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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라사의 광인 | 원종호 | 2021-06-0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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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라사의 광인 성경본문 눅8장27-39 예수께서 육지에 내리시매 그 도시 사람으로서 귀신 들린 자 하나가 예수를 만나니 그 사람은 오래 옷을 입지 아니하며 집에 거하지도 아니하고 무덤 사이에 거하는 자라 예수를 보고 부르짖으며 그 앞에 엎드리어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께 구하노니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 하오니 이는 예수께서 이미 더러운 귀신을 명하사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 (귀신이 가끔 그 사람을 붙잡으므로 그를 쇠사슬과 고랑에 매어 지켰으되 그 맨 것을 끊고 귀신에게 몰려 광야로 나갔더라) 예수께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물으신즉 가로되 군대라 하니 이는 많은 귀신이 들렸음이라 무저갱으로 들어가라 하지 마시기를 간구하니 이에 허락하시니 마침 거기 많은 돼지 떼가 산에서 먹고 있는지라 귀신들이 그 돼지에게로 들어가게 허락하심을 간구하니 이에 허락하시니 귀신들이 그 사람에게서 나와 돼지에게로 들어가니 그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호수에 들어가 몰사하거늘 치던 자들이 그 이루어진 일을 보러 나와서 도망하여 성내와 촌에 고하니 사람들이 그 이루어진 일을 보러 나와서 예수께 이르러 귀신 나간 사람이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예수의 발치에 앉은 것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귀신 들렸던 자가 어떻게 구원 받았는지를 본 자들이 그들에게 이르매 거라사인의 땅 근방 모든 백성이 크게 두려워하여 예수께 떠나가시기를 구하더라 예수께서 배에 올라 돌아가실새 귀신 나간 사람이 함께 있기를 구하였으나 예수께서 그를 보내시며 이르시되 집으로 돌아가 하나님이 네게 어떻게 큰 일 행하셨는지를 말하라 하시니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셨는지를 온 성내에 전파하니라
(i)들어가는 말 갈릴리 맞은편 거라사 지경에 한 광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문명 속에 살던 그 도시 사람으로서 귀신들렸기(27절) 때문에 광인이 되었습니다. 귀신 들렸다는 것은 마음도 몸도 다 마귀에게 사로잡힌 자 즉 지성이나 감성, 양심 의지 같은 인격기관이 모두 마귀에게 빼앗겨졌기 때문에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그의 생각도 말도 행위도 모두 마귀의 것이 되어버린 자를 뜻합니다. “반드시 죽으리라”하신(창2장17절) 하나님이 아니라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창3장4절)한 마귀를 추종하였던 인간은 다 마귀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거라사의 광인처럼 인간 재 구실을 할 수 없는 인간 자기상실자가 된 것이 인간의 실정이었으나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받은 자는, 오늘 본문에서처럼 인간이 회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엄밀한 의미에서 이 땅에는 하나님께 속한 사람과 마귀에게 속한 두 종류의 사람만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시 사람이었던 이 거라사의 광인은 도시화 해가는 고도의 문명 속에 살고 있으면서도 그 가슴은 마귀의 정신에 들려 광적으로 살아가는 현대인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제 우리는 마귀에게 사로잡힌 자아상실자의 상태와 그가 어떻게 그 마귀의 세력에서 해방되어 인간이 회복되며, 자아가 회복된 그에게 주어진 사명은 과연 무엇인가를 본문을 추적하면서 살피는 중에 하나님께서 은혜 베푸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ii) 마귀에게 자기를 빼앗긴 자의 상태
(A) 오래도록 옷을 입지 않았습니다. 잠깐이라도 옷을 입지 않고는 밖으로 나 다닐 수도 없는 것이 인간인데 여기 거라사의 광인은 오래도록 옷을 입지 않고도 얼마든지 활보하는 인간이기에 수치의식이 없는 광인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마귀에게 붙잡힌 자는 부끄러움을 모릅니다. 즉 수치의식이 희박하다는 말입니다. 범죄하고 수치스러운 일을 행하면서도 그것을 부끄러움으로 느낄 줄 모르니 자각이 없는 자들입니다. 마귀의 힘에 의해서 모든 것이 움직여지는 자이기에 십자가의 원수로 행할 수 밖에는 없는데 이 같은 자들은 땅의 일만을 생각하는 자들로서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습니다.(빌3장19절) 즉, 올바르지 못한 부끄러운 일을 오히려 영광으로 생각하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로 옷을 입으라(롬13장14절)고 합니다. 그것이 인간의 모든 수치를 가릴 수 있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으로 그리스도로 옷을 입는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하여(롬6장3,4절) 세례를 받는 일입니다(갈3장27절)
(B) 집에 거하지 않았습니다.
마귀에게 몰려다니기 때문이었습니다. 정상인이라면 필히 집에 거했을 것입니다. 자기를 낳아주신 아버지 집을 떠난 인간들! 그들에게는 영혼의 안식처가 없습니다. 때문에 그들은 유리하며 방황하는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집을 떠난 자들의 당연한 결과입니다. 심신이 곤핍합니다. 마음에 정처가 없고 심령이 안식을 상실한 자의 삶은 또한 자행자지의 무질서 일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도 그를 통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니 악령의 힘에 눌려서 움직이는 자이기에 아무도 그를 제어할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무덤 사이에서나 산으로 늘 소리를 지르며 돌로 자기 몸을 상하게 하는 자(막5장5절)였으며 쇠사슬과 고랑을 끊고 광야를 마구잡이로 내 달리는 자, 삶의 방향도, 질서도 없는 광인! 아무도 물리적 힘으로 그를 제어할 수 없는 집을 떠난 방황인, 심령의 주인을 잃었기에 공허와 고독 때문에 언제나 술을 퍼마시고 소리를 지르며 방황하는 문명인이라 자처 하는 탕자들은 언제나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올려는지?
(C) 무덤사이에 거하였습니다.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자의 모습입니다(계3장1절) 즉 죽은 생활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실상은 생명의 자리가 아니고 사망이 거주하는 죽음의 장소를 자기의 보금자리처럼 여기는 삶의 모습 이라는 말입니다. 장차 들어갈 무덤 사이에서 사는 생활! 이것은 천국 생활을 이 지상에서 이미 시작하는 사람들과 정반대로 지옥 생활을 이미 이 세상 곧 오늘 이라는 현재에서 사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ⅲ,) 주님을 만난 광인
이것이 이 사람에게 있어서 그 광증으로 부터 즉 그 광적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축복이었습니다. 까닭은 주님만이 마귀의 세력을 제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에덴이후 사탄의 세력에 그 정신과 인격이 사로잡히고 몸과 마음을 빼앗긴 인간은 자력으로서는 도저히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리하여 인간이 자기를 상실하고 제구실을 못하던 비인간화의 역사의 흐름 속에 인간이 되어 찾아오신 하나님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인간을 구원하실 자로서의 그 분이 하시는 일은 사탄의 세력을 꺾는 것이었고 십자가에서 그것이 극치를 이루었는데 그분은 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요19:30)하시기 전에 실제로 사탄에게 사로잡혀 신음하는 자들을 많이 풀어놓아 주었고 본문은 그 대표적 사례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만난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며 축복입니다. 주님을 만나서 변화되지 않은 자가 없고 주님을 만나서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자가 없으며 성경은 주님을 만난 자들의 기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만남은 장삿속으로 만나는 거래나 철학적 사상 혹은 정치적 이념이 같기 때문에 만나는 만남도 아니며 도덕적 진리를 배우기 위한 만남도 물론 아닙니다. 오직 나를 있는 그대로 내어놓는 만남이며 이 만남에는 오직 은혜에 근거한 믿음이 필수요건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만남은 인간이 찾아가는 만남이 아니라 주님께서 찾아오시는 만남입니다. 오늘 본문도 주님께서 그곳 거라사 지방에 찾아 오셨기에 그 광인이 만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귀신들린 자 자신으로서는 도저히 주님을 찾아갈 수도 없고 주님이 찾아오시지 않았더라면 그 광증이 더욱 극심하여져서 세상을 공포와 불안에 떨게 하는 유해적 무용지물로 그의 생을 끝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찾아오신 주님을 만났기에 정상인으로 되돌아 올 수 있었으니 이 얼마나 큰 축복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A) 주님을 향한 그 광인의 고백과 태도
그러나 주님을 만나던 처음부터 그 광인은 순순히 굴복한 것은 아닙니다. 물론 쇠사슬과 고랑도 끊고 공동묘지에서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거칠게 광야를 내달리던 그였기에 이 땅에서는 아무도 그를 물리적으로는 제어할 수 없는 왕초였지만 다시 말해서 사탄의 정신에 사로잡혀서 사탄의 힘으로 휘두르며 세상 왕초 노릇하는 자들도 많지만 주님 앞에서는 그 횡포를 부리지 못하고 그 앞에 꿇어 엎드렸습니다(28절) 그리고 고백합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라고 말입니다. 마귀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한 항복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까닭은 이어서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사탄이 스스로가 자기는 그리스도와 상관이 없음을 자인하는 것이며 상관없으니 내버려 두어달라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예수 그리스도와 즉 십자가의 사건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내어뱉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실 십자가와 상관없으면 천국과 상관없는 것입니다. 혹 어떤 자들이 정도의 차이가 있는 윤리적 선행을 내세우면서 그것도 교계의 불의를 지적하면서 하늘나라나 십자가가 무슨 의미가 있으며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한다면 그는 분명히 사탄에게 얽매어 있는 자입니다. 나와 여러분! 우리 자신의 생활은 주님과 상관이 있습니까? 우리의 사업이나 직업은 주님과 과연 상관이 있습니까?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문화는 과연 주님과 상관있는 것인지? 그러나 오늘 본문에 나타난 이 광인의 고백은 최후의 발악이었습니다. 까닭은 주님께서는 이미 그 마귀에게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B) 사탄의 간청(31-33절)
어차피 그 사람에게서 나가야 할 것을 알아차린 귀신들은 “무저갱으로 들어가라”하지 마시기를 간청하다가 돼지 떼에 들어가게 해달라고 요구하였습니다. 허락하니 귀신들이 그 사람에게서 나가서 돼지 떼에게로 들어갔으므로 거의 2천 마리(막5장13절)나 되는 돼지 떼가 비탈로 내리달려 바다에 빠져 몰사하였습니다. 우리는 우선 여기에서 귀신들도 주님의 주권 앞에는 아무런 힘도 쓸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찌하여 주님은 귀신들의 청을 허락하셨을까?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그것도 근 2천 마리의 돼지를 죽임으로 다른 사람의 재산에 막대한 피해를 입히는 일을 해가면서 말입니다. 여러가지 이유들로 설명할 수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2천 마리나 되는 돼지와 귀신들린 무용지물 같은 인간! 그러나 그 인간이 더 존엄하고 가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신 행위였습니다. 즉, 돼지를 치던 자들의 눈에는 이 거라사의 광인은 돼지 한 마리와도 바꿀수 없는 무용지물일 뿐 아니라 가까이 할 수 없는 유해적 존재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이 보실 때는 비록 마귀 들린 광인이었지마는 그도 역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천하보다 더 귀한 영혼이기에 돼지 같은 짐승 2천 마리 보다는 더 크고 귀하다는 것을 보여 주신 처사 이었습니다.
(C) 주님의 발아래 앉은 온전한 사람
이렇게 주님을 만났던 이 광인은 이제 마귀의 얽매임에서 완전 해방되어 온전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옷을 입었고 정신이 온전하여 주님이 발치에 앉았습니다.(35절) 오래도록 옷을 입지 않고 살았던 그가 이제 옷을 입었고(갈3장27절 참조) 사탄에게 빼앗겼던 정신이 이제는 온전하여졌습니다. 그러한 그는 예수님의 발치에 주님과 마주 앉았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온전한 사람”은 주님과 마주합니다. 등을 돌려 앉지 않고 마주 그 발치에 앉습니다. 아니 인간은 주님과 마주 앉을 때 “온전한 사람”이 됩니다. 즉 본연으로 되돌아갑니다. 그러므로 주님만이 인간 해방자요 인간 혁명자이며 그는 연구의 대상이 아닌 만나야할 즉, 인간이면 누구나 다 만나야할 현재적으로 완전히 자아를 상실한자라 하더라도 인간을 최고의 존엄한 존재로 대우하시는 분이십니다.
(iv,) 그에게 주어지는 사명
돼지 떼가 몰사하는 것을 본 돼지 치던 자들이 도망하여 그 거라사 도성으로 들어가 많은 사람들과 함께 나와 보니 그 광인이 온전하여 진 것을 보고 크게 두려워하여 주님을 그 지경에서 떠나가기를 요구하였고 주님은 떠날 차비를 하였습니다.
(A) 주님을 거부하는 거라사인들
납득되지 않는 일입니다. 아마도 그렇게 강한 귀신을 내어 쫓는 것을 보니까 주님을 무슨 귀신 들린 자의 고수로 본 것인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아직도 한 사람이 온전케 되었다는 기쁨보다는 일시에 재산 전부가 손실된 자신들의 상업적 이해관계에 더 슬픈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주님을 거부하였는지도 모릅니다. 오늘날도 물질적 이해의 문제 때문에 주님을 거부하거나 영접하기를 주저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참으로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B) 떠나가시는 주님
배를 타고 거라사 지방에 오셨던 주님은 그 도성 안으로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되돌아섭니다. 주님은 강제로 입성하시지는 않았습니다. 즉 그의 영접을 강요하지는 결코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문을 열 자는 오직 인간 각 자이고 다만 주님은 문밖에서 문을 두드리실 뿐입니다. 이 노크 소리를 들을 때 즉시 문을 여는 것은 복됩니다.
(C) 인간 회복자에게 주신 사명
주님은 함께 따라가기를 원하는 그 온전케 된 사람을 집으로 돌려보내시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네게 큰일 행하신 것을 온성에 고하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자기를 거부하는 곳이지만 그들을 생각해서 이 거라사의 광인이었던 사람을 복음의 씨앗으로 심고 거기를 떠나시는 것입니다. 주님 대신 하나님 나라를 선포할 자로서 그에게 사명을 부여 하시는 것입니다. 일일이고하라 하신 주님의 명령을 받들어 그 온성에 자신의 체험한 하나님을 선포하였다고 본문은 증거합니다. 이것이 인간 회복자에게 주시는 주님의 사명입니다. 인간 회복이 안 된 자는 인간 해방 자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v,)나오는 말 우리는 본문에서 타락한 인간의 진상을 보며 이를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며 구원받은 자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봅니다. 오! 위대한 손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여!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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