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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일 큰 축복 | 원종호 | 2021-02-2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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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마20장1절-16절
Ⅰ. 들어가는 말 다시 찾아오는 3월은 겨울잠에서 깨어난 만물이 가을의 결실을 향한 생명운동을 시작하는 일하는 계절입니다. 어느 계절이라 일하지 않는 때가 있겠습니까마는 농부들의 일손이 다시 시작되고 각종 대학이나 실업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진출하는 사람들의 첫 일이 시작되는 이즈음에 성경이 말하는 일에 대한 교훈을 생각해 보는 것은 뜻있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오늘 우리의 본문은 천국 비유로서 하늘나라는 일꾼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Ⅱ. 하나님은 일꾼을 부르십니다. 본 비유에서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장터에 나간 주인은 물론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일꾼을 부르십니다. 어떤 일이든지 그 일이 성공적으로 성취되기 위하여서는 일하는 자 즉, 일꾼이 있어야 하는 법입니다. 모든 일을 친히, 직접적으로 성취하실 수도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사람을 통해서 일하시기 때문에 일꾼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부르심은 일하러 오라는 초청인 것입니다.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초청이 있습니다. 결혼이나, 생일, 회갑잔치 그리고 각종 연회나 파티 같은 먹고 마시며 즐기자는 초청이 있는가하면 관광이나 등산, 낚시, 그리고 영화나 연극이나 스포츠 경기 등의 관람에 같이 가자는 초청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초청은 일하러 오라는 부르심이라는 것입니다. 얼핏 생각하면 다른 그 어떤 초청보다도 가장 싫고 불행한 초청, 즉 즐겁지도 않고 축복도 아닌 것 같습니다만 어떤 사람이 대학을 졸업한 후에 다른 친구들은 다 일자리를 얻어 취업을 하였는데 이력서를 제출해 놓은 회사에서는 아무런 소식도 없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시간이 흐를수록 그 심정이 불안하고 초조해 질 것입니다. 그러한 때에 어디서 연회의 초대나 여행, 혹은 관광의 초청이 온다면 그 사람은 과연 기쁠 수가 있겠습니까? 오히려 더 괴로움을 주는 일이 될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자에게 일하러 오라는 취업통지서가 배달되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처럼 기쁜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하러 오라는 초청은 확실히 제일 큰 축복인 것입니다. 더욱이나 일자리가 없어 종일토록 장터에 서있던 본문의 한사람에게는 보다 더 그렇습니다. 사람이란 타향살이를 해 보아야 고향이 소중한 것을 알게 되며 실직을 당해보지 않고는 일자리가 얼마나 큰 축복인가를 미처 깨닫지 못하는 법입니다. 현대인들은 너무 바쁘고 분주한 자신들의 삶을 곧잘 불평합니다마는 그것은 즐거운 비명입니다. 까닭은 실직의 고통에 비할 바가 도저히 아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인간 최고의 행복은 자신의 전 능력을 기울여 일에 몰두할 때라고 한 전 미국대통령 존 에프 케네디의 말처럼 최선을 다하여 자기의 일에 열중하는 자들에게는 보수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일자체가 보수이기 때문이며 충실치 못한 일에 대한 많은 보수는 오히려 고통이겠기 때문입니다. 더욱이나 외국에까지 가서 전공하여온 자신의 전문 분야에 대한 일자리가 없었던 자에게 일이 주어진다면 그에게 있어서는 그것처럼 큰 보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연회나 관광, 예술 감상의 초청 같은 것은 일하는 자에게 라야 여가를 선용할 수 있는 즐거움으로 기쁨이 되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은 악을 행하는 것”이라는 서양의 격언은 과연 사실입니다. 사람이 실직하여 있으면 나태해지고 잡념이나 악한 생각이 그 마음에 들어오게 되어 죄를 범하기에 이르게 됩니다. 때문에 사람이 어떤 일에 종사하든지간에 일할 수 있다는 행복을 감사해야 하며 동시에 그 일은 하나님의 소명임을 자각하여야 합니다. 따라서 어떤 일자리에 서 있던지 그 일에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최선을 다하는 것은 곧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이며 동시에 그것은 나의 구원을 완성하는 길이 되는 것입니다. 까닭은 삶이란 곧 일하는 것이며 즉 인간은 일하기 위해 세상에 왔으며 그 일이 무엇이든지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정상화 해가는 것이 인간의 존재 의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가치는 신분의 높낮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자신의 맡은 일에 충실한가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나와 당신은 이 최대의 축복을 오늘도 누리고 있는지? 오늘 본문에 나타난 주인은 하루에 무려 다섯 차례나 일꾼을 부르러 나갔습니다. 그만큼 그 포도원에는 할 일이 많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기에 일꾼은 얼마든지 필요합니다. 기독교는 역사의 종말까지 계속하여 일꾼을 필요로 합니다. 이시간도 하나님은 일꾼을 부르시고 계십니다.
Ⅲ. 그러면 어디에서 일하라는 것입니까? 본문은 포도원에 들어가서 일하라고 합니다. 포도원이란 넓은 의미에서는 이 세상 즉 역사와 자연계 전체를 말하고 좁은 의미로는 하나님이 경영하시는 포도원으로 비유된 바 있는(사5장1절 이하) 하나님의 선민 이스라엘을 뜻하기도 하며 복음시대에 와서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포도나무가지이고 그리스도는 그 가지들이 붙어있는 포도나무이며 이 포도나무를 경영하시는 주인은 하나님으로 되어 있으니(요15장1절 이하) 포도원이란 머리와 몸의 관계를 가진 교회임이 분명하여집니다. 그러므로 포도원에 들어가서 일하라는 것은 교회에 들어가서 일하라는 의미입니다. 포도원 밖에서 일하는 것은 포도원 주인의 일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포도원에 들어가서 일하라는 것은 교회 안에서 일하라는 우선적 뜻이 있지만 그것은 반드시 교회 안에서만 일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까닭은 이 세상 즉 인간 역사나 자연계 전체까지도 하나님의 포도원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어떠한 직업이나, 어떠한 위치에서 일하던지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하는 것은 다 포도원에서 일하는 것입니다. 이유는 포도원에 들어가서 일하라는 것은 그 포도원 주인 되시는 하나님의 일을 하라는 의미이기 때문에 무슨 일이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 되겠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정치가이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정치하고 교육가이면 하나님의 뜻을 따라 교육을 하고 기업가이면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 기업을 경영하는 등 삶의 어떤 분야에서 일하던지 간에 이같이 하는 것은 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라는 것이며 동시에 이것이 자기 구원의 완성인 것입니다. 까닭은 삶 자체가 일이며 그 일을 통해서 인간은 자기를 실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하나님의 일인 동시에 곧 나의 일인 것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는 영역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계는 이 같은 방법으로 경영되어야 할 하나님의 포도원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포도원에 들어가라는 것은 단순히 주인 되시는 하나님의 일을 하라는 의미뿐이겠습니까? 즉 교회에 들어간다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근거인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들어간다는 의미가 동시에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란 하나님의 통치의 개념으로 설명될 수 있기에 교회에 들어간다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 아래로 들어간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교회에 들어간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며 그들은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절대통치 곧 하나님의 법도(法道) 아래에 종속되는 자들이므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에 들어가지 않은 자 곧 포도원에 들어가지 않은 자는 하나님의 일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은 선행할 수도 없지만 어느 정도의 도덕적 선행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일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에 다니기는 하지만 아직 하나님의 절대통치 아래에 들어가지 못한 자들은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습니다. 때문에 오늘 우리의 성경말씀은 포도원에 “다니라”가 아니고 “들어가라”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참으로 교회에 들어간 사람은 그가 어떠한 일에 종사하던지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는 자이기에 그 자기의 하는 일을 하나님의 다스림에 의해 처리할 것이고 또한 그렇게 되니 그것은 모두가 하나님의 일인 것입니다. 동시에 오늘 우리의 본문이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시는 것은 일하라는 부르심이지 포도주에 취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포도원에 들어간 사람은 일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곧 나의 일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나와 당신은 아웃사이더(out sider) 입니까? 인사이더(in sider)입니까? 하나님의 통치 아래로 깊이 들어가지 못하고 변두리에서 빙빙 도는 사람들! 은혜의 깊은 세계에 들어가야 합니다. 주님은 깊은 데로 가라 그리고 거기서 그물을 내리라고 명령하십니다(눅5장4절).
Ⅳ. 다음으로 그러면 언제 들어가서 일하라는 것입니까? 바로 지금입니다. 해지기 한 시간 전, 그러니까 일할 수 있는 시간이 한 시간밖에 남지 않은 시점인데도 불구하고 주인은 “바로 지금” 포도원에 들어가서 일하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일반적 관점으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습니다. 동시에 해가 지면 더 이상 일할 수 없는 당시의 노동 고용에 대한 사회적 규범을 알면서도 해지기 한 시간 전까지 일하기를 기대하면서 즉 종일토록 서 있었던 이 한사람의 태도 역시 인간 이성으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일입니다. 때문에 이 성경 본문은 인간의 일반적 상식의 범주를 넘어선 영적 교훈이 담겨져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적어도 오전 9시가 넘으면 포기하고 내일이나 기대하면서 자기 집으로 돌아가야 할 이 사람이 오후 5시 즉 해지기 한 시간 전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다는 이 불합리한 태도가 우리에게 주는 영적 교훈은 일하고 싶은 강렬한 의지를 말하여 주며 그만큼 하나님의 일이 하고 싶어서 이치에 맞지 않게 끝까지 서서 버티고 기다렸다는 이 사실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인 믿음(히11장1절)으로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자세를 보여주는 것이고 동시에 그것은 “그 날”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매우 중요한 교훈을 교시합니다. 까닭은 만약 그 사람이 내일 일할 것을 생각하였다면 해가 질 무렵까지 거기에 서 있지 않고 이미 자기 집으로 돌아갔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본문의 주인도 그 사람에게 내일을 약속한 것이 아니고 “바로 지금” 일하라고 하였고 그 사람 역시 “바로 지금” 일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일에 대한 의지의 강렬함이 결핍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정치를 해도, 기업을 해도, 교육을 해도, 하나님의 말씀(뜻)을 따라 하려는 의지는 없고 정치적 수완, 사업적 경험, 세계 경제의 동향, 사회적 현상과 같은 데만 신경 쓰고 의존하기 때문에 그것은 역사와 세계의 방향을 궁극적으로 조정하시는 세계와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일이 될 수 없고 따라서 거기에는 부작용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미 말씀드렸습니다마는 어떤 분야에서든지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 일을 하는 것은 곧 자기 구원의 완성의 길이며 하나님의 일이 되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일과 나의 일은 분리될 수 없으며 그것이 또한 자기의 실현인데 오늘 우리에겐 이것을 위한 믿음의 노력 즉 현실적으로는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 같았지만 해질 무렵까지 서서 버티는 신앙적 노력이 없기 때문에 세계는 그 병이 심화되어가고 교회의 존재는 의미를 잃은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어옇든 본문에서는 이 같은 끝까지 버티는 신앙적 노력에 응답이 있어서 한 시간의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버티고 서있는 나의 공로가 아니라 거기에 대한 응답으로서 주인이 베푼 은혜이며 축복으로서의 기회였습니다. 주인의 이 같은 불러주심이 없었더라면 완전 실패한 자, “빈손 인생”으로 돌아갔을 이 사람에게 있어서 주어진 이 한 시간은 한없는 축복이요 전적인 은혜가 아닐 수 없었을 것이고 따라서 기쁨과 감사와 찬양이 넘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보수에 대한 계약이나 약속을 받은 일이 없는 이 사람에게 있어서 이 한 시간은 감사와 감격에 도취되어 희희락락하며 아무렇게나 보낼 수 없는 것은 그 한 시간이 어떠한 인생으로 그를 자기 집으로 돌아가게 할 것인가를 규정짓는 긴박한 시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현재라는 시점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아무리 위대한 비전이라고 하더라도 미래의 어떤 시점에 가서 한꺼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서부터 이루어져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현재를 잃으면 미래도 없는 것입니다. 시간이란 영원한 것 같지만 그렇지도 않고 더더욱 나에게 주어진 나의 시간은 영원할 수 없는 인간이기에 지금까지는 기다림으로만 지내온 여기 본문의 이 사람이 그 한 시간마저를 놓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감사와 감격에 넘쳐 최선을 다 하였을 것이 분명한 것은 그토록 일하고 싶었던 자이며 그렇던 그에게 주어진 그것도 여유가 없는 긴박한 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있어서 이 한 시간은 혼신의 힘을 다해 일하는 땀 흘리는 시간이었으나 힘든 줄 모르는 감격과 감사로 일하는 기간이었을 것입니다. 의무감에서 해질 시간만을 기다리며 일하였을 수도 있는 품삯의 약속을 받은 자들과는 확실히 같을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아무리 일을 많이 한다 하더라도 아침 첫 시간부터 일한 자들만큼 할 수는 없었을 것임에도 꼭 같은 보상을 받았다는 것은 의무감에서가 아니고 은혜에 대한 기쁨과 감사로서 최선을 다하는 자에게 베푸시는 주인의 또 하나의 은혜이며 축복인 것입니다.
Ⅴ. 나오는 말 본 비유에서 그냥 지나쳐 버릴 수 없는 것은 품삯을 계산해 주는 장면입니다.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자를 하루 종일 수고한 자들과 동일하게 대우하고 그것도 우선적으로 계산해 주는 주인의 처사는 확실히 노동규범에 어긋나는 불공평(?)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일반적 인간사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고 신앙적 교훈을 주시는 것입니다. 본문에 있어서 주인의 대답은 내가 너희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 즉 계약을 하였기에 한 데나리온을 주었는데 무엇이 잘못이며 더욱이나 적게 일한 자에게 많이 일한 자와 같은 보상을 한 것은 오히려 선한 일이며 또한 그것은 주인이 자기 것을 가지고 자기의 뜻대로 한 것에 대한 그들의 권한 침해이며 간섭이라는 것입니다. 이 같은 주인의 논지는 전혀 잘못이 없을 뿐만 아니라 이 비유의 가장 핵심적 교훈이 숨어 있는 것입니다. 즉 품삯을 계약하고 들어와서 일한 자들은 주인과의 계약 관계에 있는 율법주의자들을 뜻하는 것이며 전혀 품삯의 약속이나 보장을 받지 못하고 포도원에 들어간 자들은 주인과 은혜의 관계에 있는 복음에 속한 자들을 표상하는 것입니다. 만약 불공평을 주장했던 계약관계에 있는 자들이 일하러 들어올 때에 품삯에 대한 계약을 받지 못했다면 일하러 들어오지도 않았을 것이고 품삯의 약속을 계약했기 때문에 의무감에 젖어 마지못해 일하는 비능률이 되풀이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그들은 불공평(?)에 대한 주장은 오히려 계약조건을 넘어서려는 즉 계약 이상의 보상을 받으려는 이기주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품삯에 대한 어떤 보장도 못 받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일을 소홀하게 한 것도 아닌 자들에게는 더욱이나 한 시간밖에는 일할 수 없는데 주인이 얼마나 보수를 주겠는가, 그저 적당히 시간만 보내고 주는 대로 받자는 자세는 전혀 없었습니다. 이것은 그가 해질 무렵까지 서서 기다렸다는 사실에서 이미 충분히 설명된 바 있지만 다만 일할 수 있게 해주었다는 그 감격 즉 그에게는 일자체가 이미 보상이었기 때문에 최선을 다하였다는 것입니다. 주인은 말씀하십니다. “이와 같이 나중 온 자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14절) 이것이 계약관계에서가 아니라 은혜로서 구원받고 축복받도록 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역사는 이미 해질 무렵 즉 해지기 한 시간 전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지금까지 자기를 낭비한 자들이 있다면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명령하십니다. 바로지금 포도원에 들어가라고 그리고 감사와 감격으로 일을 하라고 말입니다. 이 남은 한 시간마저도 놓치면 당신은 실로 빈손 인생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역사가 황혼이 될 때까지 하나님은 계속하여일할 자를 부르고 계십니다.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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