식에 의해서가 아니라 신앙생활 이전에 가졌던 즉, 옛사람의 지식이 새삼스럽게 발동하여 우리를 지배함으로 암담한 밤바다에서 유리하는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까닭은 본문의 제자들처럼 주님께서는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도 5천명이상 되는 사람들을 얼마든지 먹일 수도 있으신 분이라는 사실을 그들은 망각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물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유령인줄 알고 공포의 비명 소리를 지르기까지 한 제자들은 유령이라야 물 위를 걸어올 수 있다는 옛 사람의 지식이 그들을 지배 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분명히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먹인 사건을 체험한 것이 불과 몇 시간 전의 일이었기 때문에 유령보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얼마든지 물 위로 걸어 오실수도 있다는 것을 믿고 깨달아 기억하고 있었어야 했을 제자들이었는데 그렇지 못하였다는 말입니다. 이유는 마음이 둔하여 졌기 때문이었습니다(막6장52절). 그렇습니다. 마음이 둔하여지면 주님의 말씀이나 하신 일의 뜻은 깨달아지지 않고 옛사람의 지식이 발동하여 그것에 지배를 받게 되고 그렇게 되면 주님이 유령으로 즉 성령의 역사가 귀신의 일로 보일 수도 있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주위의 어두움이 하나의 원인이기도 합니다. 즉 밝은 대낮이었다면 물위로 걸어오시는 분이 주님이라는 사실을 몰랐을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영적으로 죄악의 밤이 깊은 때에는 새사람의 지식보다 옛 사람의 지식이 거듭난 그리스도인들 까지를 더 많이 지배 하게 되는 것이고 역시 그렇기 때문에 성령의 역사와 악령 사단의 역사가 혼동 되는 일이 심하여 지는 것입니다. 나와 여러분은 진실로 거듭난 새사람의 지식으로 삽니까? 아니면 옛 사람의 지식으로 삽니까? 아니 아직도 옛사람으로 사는 것은 아닙니까?
Ⅳ. 찾아오신 주님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 같은 처지에 있는 자들에게 주님은 찾아오셨습니다. 그들을 그 풍랑에서 건져주시고 그들로 하여금 안전 항해를 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주님은 찾아오셨던 것입니다. A.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찾아오신 주님은 어두운 밤바다에 풍랑에 시달리며 힘겹게 노를 저으며 공포에 질려 소리 지르는 그들을 향하여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유령이 아니고 너희를 구원하려 온 자니 안심하라는 것, 즉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늘 어두워진 역사의 밤에 모진 바람과 거칠은 물결에 시달리며 힘겹게 노 젓는 밤의 항해자들이 있습니까? 주께서 말씀하십니다.“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입니다. B.베드로의 청원 본문 동일기사인 마태복음14장에는 이 주님의 음성을 들은 베드로가 자신을 명하여 주님처럼 물 위로 걸어오게 하여 달라고 주님께 청원한 사실이 있으며 결국 “오라”는 주님의 명령을 받고 베드로가 물 위로 걷는 사건이 첨가되어 있습니다(마14장28-32절). 배 안에 타고 있으면서도 풍랑 때문에 무서워서 어쩔 줄 모르던 베드로가 어찌하여 바다위로 걷겠다는 것이며 또한 무슨 용기로 아직도 풍랑이 거칠게 몰아치는 바다 위로 성큼 발을 내려놓는 것이었겠습니까? 이것은 주님의 음성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영적 생명이 완전히 죽지 않고 살아있는 자는 옛 지식에 의해 움직이다가도 주님의 음성이 떨어지면 그 음성이 들려집니다. 또한 영적 생명이 살아있는 자에게는 주님의 음성이 그토록 큰 용기를 줍니다. 즉 믿음을 줍니다. 생명이 살아있는 나무에 내리는 비는 더욱 생기 돋게 하는 것 같이 말입니다. 주님이 물위로 걸으니 나도 걸을 수 있다는 믿음이 생기는 법입니다. 때문에 그는 주님의 음성 곧 명령을 구하였습니다. 즉, 주님의 말씀을 구하였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어려운 풍랑을 만난 자신의 처지를 호소한 것이 아니고 주님께 그의 말씀을 구하였습니다. 병 고침도 좋고 물질적 축복도 좋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우선적으로 구해야 할 것은 말씀입니다. 편식과 간식은 건강을 잃게 되고 종내에는 생명이 위험하게까지 되기 때문입니다. 오직 순수 말씀을 구하는 신앙이 되십시다. 그것만이 영적 양식이며 영적 법칙이기 때문입니다. C. 물 위로 걷는 베드로 베드로도 주님처럼 바다 위를 걸었습니다. 오라 하시는 주님의 말씀대로 걸었으며 주님을 향하여 주님을 바라보며 걸었습니다. 신앙인생의 삶이란 세상이라는 바다 위를 걷는 삶입니다. 세상을 떠나서도 안 되고 그렇다고 세상에 빠져 들어가서도 안 되는 삶, 즉 세상에 빠지지 않고 그 위를 걸어가야 하는 "생"인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걸어가다가 바다 속으로 빠져들어갔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바람이 오는 것을 보고 무서워졌습니다. 바람이 무서우면 안됩니다. 세상바다에는 정말 크고 작은 그리고 다양한 바람이 참으로 많습니다. 주님을 바라보던 시선이 다른 방향으로 옮겨질 때 바람이 무서워집니다. 주님만을 바라보는 자에게는 정치바람, 경제 바람, 부동산 투기바람, 유흥과 쾌락의 바람, 지금 우리나라에도 불어 닥친 동성애와 동성혼의 바람 등, 개인적이거나 가정적이거나 사회적이거나 국가적이거나 세계적인 환란의 바람이 다양하게 부닥처와도 두려워하지 않는 법입니다. 즉 주님만을 바라볼 때에 곧 주님만을 소망의 근거로 삼을 때 세상이라는 바다에 빠져 들어가지 않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오직 내 인생의 거점을 주님만으로 삼는 자는 이 세상이라는 바다가 삼키지 못하고 오히려 그가 활동하는데 아무런 불편이 없도록 받쳐주는 발판이 된다는 것입니다. 즉 주님만을 소망으로 바라보는 자에게는 그의 명예, 권세, 지식, 부귀, 영화 기타의 모든 것이 그를 믿음으로 살게 하고 영적으로 성숙하게 하는 곧 하늘 길로 잘 가게 하도록 떠받쳐 주는 발판이 되지만 다른 것을 바라볼 때에는 나의 지식, 명예, 권세, 부귀 같은 모든 것은 금방 나를 삼킨다는 것입니다. 즉 믿음이나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지배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것들이 나를 지배하게 되니까 그것은 내가 세상에 완전히 빠져 들어가는 것이 된다는 말입니다. 베드로는 완전히 빠져 들어가기 전에 주님을 찾았습니다. 주님은 즉시 손을 내밀어 구출해 주셨습니다. 빠져들어 가서는 안 되지만 빠지게 되면 완전히 빠져들어 가기 전에 부르짖어야 합니다. 완전히 빠져 들어간다는 것은 생명을 완전히 일어 버린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입니다.
Ⅴ. 나오는 말 이제 이 배는 안전항해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람과 바다도 순종할 수밖에 없는 창조주이신 그리스도께서 그 배에 타셨기 때문입니다. 생의 안전항해를 원하십니까? 밤바다에 힘겹게 노 젓는 고달픈 자들이여! 정녕 안전항해를 원하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십시오. 그 분은 당신을 찾아 오셨습니다. 거칠은 파도에 시달리고 지친 당신을 구원하시려고 말입니다. 나와 여러분! 우리의 가슴에는 그리스도가 타셨습니까? 우리의 사업은 어떠합니까? 우리의 가정, 사회, 국가는 어떻습니까? 지금도 주님은 찾아오셔서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말라고 하십니다.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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