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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즉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 원종호 | 2021-03-0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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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즉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마13장1절-23절) Ⅰ. 들어가는 말 씨 뿌리는 비유로 통하는 이 비유는 9절까지가 비유의 본 내용이고 10절-17절은 비유의 목적에 대한 말씀이며 18절-23절은 예수님께서 친히 하신 본 비유의 해석입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 해석에는 별로 어려움이 없습니다만 내용상으로 차이가 없는 공관복음서의 동일기사(막4장1-20절, 눅8장4절-15절)를 함께 참조해 가면서 여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교훈을 생각하고자 합니다.
Ⅱ. 어디에나 뿌려지는 씨앗 본 비유는 씨앗이 반드시 옥토에만 뿌려지는 것이 아니라 길가에도, 돌 짝밭에도 가시덤불 속에도 곧 어떤 곳에든지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우선 교훈하여 줍니다. 즉 복음은 이 땅위의 모든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전파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 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 24장14절)고 하시기도 하셨던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온 세상은 복음을 받기 위하여 존재 한다는 것입니다. 즉 온 세상에 복음이 전파 될 때에라야 이 세상의 끝이 온다는 의미 이니까 곧 그 세상은 복음을 받기 위하여 존재 한다는 것이고 따라서 하나님은 이 세상을 복음을 위하여 창조 하셨다는 의미이기도 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복음 곧 말씀이라는 씨앗은 길가이거나 돌밭이거나 가시덤불을 막론하고 이 땅위의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전파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구원이란 옥토와 같은 아무리 좋은 마음 밭을 가진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인간 자체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떨어지는 씨앗 곧 말씀의 씨앗에 따라서 되어 진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보여 줍니다. 다시 한 번 더 말한다면 구원은 인간 자체의 의로운 삶으로나 그 어떤 다른 것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오직하늘에서 떨어지는 생명의 씨앗 곧 복음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확증 하여 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씨앗은 어디에나 떨어지지만 그 떨어지는 곳 어디에서든지 결실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떨어지는 씨앗이 어떤 씨앗인가에 따라서 열매를 맺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하여서는 이 비유는 관심도 없고 아니 그런 문제는 취급하지도 않고 오직 씨앗이 떨어지는 밭! 즉 씨앗을 받는 밭이 어떠한 밭인가에 따라서 결실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한마디로 씨앗의 문제가 아니고 다만 그 씨앗을 받아들이는 마음의 토양이 문제임을 밝히는 것이 본 비유의 핵심적 교훈입니다. 그렇다면 씨앗은 하나님의 말씀(눅8장11절)이며 씨앗을 뿌린다는 것은 말씀을 뿌리는 것(막4장14절 참조)을 뜻하고 씨앗을 받는 밭은 말씀을 받는 마음 밭(마13장19절)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마음 밭에 뿌려지는 씨앗이란 석가나 공자의 말도 아니고 그 어떤 철인이나 사상가나 윤리학자의 말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은 너무도 분명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가슴이라는 밭에 생명 운동을 일으키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기인 한다는 사실을 주님은 구태어 강조 하시지도 않고 말씀 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씨앗을 받아 30배, 60배 혹은 100배의 결실을 수확한다는 것은 말씀을 받아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 받은 인격의 성장도를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선포되어지는 말씀 즉 메시지의 문제가 아니라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 마음 밭의 문제임을 핵심적 교훈으로 하는 본 비유는 그 인간의 마음 밭을 네 가지로 나누고 있습니다.
Ⅲ. 네 종류의 마음 밭 이미 말씀드렸습니다만 말씀이라는 씨앗은 어디에나 떨어지며 떨어져야 합니다. 자연계에 있어서의 농사는 열매를 맺을 수 없을 땅에 씨앗을 뿌릴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영계에 있어서는 결실될 수 있을만한 밭만을 골라서 생명의 씨앗인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까닭은 인간의 눈은 어떤 밭이 옥토인지, 타인의 마음 밭을 정확하게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A. 길가 이것은 마음 상태가 길바닥처럼 굳어진 사람을 의미합니다. 때문에 말씀이 심겨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들었을 때에 “그들로 믿어 구원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마귀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 운 것을 빼앗는다”(눅8장12절, 막4장15절)고 하였습니다. 이유는 믿음은 들음에서 나기(롬10장17절)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만약 마귀가 일방적으로 즉 주권적으로 사람의 마음에서 말씀을 빼앗아가는 것이라면 어떤 사람이든지 믿어서 구원 받지 못하게 하는 것이 본업인 마귀가 어찌하여 돌밭이나 가시덤불속에 떨어진 말씀이라는 씨앗은 빼앗아 가지를 않습니까? 그러므로 이것은 마귀의 일방적인 주권 행사가 아니라 말씀을 받는 밭이 길바닥처럼 무디어진 마음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길가에 뿌리웠다는 것은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에는 악한 자가 와서 그것을 빼앗는다(마13장19절)고 하심으로써 단 깨닫지 못할 때에 국한되는 것임을 명시하셨으며 따라서 깨닫지 못하는 마음에 그 책임이 있음을 교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깨닫는 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예수께서는 떡(물질적인 것)이 없음으로 서로 의논하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마16장8절-9절)고 하셨을 뿐만 아니라 노아시대의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사치와 육적 쾌락에 젖어 있으면서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즉, 홍수가 나서 그들을 멸망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다고 말씀하시면서 주님은 인자의 때 즉 주님이 재림하실 때에도 이와 같으리라(마24장37절-39절) 하심으로써 역사의 종말이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사치와 쾌락에 깊이 빠져 깨달음이 없을 것을 예고하셨던 것입니다. 또한 인간의 전적 타락과 부패를 선언하는 말씀에서는 의인도 없고 선을 행하는 자도 없으며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지만 “깨닫는 자도 없다”(롬3장10절 이하)고 하셨습니다. 이로써 성경이 제시하는 인간의 문제는 깨닫지 못하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더욱이나 백배의 결실까지도 할 수 있는 좋은 땅을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마13장23절)라고 하였으니 깨달음의 유무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가 더욱 명백하여 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마음이 되어버린 까닭은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주님은 이에 대하여 이 백성들이 “마음이 완악하여졌기 때문에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다”(마13장15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의 인식 기능은 감관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즉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을 통하여 보고, 듣고, 고저, 장단, 선악, 미추 등을 판별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마음이 없으면 볼 수도 들을 수도 없게 됩니다. 가령 설교 듣는 이 자리에 앉아 있으면서도 마음이 다른 곳에 가있다면 설교가 무슨 말씀을 하는지 들리지 않으며 눈에 무엇이 보이지도 않게 됩니다. 귀나 눈이 고장 났기 때문이 아니라 마음이 거기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실 눈이 보고 귀가 듣는 것이 아니라 눈과 귀를 통해서 마음이 보고 듣는 것입니다. 때문에 마음이 바르지 못하면 바르게 보고 들을 수 없기에 바른 판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예컨대 붉은 색깔의 안경을 쓰면 온 세상이 붉게 보이고 푸른 색깔의 안경을 쓰면 세상이 온통 푸르게 보이는 것과 같습니다. 다시 말하면 마음여하에 따라서 세상은 다르게 보일수도 있으며 즉, 좋게도 나쁘게도 보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뚤어진 마음에 모든 것이 바르게 들리고 보일 수 없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인 것입니다. 때문에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예수님은 인간의 귀가 듣는데 둔하고 눈은 보아도 보지 못하는 것은 마음이 완악하여진 연고라는 것이며 "인간의 마음은 만물보다 더 거짓되고 부패하였다"(렘17장9절)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인간성은 그토록 완악하여졌으며 부패하여 졌습니까? 물론 근원적으로 말하면 하나님 없이 살기 때문에 마음눈이 어두워진 연고입니다만 현실적으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부패하여지는 까닭을 성경은 몇 가지로 밝히고 있습니다. 그 첫째는 술 취하여 방탕한 생활이나 생활의 염려 같은 것으로 인간의 마음은 둔하여지며(눅21장34절) 그 둘째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님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에 착념치 않으면 결국 마음이 부패하여져서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삼게까지 된다고(딤전6장3절-5절) 합니다.
이것은 한마디로 하나님의 말씀에 마음의 뿌리를 내리지 않고 이 세상이나 세상의 것에 마음이 기울어져 있음을 말합니다. 즉 길바닥이 굳어지는 이유는 숫한 차량과 사람들이 밟고 지나가기 때문입니다. 이익을 가장 우선시하는 장사치도 지나가고 화물차도 지나가며 쾌락에 자신을 내던진 사람들과 관광버스도 지나가고 전쟁을 위한 군용차나 탱크도 지나가고 살인강도도 그 길을 밟고 지나갑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들의 마음이 장사잇속에 밟히고 쾌락주의나 사기를 해서라도 육적이고 현세적인 이익만을 추구하며 필요하면 살인강도질이라도 불사할 수 있는 사고나 가치관에 밟히고 다져지고 정치에도 관심을 가지다가 경제적 관심으로 기우려졌다가 또한 예술가가 되고 싶다가 사업가로 변신하는 숫한 것들이 밟고 지나가면 길바닥처럼 무디어지고 완악하여 질 수밖에 없습니다. 또다시 말하면 어떤 사람은 석가나 공자나 또 다른 철학자나 사상가들의 정신과 사상에 이미 밟히고 그 마음이 다져졌기 때문에 거기에 완전히 굳어졌으며 산전수전을 다 겪었다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삶 속에서 쌓여진 경험에 의하여 그 마음이 역시 길바닥처럼 굳어진 사람들도 있어서 그들의 마음에는 복음이 들어 갈 수 없는 길바닥처럼 완악한마음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러한 사람들은 자기들의 마음은 그 어떤 잘못된 것도 없는 가장 참된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성경은 그러한 마음을 길바닥처럼 완악한 마음이라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4장23절)고 하였고, 그러므로 결국 마귀가 그 마음에서 들은 바 말씀을 빼앗아 가는 깨닫지 못하는 마음은(마13장19절) 천국과 관계가 없는 마음 밭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하나님 앞에서 마음이 바르지 못하면 그리스도의 도와는 관계도 없고 이 도에서 분깃될 것도 없다고(행8장21절) 강력히 선언합니다. 따라서 윤리적 표준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서 우리 자신을 평가하여야 하고 때문에 말씀이 깨달아지지 않는 마음은 무디어진 마음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최우선적으로 마음 밭을 갈아야 합니다.
B. 돌밭 이것은 떨어진 씨앗이 심겨져서 싹이 나오지만 뜨거운 해가 돋은 후에는 타서 말라버린다고(마13장5절)하였습니다. 즉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아들이지마는 돌 짝밭이므로 뿌리가 깊이 박히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 말씀으로 인하여 햇빛과 같은 뜨거운 시련 즉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마13장20절)라는 것입니다. 까닭은 그 속에 뿌리가 없기 때문이며, 그렇다면 왜? 뿌리가 없는가? 흙이 얇은 돌밭이기 때문에 뿌리가 깊이 박힐 수가 없는 연고입니다. 말씀을 들어도 전혀 반응이 없는 길가와 같은 곳과는 달리 즉시는 기뻐하며 잠깐 견디다가 어려운 시련이 올 때에는 끝까지 버티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까닭은 전술한 바와 같이 흙이 얇고 습기가 없는 돌밭이기에 뿌리가 깊이 내려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것 역시 돌밭이라는 밭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습기가 없는 땅, 흙이 얇은 돌밭! 거기에는 믿음의 뿌리가 깊이 내려질 수가 없습니다. 메마른 인간성, 얄팍한 가슴, 깊이를 상실한 마음, 의미보다는 감각적 현실성에 젖어버린 인간성, 때문에 참된 마음의 토양을 먹고 살아가야할 생명의 씨앗인 말씀이 뿌리를 깊이 내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말씀이 뿌리가 깊지 못하기 때문에 다가오는 환난에 끝까지 견디지 못하고 곧 넘어지는 신앙이 돌밭과 같은 마음입니다. 나와 여러분의 마음 밭은 어떠합니까? 뿌리가 쉽게 드러나는 것이나 뿌리가 깊지 못하여 바람이나 뜨거운 햇빛의 영향을 받는 것은 뿌리뿐만 아니라 그 나무 전체의 생명의 적신호인 것입니다. 때문에 주님께서는 “깊은 데로 가라”(눅5장4절)고 하시는 것입니다.
C. 가시덤불 이것은 씨앗이 가시덤불 위에 떨어졌기에 그 가시가 함께 자라서(마13장7절,눅8장7절) 자라나는 곡식의 기운을 막아서 결실치 못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즉 누가는 이를 “말씀을 들은 자니”라고 하여 씨앗이 심겨지지 않던 길가와는 다르고 또한 가시가 함께 자란다는 표현에서 알곡도 자라나기는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 함께 자라나는 가시가 씨앗인 말씀의 기운을 막아 결국은 결실치 못하는 밭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인간의 가슴 속에서 말씀 운동의 기운을 막아버리는 마음의 가시는 과연 무엇입니까? 주님께서는 이것을 세상의 염려, 재리의 유혹 그리고 쾌락(눅8장14절)과 기타 욕심(막4장19절)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인간성 속에서 일어나는 진리운동을 차단하는 마음의 가시란 “가시 떨기 위에 떨어졌다” 고 함으로서 그 마음 밭 자체에 이미 부터 있던 가시도 있고 말씀을 듣고(믿고) 지내는 중(눅8장14절) 마음에 들어온 것도(막4장19절) 있음을 보여줍니다. 어떻든 그와 같은 가시에 말씀이 기운이 막힌다는 사실과 “함께 자란다”는 표현은 말씀을 믿고 따르려는 가슴속에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과 쾌락과 기타 욕심이 함께 점점 커가는 오늘 이 시대 교계의 모습이라 아니할 수 없을 것입니다.
(ㄱ) 세상의 염려 인간은 문제를 가지는 동물이기 때문에 염려를 하지 않을 수 없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염려를 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기에 주님께서는 “너희가 염려를 함으로 너희 키를 한자라도 크게 하거나 머리카락을 희거나 검게 할 수 있느냐"(마6장27절,5장36절)고 하시면서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아무 것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즉 노력을 하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때문에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마실까 염려하지 말고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장33절)는 말씀도 의식주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하지 말고 그 나라와 그 의만을 구하고 다음에는 현실적 문제에도 구하는 노력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염려는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염려는 문제의 해결이 아니고 오히려 우리를 죽음에 이르는 병에 들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여하한 염려나 근심이든지 하지 말라는 것은 또한 아닙니다. 까닭은 성경은 “너희 중에 누가 혹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라”(히3장12절)고 하였으며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 없는 구원에 이르는 회개를 이룬다는 것이고 세상근심은 사망을 이룬다(고후7장10절)고 하심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 있고 세상 근심이 있음을 밝히면서 세상 근심은 하지 않아야 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하여야 할 것을 교시하여 줍니다. 때문에 오늘 우리의 본문에서도 인간의 마음속에서 역사하는 말씀의 기운을 차단하는 가시로 지적된 염려는 하지 말고 오직 주께 다 맡겨 버려야합니다(벧전5장7절).
(ㄴ) 재리의 유혹 물질로 된 육체를 떠나서는 인간일 수 없는 인간이 물질세계에 살아야 하기에 물질 없이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재물이나 그것을 추구하는 자체가 죄일 수는 없고 다만 그런 것을 추구하는 마음이나 그런 것에 끌려가는 마음의 도가 하나님께 이끌리는 마음의 정도보다 더 강할 때 바로 그것은 이미 재리의 유혹에 빠져 들어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와 같은 것이 바로, 우리의 인격 속에서 결실작용을 해야 할 말씀의 기운을 막는 가시덤불이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는 말씀도(딤전6장10절) 무엇이든지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으면 능히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마10장37절-38절)는 말씀의 빛 아래서 이해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는 자는 이미 그것에 의해 그의 인격과 삶이 움직여지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차단되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인 것입니다. 때문에 주님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말라(마6장24절)고 하신 것은 단순히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으니 재물만을 주인으로 섬길 사람은 재물만을 섬겨도 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에덴이후 인간세계에는 재물을 섬기는 재물의 노예들이 많이 있어오지만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말라는 것은 하나님은 섬김의 대상이지만 재물은 섬김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재물은 인간이 써야할 사용의 대상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마땅히 섬겨야하고 재물은 섬겨서는 안 됩니다. 까닭은 재물이 인간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지 인간이 재물을 위해서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ㄷ) 쾌락(눅8장14절) 이것은 참으로 여가를 선용하며 건전하게 즐기는 것을 뜻함이 아니라 관능적이고 감각적인 쾌락에 젖어들어 하나님을 향한 마음보다 쾌락 쪽에 더 마음이 있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은 말세의 시대적 현상입니다. 즉 쾌락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 한다(딤후3장4절)고 하였습니다. 오늘날 전 세계적 양상인 관광 인구의 폭증, 이에 따른 유흥시설의 확충, 사치와 소비풍조의 만연, 이 같은 현상은 현대인이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단적으로 말하여줍니다. 지금 세계 안에 동성애나 동성혼의 대세도 타락한 인간의 마지막 죄악의 현상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좌우간 쾌락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신앙 인격과 마음의 질서를 유지하기 힘드는 저해 요인이며 다시 말하면 우리 마음에서 일어나는 그리스도의 형상의 확장 강화운동을 결정적으로 저해하는 요인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ㄹ) 기타 욕심들 마가복음은 “기타욕심들”이라 하여 이상에서 열거한 여러 가지 이 외에도 자기중심의 이기주의적 모든 욕심은 다 우리들 마음에서 일어나는 말씀운동을 막는 가시덤불이라는 것입니다.
D. 좋은 땅 물론 이것은 많은 열매를 수확하는 밭입니다. 마가는 이를 “말씀을 듣고 받는 마음”(막4장20절)이라고 표현하였고 누가는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눅8장15절)라고 하였으며 마태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라고 하여(마13장23절) 제일 좋지 못했던 길바닥 같은 전혀 깨닫지 못했던 마음과 대조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밭은 말씀이 받아들여지는 즉 심겨지는 밭이며 말씀을 지키는 순종의 마음이며 착하고 좋은 마음이기에 깨닫는 마음입니다. 깨달음이란 지식적 앎이 아닙니다. 지식의 전달이나 외부로 부터의 도움을 받을 수는 있으나 단순한 이지적 동의나 지식적 이해가 아니라 가슴에서 느껴지고 체험되어지는 것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여하한 외부의 영향 없이 깨달아지는 앎을 말합니다. 이 같은 앎은 우선 자신 안에서 자기개혁과 정비운동을 시작하여 인격의 성숙을 지향합니다. 외부의 영향 즉 지식적 도움을 받았을 경우에도 그것이 자신의 인간본성에 승화되어 생리화 되었을 때 비로소 깨달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앎은 필연적으로 생활에 반영 됩니다. 전혀 의도적인 것이 아닙니다. 어떤 경우든지 깨달음은 인간이면 생리적 인간에 대한 앎이거나 식물이면 그 식물의 생성법칙에 관한 앎은 여기서 말하는 깨달음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참 깨달음이란 단순히 사물에 대한, 인간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인간과 자연, 인간과 하나님, 또는 하나님과 자연 그리고 인간과 인간 등의 관계에 대한 발견이요 깨달음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여 하나님에 대한 깨달음, 자연과 이웃에 대한 깨달음, 그리고 자신에 대한 바른 깨달음을 가지는 자는 100배의 결실까지도 이룰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두 말할 필요 없이 순수한 마음 즉 옥토와도 같은 마음 밭에서라야 일어나는 역사입니다. 즉 거기에는 길가처럼 다져지고 굳어진 마음도 아니고 돌 짝과 같은 자기 고집이 있는 것도 아니고 가시도 없는 실로 순수한 마음 밭이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30배나 60배나 100배 이상으로 수확하게 된다는 것은 영적으로 그만큼 성숙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게 영이 잘되면 범사도 잘되게 되는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축복의 원리임을 아직 모르시지는 않겠지요?
Ⅳ. 나오는 말 그러므로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게 될 것입니다. 까닭은 무릇 깨닫는 마음에는 더욱 풍성하여 질 것이요 깨닫지 못하는 가슴은 더욱 메말라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시들어 진 나무일지라도 아직 생명이 있는 나무는 비를 맞으면 맞을수록 더욱 싱싱하여 푸르러 가지만 이미 생명이 죽은 나무에는 비가 내리면 내릴수록 더 빨리 썩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나와 여러분! 우리의 마음은 어떠한 밭입니까! 길바닥과 같은 마음이라 하여 낙심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최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바로 그 마음 밭을 가는 일입니다. 까닭은 아무리 좋지 못한 밭이라도 잘 갈아 놓기만 하면 거기에서도 수확할 수 있는 좋은 밭, 즉 옥토가 될 수 있겠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마음 밭갈이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회개입니다. 깊이 갈아서 가시덤불도 뽑고 돌멩이도 제하여 버리고 부드럽게 갈아엎으며 은혜로 거름을 주어 기름진 옥토로 변화시키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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