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 원종호 | 2021-06-2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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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성경본문 마태복음 26장47절-52절 말씀하실 때에 열 둘 중에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가 칼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예수를 파는 자가 그들에게 군호를 짜 이르되 내가 입 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으라 한지라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고 입을 맞추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하신대 이에 그들이 나아와 예수께 손을 대어 잡는지라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에 하나가 손을 펴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Ⅰ)들어가는 말 “아버지여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피하게 해 주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는 기도를 떨어지는 땀방울이 피같이 되도록 하시던 주님의 이 지상 최후의 밤이 깊어가던 겟세마네 동산에서였습니다. 베드로는 분연히 칼을 뽑았습니다. 아마도 칼을 뽑은 베드로를 나쁘다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까닭은 칼을 뽑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인간의 역사는 피차에 칼을 뽑아 휘두르는 전쟁의 핏자국으로 얼룩져 왔습니다. 개인 간이든 국가 간이든 왜 이 같은 치열함 싸움의 현장으로 자신들의 삶을 내 몰아야만 했습니까? 우리는 오늘 또 한 번 동족상잔의 비극을 상기해야 하는 6.25 71주년을 맞으면서 칼을 뽑지 않을 수 없었던 베드로의 입장과 그러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고 명령하시는 주님의 태도가 의미하는 인간 원리를 추구하면서 우리 자신들의 삶을 가다듬고저 합니다.
(Ⅱ) 베드로가 뽑아 든 칼의 의미
(A) 베드로의 칼은 정의의 칼이었습니다.
힘이 있다고 하여 남의 나라를 칼로 정복하고 앉아서 민의와 자유를 박탈하고 탄압하던 로마 정권이 아무 죄도 발견하지 못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군중들의 고함 소리가 무서워서라기보다는 유태인들을 영구히 식민지화하려는 전형적인 정치가들의 정략적인 처사도 비위에 거슬리는 일이지만 종교를 한답시고 앉아서 진정한 신앙적 이념의 인격적 성취나 그러한 것의 사회적 구현보다는 정권과 야합하여 안정된 현재의 기득권 유지에 혈안이 되어 있던,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부패상도 구역질이 날 뿐 아니라 그러한 자신들의 회개를 촉구하던 주님을 없애 버리기 위해 군중들에게 돈까지 주어가면서 데모하도록 충동한 일과 더욱이나 베드로 같은 자신들과 함께 주님의 제자로 3년여를 같이 먹고 자고 활동하던 가룟유다가 그가 출세할 목적으로 동료들을 배신하고 돈을 받고 스승을 팔아넘기는 현장! 그것도 가장 사랑한다는 표시인 kiss를, 잡아야 할 자가 누구인가를 알려주는 암호로 악용한 그 악랄하고 야비한 광경 앞에서 베드로는 의분의 칼을 뽑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가장 불의한 인간들이 가장 의로운 예수님을 마치 강도나 잡듯이 몽둥이나 칼을 들고 온 그 현실 앞에 정의의 칼을 뽑은 베드로를 누가 나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주님은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하시면서 이 같은 베드로의 행위를 거부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현실에서도 사필귀정이란 말이 의미를 잃은 것 같은 때 즉 힘과 불의가 의를 짓밟고 진실을 비웃고 모독을 할 때 우리는 곧잘 정의라는 이름 아래 칼을 뽑는 일들을 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러한 때에도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고 하십니다.
(B) 베드로의 칼은 정당방위의 칼이었습니다. 예수님만 잡히면 끝나는 일이 아닙니다. 그 다음에는 그분을 추종했던 베드로 자신을 위시한 모든 제자들에게도 그 해가 미칠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다가 칼과 몽둥이를 들고 깊은 밤중에 감람산 그곳까지 찾아온 그들 앞에 즉 주님만을 헤칠지 전혀 예측 할 수 없는 그들 앞에 칼을 뽑은 베드로의 이 행위는 칼은 칼로, 몽둥이는 몽둥이로 대응하는 멋있는 정당방위의 행위라고 아니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은 인간의 일반적 삶에 있어서 상식입니다. 동시에 법의 세계입니다. 때문에 율법에서도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 갚을 것을 말하였습니다. 오늘날과 같이 사회의 안녕과 질서를 위해 준법이 강조되고 있는 시대는 일찍이 없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일상적 인간의 모든 삶이 법의 제약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인간들에게 있어서 정당방위의 칼은 당연한 것이기 때문에 누가 칼을 뽑은 베드로를 나쁘다고 할 수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때에도 “네 칼을 도로 꽂으라”고 하십니다.
(C) 베드로의 칼은 비상시에 뽑은 칼이었습니다. 전쟁이라면 사전에 선전포고라도 있어야 하지만 여기 예고도 없이 겟세마네까지 그것도 한밤중에 추적 급습하여 검과 몽치로 주님에게 손을 대는 그들 앞에서 설득할 장소도 아니고 그들의 양심에 호소할 처지도 못되고 타협할 겨를도 없었던 그 절박한 비상 상황에서 베드로는 칼을 뽑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즉 이제 한순간이 지나가면 모든 것은 끝나버릴 것 같은 그 최후의 순간에 어찌 칼을 뽑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유도 조건도 없이 야음을 이용하여 인적 드문 겟세마네에 까지 뒤따라 와서 검과 몽둥이를 휘두르는 그 절박한 현실은 칼을 뽑아서라도 모면해 놓고 보아야 할 것이라는 자세는 아무도 나무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때에도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하심으로써 베드로의 그 같은 태도를 거부하셨습니다.
(Ⅲ) 그렇다면 이제주님은 칼 뽑은 일을 왜 거부하셨습니까?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칼을 뽑는 행위는 인간 원리가 아니며 하나님의 의도도 아닙니다. 까닭은 칼이란 일단 뽑혀지면 제 힘으로는 도로 집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뽑은 칼날에 상처 받은 자들이 보복의 칼을 갈고 있겠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정당한 칼이라 하여도 칼을 뽑는 것은 수천수만의 칼을 뽑게 만드는 일이며 진정한 평화와 번영은 없고 불안과 공포에 젖어 뽑아 든 칼에 날을 더 세우며 편히 잠들 수 없는 세계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칼로써 시작된 공산주의 혁명은 이미 망하고 말았습니다만 우리나라의 역사에도 존속 되었던 사색당쟁은 그러한 실 예들일 뿐입니다. 또한 칼을 뽑는 행위는 언젠가는 나 자신도, 그 칼날에 엎드러져야 한다는 숙명적 결과를 초래하는 행위입니다. 때문에 주님은 “칼을 쓰는 자는 칼로서 망할 것”이라 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칼의 비극적 생리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라는 정당방위로 대응하는 법과 상식의 세계가 아니라 원수를 사랑하여 그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고, 어떤 자가 오리를 가자면 십리까지도 가주고 겉옷을 가지고저 하면 속옷까지도 주고, 오른 뺨을 때리면 왼뺨까지 돌려대라고 가르쳤으며 그 평소의 가르침을 이 비상 시기에도 몸소 실천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힘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열 두 군단 더 되는 천군 천사들을 얼마든지 부를 수 있었읍니다(마26장53절-54절).자신에게는 칼이 없어서가 아니며 칼을 가져서도 안 된다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최후 겟세마네 동산에 오르면서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서라도 칼을 사라(눅22장36절)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만약 주님께서 정당방위라 해서 칼 뽑는 것을 허용하셨다든지 한 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이 끝나는 비상시기 즉 최후의 순간이라 하여 칼을 사용하셨다면 평소의 주님의 가르침은 완전히 거짓으로 끝났을 것이며 오늘날 기독교는 이 땅위에서 자취를 감추었을지도 모르며 인간역사는 보다 참혹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현실적인 안목에서 이기느냐, 지느냐를 가지고 선이냐 혹은 악이냐를 판단하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느냐 아니냐를 평가하는 세계에서 우리는 쉽사리 울분의 화신이 됩니다.
(Ⅳ) 참으로 이기는 길 힘이 없어서 지는 것은 수치입니다. 칼이 없기에 저항하지 않는 자는 비겁한 자입니다. 칼을 가지고도 뽑지 않는 자는 강자입니다. 칼을 뽑는 자는, 최후를 칼에 의해 보장 받으려는 자입니다. 즉 칼이 최후의 힘, 궁극적 힘이라고 믿고 거기에 의해서 자신의 생명을 보장 받으며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는 자입니다. 그러나 상대방의 빼내어든 칼날 앞에서도 칼이 없어서가 아니라 있으면서도 칼을 뽑지 않는 것은 참으로 강자의 자세입니다. 그것은 상대방에게 항복하는 것도 아니요 타협하려는 것도 아니며 도망치려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뺏던 칼까지도 도로 칼집에 꽂으면서도 상대방의 칼날 앞으로 전진 하는 것은 정녕 강자만이 할 수 있는 자세입니다. 그는 칼보다 더 큰 힘이 있다는 사실을 아니 칼을 주관하는 칼의 주인이 따로 있다는 사실을 아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비상시라해서 칼을 뽑는 것은 칼이면 다라는 현실적 힘에 굴복하는 행위가 됩니다. 그러므로 칼은 칼집에 들어 있을 때 신념이요, 의욕이요, 정의이며 힘과 권리의 상징입니다.
(Ⅴ)나오는 말 주님은 정의의 칼도, 정당방위의 칼도, 비상수단으로서의 최후의 칼도 뽑지 않았습니다. 실로 그는 자기의 죽음 앞에서도 칼을 뽑지 않았습니다. 칼을 뽑지 않는 삶은 현실적으로 수난의 길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죽음마저도 흔들어 놓을 수 없는 하늘의 힘을 절대 신뢰하는 주님의 무저항적 저항의 삶! 이 길만이 시간을 영원으로 승화시키며 현실을 천국으로 만들 수 있는 유일의 방법, 곧 인간 원리인 것입니다. 오! 인류여! 당신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즉 명예, 권세, 부귀, 지식, 기술, 그리고 가문이나 사회적 배경 등을 칼로 사용함으로서 거기에 의해 자신의 생명과 안녕을 보장 받으려는 삶은 인간의 바른 길이 아닙니다. 우주 개발까지도 전쟁 도구화 하는 오늘을 직시하십시다. 참으로 인류여! 당신들의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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