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구원이 이르렀다 | 원종호 | 2021-01-21 | |||
|
|||||
|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성경본문: 눅19장1절-10절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 지나가시더라 삭개오라 이름 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수 없어 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하여 돌 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 이러라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쳐다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뭇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가로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Ⅰ. 들어가는 말 인생은 “만남”입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든지 만나지 않고는 삶이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누구를 즉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에 따라서 인생의 성공과 실패, 행복과 불행이 결정되는 법입니다. 물론 자기 스스로가 선택의 여지는 없는 일이지만 사람이 부모를 잘 만나고 자식을 잘 만나고 형제나 골육친척을 잘 만나는 일도 대단한 축복입니다마는, 동시에 선택의 여지가 있는 남편이나 아내를 잘 만나고 친구를 잘 만나고 스승이나 이웃을 잘 만나는 일 등은 인생의 성패에 직결되는 대단히 중요한 일들입니다. 오늘 성경본문에 나타난 삭개오라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놀라운 변화를 받았습니다. 성경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이 있습니다. 앉은뱅이가 만나면 걷게 되고 소경이 만나면 보게 되며 문둥이가 만나면 깨끗하여지는 즉, 어떤 병에 걸렸든지 병자가 만나면 병이 고쳐지고 죄인이 만나면 죄 사함을 받고 변화되어 구원 받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 삭개오도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완전히 변화되는 구원의 백성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까닭은 주님은 모든 인간 문제의 유일하신 해결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오늘 이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고 하시면서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라”고 결론을 맺음으로서 주님이 오신 목적이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시는 것임을 밝힘과 동시에 바로 삭개오의 구원이 잃어버린 자의 구원임을 시사합니다. 즉, 삭개오는 “잃어버린 자”였다는 사실을 밝힌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는 주제 아래 어떻게 하여 삭개오의 집에 구원이 이르게 되는가를 본문을 추적하면서 살피려는 것입니다.
Ⅱ. 잃어버린 자란 어떠한 사람입니까? 물질로 구성된 세상에서 물질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육체를 소유한 인간들은 그 물질적 소유의 빈부나 기타 세상 적 소유(권세, 지식, 명예 등)의 많고 적음에 인간 가치의 평가기준을 두며 행, 불행의 근거를 두고 살기 때문에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면서 인간은 그러한 것들을 추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습니다. 에덴 이후 그러한 가치관의 흐름 속에서 삭개오도 예외일 수는 없었기에 자기의 동족들이 싫어하여 민족의 반역자 같이 취급하는 세리라는 관직을 택하였고 당시 “면허장 가진 도적”이라고 세인들로부터 지탄을 받던 세무 관리였지만 그는 어떻게 되었던지 간에 출세하고 돈 많이 모으는 것이 가치요 승리요 성공이라는 철두철미한 물질적이고 현세적인 가치관에 뿌리를 박고서 재치 있게 세금을 포탈하여 돈을 모으는 반면 상납도 잘하여 마침내 세관장이라는 무시 못 할 사회적 지위를 확보하였으니 부러울 것이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 2절에 그가 “세리장이며 또한 부자”였다고 하니 금력과 권력을 동시에 누리는 그의 신분은 로마 정권이 보장해 주고 있으니 이 사람이야 말로 성공자요 행복 자가 아닐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 시대도 이러한 가치관에 서 있고 현대인은 “너” “나” 할 것 없이 이 길을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세상 적 소유의 유무나 현세적 신분의 높낮이가 반드시 인간의 성공이거나 행복의 근거가 아니라는 것은 성경의 확증이며 인생사가 입증하기도 하는 바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삭개오도 그러하였습니다. 그의 높은 신분이나 풍부한 재물이 그를 행복하게 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그가 살아온 가치관대로라면 그는 당연히 행복을 누렸어야 하는데 그의 가슴에는 참 만족과 평화는 없고 오히려 무언지 모르게 허무와 고독이 스며 흘렀습니다. 그러 하였기 때문에 그는 예수님이 “어떠한 사람인가? 만나보고 싶어”하였던 것입니다. 만약 그의 권력과 금력이 그를 참 만족케 하였다면 그가 그토록 예수님을 만나려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삭개오의 가슴 속에 밀려드는 외로움과 허무는 단순히 매국노라고 유대인들로부터 지탄받고 소외를 당하는 일에서 오는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때문에 그는 지금 자신이 걸어온 인생에 대해 그리고 자신이 밟고선 현존하는 사회적 가치관에 대하여 깊은 회의를 느끼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돈이나 지위보다 마음의 안정과 평강이 아니 육적문제보다 영적문제가 인생에 있어서 더욱 소중하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하였다는 말입니다. 주님은 바로 이러한 자를 잃어버린 자라고 하십니다. 곧 돈과 명예나 권세와 같은 신분이나 사회적 보장 같은 것만을 삶의 최고의 가치로 알고 추구하는 자들을 주님은 잃어버린 인간이라고 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양심을 잃어버린 자들이며 결국 인간 자기를 상실한 자들이기에 이웃과 동족과 조국을 잃어버린 자들입니다. 때문에 그들은 하늘을 잃어버린 자들이며 자기를 잃어버린 곧 인간 자기 상실자들입니다. 인간이 인간 이상의 존재로 즉 신격화 되거나 인간이 인간 이하로 동물화 되거나 곧 기계나 상품 취급을 받는 일등은 다 인간을 잃어버린 시대적 현상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잃어버린 인간을 찾아 구원시키기 위해 즉 인간을 인간으로 회복시키기 위해 오셨습니다. 마음의 안식과 평화를 주며 심령에 새 생명 주시기 위해 오셨다는 말입니다. 이 시간도 주님은 외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너희는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의 마음이 쉼(안식)을 얻으리니”(마11장28절~ )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Ⅲ. 그러면 잃어버린 자의 구원은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그것은 이미 언급되었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알아야 할 대상이 아니고 믿어야할 대상이며 연구해야 될 대상이 아니라 만나야할 대상입니다. 오늘 우리의 성경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여리고를 지나가시는 길임을 시사합니다. 따라서 그 여리고에 있는 세관의 세리 장 이었을 삭개오에게는 놓칠 수 없는 기회였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의 주님을 만나고 싶은 강렬한 의지가 본문에 나타나 있습니다. 이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아무리 주님이 그곳을 지나가신다 하더라도 마음의 공허를 느끼지 못하고 아직도 이 세상 적 가치관에서 사는 자들에게는 별로 관심거리조차 될 수 없겠기 때문입니다. A. 돌 무화과나무에 올라갔습니다. 돌 무화과나무에 올라간 삭개오의 행위는 대단한 용기였습니다. 세관장인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을 그 도시 길거리에서 돌 무화과나무에 올라간 그 태도, 더욱이나 세관장쯤 되었으니 나이도 들었을 것이고 따라서 아들, 딸들이나 또는 며느리나 손자 손녀들까지 있었을지 모르는 그로서 그 모든 창피와 체면을 무릎 쓰고 돌 무화과나무에 올라가서 예수님을 내려다보는 철부지 같은 그의 태도는 분명히 그의 사회적 신분이나 인간적 체통 같은 것을 아랑곳하지 않은 용기였습니다. 이것은 그가 주님을 얼마나 만나고 싶어 하였다는 것을 나타내며 동시에 명예와 권력으로써 해결될 수 없었던 그의 심령의 갈증이 얼마나 깊었는가를 나타내 주는 것이고 또한 그와 같이 심한 영혼의 갈증을 느끼는 사람은 반드시 주님을 만나야 한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체면도, 창피도 금력과 권력으로 뒤집어쓰고 있던 자만심이나 위선의 껍데기를 모두 벗어야 합니다. 아니 내적인 마음의 갈증을 해소시키기 위하여서는 옛사람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모든 것을 벗어버리고 순수한 인간으로 되돌아가야 합니다. 심령의 평화와 영혼의 안식은 돈과 명예와 권세의 문제보다 근원적이며 우선적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삭개오는 반드시 돌 무화과나무에 올라가야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로서는 반드시 그리하여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키가 작은 자이었기 때문입니다. 즉 그의 키가 작았기 때문에 주님이 “어떠한 분인가”를 만나볼 수가 없었다(3절)고 오늘 우리의 성경 본문은 증거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무화과나무에 올라간 삭개오의 행위는 주님을 만나기 위해 자신의 부족을 보완하였다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동시에 그것은 주님을 만나는데 있어서 자신에게 부족한 점이 있다는 것을 시인하는 행위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확실히 표준에 미달되는 키의 소유자였습니다. 인간 모두는 부족한 데가 있는 미달 자들입니다. 사업을 해도, 정치를 해도, 교육을 해도, 여타의 어떤 일을 하더라도 완벽할 수 없는 미달 자들이며 그것은 본질적으로도 무한자인 하나님에 비하여 인간은 다 유한자이기에 미달 자 들이고 더욱이나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없이는 주님을 만날만한 자격조차 없는 죄인들이기에 하나님의 표준에는 미달 될 수밖에 없는 키 작은 미달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가 천국을 소유할 수 있다”는 말씀처럼(마5장3절) 세관장으로서 돈과 명예가 있었던 삭개오는 큰 자가 아니라 자신이 작은 자, 표준 미달자라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자가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B. 앞으로 달려갔습니다. 주님을 만나려는 삭개오를 어렵게 하였던 또 하나의 이유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 사람들에 주님이 가리워져 볼 수가 없었다는 점이었습니다.(3절) 아무리 키가 작다고 하더라도 삭개오와 주님의 단 두 사람만 이라면 즉 그 앞을 가리우는 다른 사람들이 없었다면 문제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가리우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앞으로 달려 가야했고 돌 무화과나무에 올라가야 하였던 것입니다. 허기야 “앞으로” 가지 않고 뒤에 있는 어떤 나무에 올라가서 멀리가시는 주님을 뒤에서 즉 뒷모습을 볼 수도 있었을 것인데 삭개오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단순한 호기심에서 주님을 만나려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지나간 주님을 보는 곧 과거의 주님을 만나려한 것이 아니고 자기 앞으로 다가오시는 주님을 정면으로 만나기를 원하였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측면에서 주님의 눈치나 살피면서 비위를 맞추고 그의 축복이나 받으려는 자세가 아니고 자신을 몽땅 내어 놓고 정면으로 주님을 만나고 싶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 시대는 예수 그리스도를 정면으로 만날 수 없게 하는 곧 우리에게 주님을 가리 우는 것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환경적 요인이나 인간성 속에 잠재하는 육적 사욕이나 그런 것들을 근거로 하는 가치관도 그러한 것들이지만 숱한 신학자들이나 그들의 신학이 주님을 직접 만나지 못하게 하는 가리움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하한 중간 개입자 없이 주님을 직접 정면으로 만나기를 원하여야 합니다. 이러한 자에게 주님은 만나주십니다.
Ⅳ. 그 집에 유하여 주시는 주님 이와 같이 모든 것을 내어놓고 또 모든 것을 벗어버리고 주님 정면에 나선 삭개오에게 주님은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5절)고 하신 것입니다. “유한다”는 것은 그 집에 들어가 함께 먹고 마시며 동거해 주시는 것을 뜻합니다. 주님이 함께 사는 집, 주님이 식탁에 함께 하고 잠자리에 함께 하시고 일터에 함께 하시는 집! 이것이 주님을 영접한 가정인 것입니다. 이리하여 돌 무화과나무에서 내려와 주님을 영접한 삭개오의 집에서는 잔치가 베풀어졌습니다. 주변에서는 거룩하신 주님이 죄인의 친구 되었다고 비난을 하든 말든 주님을 모신 가정은 잔치 집으로 변하는 법입니다. 금력과 권력에 쌓여있었던 부자였지만 참 만족과 기쁨이 없던 삭개오의 가슴과 가정에는 웃음꽃이 활짝 핀 잔치집이 된 것입니다. 이 같은 기쁨에 처음으로 젖어보는 삭개오는 아니 돈이나 명예 따위로는 도저히 맛볼 수 없던 기쁨에 젖어든 삭개오는 비로소 회개의 결단을 하는 것입니다. 즉 자기의 재산 절반을 가난한자들을 위해 내어놓는 결단이며 타인의 것을 속여 빼앗은 것은 네 갑절을 갚겠다는 이 결단! 이것이 어찌 주님을 만나는 일 말고 다른 곳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즉 오직 현세적이며 물질적 가치관에 젖어있는 현실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겠느냐는 말입니다. 놀라운 변화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만 있을 수 있는 인간 변화요 인간 구원입니다. 지금까지는 남의 것을 속여 빼앗아서라도 긁어모으기만 하던 삭개오가 자기 것을 지금까지 자신이 무시하고 짓밟아오던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내어 놓으며 더욱이나 엄청난 수치요 굴욕일 터인데도 속여 빼앗은 것까지라도 여러 배를 갚겠다는 결단은 그러한 댓가를 치루고서라도 주님을 얻는 것이 참 생명이요 행복이라는 것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이제야 비로소 인간이 무엇인가를 발견하였습니다. 실로 위대한 인간 회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와 당신의 가정은 어떠합니까?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Ⅴ. 나오는 말 오늘 우리 시대는 삭개오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마침내 경제적 풍요를 누리는 현대인은 가슴을 엄몰하는 고독과 허무의 물결에 밀려 유리하며 방황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여리고를 지나가시던 것처럼 현대라는 가도를 지나가십니다. 주님을 만나고 싶지 않으십니까? 그러면 당신의 가정이 잔치집이 되는 구원이 이를 것입니다.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
|||||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