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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정의 진정한 의의 | 원종호 | 2021-05-1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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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의 진정한 의의 (성경본문 에베소서 6장 1절-4절)
(Ⅰ) 서론 마음이 아름다운 한 미술가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을 그리고 싶었습니다. 그리하여 가장 아름다운 것을 찾아 떠났습니다. 그러다가 어떤 목사님을 통하여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믿음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부부나 부모자식간이나 또 다른 모든 사람 간에 믿을 수 없다면, 거기에는 참으로 어두움이 깊이 드리워질 것이기에, 화가는 과연 그렇겠다 싶었지만, 믿음을 어떻게 화폭에 그림으로 담을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서 다니는데, 어떤 장군 한 사람을 만나서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을 물었더니, 그 분은 “평화”라고 하면서 “만약 나라와 나라간이나 단체와 단체 간에 진정한 평화만 있다면 그만큼 행복과 아름다움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라고 말하기에 과연 그렇겠다 하면서, 또 가다가 한 여행 중에 있는 부부를 만나서,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 무엇이겠는가?” 를 물었더니, 주저하지 않고 “그것은 물론 사랑 이지요” 라고 하면서 “만약 이 세상에 사랑이 없다면 살아갈 의미가 있겠으며 기분이 나고 살아갈 맛이나 의욕이 생겨날 수 있겠습니까? 라고 할뿐 아니라 우리의 아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나의 남편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 참담함이나 그 절망과 고독이 얼마나 깊어지겠습니까?” 라고 까지 하는 말을 듣고, 화가는 역시 과연 그렇겠구나! 생각하고, 그러나 그러한 것을 어떻게 그림으로 그릴 수 있는가를 깊이 고심하면서, 지친 몸을 이끌고 자기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믿음과 평화와 사랑을 어떻게 아우르는 그림의 소재를 찾아 온 세상을 헤매다가 그러한 소재를 찾지 못하였기에, 더욱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 왔더라는 것입니다. 자기 집 대문간에 들어섰을 때에, 그렇게도 그리워진 아빠를 참으로 오랜만에 본 아이들이 아빠! 라고 크게 외치면서 달려와서 가슴에 안기고, 아빠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그 맑은 눈망울 속에서 화가는 믿음을 보았습니다. 아빠를 절대적으로 의지하는 믿음을 보고는 그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는 믿음은 여기에 있구나! 를 느끼고 있는데, 뒤이어 나온 자기의 아내는, “어디 갔다가 이제 왔느냐” 면서 눈을 흘기고 꼬집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고 “여보! 고생하였겠네요? 어디서 무엇을 먹었으며, 잠자리는 불편하지 않았느냐” 면서 자기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어깨를 들먹거리며 흐느끼는 아내를 가슴에 깊이 안으면서, 아! 여기에 세상에서 가장아름다운 사랑이 있구나! 를 느끼고는, 들어가 씻고, 닦고, 옷을 갈아입고, 저녁식탁에 모두 함께 앉았을 때, 아! 여기야 말로 참 평화가 있구나! 를 실감하면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믿음도, 사랑도, 평화도, 있는 곳은 바로 가정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평생을 가정이라는 주제로 그림을 그렸다고 합니다.
(Ⅱ) 가정의 진정한 의의 어떤 사람이 기독교를 가정적인 종교라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불교의 스님들은 가정을 떠나기 때문입니다. 대처승들도 있기는 합니다만 스님이 되려면 가정을 등져야 합니다. 결혼한 사람도 가정을 버리고 사찰에 들어가는 것이 불교인데, 거기에 비하면 기독교는 가정적인 종교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즉 메시아로서 제일 처음 행하신 이적은, 가나 혼인 잔치집의 모자란 포도주 문제를 해결하여 주신, 곧 가정의 문제를 해결하여 주심으로서 가정을 축복하셨다는 것이며, 아브라함이라는 한 남자가 아니라, 사라라는 그의 아내까지, 곧 한 가정을 하란으로부터 불러내어 이삭이나 야곱 등의 자손을 통하여, 다시 말하면 아브라함의 한 가정을 한민족으로 이루시고, 그 한 민족 이스라엘을 통하여 이 세상 전체를 구원시키는 일을 하였기 때문에 기독교는 가정적인 종교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기독교는 가정을 중요시하는 종교라고 그 사람은 말하였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사람의 말을 실로 공감하고 동의하면서도, 그러나 한술 더 떠서 기독교는 가정적인 것이 아니라 바로 “가정” 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가정이란 어떤 의미입니까?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실 때에, 사람을 맨 나중에 만드셨는데, 그것은 사람이 살아갈 수 있는 모든 조건과 환경을 만드시고, 거기에 사람을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중심은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즉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 창조의 목적이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산과 들과 강과 바다와 거기에 존재하는 등물들과 모든 식물을 통해서 하나님의 어떤 목적을 이루시려는 것이 아니고, 사람을 통해서 어떤 목적을 이루시고 싶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을 남자로만 만드신 것이 아니고, 여자까지를 만들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창조하신 것으로 창조가 끝났는데, 남자보다 여자가 나중에 만들어 졌으니, 여자까지 만드셨을 때에 비로서 창조가 완성된 것이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이 의미는 사람을 창조하셨다는 것은, 남자와 여자, 곧 가정을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가정을 통해서 이 땅을 창조하신 목적을 이루시려 하셨다는 것을 말하여 주는 것입니다. 때문에 기독교는 가정적이라는 말은 틀리지 않지만 너무 가볍게 이해한 것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이 세계를 창조하신 목적이 십자가를 통한 구원이며 또한 그것이 곧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시려는 것인데 그것을 아담과 하와라는 가정을 통해서 실현 하시려고 하셨으니까 가정이 곧 기독교이며, 아니 인간자체가 가정이기 때문입니다. 까닭은 인간을 만드셨다는 것은, 곧 가정을 만드셨다는 것이니까 말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이루어 가시려는 하나님의 나라도 인간들이 그분의 자녀들이 되는 하나님의 가정을 실현하여 가시는 것으로 말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가정이 하나님의 창조의 중심이고 목적이니까, 하나님은 이 세상 안에서 이루어 가실 목적을 가정을 통하여 실현하여 가신다는 사실이기에, 가정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Ⅲ) 가정의 위기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가정을 떠납니다. 또는 가정을 가지지 않고 독신으로 살아야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가정은 자유를 속박한다고 생각할 뿐 아니라 자녀를 생산하여 키우는 일까지도 모두가 인간을 불행하게 하는 마치 불필요하고 거치장스러운 일처럼 느끼는 사고방식이 보편화 되어가는 실정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적지 않은 남정네들이 또는 많은 여인네들이 가정에 얽매이지 않기 위해 독신으로 살아가려는 시대적 사조가 거의 만연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정말 그 어떤 것에서도 다 벗어나고 싶으면 죽어야 합니다. 살아있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어떤 문제이든지 문제는 있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자녀를 낳고 양육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 곧 삶의 법칙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복을 주신 전제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창1장27절-28절). 그러므로 가족이 축복이고 가정 자체가 축복입니다. 아내와 자녀들을 위해서 일하고 돈 버는 일이 행복이어야 합니다. 지겹고 마지못하여 하고, 즉 얽매여 있기 때문에 하는 일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동시에 남편과 자녀들의 음식을 만들고 빨래를 하고 뒷바라지 하는 일 역시 행복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불행으로 느껴지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세상에 존재케 하셨다는 그러한 소명감이 없는 태도이고, 그러한 발상 자체가 불행입니다.
사나운 맹수들도 자기의 가족들을 위하여서는 어떠한 희생도 감수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질서입니다. 짐승들에게도 그러한 본성을 넣어주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가족들을 위하여 희생하는 것은 행복입니다. 그렇게 희생할 가족조차 없는 사람들을 생각하여 보십시오. 그러므로 가정이라는 것은 아버지의 왕국이고, 어머니의 세계이고, 자녀들의 천국입니다. 실로 가정은 자녀들의 천국이어야 합니다. 인자와 엄위(롬11장22절) 이라는 말씀처럼 가정은 율법과 복음, 곧 공의와 사랑이 함께 있는 곳입니다. 아버지는 공의이고, 어머니는 사랑이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의미는 하나님은 공의이시며, 또한 사랑이시기에 가정에 있어서 아버지와 어머니는, 곧 어버이는 하나님의 계획을 따른다는 의미이고, 따라서 그 아래서 자라나는 자녀들에게 있어서는 그곳이 천국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을 처음으로 창조하실 때에, 아버지와 어머니를 창조하신 것은, 즉 어버이를 만드신 것은, 하나님을 잘 공경하고 섬기는 것이, 사람의 본분이라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해서 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가정의 진정한 의의는 사라지고, 결혼을 얽매이는 불행이라고 생각하고, 독신주의를 지향하는 사람들이 증가되고 있으니, 가정의 위기가 오고 있는 정도가 아니라 이미 가정은 위기에 깊이 빠져 들어가 있습니다. 그래서 가출하는 자녀들도 더욱 많아져 가고 있는 실정입니다.
탕자처럼 아버지의 잔소리나 간섭이 싫어서 가출하는 청소년들이 많아지니, 이 역시 가정의 붕괴를 재촉하는 현상이 아닐 수 없으며 이혼 률이 대폭으로 증가되는 부부관계 뿐만 아니라 성윤리의 파괴와 동성애를 넘어서, 동성결혼마저 합법화 되는 세계적인 추세에 따라 우리나라 에서도 간통죄는 이미 폐기되었고 동성애나 동성혼을 막아야 한다는 기독교적인 대응이 크게 소리 높여 외쳐지는 실정이 아닙니까? 진정 가정은 거의 붕괴되었거나, 붕괴의 위기에 와 있습니다. 아버지의 간섭에 얽매이기 싫어서, 아니 가정이라는 틀에 메이기 싫어서, 아버지 집을 떠나간 탕자가 자유를 누린 것이 아니라, 도리어 다른 것에 얽매여 종살이를 하였던 것이 아닙니까? 그러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면 무엇인가에 의존하게 되는 것이 필연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의존적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은 무엇인가에 의존하고 라야, 그 마음에 안정과 평화가 있게 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존하는 것이 없으면 헤매게 됩니다. 방황하게 됩니다. 마음을 붙일 곳이 없게 된다는 말입니다. 인간이란 아무데도 의지할 곳이 없게 되면 허무와 고독과 불안에 차서, 헤매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정신적 지주, 마음의 터전이 무너졌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집을 떠난다고 하여 자유로울 수 없고, 오직 하나님께로 돌아올 때에, 곧 하나님을 의지할 때에, 그 어떤 것에도 잡히지 않고, 육체적이거나 세속적 노예가 되지 않는, 참 자유, 참 평화를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정은 참 믿음의 근거요, 참 사랑의 근거이며, 참 평화의 근거입니다. 가정은 하나님자기의 계시이며, 곧 하나님자신의 투영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시대는 이 가정의 참된 의미가 퇴색되어 간다는 정도를 넘어서, 붕괴의 위기에 봉착하였다는 사실입니다. 가정의 위기는 곧 인간의 위기입니다.
(Ⅳ) 가정은 하나님의 축복의 기관 하나님의 창조의 중심이 가정이라면, 가정을 통해서 하나님은 이 땅에 어떤 목적을 이루시고자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그 가정을 통해서 모든 하나님의 축복이 모든 만물에게 흘러가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엄친자당(嚴親慈堂)! 곧 아버지는 공의, 어머니는 사랑, 즉 아버지는 율법이고, 어머니는 복음과 같은 의미인데, 하나님에게는 이 공의와 사랑, 곧 율법과 복음이 함께 있으니, 곧 아버지 어머니, 곧 어버이는 하나님을 뜻하는데, 그 아버지 아래서 자녀들은 천국을 누리는 것이 가정이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어버이가 없는 사람은 가장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고아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과부나 편부슬하에서 성장한 고아들에게서는 율법이거나 아니면 지나치게 사랑만을 요구하는 그러한 일들을 보게 되는 것이 일반적 현상입니다. 그러나 편부보다는 그래도 편모슬하에서 자라난 자녀들이 괜찮기는 하지만, 어떻든 결손 가정에서 성장한 사람들에게는 정신적으로나 정서적으로 결핍이 있는 것이 일반적이라는 말입니다. 지나친 아버지의 간섭이나 잔소리가 듣기 싫어서, 즉 자유롭고 싶어서 아버지 집을 떠났던 탕자였지만, 결국 자유로운 존재가 아닌, 들로 가서 쥐엄 열매나 먹으면서 돼지를 치는 종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 사건이 주는 영적 의미가 무엇입니까? 인간은 본래 무엇인가에라도 자신의 생을 의지하는 것이 있어야 안정을 누리는 존재입니다. 만약 그렇게 의지할 것이 없다면 방황하게 됩니다. 마음이 정착할 곳을 잃는다는 것입니다. 재물이나 명예, 권세, 지식, 부모, 자식, 또는 철학적 사상이나 경제적 이익을 의지할 수도 있습니다만, 그러한 것은 인간의 가슴에 참 평화와 만족을 주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므로 그러한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의지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의지할 때에, 참 가슴의 평화와 안정과 자유가 있게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무엇을 하고, 하지 말라는 것은, 참 자유와 참 만족과 평화에로 가는 길입니다. 그러할 때에라야, 그 어떤 것에도 묶이지 않고, 잡히지 않고, 노예가 되지 않고, 얽매여지지 않는 참 평화와 자유가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성경은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 함이 있다고 하며”(고후3장17절)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한다”(요8장32절) 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말합니다만,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면 어디에 종이 되어도 종이 되는 것입니다. 그 어디엔가 잡히고, 얽매이고, 그것에 의해서 조종되는 사람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버이, 곧 가정을 떠나는 것은, 기혼자이든지 독신주의자이든지 거기에는 불행만 있을 뿐입니다. 즉 가정에서 가족 간에 믿음을 이루지 못한 사람이 밖에 나가서 다른 사람과 신뢰의 관계를 올바르게 이룰 수가 있을까요? 가정에서 진정한 사랑을 알지 못하고, 즉 주고받지 못한 사람이 밖에 나아가면 사랑의 사람이 될 수 있겠습니까? 또한 가정에서 평화를 누리지 못한 사람이 어찌 밖에 나가서 평화의 유대를 이루며 살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그 가정이 믿음과 축복의 기관입니다. 하나님의 창조가 사람을 만드셨다는 것은, 곧 가정을 만드셨다는 것이기에 그 기관을 통하여 이 땅위에 하나님의 일을 시작하신 것이고, 이루어 가시는 근거로 만드셨다는 것은 그 가정이, 곧 하나님의 모든 능력과 복이 들어가는 기관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가정을 통하여 모든 만물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전달되고 들어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곧 가정이 만복의 근거요, 믿음의 근거이며, 평화의 근거요, 사랑의 근거라고 하는 자체가 어디에 뿌리를 합니까? 하나님께 뿌리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정을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만드셨다는 것은 가정을 만드셨다는 것인데, 그 가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곧 천국을 이루고, 그 가정을 통해서 모든 피조물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있게 하셨는데, 그 가정이 깨어지고, 그 가정이 파괴되고, 그 가정이 부실하고, 그 집이 부패하였습니다. 그리하였더니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하던 하와에게, 곧 “저 여자가! 선악과를 따서 줌으로 먹었다” 고 하여, 책임을 몽땅 아내에게 돌리고 자기는 빠져 나가려 하였던 사람이 인간의 조상 아담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의 아내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고 자기는 빠지려 하였던 거기서부터 인간의 타락이 시작된 것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그것이 곧 이기주의 이었습니다. 가정에서도 이기주의가 팽배하여진 우리 시대는, 과연 그 아담과 하와의 타락의 계승이기 때문입니다.
이 아담과 하와의 부부관계가 깨어진 것이, 곧 인간타락이요, 가정의 타락입니다. 그러한 가정과 그러한 가정으로 구성된 사회에서 자라나는 현대인들이 믿음이 있을 수가 있는지? 거기에는 장삿속이 우선되고, 이기주의가 위주가 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따라서 그러한 가정에는 믿음도 평화도 사랑도 있을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인간의 타락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진정한 구원은 가정이 먼저 회복이 되어야 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믿음은 하나님과의 관계이고, 사랑은 사람과의 관계이고, 평화는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이 평화를 누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불신하고 불순종한 결과로 가정이 파괴된 것이기에, 즉 믿음으로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불순종함으로 하나님을 떠나 마귀를 순종하였으므로, 첫째 아담의 가정은 깨어졌지만, 하나님을 절대 순종함으로 마지막 아담, 예수그리스도의 가정은 완전히 회복이 됩니다.
그런데 그 마지막 아담의 가정이 바로 교회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지체된 사람은, 하나님이 아버지시고, 다 그의 자녀인 형제자매들이기 때문이며, 또한 다른 의미로는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그리스도의 신부들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에 가정의 성경적 의의 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정과 교회는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위에 세우신 것은 가정과 교회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큰 기업이나, 교육기관이나, 어떠한 나라들을 세우신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사람이 세웠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세우신 것은 가정과 교회뿐이었고, 그것은 둘이 아닙니다. 하나입니다.
(Ⅴ) 가정과 교회(엡5장22절-32절) 가정의 핵심이 남편과 아내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부부로서 가정을 시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부부가 자기의 참 도리를 다 하는 것이, 즉 남편은 남편의 도리를, 그리고 아내는 아내의 도리를 잘하는 것이 가정이 회복되는 것인데, 본문은 이것을 정확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A) 아내의 도리 아내들은 남편에게 복종하여야 하는데,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자를 주관치 말라고 하였고(딤전2장12절) 집에 가서 남자에게 물으라고 하였으며(고전14장35절) 교회에서는 잠잠하라고 한 것입니다(고전14장34절).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그가 몸의 구주시며, 그렇기 때문에 아내들도 남편에게 복종하라(엡5장22절) 는 것입니다. (B) 남편의 도리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이것은 물론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몸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하심이라(엡5장27절) 남편들도 아내를 사랑하는 것은 그들로 하여금 거룩하게 하려 하시는 것입니다. (ㄱ) 남편들은 아내 사랑하기를 자신과 같이 하라.(엡5장28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몸이니까요? 그리스도의 몸이 교회인 것같이 말입니다.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함과 같이 하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지체임이니라. 그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 그 둘이 한 몸을 이룰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엡5장32절) 고 하였습니다. (ㄴ) 그리스도와 교회는 곧 남편과 아내. 그리스도와 교회가 원본입니다. 즉 아내가 하여야 할 도리도,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한 것 같이 하라는 것은,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는 것이 원본이라는, 즉 그것이 본래의 본질적 의미라는 것이며, 남편이 하여야 할 도리도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고 위하여 자기 몸을 주신 것과 같이 하라는 것은, 역시 그것이 원본이고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부부관계에다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비유한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계시하는 것이 부부관계이며,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이루기 위하여 부부관계, 즉 남편과 아내라는 가정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담과 하와를 지으신 이유이며 뜻이었습니다. (ㄷ) 그렇기 때문에 아담과 하와를 지어 놓으시고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2장24절) 고 하셨는데, 부부관계를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에다 맞추어야 할 것을 말씀하시면서, 이 말씀을 신약성경이 본문에서도 한다는 것은, 부모를 떠나 둘이 한 몸을 이루라 는 말씀이 바로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한 말씀임을 확인시킵니다. 따라서 “이 비밀이 크도다”(엡5장32절) 라고 말하면서 바울사도는 “내가 지금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고 하는 것입니다. “이 비밀” 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곧 아담과 하와라는 남녀를 즉 신랑과 신부를 만드신 목적이 그리스도와 교회를 의미하는 것이기에 비밀인 것이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었기 때문에 그의 신부인 교회, 곧 그리스도인들이 생길 것을 아담을 잠시 잠들게 하고, 그의 갈비를 취하여 그의 신부 하와를 만드신 일, 즉 아담의 옆구리에서 피가 흘러졌기에 그의 신부가 생긴 일을 통해서 계시하셨던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 비밀이 큰 것이고, 그래서 바울은 남편과 아내를 말하고 있지만, 그것이 실상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담은 그리스도의 모형이라고 성경은 확증합니다.(롬5장14절) 따라서 본질적으로 말하면 아내보다 남편이 더 어렵고 힘드는 것입니다. 아내는 복종만 하면 되지만, 남편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주신 것처럼, 곧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던 주님처럼 희생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특히 아시아권에서는 오히려 아내에게 희생이 강요되어 왔던 것입니다. 남편의 갈비뼈(창2장22절) 로서 창조되었다는 말씀 때문에 여자는 남편의 부속품처럼 여기어져 왔습니다. 그러나 돕는 배필이니까 전적으로 남자만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돕는 배필이란? 그 돕는 배필이 없으면 남자도 아무것도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단순히 돕는 자, 협조자가 아니고, 돕는 배필이기 때문입니다. 배필이란? 머슴살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남편과 동등입니다. 더욱이나 부부관계가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계시하는 것이고, 그것을 이루어가는 것이라면, 돕는 배필이란 그리스도를 돕는 배필이지 남편이라는 인간적 존재를 마냥 돕는 배필이 아닌 것입니다. 이미 우리가 살폈던바 대로, 이 세계의 창조가 이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이루려고 하는 것이 틀림없다면 천지만물, 곧 모든 생물을 암수로 만드신 것도 역시 그리스도와 그의 신부인 교회, 곧 구원받을 자들을 계시하시는 의미의 본질적 목적이 들어 있을 것이 분명합니다. 더욱이나 특히 물고기들의 경우 새끼를 낳게 하기 위하여 알을 암컷에게 잉태케 하고는 그 생명의 최후를 마친다는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신 일을 뜻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또한 인간을 남녀로 만드신 것이 진정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한 것이라면, 그들에게 복을 주어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는 의미 역시, 단순히 육적 자손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영적 자손들에 대한 의미가 더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의미이었음이 부인할 수 없는 사실로 밝혀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땅을 정복하고 모든 만물을 다스리라”(창1장28절) 하신 것도 영적 의미가 더 본질입니다.
(Ⅵ) 부모를 공경하고 순종하라 (A) 공경해야 합니다. (ㄱ) 동정이 아닙니다. 동정은 상대를 나보다 조금 낮은 자로 여기는 것이기에 참 사랑은 아닙니다. 아무리 나보다 못하고 결함과 부족함이 많은 부모라 하더라도, 부모를 나보다 낮추어 평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ㄴ) 나와 동등으로 대하면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위치가 나보다 못하다 하더라도, 그 부모를 나보다 인격적으로 높이어야 참된 것입니다. 사람위에 사람 없고 사람아래 사람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만인이 평등하지만, 부모는 자신과 평등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ㄷ) 그런데 공경이란? 나보다 높이는 것입니다. 부모는 공경해야 하는데, 그것은 존경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에도 부모는 존경해야 합니다. 무시하면 안 됩니다. 그 부모가 없었다면 “나” 라는 존재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부모를 통해서 “나” 를 이 세상에 보내셨으니까 그 부모를 공경해야 하고, 또한 하나님을 공경하는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B) 순종해야 합니다. (ㄱ) 복종이라도 해야 합니다. (ㄴ) 그러나 자원하는 마음과 즐거워하는 마음으로 하여야 합니다. (ㄷ) 장사잇속으로 해서는 안 됩니다. 부모의 재산을 많이 상속받아 내기위하여 효도하는 것은 효도를 흉내 낸 것이지, 효도가 아니고 오히려 죄악입니다. 기생이 돈을 많이 빼내기 위하여, 부자에게 마음에도 없는 온갖 애교와 아양을 다 떨고, 서비스하고, 몸 둥이 까지 주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추악한 범죄입니다. (Ⅶ) 자녀에 대한 부모의 올바른 신앙의 자세 (A)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떠한 경우를 막론하고 노엽게 해서는 안 됩니다. 까닭은 노엽게 하면 그 자녀들의 정서가 정상적으로 성숙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징계나 책망을 할 경우에도 그 마음에 오래도록 상처가 되는, 즉 그 자녀들의 인간성이 정상적으로 성장하는 일에 장애가 되도록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에 찬 가슴과 눈빛과 표정과 말로하여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B)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여야 합니다. 전통적인 윤리나 현실적 사회의 공인된 정의감 같은 것으로 양육하거나, 철학적이고 이성적인 위인들의 정신이나 사상으로 양육하지도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서,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녀들을 양육하여야 합니다.
(Ⅷ) 나오는 말 오래전에 스웨덴의 어느 양로원에서 한 할머니가 자살하였는데 유서에 “나는 동물원의 짐승이 아니다.” 라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사회보장제도가 잘되어 있는 나라이기에 그 양로원은 우리나라 호텔의 중, 상위 수준이기에 먹고 입고 살아가는데 모든 것이 결핍하지 않았습니다만 외로웠던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은 정말 동물이 아닙니다. 육체적 삶의 안전도만으로는 행복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우리나라 T.V에서 본 프로였습니다. 나이 많은 할머니를 양노원에다 맡겨 놓고 돌아오는 승용차 안에서 꼬마 아들 녀석이, “아빠! 왜 할머니를 양노원에다 맡기는데?” 라고 묻는 아들에게 그 아빠는 “나이 많이 들면 다 그렇게 하는 거야!” 라고 대답하였더니, 그 아들 꼬마가 “그렇다면 이 다음에 아빠 엄마가 늙으면 나도 아빠 엄마를 양노원에 갔다 맡기면 되겠네!” 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깨닫고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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