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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자가의 의미 | 원종호 | 2021-03-2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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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의미 (성경본문 고린도 후서 5장 10절-19절) (Ⅰ) 들어가는 말 오늘은 이 지상의 모든 교회들이 고난주일로 지키는 날입니다. 우리도 그러한 날을 반드시 지키자는 의미가 아니지만, 십자가의 의미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생각하고자 합니다. 십자가의 의미라면 대단히 큰 제목입니다. 기독교 전체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기독교의 특징이며 특성이고 그 전부입니다. 다른 종교에는 이 십자가가 없기 때문입니다. (Ⅱ) 십자가의 의미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아담의 범죄와 타락을 회복하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 모든 문제의 해결의 길입니다. 단순히 죄 문제만의 해결이 아니라, 가난의 문제나 질병의 문제 등을 막론하고 인간 모든 문제의 해결의 대안입니다. 그러나 특히 죄악의 문제를 처리하고 해결하는 유일의 방법입니다.
(A) 그렇다면 죄란 무엇입니까? 일반 적으로 사람들은 윤리적 죄만을 죄라고 하지만 성경은 마음의 죄도 있다고 합니다. 예컨대 십계명중 부모공경과 살인, 간음, 절도, 거짓증거, 이웃을 탐내지 말라고 한(제5계명부터 제10계명까지) 계명들은 다 사람이 사람에게 행하여야 할 마땅한 도리를 말하는 윤리적인 계명이고, 다른 신이나 우상승배를 하지 말고,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고,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는 제1계명부터 제4계명도 지켜야 할 마땅한 도리인 비윤리적인 계명들입니다. 그러므로 윤리적인 죄도 물론 죄이지만, 비윤리적인 죄도 당연히 죄인 것입니다. 비기독교인은 물론 그리스도인들까지도 일반적으로 윤리적인 죄만 죄로 생각하는 성향이 더 크기 때문에 비윤리적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관심도 약하고, 지키지 않아도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습니다. 성경은 믿지 않는 것이 죄라고 합니다. 자기 부모나, 자식이나, 형제나, 남편이나, 아내 같은 사람을 믿지 않는 것도 죄악일수 있지만,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죄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보혜사 성령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세상을 책망할 세 가지 가운데 “죄에 대하여 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 것”(요16:9)이라고 주님께서 직접 말씀하셨으며 “믿음으로 따라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롬14:23)이라고 또한 성경은 증거 합니다. 믿지 않는 다는 것은 단순히 실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믿지 아니한 모든 것”이 죄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하는 것이 죄입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께로 따라오지 않는 불신앙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가장 큰 죄가 되는 것은 그들은 다 구원받지 못하고 지옥의 멸망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기도를 하지 않고, 성경책 읽지 않고 십일조를 바치지 않는 것은 다 죄입니다. 부모공경이나, 살인, 절도, 등을 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십계명 말씀과 꼭 같은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이뿐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을 지키는 것이 사람의 본분”(전12:13)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들은 윤리적인 도리만 다하면 인간의 도리를 다하는 것으로 여기지만 아무리 윤리적 도리를 다했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경외치 아니하면 즉 섬기지 아니하면 그는 인간의 본분을 다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윤리적인 죄와 함께 하나님을 순종치 않는 것도 죄인 것은 틀림없지만,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 더 큰 죄라는 것은 그것이 모든 죄의 뿌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의 죄가 뱀, 곧 마귀를 믿고 하나님을 믿지 않은 죄이었고 그것이 인간들의 모든 죄의 근원이었기 때문입니다.
(B) 그렇다면 왜? 죄를 없애야 합니까? 인간들은 죄를 없애려 합니다. 동서와 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이 존재하였던 곳에서는 다 죄악을 없애려고 하였지 죄악을 장려한 곳은 없었습니다. 지금도 세계의 어떤 나라 어떤 민족이나 종족 부족을 막론하고 자기들이 살아가는 사회에서는 죄악을 없애려고 합니다. 그래서 경찰과 검찰이 있고 법정이 있고 교도소가 있고, 각종 N.G.O들이 있고 유치원으로부터 대학원에 이르기까지 도덕 교육이 있고, 다양한 철학이론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그토록 죄악을 없애고 없애보려고 애쓰는 것입니까? 그것은 죄가 인간을 가장 불행하게 한다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질병이나 가난이 인간을 가장 불행하게 한다고 생각하여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그토록 몸부림칩니다. 이것이 경제 지상주의나 물질 만능주의에 인간을 침몰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가정이 경제적으로는 풍족하여 여유가 넉넉하고 가족들이 다 건강하다고 하더라도 부부 중에 한 사람이 바람을 피운다거나 그 자녀가운데 악한 짓만 하고 다니는 자녀가 있다면 그 가정이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즉 죄가 있으면 아무리 돈 많고 건강하여도 거기에는 행복이 있을 수가 없고 역으로 가난하다 하더라도 부부사이나 부모 자식 간에 전혀 어떠한 거짓이나 죄도 없다면 거기에는 얼마든지 행복이 넘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는 인간을 원초적으로 불행하게 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죄를 그토록 없애려고 합니다. 이것은 또 하나의 십자가의 의미로서 깨달아야 할 측면입니다. (C) 그러나 인간들은 그 죄의 문제를 온전히 처리할 수도 해결할 수도 없습니다. 그처럼 죄라는 것이 인간을 가장 불행하게 하는 정도가 아니라 원초적으로 불행하게 하는 것이라면 인간들이 그 죄의 문제를 해결하면 될 것인데 어찌하여 그것이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로서 라야 해결된다는 것입니까? 그것은 인간 스스로는 죄악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인간들 스스로는 죄의 문제를 처리하고 해결할 수 없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선악과를 따 먹은 인간의 타락입니다. 인간의 타락이란 과연 무엇이며 선악과를 따먹었는데 도대체 그것이 어떻게 되었기에 인간들은 스스로의 노력이나 방법으로는 죄의 문제를 완전히 처리하고 해결할 수 없다는 것입니까? 즉 어찌하여 인간은 완전히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이 될 수 없다는 말인가? 하는 문제는 평소에 많이 말씀드렸기 때문에 여기서는 더 이상 말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다”(롬3:20)는 성경의 의미도 인간은 율법을 다 지킬 수 없다는 것이며 다 지키므로 완전히 죄에서 벗어나야 역시 완전한 의인이 되는데 그럴 수 없다는 것이 아담이후의 인간들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서 인간은 영이 죽게 되었기 때문입니다.(창2장17절) 따라서 앞에서 말씀드린바와 같이 인간들이 그토록 죄를 없애려 하지만 죄는 없어지지 않고 오히려 죄가 더 많아졌고 더 많아져 가고 있는 현실이며 사실입니다. 낫 놓고 기억자도 모르던 우리나라의 선조들은 괭이, 삽, 호미로 다 그 힘들던 농사를 짓고 살면서도 지금보다는 훨씬 더 순수하였고 죄도 많이 짓지 않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대학출신이 발에 차일만큼 많아져서 사람들의 의식수준이나 문화양식이 대단할 뿐 아니라 그만큼 기술문명의 혜택 곧 편리와 풍요를 만끽하면서 살아가는데 어찌하여 범죄는 더 다양하여 지고 죄의 질도 흉악하여지며 그토록 악하여 지는 것입니까? 아무리 문명의 혜택과 물질적 풍요를 누린다 하더라도 그런 것으로는 인간성이 근본적으로 개선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여 주는 것입니다. 이 같은 근본적 의미는 그토록 죄를 없애려고 하지만 인간들의 자력으로는 그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증거 하는 사실입니다. 더 많은 사람들은 죄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도 관심도 희미하거나 아주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죄가 자기들을 행복하게 한다고 생각하며 의도적으로 죄를 범하고 죄를 즐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쾌락에 도취되어 불륜을 즐기고 도박과 사기와 밀수와 각종 비리와 부정을 자랑하면서, 그것이 성취되는 것을 성공과 승리와 행복과 지혜로 여기고는 도리어 그렇게 하지 못하는 자들을 바보, 병신, 얼간이, 모자라는 사람 곧 실패한 사람으로 취급하는 사람들이 증폭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다시 말하지만 인간들로서는 죄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로서만 모든 죄의 문제는 해결되는 것입니다. 인간들로서는 안 되기 때문에 인간 세계의 밖에서 이 죄 문제 해결의 길이 와야 하였다는 그것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신 이유입니다. 즉 인간들로서는 죽은 영을 다시 살리는 길은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그 예수그리스도도 사람이 되어야 하고 무죄한 사람이 되어야 하였던 이유는 사람이 아니면 사람의 죄를 대속하는 일을 할 수 없고 또한 무죄 자가 아니면 대속의 제물이 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짐승의 피로서는 사람의 죄를 사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히9:22, 레17:11) 그러므로 또 다시 말합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이외에는 인간의 죄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는 길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윤리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참 진실한 인간일 만큼 깨끗하게 살기 때문에 칭찬받으며 그 사람은 법이 없어도 살아갈 만큼 착한 사람이 된다면, 그것이 죄의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사람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더욱이나 예수님의 관점에서 보면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으면 이미 간음한 것이고(마5:28)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이미 살인한자(요일3:15)라는 기준에서 보면 죄 문제를 어찌 인간 스스로가 다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미 말씀드린 바이지만 죄를 미워할 줄도 모르는 사람 아니 죄를 지혜롭고 자신이 더 잘되고 행복하여 지는 것이라 생각하고 즐기는 사람도 있지만 죄의 가책을 느끼는 사람도 있습니다. 죄에 대하여서 희미하게든지 강하게든지 아파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회개를 하여도 할 것이며,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는데 대한 양심의 아픔이 크면 클수록 그만큼 더 좋은 신앙양심의 소유자입니다. (Ⅲ) 역사의 중심인 그리스도의 십자가 오늘 우리의 성경본문은 한사람 곧 예수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셨다고 합니다. 이 모든 사람이란 인류의 최초의 사람 아담으로부터 이 세상 종말까지 이 세상에 살아갈 사람 곧 모든 인류를 의미하는 것이니까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 모든 사람과 관계되는 역사의 중심이라는 것입니다.
(A) 창조의 목적 제가 평소에 자주 말씀드렸던 것처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창세전(엡1:4) 만세전(고전2:7) 그리고 영원한때 전부터(딤후1:9) 세워진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이 세계 안에서 지금부터 만세전 영원한때 전에 계획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세상이 창조되기 전부터 계획되었던 십자가는 이 세계의 창조와 무관한 것일 수가 있겠습니까? 100%관계가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까닭은 십자가 성취 이외의 다른 목적이 성경 안에 발견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 세계의 시작부터 그 종말까지의 운명을 다루는 책인데, 그 성경의 주제가 그리스도와 그 십자가(요5:39)라는 사실로도 이 세계 창조의 목적이 그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사실이 드러나고 이미 언급된 오늘 우리 성경 본문의 증거처럼 아담으로부터 이 세상 끝 날까지의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신 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면 그 십자가는 이 세계 창조의 목적임이 분명하여 지는 것입니다. 이뿐 아니라 바울사도는 보이지 아니하는 형상인 그리스도에 의하여 만물이 창조되었을 뿐 아니라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다(골1:15-16) 함으로서 그리스도는 창조될 때 하나님으로서 단순히 세계의 만물을 창조하신분만이 아니고 만물이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다는 것은 만물이 그의 십자가를 위하여 창조되었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되어 진 것이 없느니라”(요1:3)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서도 그가 없이는 곧 그리스도가 없이는 하나도 된 것이 없다는 것은, 단순히 모든 것이 그에 의하여 창조되었다는 의미만이 아니라 즉 그가 없이 되어 진 것이 없다는 말은 그가 없이는 되어 질 것도 없다는 것이므로 예수그리스도 곧 그의 십자가 없이는 되어 질 것도 없고 그러므로 이 세계 만물은 그 십자가를 위하여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위하여 만물이 존재하는 것이니까 그 안의 모든 만물은 다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들이 틀림없는데 그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이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실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지 창조의 목적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이루는 것이기 때문에 천지와 만물은 이 십자가의 성취를 위하여 있는 도구들이며 재료들이고 비용인 것입니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이 세계의 역사는 십자가의 성취를 위하여 있는 것이기에 이것이 그 성취와 함께 이 세계의 역사도 종지부를 찍게 될 것입니다.
(B) 십자가의 크기 (ㄱ) 시간적으로 영원한때 전부터에서 이 시간 세계의 끝까지를 그 성취의 기간으로 계획되어지고 진행되어지는 일입니다. 이 세계를 단 6일 만에 그것도 말씀만으로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이 십자가 구속사역의 성취는 시간세계의 계산으로 만도 창조 시부터 골고다의 십자가까지 무려 4천여 년을 걸려서 이루셨다는 것이고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을 구원시켜야 하는 십자가의 목적은 이 세상의 끝 날까지 가는 것입니다. 그 만큼 큰일이며 위대한 일이었습니다. (ㄴ) 공간적으로 이미 충분히 말하여졌다고 생각합니다만 이 세계 전체와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을 도구와 자료와 비용으로 삼아서라도 이루어야 할 만큼 하나님에게 있어서도 큰일이며 그만큼 중요한 일이었다는 사실입니다. (ㄷ) 독생자까지도 이뿐 아닙니다. 둘도 아니고 하나밖에 없는 자기아들을 희생의 제물로 넣고라도 이루시고 싶은 일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초시간적 존재가 시간적 존재가 되고 초 공간적 존재가 공간적 존재가 되고 초 생리적 존재가 생리적 존재가 되는 그리스도의 화육은 그 자체가 고난이고 어려운 수난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의 출생까지도 짐승의 우릿간이었으니까 범죄 한 인간들로서 아무리 가난하여도 짐승의 우릿간에서 태어나는 일은 없었는데 인간 이하의 짐승처럼 짐승의 우릿간에서 출생하였고 태어나자마자 약대에 실려 애굽으로 피신하였고, 나사렛 동네에서 성장의 기간을 일찍이 세상을 떠났을 것으로 추정되는 그의 육적 아버지 요셉을 도와 힘든 목수의 일을 하였을 것이며 그 아버지 사망 후 아마도 어머니와 동생들(마13:55)의 생계를 위한 부양의 의무를 담당하였을 것이며 또한 메시아로서 그의 사역은 피곤하기도 하였기에(요4:6) 그렇게 넓지 않은 갈릴리 바다로 건너가는 동안에 배안에서 주무시기도 하였으며(막4:38) 어떤 때에는 시장하셔서 길가의 한 무화과나무에 가서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하시기도 하였고(마21:19) 습관을 쫓아 겟세마네동산에 가서 기도하심으로(눅22:39) 밤을 지새우기도(눅6:12) 하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다 잘 아는 대로 십자가의 수난에서는 가시면류관 쓰시고 대못에 찔려서 사지에 피가 흐르고 얼굴에 침 뱉음을 당하며 채찍을 맞고 실로 수많은 희롱과 멸시를 받았을 뿐 아니라 두 손 두발에 대못이 박히고 무려 여섯 시간동안이나 물과 피를 한 방울도 남김없이 다 쏟으며 운명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아니 엘리엘리 라마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고 그 고통을 비명으로 절규하였지만 태양마저 빛을 잃은 캄캄함이 짙게 드리워진 체 하나님은 한마디의 응답도 없으셨습니다.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야 두말할 필요도 없지만 세상에 출생하신 이후로도 지금까지 한 번도 주님을 떠난 일이 없었던 하나님은 이 순간만은 자기 아들의 외마디 비명에도 침묵하셨던 것입니다. 아니 온 세상의 모든 죄를 짊어진 아들이기에 조금도 봐주는 일없는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의 형벌이 여지없이 떨어지고 쏟아져 내렸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모든 만물을 그 비용으로 넣고 무려 전능하신 하나님도 4천년이나 걸려서 그것도 자기 아들까지도 희생의 제물로 넣고서야 이루셨던 이 십자가의 구속 사역은 그만큼 크고 위대한 일이었다는 사실입니다.
(C) 십자가의 전후와 좌우 (ㄱ) 십자가의 전후 이는 그 십자가 그 이전과 그 이후가 얼마나 달라졌는가? 함을 고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본래 로마 제국의 사형수를 죽이는 사형 집행 형틀이었습니다. 지금은 전부 전기의자나 총살형이 아니면 목메어 죽이는 정도의 사형 집행방법이 있고 십자가형은 없습니다. 그 당시에는 단두대와 목메어 죽이는 것과 십자가형의 사형집행 방법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형은 가장 죄질이 나쁘고 죄가 많은 흉악범들을 죽이는 사형방법 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십자가형에 처하여졌던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까지는 사람들은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도 싫어하였습니다. 더욱이나 그 십자가의 처형 현장을 그 누가 보고서 즐거워하였겠습니까? 생각만 해도 끔찍스럽고, 소름이끼치고 몸서리 쳐지는 그러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십자가 처형 장소에는 아무 일 없던 때에도 그 곳에는 사람들이 가까이 가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나라에도 경상북도 칠곡군 어느 곳에 총살형으로 사형수를 죽이던 그 곳에는 대낮에도 그 근처에는 어떤 사람이나 나무꾼들이라도 가지 않으려 한다는 것입니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이같이 십자가도 그러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이후에는 이 십자가는 모든 사람이 가까이하고 싶은 사랑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십자가를 근거로 적십자 운동도 생겨서 적십자 병원 등 각종 적십자 운동이 활발하고 전쟁터에서도 적십자의 깃발이 서있는 곳에는 비행기가 폭격도 아니 하고 총격도 하지 않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어디 이뿐입니까? 적십자 운동도 있고 녹십자 운동도 있고 청십자 운동도 있고 교회마다 십자가가 없는 곳이 없고 아무튼 십자가는 다 좋은 곳에 사용되어지기도 하고 어떤 나라에는 국기에 십자가를 그려 넣은 것도 있지 않습니까? 만약 그 십자가를 생각하기만 하여도 오싹오싹 소름이 끼치는 십자가라고 하면 어찌 그 십자가를 생의 목적으로 바라볼 수 있겠으며 그 십자가 아래에서 밤새도록 울부짖으며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심지어 그 십자가로 목걸이를 만들어 목에다 걸고 다닐 수 까지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십자가의 의미가 달라졌습니까? 그것은 마땅히 그 형틀에 달려죽어야 할 흉악범이 아니라 전혀 아무 죄도 없는 주님이 거기 달려서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까요? 전 세계는 지금 "서기"라는 년 호를 사용합니다. 즉 예수그리스도의 출생을 기점으로 하여 그 이전을 주전(B.C)으로 하며 그 이후를 주후(A.D)라고 하여 역사와 현재를 계산하고 있습니다. 우연이라고 하겠습니까? 나사렛 예수가 누구 길래? 아직도 78억 세계 인구 가운데 40억 이상이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어찌하여 세계의 역사를 그분의 출생을 기점으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계산하고, 또한 거슬러 내려오면서 계산하고 있는 것입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우연한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저는 그가 역사의 중심이 아니겠느냐? 는 것을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History(역사)란 His story(그의 이야기)라고 까지 합니다. 실로 역사는 그의 이야기(History is his story)인 것입니다. 실로 이 세상 창조는 즉 역사는 그를 위하여 있는 것이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ㄴ) 십자가의 좌우 주님께서는 마지막 때에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별하듯이 구별하여 모든 사람을 그의 좌우편에 세운다(마25:31-이하)고 하셨습니다만 골고다 계곡에 세워졌던 그리스도의 십자가 좌우편에도 역시 두 개의 십자가가 각기 세워졌었습니다. 그들은 평생에 강도를 업으로 삼고 살았던 당연히 그 십자가에 사형당해야 할 흉악범들이 틀림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가운데 두고 영원히 분리되고 갈라지는 운명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회개하고 하지 않은 차이 때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 중 하나는 예수님을 조소하면서 “네가 과연 그리스도라면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눅23:39)고 하였습니다. 즉 평생을 강도질하며 살아온 자기인데, 이제 마지막 숨을 몰아쉬면서 죽어가는 최후의 순간에도, 무엇이 그렇게 세상에 미련이 남아 있어서 세상으로 돌아가고 싶어서 거기서 살아남으려고 하였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세상에 살아남아서 또 다시 강도질을 하고 싶다는 것이 아니라면 참으로 회개하고 마음눈이 밝아져야 하였었는데, 그러한 말은 전혀 없었고 다른 편 강도는 오히려 그 동료를 꾸짖으면서 우리는 이 같은 형벌을 받는 것이 당연하지만 이 사람은 그렇지 않다면서 “주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눅23:42)라고 함으로서 자기들은 당연히 죽어야할 죄인임을 시인한 것이 그의 회계이고, “당신의 나라”라고 하여 죽은 다음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였을 뿐 아니라 그 나라에서 자기를 기억하여 달라고 한 것은 먼저 이 세상에 더 이상 살아 남으려하지 않고, 마땅히 죽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었으며, 그리고 자신을 생각하면 전혀 어떻게 그 나라를 구할 수가 있겠습니까마는 염치나 체면도 없고 주제 넓은 것 같지만 그 나라에서 자기를 기억하여 달라고 하였다는 것일 뿐 아니라 그리고 자기들 편에서 자기들과 같은 죄목으로 죽어가지만 그 분이 구세주 곧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믿었기 때문에 그에게 자신의 사후를 구한 것이었고 그 순간으로 낙원을 허락받았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모든 인간을 좌우로 분리시키는 중심에 서있는 십자가입니다. 지금까지는 누가 더 선하냐! 하는 것과 상관없이 똑같이 살아온 강도 두 사람! 한 번도 떨어져 본 일이 없는 의리의 동료(?)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그들은 역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중심으로 천국과 지옥으로 영원히 갈라질 수밖에 없었다는 말입니다. 실로 그것은 믿음의 유무에 근거합니다. 이렇게 분리되는 근거란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믿음의 유무입니다. 그것도 비록 십자가에 달려서 촌각을 다투며 죽음으로 달음질 하는 순간이라도 그 생명이 끝나기 전에는 회개의 기회는 상실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십자가의 은혜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전후좌우 전체를 커버 하는 구속의 빙거이기에 그것은 역사의 중심에선 역사의 구심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가슴 중앙에는 역사의 중심 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견고히 서야 하겠고 우리의 가정과, 직장과, 사회와, 나라와 민족, 그리고 전 세계 인류의 중심에도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흔들림 없이 서야 합니다. (Ⅳ) 하나님과 화목케 하는 십자가 오늘 우리의 성경은 아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을 자기와 화목하게 한다고 합니다. 인간이 뱀 곧 마귀의 꾐에 빠져서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서 타락하였다는 것은 하나님과 불화하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즉 하나님과 분리 되었던 것인데 이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목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다는 것은 이제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는(엡1:10) 만유의 통일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사람과 하나님의 하나가 되는 일뿐 아니라 자연계의 만물까지 모두가 다 통일을 이룬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A) 이 화목의 사명 자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자신과 화목케 하시고 우리에게 화목케 하는 직분을 주셨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끼리끼리의 화평이 아닙니다. 친목케 하는 사람들과 같이 자기들끼리는 대단히 화목한 것 같은 그러한 화목이 아닙니다. 자기의 가족이기 때문에 화목 한다든지 하는 그러한 화목도 아닙니다. 그러한 것은 사나운 맹수들에게도 있고 귀신들끼리도 있는 화목입니다. 지연, 학연, 혈연, 국가나 민족끼리의 화목, 따라서 동족간의 화목 같은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과의 화목을 근거로 하는 화목을 말합니다. 그럴 때에 진정한 화목이 어디서나, 언제나, 무엇에서나, 이루어 질수 있습니다. 아니면 집단 이기주의들만이 있게 되므로 집단 간의 이해득실 때문에 오히려 격렬한 정쟁이나 싸움이 빚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B) 어떤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는 삶 바울사도는 우리가 이전에는 예수그리스도까지도 육체대로 알았지만 이제는 그 어떤 사람도 육체대로 알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어떤 사람과 관계를 가지더라도 육체대로 즉 육적으로 사귀고 관계를 가지지 말라는 것이며 어떤 자를 막론하고 육체대로 곧 육적으로 평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되풀이 되는 말이지만, 에덴이후 영이 죽은 상태의 인간들은 다 육주체적으로 사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에 육적으로 즉 모든 것을 육안으로 보이는 것에 의하여 판단 평가하면서 살수밖에 없었습니다. 따라서 육적으로 곧 현세적으로 큰 것이 반드시 큰 것이고 육적으로 행복한 것이 참 행복이고 육적으로 이기는 것이 정말로 이기는 것으로 아는 그러한 가치관과 사고방식으로 살아오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나사렛 예수도 단순히 자기들과 전혀 차이가 없는 육적 존재로만 알았던 것입니다. 그분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마16:16) 이라는 것을 몰랐고, 그러니까 십자가에 죽이기까지 하였던 것입니다. 어떻든 이제 죽었던 영이 다시 살아난 그리스도인들은 사람을 육체대로 평가하면 안 되고,영적으로 평가하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C) 오직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는 삶 이와 같이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이제부터는 더 이상 자기를 위하여 살지 않고 우리를 위해 죽었다가 산자를 위하여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의미와 목적입니다. 그를 위하여 산다는 것은 곧 그의 십자가를 위하여 산다는 것이며 또한 그것도 하나님을 위하여 산다는 것입니다. 까닭은 모든 만물이 인간까지도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되어 이 땅에 존재하게 되었다는 의미는 그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을 위하여 있다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위하여 살아야 합니다. 따라서 자연계만 아니고 인간계 그러니까 인간들이 빚어가는 이 세계안의 모든 것은 즉 그것이 미국이든지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일본, 중국, 한국이든지 다 하나님을 위하여 있습니다. 개인도, 가정도, 하나님을 위하여 있는 것이기에 그들이 행하고 이루어가는 모든 일도 다 하나님을 위하여 있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기독교 밖의 사회야 논외로 하고라도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아야 하는 하나님나라 시민들인 성도들까지도 아직 거의 자기를 위하여 살아가는 인간사적 현실입니다. 또다시 말하지만 자기의 성공과 자기의 행복과 자기의 출세와 자기의 영광과 자기의 체면과 자기의 자존심과 자기의 현실적 이득을 위하여 살아가는 이러한 것이 자신의 목적이 되어 있는 사람은 본의든 본의가 아니든 간에 그러한 사람은 하나님과 교회나 목회자와 성도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다른 사람을 이용하는 사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면 그것이 거짓이 되니까요? 이 자리에 있는 우리들 중, 이러한 말씀에 Stress(충격되다)를 받는 사람이 있습니까? 스트레스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한 Stress는 받아야 하고, 그것이 아픔과 치유과정이 되어서 정결케 됨을 받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겸손하고, 의롭고 “바르게 살아라.”고 하는데, 거기에 Stress를 받는다면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이 아닙니까? 그리스도인이니까 당연히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십시다. 라고 하는데 거기에 왜? 스트레스를 받아야 합니까? 아멘 하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 자신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지 못하는 부분이 너무 많더라도 무엇을 하든지 즉 정치를 하든지 경제를 하든지 교육을 하든지 문화예술이나 기술과학을 하든지 간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하면 아멘 하여야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래야 살아있는 그리스도인입니다. (Ⅴ) 나오는 말 이렇게 복된 하나님나라의 시민은 바로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것입니다. 그 새로운 피조물이 된 그리스도인은 화목의 사랑을 감당하고 그러한 사람은 육체대로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하여 산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십자가의 의미의 중요한 몇 가지를 생각하십시다. 보통 그리스도교 안에서도 물론이고 비 그리스도교인 들까지도 그리스도교를 사랑의 종교로 압니다. 그것도 십자가를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맞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절대 사랑이고 그 어떤 죄를 지었든지 간에 그 십자가 사랑의 실현 때문에 구원을 받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도 그 무조건적인 사랑을 실천하여야 한다는 것을 부인할 그리스도인은 없습니다. 그러나 어떤 죄인이라도 용서해주시는 십자가의 사랑이니까 어떠한 죄를 계속하여 지어도 되는 것입니까? 결코 아닙니다. 더 이상은 죄를 범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십자가의 사랑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롬3:31)고 성경은 말하는 것입니다(롬8:3-4참조) 그러므로 십자가에는 사랑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공의도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속죄의 제물로 죽으셨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공의를 성취하시는 것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그러므로 십자가를 사랑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인간들이 자기편에서만 십자가를 이해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너무 이기적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십자가의 사랑을 실천한다 할 때에도 하나님의 약속을 근거로 또는 목적으로 하여야 합니다. 불신자들도 할 수 있는 사랑을 근거로 하면서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신앙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랑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하나님이 아닐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구속이 빠진 사랑은 진정한 의미에서 사랑이 아닙니다. 역사의 중심에 서신 십자가를 중심으로 하는 사랑이 확실히 인간의 가슴에도 가정이나 어떤 인간 공동체의 중심에도 그리고 인류 역사의 중심에도 뿌리깊이 서야 합니다.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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