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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너 그리고 하나님 원종호 2021-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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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너 그리고 하나님

성경 본문1511-32

 

 

i. 들어가는 말

이 비유는 한 가정의 이야기입니다주님은 인간 역사를 이 한 가정사에 부각시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이 이야기 중에 나오는 아버지와 두 아들 삼자의 관계는 나와 너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즉 인간의 삶을 나와 너의 관계라 할 수 있다면 그 관계 위에 계시고 그 관계에 관계 하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곧 인간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작은 아들에 대하여

보통 탕자로 불리어지는 이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집을 멀리 떠났다가 다시 돌아왔습니다떠났던 이유나 떠나간 경위상태결과 그리고 돌아온 이유 그 결과 등을 본문을 통해 추적하면서 인간들이 엮어가는 인간사의 진상과 그 인간사 속에 나타나는 구속사의 의미 등을 우리는 보려는 것입니다.

A. 자기 몫의 주장

이 작은 아들은 아버지의 재산 중에서 자기에게 돌아올 분깃 곧 자기 몫을 자신에게 줄 것을 요구하였는데 이 같은 그의 법적 권리 주장은 결코 잘못이 아닙니다성경본문도 이 사실 자체를 나쁘다고 지적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그러나 그것을 주장하게 된 동기가 아버지를 떠나 독립하여 살겠다는 것이었기에 여기에 생각 할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더 이상 아버지 슬하에서 아버지의 도움이나 간섭을 받으면서 산다는 것은 창피한 일이라는 것입니다까닭은 자신은 이제 그렇게 살지 않아도 될 만큼 성숙하였다는 것입니다그러므로 그 무엇에도 의존하지 않고 자주적으로 살아가겠다는말하자면 독립 선언이었던 것입니다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것 자체를 나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그러나 자신이 과연 자주 적으로 살아갈 만큼 성숙하였는가의 문제라는 것입니다우리는 보장된 법적 권리를 주장해야 하고 또한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권리행사에는 반드시 책임이 수반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즉 자기 몫을 주장하여 받은 다음에는 반드시 그것을 관리하는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입니다만약 그것을 책임질 수 없다면 자기 몫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자격이 아직 없는 것입니다그러므로 성경 본문이 교시하는 작은 아들의 잘못은 자기 것에 대한 권리행사가 아니라 그것에 대한 책임수행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의무수행보다는 다만 권리주장으로 인해 빚어진 인간 역사의 피의 발자취를 우리는 상기하여야 합니다그토록 조국 독립이란 권리를 외치며 주장하던 우리 민족이 해방 조국을 얼마나 책임져 왔는가(?)도 상기하여야 합니다.

B. 돼지우리의 현주소

자기 몫을 나누어 받은 작은 아들은 본래의 의도대로 아버지 집을 떠나 먼 나라로 갔습니다그러나 그 결과는 낙원이 아니라 돼지우리가 그의 현주소가 되고 만 것입니다비참한 결과입니다그렇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자기 선택의 길에 대한 결과였습니다.

분깃을 분배 받자 며칠이 못 되어 자기 소유 전부를 정리해 가지고 먼 나라로 향해 아버지 집을 떠난 것은 작은아들 자신이 선택한 길이었지 아버지께서 원하셨던 길은 아니었습니다아버지는 언제까지라도 그 아들이 자기와 함께 살아 주기를 원했지만 권리를 주장하는 그 아들의 자유를 강제로 막지는 않았습니다마치 선악과를 선택한 아담의 자유의지를 강제로 꺾지 않으셨던 것처럼 말입니다그러므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란 가장 고귀한인간을 인간되게 하는 근본적인 것 중의 하나이지만 그 선택의 결과는 반드시 유익한 것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때문에 자유의 남용은 방종인 것이고 그러므로 아버지의 원치 않았던전적인 자기 선택의 길이었던 그 결과가 더러운 돼지우리의 삶이라는 이 사실 자체가 하나님을 떠난 인간 삶의 현주소가 어디인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허랑 방탕의 결과였습니다.

먼 나라에 간 작은아들은 허랑방탕하여 재산을 허비하여 다 없이 하였습니다.(13아버지의 간섭 없이 사는 먼 나라이었기에 오히려 재산 허비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을지도 모릅니다하여튼 허랑 방탕이란 자기와 자기 소유를 아무렇게나 써버리는 즉 자기허비를 뜻합니다비로소 궁핍을 느낀 작은 아들의 처지는 너무도 당연한 것입니다궁핍은 바탕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역사 안의 많은 사람들은 자신과 자신의 것을 가치와 보람에다 사용치 못하고 아무렇게나 허비해 버릴 때 궁핍을 경험케 됩니다가슴의 공허마음의 불안심령의 깊은 허무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돼지 먹이로도 채울 수 없을 만큼궁핍하였던 탕자의 가난처럼 하나님을 떠났기에 자신을 낭비해 버린 인간 가슴의 공허는 돼지먹이 곧 육적본능에만 의존하여 사는 짐승의 양식으로는 메꿀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인간은 결코 돼지먹이로 배를 채울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자기 무지의 결과였습니다.

자기 소유를 다 허비해 버린 작은 아들에게 설상가상으로 그 지경에 흉년이 들어 그 나라 백성에게 붙어 사니 그는 들로 보내어져 돼지를 치게 되었으므로 돼지우리에서 사는 종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 사실은 자기 몫에 대한 책임을 제대로 수행 못했을 때 남에게 붙어 사는 즉 얹혀 사는 거지가 되던지 더 이상 자기의 권리를 주장 할 수 없는 남의 종이나 노예가 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아니 그 전체적인 결과는 인간이면서도 돼지우리에서 산다는 것곧 돼지의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같은 그의 비참한 현실적 결과는 근본적으로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그것은 물론 자기가 아버지를 떠나 자주적으로 살아갈 만큼 성장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즉 자기 무지의 결과였다는 말입니다인간의 역사는 한마디로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가는 둘째 아들의 길을 밟아 왔습니다마는 현대지성은 더 더욱 신에 대하여 자주독립을 선언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고도한 물질문명을 이룩하여 각종 편리와 풍요를 누리는 인간 이성은 아직도 신의 도움이나 간섭을 받아야 살아가던 미개한 시대처럼 어리지는 않다는 것입니다그러므로 그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고서도 자주적으로 자신들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하나님을 떠났고 떠나고 있습니다그러나 그리하여 낙원을 만들 것이라던 문명이 이룩한 현대 사회는 외형적으로는 다양한 칼라로 꾸며져 있지만 실상은 코를 찌르는 냄새로 짙어가는 돼지우리가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돼지우리이기에 돼지먹이만 있고(그것도 풍족하지 못했지만돼지이기에 돼지먹이만을 찾아 헤매는 것이 오늘 우리가 사는 현대라는 사회라고 한다면 너무 지나친 표현일련지하여튼 사람은 돼지우리에서 살수도 없고 더 더욱 돼지먹이로 배부를 수는 없습니다.

때문에 현대지성은 비로서 공허를 느끼기 시작 하였습니다물질적 풍요문명의 편리오색영롱한 샹들리의 불빛아래서 술잔을 기울이며 흔들리는 음악에 함께 흔들어 보면서도 가슴은 배부르지 못한 것이 이 시대의 현실입니다.

아니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마음의 공허는 깊어집니다그러한 것들은 인간을 참으로 배부르고 만족케 할 수 있는 인간의 양식이 아니고 돼지먹이 들이기 때문입니다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살아본 경험이 있는 자는 참으로 배만 부르면 되는 돼지먹이로는 배부를 수는 없기에 아버지 집을 향해 돌아오는 것입니다.

 

 

C. 돌아온 아들

작은 아들은 돼지우리에서 아니 거지 신세의 자리에서 비로소 궁핍한 자신을 깨닫고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범하였다고 뉘우칩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후회와 뉘우침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일어나 아버지 집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입니다돌아올 염치도 체면도 없었지만 그것을 무릅쓰고 돌아왔습니다이전의 아들 상태로서가 아니라 종으로서 이었습니다전승의 개선장군이 아니라 완전히 실패한 죄인으로서 돌아온 것입니다아버지 집을 떠나던 그때처럼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아버지의 처분만을 바라보며 거기에 자신을 맡기면서 돌아왔습니다자의대로 살던 이기적이고 교만하던 생활방식을 바꾸어 순종만 하는 종이 되기를 원하는 자로 돌아왔던 것입니다이것이 회개의 참모습입니다.

 

 

 

 

아버지에 대하여

돌아온 작은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태도는 전적으로 무언의 행동이라는 성경 본문의 특색입니다그러나 이 무언은 돌아온 아들이 못마땅하고 꼴 보기 싫어서 지켜보고만 있는 외면이 아니었습니다까닭은 돌아오는 아들을 본 아버지는 아직도 상거가 먼데도 불구하고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기 때문입니다.(20이것은 아들이 잘못을 고백하기 이전의 행동이었으므로 아버지로서는 입으로 고백하는 말을 듣지 않아도 돌아왔다는 그 사실자체가 벌써 아들의 고백이기에 그것으로 족했던 것입니다그러므로 그는 왜 그런 짓을 하였느냐는 등의 책임추궁이나 그러한 행위는 마땅치 못하다는 윤리적 설교나또는 다시는 그런 짓 하지 않을 것이라는 다짐을 받지도 않았습니다그냥 받아주신 것입니다그것도 아들의 고백대로 종으로서가 아니라 그 옛날처럼 아들로서 받아주신 것입니다즉 이것은 돌아온 아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무조건적인 아버지의 용서와 사랑에 의해서 되어진 것입니다때문에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에게 새 옷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며 살찐 송아지를 잡고 이웃을 청하여 다가 함께 즐겼던 것입니다만약 아버지가 자기 권리를 주장하던 떠나갈 때의 아들처럼 아버지로서의 권리를 주장하게 된다면 거기에는 형벌만이 있었을 것입니다그러나 아버지께서는 그 소유는 다 탕진되었으며 생명만은 살아서 돌아온 것으로도 족했던 것입니다.

 

 

 

 

큰아들에 대하여

이와 같이 아버지는 권리행사를 하지 않고 오히려 사랑으로 작은 아들을 용서해 주시는 반면에 큰아들은 돌아온 동생에 대해 환영대신에 자기 권리를 주장하고 나섰습니다어느 날 밭에서 돌아온 그가 자기 집에서 울려 나오는 예상치 못했던 풍류와 춤추는 축제의 소리에 종을 불러내어 그 이유가 돌아온 작은아들로 인한 잔치임을 알고 난 다음 그는 노하였고 그 축제에 참여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까닭은 자기 몫은 다 탕진해버린 작은 아들이 이제는 큰아들자신의 몫을 침해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그의 생각으로는 작은 아들은 돌아올 수 없고 돌아오지 않아야 하는데 그 아들을 받아줌으로 오히려 자기 몫의 재산 침해를 조장하였다고 느껴지는 아버지에게 더욱 불만이었습니다.

때문에 그는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어긴 일이 없이 여러 해 동안 아버지를 섬겼는데도 나와 내 벗들을 즐기게 해주기 위해서는 염소새끼 한 마리도 잡아주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 즉 자기 몫은 이미 다 탕진하였기 때문에 아무런 권한도 없는 그 아들이 돌아오매 살찐 송아지까지 잡으셨습니다(29)라고 항변하였습니다.

완전히 법률적 이론이며 철저한 자기권리 주장입니다선상필벌심는 대로 거둔다는 가치관에서 사는 자들이 다 이 부류에 속합니다자기 것에 대한 집착자기 몫에 대한 법적 권리 주장을 누가 나쁘다고 하겠습니까그러나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애초에 작은아들의 자기 몫에 대한 법적권리 요구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네 것”, “내 것이” 가능성으로만 존재하고 오직 우리 것으로만 있던 아버지 슬하의 시절은 한 아들의 법적권리 주장으로 인하여 붕괴되고 이제는 철두철미하게 네 것과 내 것으로 분리되고 자기권리 자기 것에 대한 이기적 관심으로만 굴러가는 인간역사의 현상이 여기에서도 교시되는 것입니다그러나 아버지께서는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라”(31하심으로서 남은 자신의 모든 것이 큰아들의 것임을 인정하시며 따라서 큰아들의 권리주장을 책망하지는 않았습니다다만 그 공의에다 사랑을 더 가졌으면 하는 것이 그 아버지의 마음이었습니다때문에 자기 동생이면서도 그 아들”(30)이라고 표현하는 큰아들에 비해 아버지는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32)고 하신 것입니다여기에 "마땅하다"하신 아버지의 자세는 법률적 이론이 아닙니다오직 사랑의 논리인 것입니다이유는 형제지간이란 법률적 관계가 아니고 사랑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그럼에도 돌아온 작은 아들의 사건이 아버지에게는 기쁨이 되었는데 큰아들에게는 기분 좋지 못한 일이 된 것은 그가 아버지와 함께 살아왔으면서도 함께 살지 않았다는 것을 증거 하여 주는 사실입니다까닭은 그는 왕과 함께 그 신하로서 사는 것이 아니라 아들로서 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하는 명을 어긴 일이 없는 것으로 족하지만 아들은 거기에 더 있어야 할 것이 있는 것입니다오늘 우리의 현실은 명을 어김이 없는 공의적 생활태도도 부족하지만 설령 그렇다하더라도 기계적인 법률성에만 서 있고 뜨거운 가슴과 사랑이 결핍된 양상들이 얼마나 많은지거기엔 네 것과 내 것의 피비린내 나는 치열한 싸움만 있을 뿐입니다큰아들에게는 명령을 어기지 않은 공의적 삶은 있었으나 용서와 사랑이 없는 시기와 질투 때문에 아버지가 베푼 잔치에 참여치 못하였습니다그러므로 큰아들도 탕자 이었습니다몸은 아버지와 함께 살았지만 마음으로는 먼 나라로 떠나갔던 탕자처럼 아버지를 떠나 있었기 때문이며 아버지의 명을 어긴 일 없이 복종한 것도 "염소새끼 한 마리라도라는 댓가를 주장하는 종의 신분으로 자기를 전락 시키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한 것입니다.

 

 

 

 

나오는 말

그러므로 결국 아버지 집을 떠나 먼 나라에 갔던 작은 아들이나 아버지 집에 함께 있었으나 아버지와 함께 산 것이 아닌 큰아들 모두가 공간적 거리와 상관없이 다 아버지 집을 떠난 탕자들이었습니다그러나 두 아들모두를 포용하는 아버지에겐 율법적 공의도 복음적 사랑도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버지 안에서만 분리되었던 것이 다시 통합이 되고 잃었던 것을 다시 찾으며 죽었던 것이 다시 살아나는(24새 역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나와 너의 관계 위에 계시고 나와 너의 관계에 관계하시는 아버지의 집그것이 곧 에덴으로부터 시작된 지구라는 인간 공동체입니다거기엔 네 것” “내 것” 이전에 오직 우리의 것이 있어야 했는데 아버지 슬하를 떠나던 인간 역사의 비극은 급기야 이 세계는 돼지우리로 변했고 인간이어야 할 사람이 돼지같이 배만 부르면 된다는 가치 기준의 오도 속에 돼지먹이로 배를 채우고자 하는 무리들로 붐비고 있으나 거기엔 배부름이 있을 수 없습니다.

참 만족과 평안이 없습니다아버지 집에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 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17)하고 탄식하던 작은 아들처럼 권리를 주장하는 아들의 자세로서가 아니라 오직 아버지의 은총에 의해 살며 순종만 하는 품꾼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종살이를 하더라도 아버지 집에는 우리를 참으로 배부르게 하는 양식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작은 아들이여 돌아오십시오큰 아들이여 돌아오십시오아버지 아래에서만 당신들의 관계도 정상화 될 수 있습니다아니 정치든경제든사회든문화든문명이든종교이든지 아버지를 떠나지 않고 아버지를 모시고 아버지와 함께 일 할 때에 인간사를 참으로 행복하게 꾸며 갈 수 있겠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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