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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가 크냐 | 정춘석 | 2021-03-1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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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크냐 성경본문: 막10장32절-44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 서서 가시는데 저희가 놀라고 쫓는 자들은 두려워하더라 이에 다시 열 두 제자를 데리시고 자기의 당할 일을 일러 가라사대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겠고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의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여짜오되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예비 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 이니라 열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소위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i,들어가는 말 우리 민족의 수난의 역사는 진보하는 문명과 함께 불황이었긴 하였지만 그래도 옛날보다 편리하고 풍요한 사회를 이루었고 이루어가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고 있기 때문에 지금은 세계의 경제 선진국 대열에 들어가기도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세계는 경제적 부강을 절대적인 것으로 아는 힘의 철학과 과학적 지식으로 완성하고자하는 유토피아의 꿈과 그 모든 것을 일순간에 파괴해 버릴 수도 있는 가공할만한 핵미사일의 보유 노력을 동시에 경주하고 있으므로 세계역사를 떠나서 개체 국가나 민족의 역사가 있을 수 없는 시점에서 생각한다면 앞으로의 역사는 반드시 살기 좋은 세계에로 진보할 것이라는 생각은 역사의 주인이며 심판자 되시는 하나님과 격변하는 현실이 공히 용납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역사란 언제나 역사에 대한 깊은 통찰력과 수난을 각오하고 그 역사에 도전하는 성실한 사람들에 의해 새롭게 창조되는 사명의 세계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주님은 역사를 깊이 통찰하시고 꿰뚫어 보시는 분이었으며 따라서 그의 수난은 역사에 대한 창조적 도전이었기에 역사의 방향을 새롭게 전환시켰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수난은 우리에게 역사를 바로 보는 눈을 갖게 하며 더욱이나 본문에 나타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는 주님의 지상 최후의 길목에서 제자들의 사이에 빚어졌던 일은 오늘 우리시대의 역사를 똑바로 보게 합니다. ii, 세 번째의 종소리 본문의 수난에 대한 예수(33절-34절)는 본서8장 31~, 9장 31~과 더불어 이미 세 번째 주님 자신이 하신 말씀이기에 샤만이란 주석가는 세 번째의 종소리라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때로 같은 길을 가면서도 상반되는 눈으로 역사를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기 함께 같이 예루살렘 길을 올라가는 주님과 제자들이 바로 그러합니다. “내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대제사장 무리에게 체포되어 능욕당하고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주님 자신의 세 번에 걸친 수난에 대한 예고의 종소리를 듣고, 놀라고 두려워하면서도 예루살렘에 올라가기만 하면 주님께서 임금으로 등극하실 줄로만 알았던 제자들에겐 차라리 동정이 가지만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님에게 미치지 아니 하리이다”(마16:22)라고 십자가를 지지말기를 간하였던 베드로나 세베대의 두 형제의 벼슬운동을 계기로 전개된 “누가 크냐”라는 논쟁과 자리다툼은 한심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어쨌든 주님은 인류와 역사의 구속을 위해 십자가의 제물이 되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는 이 절박한 때에도 벼슬운동과 제 잘난 싸움으로 이 최후의 길을 따라가는 제자들에게서 오늘 우리의 시대상을 보기도 합니다. 역사를 깊이 통찰하고 그 역사의 개혁과 전환을 위하여 도전하시던 주님의 종소리가 세 번씩이나 울려왔지만 자리싸움에 도취되었던 제자들의 잠은 깨어지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역사는 실로 자리싸움 때문에 피로 얼룩져 왔고 또한 그렇게 가고 있습니다. 나와 여러분! 지금도 주님의 종소리는 들려오고 있습니다. iii, 앞장 서 걷는 자 고난이 올 때에 사람들은 그 자세가 뚜렷해집니다. 평상시에는 모르지만 위기가 오면 그 본 색적 태도가 분명히 드러나는 것이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본문의 제자들과 같이 이러한 때에 놀라고 두려워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앞장서 가셨습니다.(32절) 수난을 각오한 용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높은 정신! 평온의 갈릴리에서 폭풍의 예루살렘으로, 성공의 명성과 칭송을 받았던 갈릴리 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고난과 저버림과 죽음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으로 이제 당당히 앞장서 가시는 것이었습니다. 현대인은 돈과 권력 그리고 성공과 영달을 위해서는 약육강식의 경쟁 마당에 기를 쓰고 앞장서 달음질 하지만, 사랑을 위한 희생, 사회 정의를 위한 도전, 인격을 위한 고난, 진리나 양심을 지키기 위한 손해, 자유와 평화를 위한 투쟁에는 앞장서기 보다는 후방의 안전지대를 찾는 마치 소라처럼 자기만의 성을 쌓고 있으며 그 안에 들어앉아서 머리를 내밀고 주변의 동정만을 살피는 현실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사랑과 정의와 자유, 인격과 진리와 양심의 길을 홀로 가셨습니다. 나와 당신은 어떠합니까? iv, 크고 으뜸 되는 자 세 번째의 종소리에도 잠을 깨지 못했던 제자들을 내버려 두시지 않고, 주님은 “누가 크냐?”는 그들의 논쟁에 끼어들어 과연 크고 으뜸 되는 자가 어떠한 자 인가? 를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크고 으뜸 되는 자는 섬김을 받으며 수하에 종을 거느리고 사는 자들인데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다고 하시면서 남을 섬기는 자와 남의 종이 되는 자가 크고 으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천국시민들의 세계에서는 남에게 섬김을 받으며 다스리는 자가 크고 으뜸 되는 자가 아니라 도리어 섬기고 남의 종이 되는 자가 으뜸이요, 큰 자라는 것입니다. 여기 종이나 섬기는 일은 타의에 의해서 즉,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되는 것을 뜻합니다. 전쟁의 포로가 되어 남의 종이 된 경우와 같은 것은 크고 으뜸이 되는 길이 아닙니다. 때문에 주님께서는 크고자 하는 자는 곧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며 종이 되라 즉 스스로 낮아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현세에서의 큰 자는 적은 수의 사람에게서 섬김을 받거나 적은 수의 사람을 종으로 다스리는 자보다 많은 사람을 다스리며 많은 사람에게 섬김을 받는 것이 보다 큰 자이지만 하나님의 법도에 의해 다스려지는 세계에서는 보다 많은 사람을 섬기고 많은 사람에게 종노릇하는 것이 보다 크고 으뜸이 되는 자입니다. 자원하여 남을 섬기는 일이나 종노릇 하는 일은 곧 남의 유익을 위해서 사는 삶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한 가정이나 단체를 섬기는 자보다 전 인류를 그것도 역사의 시작부터 끝까지의 모든 인간들을 섬기는 자는 역사에 제일 크고 으뜸 되는 자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분이 바로 그리스도 우리 주님이십니다. 때문에 그분은 “인자가 세상에 온 것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고 섬기려 오셨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나와 당신의 삶은 어떠합니까? v,나오는 말 주님을 따르고 같은 길을 가면서도 주님과의 동상이몽이었던 제자들과 같은 삶은 버립시다. 그러나 종래에 바로 그 제자들이 섬기는 자로서 역사에 새로운 창조의 바람을 일으켰으니 놀랍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섭리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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