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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낭비 원종호 2021-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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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낭비

 

성경본문: 143-9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어떤 사람들이 화를 내어 서로 말하되 어찌하여 이 향유를 허비하였는가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저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그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i,들어가는 말

근검절약은 어느 때, 어느 곳을 막론하고 정착되어야할 나와 내 가정, 나아가서는 내 국가나 사회를 번영케 하는 길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세계적으로 경제적 불황이 올 것이라고 합니다마는 경기가 침체 될 징후가 벌써 크고 작은 어떤 기업들은 그 존폐 문제가 대두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인력을 감축시키는 일로 말미암아 실업자가 많이 나타나고 있는 실정입니다. 한마디로 낭비를 막자는 것입니다. 까닭은 아무리 수입이 많아도 낭비가 많으면 저축이나 이익은 고사하고 망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아무 것도 쓰지 않는 것이 근검절약이거나 무턱대어 놓고, 쓰는 것은 다 낭비라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적절하게 써야할 때와 쓰지 않아야 할 때를 잘 알아서 쓰는 것이 건전한 경제생활일 것입니다. 어쨌든 오늘 우리의 본문에서는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는 이 낭비 문제로 인해 의견이 엇갈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깨달아야할 낭비 관을 우리는 본문을 추적하면서 살펴보려는 것입니다.

 

ii, 막대한 낭비

수난 주 첫날, 그러니까 예수께서 마지막 예루살렘에 입성했던 날 저녁,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를 하고 있던 주님 앞에 한 여인이 값비싼 순전한 나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향유 기름을 예수님의 머리와 발에 붓고 머리털로 씻었습니다. 옆에서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제자들은 향유 냄새로 가득찬 방안의 공기와는 달리 무슨 생각으로 즉, 무엇 때문에 이것을 허비하느냐 이 향유를 300 데나리온 이상의 값을 받을 수도 있었을 것인데 차라리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할 수도 있었지 않느냐?”는 자세로 말하였습니다. 당시 한 데나리온이란 돈은 노동자의 하루 품값(201-2)이었던 것으로 볼 때 300데나리온이란 돈은 실로 큰돈이었는데 이것을 단순히 예수님의 머리와 발에 부어 없애버리는 행동은 아무리 생각해도 제자들에겐 못마땅한 낭비! 실로 막대한 낭비가 아닐 수 없었으며 그러한 행위를 그대로 허용하시는 주님의 태도마저도 의아할 정도이었을 것입니다.

더욱이나 주변의 사람들은 아랑곳없이 체면도 불구하고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는 행동은 단순한 존경이 아니라 애정의 행위로도 보여지는데(?) 어찌하여 예수님은 가만히 계신다는 말인가? 라는 생각들이 제자들 마음에 흘렀음직도 합니다. 아니! 그렇다하더라도 존경이든 애정이든 반드시 그렇게 하여야만 주님께 대한 사랑이 표시가 되는가? 라는 의문으로 제자들의 가슴은 혼란하였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렇게 없애 버리는 것이라면 그것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였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제자들로서는 여인의 그 같은 행위와 주님의 방치에 의미를 부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하는 제자들의 마음을 아무도 비난할 수는 없으며 합리적이고도 이치에 맞는 그들의 도덕적 주장을 누가 탓할 수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현대 지성은 그녀의 그 같은 행위는 도저히 용납 될 수 없는 낭비라는 가치관이기 때문에 그러한 방식은 정도를 벗어난다고 판단되는 행동은 자신들은 할려고 하지도 않을 것이며 오히려 그러한 행동은 죄악이라고까지 할런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기독인생의 삶은 가난한 자에 대한 구제를 하는 정도의 윤리적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니며 인간의 역사는 단순히 가난한 자들에 대한 구제 같은 것으로만 창조적으로 변화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할 것입니다.

 

iii, 거룩한 낭비

막대한 낭비로 보는 제자들과는 예수님의 자세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그녀는 내게 좋은 일을 하였다고하심으로 그 일이 아름다운 일임을 밝히시면서 오히려 제자들을 책망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그녀의 행위를 어떻게 보셨습니까? , 주님의 머리에 기름 부은 것은 주님은 그녀의 메시야라는 신앙 고백적 행위인 동시에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 같이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준비한 행위였던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그 여인이 주님의 죽음을 예지하고 의도적으로 한 행위라고 보지는 않습니다만 주님께서 이 사실을 자신의 십자가에 죽음과 결부시켰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판 것은 전혀 의도가 달랐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사실을 통하여 하나님의 일을 진행하시고 성취하셨던 것처럼 여기 이 여인의 의도야 어떠하였던지 간에 주님의 죽음을 준비 하는 축복된 결과가 된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당시 유대인들의 풍습으로서는 죽은 다음에라야 시체에 기름을 바르는 것인데 왜? 미리 죽음을 준비하는 기름을 부어야 했었는가? 그것은 예수님의 경우 죽은 다음에는 몇 여인들이 준비를 해 가지고(161절 참조)무덤까지 갔으나 주님께서는 이미 부활하시고 그곳에 없었기에 바를 수가 없었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또 한 가지는 반드시 기름을 발라야 했는가하는 의문입니다. 그것은 완전히 죽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기절하였다가 다시 깨어난 것이 아니라 완전히 죽었다가 살아난 것을 뜻하는 의미로서 기름부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완벽한 주님의 죽음을 준비한 계시적 행위가 어찌 막대한 낭비가 될 수 있겠습니까? 낭비라고 한다면 그것은 확실히 거룩한 낭비입니다. ,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세계의 모든 것이 인류와 역사 전체를 구원하는 십자가의 사역의 실현과 성취를 위하여 존재 하는 것들인데 그것을 위하여 자신과 자신의 소유를 아끼지 않고 쏟아 붓는 이일이 어찌 낭비 일수가 있겠으며 단순히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수준의 합리적 도덕률과는 도저히 견줄 수 없는 거룩한 낭비라고 아니할 수가 있겠는가 그 말입니다. 동시에 그것은 합리성의 세계나 도덕적 차원 이상의 것이기에 우선 되어야 하며 또한 유일회적 사건으로서 이 구속 사역이 성취되려는 하나님의 때가 다가왔으니 가난한 자 뿐이겠습니까? 그 어떤 것보다 우선 되어야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인 것입니다. 인간 구원을 위한 십자가의사역은 지금도 계속 되고 있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여 거기에 모든 것을 바치고 사용하는 것은 결코 낭비가 아니고 오히려 그 반대 되는 일에 사용 되는 모든 것은 낭비이며 허비 인 것입니다.

 

iv, 사랑의 낭비

주님이 왜 제자들을 책망하고 그 여인의 행위를 내게 좋은 일을 하였다고 하셨는가는 이미 충분히 설명되었다고 생각합니다만 다른 측면에서 한 가지를 더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즉 그와 같이 엄청나게 값비싼 향유를 아끼지 않고 쏟아 부은 일이나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주님의 발을 씻는 일! 그렇게 체면 같은 것은 아랑곳 하지 않던 그녀의 자세 등은 한마디로 그것이 사랑의 행위였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애정이든 아가페적인 사랑이든 사랑이 아니고서야 그러한 막대한 낭비(?)는 있을 수 없기에 그것은 또한 사랑의 낭비인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어느 정도의 애정이나 인간적 정열이 그녀의 속에서 움직이고 있는가하는 것은 문제로 삼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행위에는 매우 복잡한 동기들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그녀의 동기와 상관없이 그 행위자체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였듯이 우리는 어떠한 사람에게서든지 타산적 한계를 넘어선 헌신적 낭비를 기쁘게 받아들이는 일이나 합리성을 초월한 자신의 낭비를 환영하는 일을 막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어떠한 이해타산도 없고 율법적 강요나 의무에 의한 것도 아닌 바로 이 여인의 낭비를 주님은 높이 평가하셨던 것입니다. 교회 역사는 때와 장소에 구애됨이 없이 자신의 체면이나 남의 눈초리 그리고 외부적인 그 어떤 영향력도 두려움 없이 자신을 낭비하는 자들의 역사입니다. 그들은 새로운 창조에 봉사하기 위해 자신과 자신의 모든 소유를 아끼지 않고 소모시키는 일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즉 그들은 하나님 자신이 자연과 역사 그리고 창조와 구원을 통하여 자신을 낭비하신 것처럼 자신을 낭비한 자들이었습니다. 종교 개혁의 선봉에 섰던 당시의 율법이나 율법적 조직을 넘어서 아무 두려움 없이 거기에 도전하였던 루터의 하나님! 그분은 창조주이었고 또한 다시 창조하기 위하여 파괴하며 자신을 낭비하시던 하나님이셨습니다. 인간이 되신 하나님!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기 낭비입니다. 까닭은 신이 자기 한계를 넘는 것은 단순히 자기의 비하가 아니라 곧 신의 자기 죽음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즉 자기를 소모시키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베들레헴에 오신 하나님! 이것이 바로 인류 구속을 위한 십자가의 시작이며 본문의 여인은 이 일을 하시는 유일의 구주에게 최대의 경의와 사랑을 자신을 낭비함으로 표현하였던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저와 여러분! 우리는 본문의 제자들처럼 합리적 목적을 추구하는 종교적이며 도덕적인 공리주의의 위험에 늘 빠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실로 창조적인 뜨거운 가슴에서 넘쳐흘러 나오고 무엇 때문에를 따지지 않는 거룩한 사랑의 낭비 없이는 하나님이나 사람의 경우를 막론하고 새 창조란 있을 수 없습니다.

 

v,나오는 말

이와 같이 그것은 막대한 낭비가 아니고, 거룩한 낭비 사랑의 낭비였기에 복음이 전파되는 그 어떤 곳에서도 그 여인의 이야기가 전하여질 것이라는 축복을 보장 받았습니다. 비록 물질 소모가 되었으나 물질로 환산할 수 없는 보장된 하늘나라의 영광! 아니 그것은 결과적인 것이고 여인의 가슴은 여하한 의무감도 이해타산도 없는 순수한 사랑의 마음이었기에 그것은 깨어질 옥합이었습니다. 옥으로 만든 합! 그것도 귀한 것이지만 그것이 깨어지지 않고는 그 안에 있는 순전한 향유가 흘러나올 수 없고 곧 십자가 사역에 자신을 헌신적으로 낭비할 수도 없고, 향기로운 냄새로 온 방안을 가득히 채울 수도 없을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가 다 본성적으로 뜨거운 사랑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엄격한 제도, 사회적으로나 개인적인 환경, 인맥, 이기심, 기타 인간관계들로 인해 억눌리고 갇혀서 질식되기 때문에 냉랭하고 강퍅한 인간으로 전락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옥합이 깨어져야 하듯이 육적 자아가 깨어져야 비로소 그 안에 잠재하여 있던 영적자아가 향기를 뿜게 되는 것입니다. 현대인은 사랑을 받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보다 사랑을 줄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은 고독합니다. 자기를 주고도 또 주고 싶을 뿐 아니라 자기 전체와 자기의 생명까지도 주고 싶은 사랑의 대상을 잃었기 때문에 불행 한 것입니다. 즉 자신을 몽땅 쏟아 붓는 허비(?)를 하더라도 더더욱 행복하여지는 사랑의 대상을 찾지 못하였기 때문에 인간은 가슴이 병들고 고독과 허무에 몸부림치며 불행에 방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적이고, 현실적이고, 세상 적이고, 외적인 것이 깨어져야 합니다. 물론 그런 것도 옥합처럼 귀한 것이긴 하지만 그것이 깨어지지 않으면 참된 내가 곧 순수한 ""라는 자아가, 순전한 향유는 밖으로 나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에 비로소 우리의 세계는 십자가의 구속 사역이 성취되고, 뜨거운 사랑이 넘실대며, 향기로운 냄새로 가득 찬 한 가족처럼 사는 방안(home)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역사는 아름다운 당신의 낭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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