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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받은 용서와 하는 용서 | 원종호 | 2021-06-0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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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은 용서와 하는 용서 성경본문: 마18장21절-35절
Ⅰ. 들어가는 말 본문은 용서에 대한 기독인생의 윤리생활은 어떠하여야 하겠는가를 제기한 베드로의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서 예수님이 주신 비유입니다. 물론 몇 번이나 용서를 하여야 할 것인가를 묻는 베드로의 질문에는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하라”고 하심으로써 무한히 용서하라는 대답을 이미 직접적으로 하셨습니다. “천국은 마치”라고 하신 말씀에서도 이미 기독자의 생활 윤리에 대한 성격임이 드러나지만 특히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이라는 말씀에서 베드로의 제기한 문제는 모든 사람과의 관계에서라기보다는 믿는 형제 사이의 용서에 대한 윤리를 말하려는 것이 본 비유의 성격이며 동시에 그것은 공적 관계에서라기보다 개인적 관계에서 라는 사실을 기억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의도는 기독인생은 왜? 그렇게 무한한 용서를 해야 하는가를 밝히려는데 있습니다.
Ⅱ. 빚진 인생 빚지지 않고 사는 것은 이상적인 생활이지만 실제로 인간은 다 빚진 자와 같습니다. 본문에 나타난 것처럼 임금에게 진 빚도 있고 동관에게 진 빚도 있습니다. 여기 주인으로 묘사된 왕은 물론 하나님을 뜻하며 동관이란 나와 같은 사람들 즉 우리의 이웃이나 형제들을 말합니다. 따라서 이 빚은 물질적인 빚이 아니고 죄의 빛을 말하는 것임을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이라고 한 베드로의 제기한 문제에서도 나타나지만 “너희가 중심으로 너희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리라”한 이 비유의 결론에서도 명백하여 집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은 죄 없는 의인은 하나도 없다(롬3장10절)고 선언합니다. 이것은 물론 도덕적 잘못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도 죄인이지만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죄 없는 완전무결한 인간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미움”이라는 마음의 움직임을 이미 "살인 행위"로(마5장:21-22절)보시는 하나님의 눈앞에서 선할 사람이 없음도 분명하지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는 인간 본래의 입장에서 볼 때 마땅히 경외하고 섬겨야할 하나님을(전12장13절) 불신앙하는 것은 보다 더욱 큰 죄라는 사실을 깨닫는 자도 없었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었고(롬3장10절 이하) 인간은 다 죄인이었고 이 죄에서 자기의 힘으로는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죄에 빚진 인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죄의 빚을 탕감 받은 자들이 그리스도인들입니다.
Ⅲ. 얼마나 졌던 빚입니까? 오늘 본문은 일만 달란트라고 표현합니다. 이 액수는 오늘날 어 본 비유는 그 사람이 왜? 그렇게 큰 빚을 지게 되었는지의 문제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다만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서 갚으라(25절) 한 말씀으로 보아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빚이라는데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단순히 모든 소유를 다 파는 정도로 갚을 수 있다면 몰라도 처와 자식들을 다 팔아야 한다는 것은 그들을 다 잃어버리는 것이므로 그럴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까닭은 빚은 그것도 죄의 빚을 지는 것은 자신뿐만 아니라 자기의 처와 자식들 까지를 다 잃어버리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처자들을 잃게 된다는 것은 그들의 생명을 살릴 수 없게 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기에 그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할 수는 없었을 것이고 그러나 채권자인 왕이 그렇게 집행을 해버려도 별도리가 없는 실정이었기에 그는 참아 달라고 애걸하였고 그러면 다 갚겠노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그것을 어떻게 갚을 수가 있겠습니까? 현대적 감각에서 볼 때 적어도 10조가 훨씬 넘는 금액이라면 그 금리만 하더라도 그의 능력으로서는 도저히 갚을 수 없는데 어떻게 원금 까지를 갚겠다는 것입니까? 만약 그에게 금리라도 갚을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면 그 주인은 처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처분하여 갚으라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그렇지 않을 수도 금리 정도는 갚을 수 있는데도 원리금 상환을 요구할 수도 있겠습니다마는 그것은 의도적으로 그 사람을 망하게 하려는 행위이기에 자연스럽지 못하고 만약 그렇다면 애초에 왜? 그 많은 빚을 주었겠습니까? 그를 돕고 살리기 위해서였을 것이기 때문에 금리 정도라도 상환 능력 있는 자를 파산케 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인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극단적으로 그럴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하더라도 본문은 그런 경우와 다른 것은 그 다음에 애걸하는 그 종을 불쌍히 여겨 그 엄청난 빚 전부를 탕감하여 주었다는 사실에서 완전히 입증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인의 근본의도는 그의 처자와 모든 소유를 잃게 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고, 그를 행복하고 축복받는 빚 없는 인생, 즉 자유의 삶(갈5장1절)을 누리게 하려는 데에 있었음이 판명이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비록 갚을 수 없지만 겸손히 엎드려 주인 되시는 하나님의 선처를 간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의 현실 속에 흔히 있는 모습처럼 빚을 지고도 갚을 길이 없으면 오히려 배짱을 부리면서 “없어서 못 갚는데 무엇이 잘못이냐”는 식으로 죄인이 아닌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하면서 교만을 부리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까닭은 자신이 죄인임을 절감하고 회개하는 마음으로 십자가 밑에 엎드리는 자에게는 모든 빚은 탕감하여 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주인은 그의 모든 빚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이유없는 무조건적인 용서이고 은혜입니다. 오직 이유가 있다면 자신의 불의를 시인하여 주인의 긍휼을 간구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죄를 시인, 자백하는 자를 탕감해 주었지만 자기의 죄를 감추는 자는 그의 죄가 점점 드러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Ⅳ. 용서할 줄 모르는 종 이렇게 하여 빚 없는 자가 된 이 사람이 자기에게 적은 금액 즉 100데나리온을 빚진 동관 한 사람을 용서를 해주지 않았다는 것이 이 비유의 핵심적 교훈입니다. 이 사람은 자신이 엄청나게 큰 빚의 전적인 용서를 받았다는 사실을 생각지 않거나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있는 자와 같은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에게 빚진 동료를 “붙들어 목을 잡고”(28절) 갚으라고 호령하였고 참아달라는 그의 간청을 외면하고 그 사람을 옥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자신이 빚졌던 주인 앞에서 애원하였던 것과 꼭 같은 처지에 있었던 자기의 동관을 그것도 그전 자신처럼 참아달라고 간구하는데도 불구하였습니다. 그것도 자신이 탕감 받은 빚의 60만분의 1 밖에 안 되는 빚을 진 자를 용서할 줄을 몰랐던 이 사람의 삶의 자세가 주인의 노여움이 되었습니다. 자신이 용서받는 것은 좋고 다른 사람을 용서하기는 싫은 것 이것처럼 이기적인 삶이 없을 것이며 나아가서 이것처럼 악한 짓은 없을 것입니다. 때문에 본문에 나타난 주인은 그를 일컬어 “악한 종”이라고 합니다. 무엇이 그렇게 악한 짓입니까? 자신이 탕감 받은 것은 탕감 받은 것이고 자기에게 빚진 자를 용서해주고 안 해 주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법적 권한이 아니겠는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주인은 말합니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고 말입니다. 여기에 기독자의 윤리의 근거가 있습니다. 남을 용서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까닭은 우리가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용서는 타인의 용서를 조건부로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기 주인은 이 사람에게 일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하여 줄 때에 전혀 그러한 언급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법률적 의무가 아니고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받은 사랑의 표현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주인이 법적 권한만을 행사하였다면 여기 이 사람은 이미 살아남지 못하였을 것이고 그렇게 되었다면 타인에게 받을 빚 같은 것은 이미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 되어버렸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세인들과 다른 기독인생의 “마땅한 삶”이 있고 그러므로 신앙은 법보다 훨씬 높은 차원이어서 법적 테두리 안에서만 사는 자들에게는 이해되지 않는 것이 신앙적 차원 곧 영적 차원인 것입니다. 즉 기독인생의 삶은 하나님께로부터 전적인 은혜로 받은 용서와 사랑에 근거하여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기독자의 대 인간관계는 필히 대 하나님과의 관계를 전제로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땅한 삶이라는 것이고 이것을 넘어서는 것은 악이라는 것입니다. 무조건적으로 받은 용서와 사랑을 무조건적으로 주는 인간관계, 거기엔 분명히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내가 아무리 많은 용서와 사랑을 베풀었다 하더라도 거기엔 자랑도 교만도 있을 수 없는 것은 내가 받은 하나님의 사랑에 비할 바 도저히 못되며 동시에 나는 그 사랑을 받아 넘겨주는 역할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육학에서 문제로 삼는 부모님의 사랑을 정상적으로 받지 못하고 성장한 사람은 남을 사랑할 줄 모른다는 이 사실은 오늘 본문이 주는 교훈에 부합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참으로 사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설령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다 하더라도 그것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남에게 그 사랑을 줄 수 없습니다. 까닭은 하나님의 사랑은 언제나 우리에게 충만히 임하여 있지마는 그것을 느끼지 못하는 자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죄인임을 깊이 느끼는 정도만큼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체험할 것이고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느끼는 정도만큼 내형제에게 그 사랑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나와 여러분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죄와 용서의 사랑을 얼마나 느끼고 있습니까? 나를 용서한 그 사랑이 보인다면 나에게 범한 형제의 잘못만 보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Ⅴ. 나오는 말 자신이 받은 너무도 큰 사랑을 망각하고 자기에게 범한 작은 잘못을 용서 못하고 감옥에 넣은 이 사람을 주인은 감옥에 넣었습니다. 60만분의 1의 잘못을 용서 못한 그는 이제 60만 배의 중한 형벌을 받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긍휼 없는 자에게 긍휼 없는 심판이 적용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게 합니다(약2장13절) 믿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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