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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을 뜬 바디매오 | 원종호 | 2021-01-1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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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뜬 바디매오 성경본문: 막10장46절-52절 저희가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소경 걸인 바디매오가 길가에 앉았다가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심히 소리 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저를 부르라 하시니 저희가 그 소경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너를 부르신다 하매 소경이 겉옷을 내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일러 가라사대 네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소경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Ⅰ. 들어가는 말 여기 한 소경이 있습니다. 왜? 언제부터 소경이 되어 구걸하는 거지 인생으로 살아오게 되었는지 알 길이 없지만 주님을 만났기에 눈을 뜨게 된 사건이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물론 이 본문 말씀은 육적 소경뿐만 아니라 영적 소경도 고쳐주시는 분은 주님이시라는 사실을 교시하여 줍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여 바디매오는 소경에서 고침을 받게 되었습니까? 그 방법을 본문을 통하여 살피는 가운데 나와 여러분의 영육간의 눈이 뜨여지는 은혜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Ⅱ. 첫째로 예수님이 누구신지 정확히 알았습니다. 소경인 자기 앞을 지나가는 행렬 속에 예수님이 계시다는 것을 들은 바디매오가 그토록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몸부림쳤던 사실로 보면 예수님에 대하여 들은 바 있는 태도이며 따라서 그분이 어떠한 분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더욱이나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 부른 것을 보면 그분이 예부터 전하여 내려오는 다윗의 씨에서 나올 메시야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이 분명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분은 소경인 자신의 문제까지도 능히 해결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생(요17장3절)이라고 합니다. 나와 여러분은 어떠합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어떠한 분이신가를 정확히 알고 있습니까? 그분은 단순한 도덕교사이거나 진리를 설파하는 소위 성인 또는 단순한 병 고치는 신비한 능력자가 아닙니다. 그분은 인류의 모든 죄와 허물과 질고와 가난 같은 불행의 근거들을 없애주시기 위해 십자가의 죽음을 자취하신 구세주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인간의 질병도 치유하여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바디매오는 주님이 이러한 분이심을 바로 알았기 때문에 그분을 만나기 위해 그토록 몸부림쳤던 것입니다. 오늘날 교계에는 편협한 그리스도관이나 오도된 그리스도관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관이 올바로 확립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Ⅲ. 둘째로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소경인 자기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뿐이라는 것을 믿었던 그였지만 예수님께서 한 곳에만 가만히 머물러 계신다 해도 소경인 그로서는 그것도 길거리에 앉아 오고가는 행인들에게 구걸하지 않고는 연명할 수 없는 걸인의 처지로서는 찾아가기 힘든 일인데 하물며 예수님께서는 유대 전역을 두루 다니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는 몸이신지라 어디로 쫓아가서 그를 만날 수 있겠습니까? 그러던 그가 어느 날 자기가 앉아있는 여리고 길거리를 떠들썩하게 지나가는 한 무리의 행렬이 바로 예수님의 일행이라는 말을 듣고는 소리를 질러 주님을 불렀습니다. 그 기회를 놓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바디매오의 입장으로서는 그 기회를 놓치면 그의 평생에 주님을 다시 만날 수 있을지 의문이었던 것입니다. 한곳에 머물러 계시지 않는 주님이시기에 찾아 나설 수는 없었던 거지 소경 바디매오에게 찾아온 기회! 그는 그 기회를 놓칠 수가 없었기에 크게 소리 쳤던 것이라는 말입니다. 나와 여러분은 어떠합니까? 기회는 많지 않습니다. time ing을 맞추어 움직인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인생의 거의 모든 성공 자들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잘 잡았다거나 활용한 자들 이었습니다. 매사를 다 잘하여야 되겠습니다만 찬스에 강한 자가 성공 확률이 큰 것입니다. 특히 운동경기에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인생은 기회입니다. 공부도, 결혼도 기회를 놓치면 대단히 힘이 드는 법입니다. 성경은 "천하의 범사에 때와 기한이 있다"(전3장1절 이하)고 합니다. 때문에 하나님도 만날만한 때가 있는 법입니다. 그러기에 이사야55장6절에서는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부르라”고 하신 것입니다. 오늘 소경 거지 바디매오에게도 주님을 만날만한 때가 찾아온 것입니다. 때문에 그는 그때를 놓치지 않았던 것입니다. Ⅳ. 셋째로, 끝까지 부르짖었습니다. 주변의 잠잠 하라는 꾸짖음에도 불구하고 바디매오는 더욱 큰소리로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계속하여 부르짖었습니다. 아마도 길거리에 앉아 구걸하는 거지이며 소경이기 때문에 무시하였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러나 그가 소경 거지이기 때문에 멸시 천대 받고 무시당한 것이 어찌 한두 번이었겠습니까 마는 주님을 만나려는 그의 부르짖음은 그러한 주변의 무시나 방해 같은 것에는 전혀 구애를 받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응답하실 때까지 그는 조금도 약하여지지 않고 끝까지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도중에 약하여 지거나 좌절되는 것은 확신이 없기 때문이거나, 나의 부르짖는 내용이나 목표가 이루어져도 그만, 안 이루어져도 그만인 정도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앞에서 말씀드린 바처럼 바디매오는 오직 주님만이 자기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분이라는 철저한 확신과 자신의 눈이 밝아져야 되겠다는 변할 수 없는 목표가 철저하였기 때문에 주변에서야 무엇이라 하든지 간에 계속 부르짖었다는 것입니다. 즉, 비록 소경이요, 거지로 살았지만 삶을 포기하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체념하고 운명에 자신을 맡기는 현재에 안주하려 하지 않고 전진하려 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는 자신도 정상으로 회복될 수 있다는 믿음! 그것이 그로 하여금 의욕 찬 전진을 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끝까지 부르짖는 자에게 주님은 응답하십니다. 여호수아는 해와 달을 멈추었지만 바디매오는 그 해와 달 같은 천체들을 지으시고 운행하게 하시는 주님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기도는 우주와 그 안의 모든 것을 지으신 창조주를 감동시키며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성도가 가진 유일의 무기입니다.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Ⅴ. 넷째로 주님 앞으로 뛰어 나갔습니다. 그의 부르짖음을 듣고 걸음을 멈추신 주님께서 그를 부르신다는 말을 들은 바디매오는 일어나 주님 앞으로 뛰어 나아갔습니다. 거지의 기도라도 들으시는 주님이 감사합니다만 소경인 그가 달려 나갔으니 어디에 부딪칠 수도 있고, 넘어질 수도 있고 시궁창에 빠질 수도 있을 것이겠지만 바디매오는 그러한 것에 개의치 않았습니다. 조금 천천히 가도 상관없었을 일이었지만 그저 자신의 부르짖음에 응답해 주셨다는 사실, 곧 자신을 부르신다는 주님의 사랑에 그저 감격하였기 때문에 거의 필사적(?)인 자세로 달려 나아갔던 것입니다. 그가 겉옷을 내어 버리기까지 하면서 뛰어나갔다는 말씀에는 더욱 그러합니다. 까닭은 집도 절도 없이 길거리에 앉아 구걸하는 거지 신세인 그에게 있어서 겉옷이란 재산목록 1호라기 보다는 재산목록 전체였기 때문입니다. 더욱이나 그에게 있어서는 거처하는 집과도 같은 것이어서 비가 오면 비옷이 되고, 눈이 오거나 바람이 불면 외투가 되고, 밤이면 덮고 자는 침구가 되는 것인데 그것까지 버리고 달려간다는 그 감격의 정도를 우리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아니 눈이 밝아지면 다시는 그 거지의 겉옷이 필요 없겠기 때문에 내어 버리고 달려 나간 신앙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우리의 부르짖음에 응답하므로 부르실 때에는 주저하여서는 안 됩니다. 모든 것을 다 내어버리고서라도 뛰어나가야 하고 달려가다가 부딪치고 넘어지고 깨어지고 빠지는 한이 있더라도 주님 앞으로 달려 나가야 합니다. 즉, 그 부르심에 절대 순종하여야 합니다. 오늘날 어떤 이들은 주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여 오라하는데도 주님 앞으로 나아가기를 거부하거나 주저하는 자들이 있는 줄 압니다. 나와 여러분은 주저하지 마시고 달려 나가는 사람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Ⅵ. 다섯째로 바른 것을 구했습니다. “네가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하시는 주님 앞에서 바디매오는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함으로써 가장 바른 것을 소원하였습니다. 얼핏 생각하면 소경이 된 것은 운명적인 것이고 그렇다면 걸인이었기에 괄시 받았던 그로서는 돈이나 한 뭉치 달라고 요구할 수도 있지 않았겠습니까? 까닭은 소경이라 하더라도 돈만 많으면 대우 받고 살 수 있는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디매오는 바른 것을 원하였습니다. 동시에 이것은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던 자세였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돈을 주었다 하더라도 그 돈을 쓰는 일밖에는 할 수 없는 소경인 그로서는 그 돈이 다 없어지면 또 다시 거지 신세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지만 소경을 고침 받는다면 그의 손으로 돈벌이를 할 수 있기 때문에 더 이상 거지노릇은 하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까닭은 그가 거지가 된 것은 오직 소경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그에게 있어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근본 문제의 해결이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디매오의 문제는 경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보지 못하는 어두운 눈을 밝히는 것이 그의 문제였습니다. 소경이란 바로 볼 수 없기 때문에 가치 판단력이 불가능하거나 부족한 자를 말합니다. 즉, 좋고 나쁜 것에 대한 분별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어떤 것이 선한 것인지 혹은 악한 것인지, 어떤 것이 아름다운 것이며 더럽고 추한 것인지, 분별력이 흐리기 때문에 어떤 것이 영원한 것이고, 어떤 것이 일시적인 것인지의 판단이 흐린 자이며 높고 낮은 것을 볼 수 없으니 어떤 것이 참으로 고상하고 가치 있는 것이며 어떤 것이 참으로 저속하고 무가치한 것인지 등의 판단력이 정확하지 못한 자를 의미합니다. 행과 불행이 진정 어떤 것이며 "생과 사"가 참으로 어떤 것인가를 올바르게 분별하지 못하는 가치 판단이 무디거나 흐린 자들은 다 소경입니다. 역사의 흐름인 현실을 바로 보지 못하는 자도 인간이 무엇이며 인생의 의미나 의의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자도 다 소경입니다. 미움도, 증오심도, 편견도, 이기심도 다 인간의 눈을 흐리게 하는 병균들입니다. 한마디로 사욕은 인간의 가치판단을 흐리게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이 인간성을 상실하였기 때문에 모든 것을 똑바로 볼 수 없는 소경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만물의 의미와 가치를 바로 볼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의 안목을 소유하는 일입니다. 까닭은 만물을 존재케 하신 하나님의 의도가 곧 만물의 존재 의의이겠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본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기에 인간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모든 것을 평가할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인 그리스도(골1장15절)를 가슴에 영접하고 그의 형상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면 하나님의 안목에서 즉 인간 본래의 기준으로 모든 가치를 판단 평가할 수 있을 것이고 그러한 가치판단이어야 정확할 것이기에 비로소 명실상부한 소경이 아니고 바로 보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이것이 바로 인간회복이고 그 회복된 순수한 인간의 눈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시각이겠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과 양심과 영혼의 눈이 어두워져서 가치 판단력이 흐려진 오늘 현대인들의 문제는 바디매오의 경우와 같이 경제문제가 아니고 바로 볼 수 있는 마음 눈, 영혼의 눈, 양심의 눈을 뜨는 것입니다. Ⅶ.나오는 말 이렇게 하여 주님은 그의 소원을 들어 주셔서 눈을 밝게 해 주었습니다. 이제는 거지 인생을 청산해도 되는, 더 이상 주변의 멸시와 천대를 받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와 같이 인간의 영육간의 모든 질병을 고쳐주셔서 인간회복을 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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