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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낫고 저 하느냐 원종호 2021-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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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52-9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 이러라] 거기 삼십 팔년 된 병자가 있더라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 가니라

 

i,들어가는 말

병든 인간은 온전한 인간이라 할 수 없습니다. 까닭은 인간 제구실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이 양문 곁의 베데스다 못가에 있는 다섯 개의 행각에는 많은 병자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물론 일정치는 않았지만 가끔 천사가 내려와서 못물을 움직이게 할 때에 먼저 그 물 속에 들어가는 사람은 어떤 병이든지 낫는다는 말을 전하여 듣고 찾아온 병자들입니다. 그러한 거기에 어느 날 예수님이 오셔서 한 병자를 향하여 네가 낫고저 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이 주님의 질문에 초점을 맞추면서 본문 사건이 주는 교훈과 은혜를 받고저 하는 것입니다.

 

ii, 병든 자들만 있는 곳

못을 중심으로 행각이 있었던 것으로 보면 이곳은 본래 사람들이 찾아와서 휴식하는 공원과도 같은 자연환경이 좋은 장소였을 것이 분명합니다만 지금은 휴식처가 아니라 오히려 가까이 가면 더욱 마음이 무거워지는, 삶의 휴식을 완전히 잃은 병자들만이 가득히 누워 있는 곳이 되고 말았습니다. 특히 본문은 맹인과 다리 저는 사람과 혈기 마른 자들이라고 하여 세 종류의 병만을 시사하지만 사실은 더 많은 종류의 병자들이 누워 있었고, 그들의 자유스럽지 못한 움직임의 모습이나 신음소리 등 때문에 아무도 가까이 가고 싶지 않는 곳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여기 38년 된 병자의 나를 물에 넣어줄 사람이 없다.”는 고백처럼 타인의 부족을 채워주거나 도와줄 사람은 하나도 없고 전부가 다 자기에게 도움을 줄자들만을 찾는 사람들로만 가득 차 있는 베데스다 못 주변! 자기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에 남을 책임질 수 없는 자들만 있는 곳. 그러니까 이타적인 사람은 없고 이기적인 사람들만 있는 이곳은 확실히 인간이 모여 사는 인간사회이면서도 인간은 없는 현대 사회의 단면도인 것 같습니다. 분명히 인간이지만 인간 제구실을 할 수 없는 병든 인간, 불구인생, 온전치 못한 인간들로만 구성되어 있는 이 베데스다 못 주변 곧 행각안의 사회는 틀림없는 이 시대의 축소판이라는 것입니다. 인간 없는 인간사회! 병든 사회이기에 병든 인간들의 비정상적인 행동과 신음 소리로 차 있는 우리 시대의 현실이 본래는 인간의 안락한 휴식처로 만들어졌던, 베데스다 못 주변 같은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인간의 낙원 에덴이 아니었던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자신들 스스로의 힘으로는 병든 그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에 일정치 않는 못의 물이 움직이기를 그토록 기다리며 설령 움직인다 하더라도 그 물속에 자신이 먼저 들어가리라는 보장은 아무데도 없는 막연한 기대에 자신을 걸고 살다가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대로 죽어가야만 하는 불쌍한 인간들의 집단!

그러나 그들 상호간에도 피차간에 그 어떠한 도움을 주고받을 수조차도 없고 오히려 누가 물에 먼저 들어갈 것인가를 겨루어야 하는 인간 군상들의 거처이기에 이곳에는 제3의 도움이 필요할 곳일 뿐입니다. 현대인은 마음의 눈이 어두워진 소경인지 모릅니다.

인격의 절뚝발이인지 모릅니다. 또한 현대인은 그 영혼이 영양 실조해 버린 혈기 마른자인지도 모릅니다. 그러기에 병든 자들로만 가득 찬 현대는 병 들었고, 그러기에 거기에는 인격이 썩는 냄새와 양심의 신음소리가 만년 되어 가는지 모릅니다. 인간 자기들의 힘으로는 그 병든 인간성이나 병든 사회를 고칠 길은 없고 이기적으로만 달음질하는 인간 없는 현대! 거기에는 꼭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디오게네스는 아테네 거리에서 사람을 찾았습니다. 하나님도 사람을 찾습니다. 웅장한 규모의 건물이나 방대한 조직이나 풍부한 경제력을 하나님은 찾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은 사람을 찾습니다. 온 예루살렘 도성 안에서 한 사람의 의인을 즉 참사람을 찾았습니다.(51)

를 전제하고 라야 성립되는 존재이기에 이타적인 인간이어야 참 인간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자를 통하여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인간 없는 인간 사회를 향하여 하나님은 오늘도"온 땅을 두루 살피사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는 자를 찾고"(대하169) 계십니다.

 

iii,네가 낫고저 하느냐?

온전치 못한 불구의 인간들, 병든 인간들만 있는 인간 없는 아무도 가까이 하기 싫어하는 그곳에 주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문제 해결의 실마리입니다. 주님만이 병든 인간을 치유하십니다. 찾아오신 주님은 네가 낫고저 하느냐고 묻습니다.

오늘 우리는 정말 병 낫기를 소원합니까? 현대인들 중에는 자신이 병든 인간임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많이 있을 뿐 아니라 병든 것을 안다하더라도 그 인격의 불구나 병든 마음이나 온전치 못한 양심 같은 것을 고치기를 갈망하지 않습니다. 육적 병은 기어코 고치기를 원하며 육적 건강을 위해서는 보약이란 약은 다 먹고 심지어 지렁이까지 잡아먹으면서 말입니다.

저와 여러분! 우리는 병든 인간성을 깨닫고 육적 병과 함께 영적 병을 고치기를 간절히 소원하여야 합니다. 아니 영적 병을 우선적으로 고쳐야 합니다. 주님께서 네가 낫고저 하느냐고 물으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낫기를 갈망하는 자를 고쳐주십니다. 본문의 고침을 받은 38년 된 병자를 보십시오. 그의 병이 단순히 오래 되었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그를 고쳐주신 것은 아닙니다. 그의 병에서 해방되어야 하겠다는 의지가 짐작할 수 없으리만큼 강렬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병자의 병이 무엇이었는지 또는 그가 언제부터 이곳에 왔는지 알 수 없지만 같은 병자이면서도 다른 사람들처럼 어느 정도의 움직임도 할 수 없고 들것에 누워만 있는 상태라는 사실을 본문을 통하여 짐작할 수 있으며 또한 물이 움직일 때에 자기를 물에 넣어줄 사람이 없어 자기가 물에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간다는 사실에서 이미 여러 차례 그러한 일을 겪었던 경험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의 부모, 형제, 친지, 친척은 다 어디로 갔기에 그만이 거기에 있으며 그를 물에 들어다가 넣어줄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까? 버림받은 것입니다. 38년이란 긴 세월을 누워서 옳게 움직이지도 못하는 사람으로 살아 왔기에 그의 부모 형제도 그를 버린 것입니다. 얼핏 생각하면 그렇게 부모 형제, 친척들에게서도 버림받고 온 세상으로부터도 외면당한 그가 움직이지도 못하는 몸으로 그것도 손발이 터지도록 기어가더라도 움직이는 물에 먼저 들어갈 수 없는 것을 알았으면 무엇 때문에 그 실패를 되풀이하면서까지 거기에 있어야만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차라리 구차한 생명 끊어버리고 마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럽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이 사람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인간적으로 전혀 가능성이 없는 절망적이지만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팔꿈치와 무릎에서 피가 나고 온 몸이 흙투성이가 되면서도 물이 움직일 때마다 필사적으로 기어갔습니다. 38년이나 그렇게 살아온 그였지만 그는 자기의 생을 긍정하였습니다. 그것은 생명이 하나님께로 주어진 것이기에 하나님께서 포기하지 않는 한 포기할 수 없다는 신앙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어옇든 그는 절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도 그것도 한 순간이 아니고 38년이나 계속되는 절망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죽어 버렸어야 했을 입장에서도 생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낫고자 하는 소망! 현실과 상황을 극복하려는 강렬한 의지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자를 고쳐주십니다. 밤이 새도록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했지만 실망치 않고 내일을 위해 그물을 씻고 있던 베드로에게도 찾아 오셔서 한 번 더 그물을 던지게 하시던 주님은(51절 이하) 그 어떠한 시련 속에서도 절망치 않는 자에게 반드시 축복을 베푸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온 인류의 병든 인간들을 향하여 네가 낫고저 하느냐고 묻고 계십니다.

 

.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38년이나 움직이지 못하고 누워만 있던 자에게 안수를 해주시지도 않고 또한 고쳐주시지도 않고 그저 일어나라는 것도 무리인데 거기다가 지금까지 등을 기대고 누웠던 자리까지도 들고 걸어가라는 주님의 이 명령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 같기만 합니다. 그런데 본문은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갔다(9)고 합니다. 엘리사의 문전에 섰던 문둥병자 나아만은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씻으라는 명령이 떨어졌을 때에 노하여 그 명령을 순종치 않고 자기 나라로 돌아가려 하였습니다. 까닭은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씻으라는 명령이 자기의 생각과 맞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즉 자기 생각에는 엘리사가 직접 나와서 여호와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당처(환부)위에 손을 흔들어 문둥병을 고쳐줄 것으로 알았는데(왕하511)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엘리사를 통한 하나님의 명령은 내 생각, 즉 인간의 이치에 맞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럴듯하지도 않았고 인간들의 생각으로는 믿어질 수 없는 명령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이 병자는 인간적 이치로는 도저히 믿어질 수 없는 명령임에도 거기에 순종하였습니다. 이것은 믿음이었습니다. 불합리한 명령이 떨어졌을 때 믿어지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려고도 하지 않았다면 그는 결코 병에서 구원 받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는 믿음의 순종을 하였던 것입니다.

주님의 명령은 순종하면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까닭은 그분의 명령은 영생이기 때문입니다.(1250) 명령은 무조건적이기에 복종만을 전제로 합니다. 불복하면 화를 자초하지만 복종하면 축복입니다. 그런데 38년이나 등을 대고 누웠던 그 자리가 무엇이 그렇게 가치가 있고 좋다고 그것을 내버리라 하지 않고 들고 가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여기에는 깊은 영적 뜻이 있습니다. 인간들 가운데는 과장이나 국장, 부장 자리같은 자리에 등을 기대고 사는 자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 명예나 권세, 부귀영화나 지식 같은 것에 완전히 등을 대고 곧 그러한 것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그러한 것에 의해 자기의 삶 전체가 지배를 받는 자들이 있으며 또한 그러한 가치관에 의해 살아가는 자들이 대단히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38년 된 병자처럼 그러한 자리에 등을 기대고 누워있는 한 그는 인간 제구실을 할 수 없는 병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곧 인간이 병든 인간 곧 인간병자라는 사실입니다.

오늘날도 인간의 역사는 자리싸움으로 얼룩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 자리에서 일어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 자리를 완전히 내어버리라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 자리에 등을 대고 눕지 말라는 것입니다. , 거기에 너 자신을 전적으로 맡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 자리를 네 손으로 들고 걸어가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그 자리에 네가 잡혀(포로) 있었으나 그 자리를 네 손에 들고 걸어가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바른길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하나님 이외의 것은 무엇이든지 간에 거기에 등을 기대는 것은 곧 그것을 전적으로 의지 한다는 의미가 되고 따라서 거기에 사로잡히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바른 길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 자리가 나를 다스리는 주인이 아니라, 내가 그 자리를 버릴 수도 있는 주인으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v,나오는말

38년 동안이나 움직이지 못하고 누워만 있던 이 사람, 이제 자리를 들고 걸어갑니다. 이 사람에게 있어서 이보다 더 큰 기쁨이 어디 있겠습니까? 병든 인간이었기에 인간이면서도 인간 대우를 받기는커녕 모든 사람으로부터 버림받았던 인간 제 구실을 할 수 없었던 인간 아닌 인간! 이제는 바로 정상적 인간 즉 온전한 인간으로 회복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병든 인간사회", 베데스다 행각에 머물지 않아도 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도움만을 필요로 하던 삶이 아니라 남을 도와주면서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이 된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그 어떠한 절망 속에서도 생을 포기하지 말고 믿음으로 주님의 명령을 준행하여 영육간의 모든 병에서 구원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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