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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번 더 그물을 던지라 | 원종호 | 2020-12-3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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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눅5장1절-11절 무리가 옹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새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호숫가에 두 배가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띄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그리한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를 손짓하여 와서 도와달라 하니 저희가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이는 자기와 및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을 인하여 놀라고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일러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저희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쫓으니라 들어가는 말~ 밝아오는 바다! 밤이 새도록 수고를 하였지만 얻은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깡그리 실패한 시점! 기다림에 지쳐 있을 가난한 자기 가족들과 그들에게 아무 것도 가지고 갈 것이 없는 자신을 생각하면 밝아오는 이 아침에도 베드로의 마음은 어둡기만 하였습니다. 직장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정든 고향이었던 갈릴리 바다! 거기에서 잔뼈가 굵었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자신이 있었던 그 바다에 대한 자신의 모든 지식과 경험과 기술을 다 동원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한 마리의 물고기도 잡지 못한 지난밤 같은 철저한 실패는 전례가 없었기 때문에 베드로는 더욱 깊은 실의에 빠졌으며 그렇게 허무하게 깨어지는 바다에 대한 지식과 경험과 기술을 의지하고 살아온 자신에게 배신당한 느낌 때문에 생의 회의마저 느끼게 되었을 것입니다. 혹시 우리 가운데 밤 같았던 지난날의 앙상한 실패와 처절한 자신의 영육간의 곤고와 가난 때문에 마음이 어둡기 만한 분들이 있습니까? 주님은 그대에게 한 번 더 그물을 던지라고 명령하십니다. 즉, 지난밤의 실패 때문에 더 이상 그물 던질 것을 포기하고 그물을 씻고 있는 피곤하고 지친 베드로에게 주님은 한 번 더 그물을 던지라고 명령하심으로써 새로운 힘과 용기를 주었습니다. 한번 실패를 하였다고 해서 그냥 주저앉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지금까지 하던 것처럼 얕은데서가 아니라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주님은 모든 실패자에게 깊은 데로 가라고 명령하십니다. 사실 베드로의 배와 그물은 깊은데로 가면 안 되는 것일 뿐 아니라 날이 완전히 밝은 지금은 고기가 잡힐 때도 아닌데도 불구하고 주님은 깊은 데로 가라는 것입니다.
(Ⅰ) 그렇다면 깊은 데로 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엄밀한 의미에서 인간 역사 전체가 그렇습니다마는 현대는 더욱 깊이를 잃은 세대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산업사회로서의 현대사회는 그 옛날 농경사회와는 달리 조용하지 못한 사회입니다. 각종 공장에서 울려 나오는 다양한 기계소리, 거리를 질주하는 많은 차량과 도심지의 소음 속에서 사는 현대인은 TV, 라디오, 전축 같은 메스콤을 통하여 흐르는 클래식, 째즈, 팝송, 시스코 같은 음악과 권투, 레슬링, 축구, 야구 같은 스포츠에 자신을 맡겨 버리는 것 같습니다. 깊이 있는 삶을 추구하며 생의 의미를 조용히 묻는 일 같은 것은 현대인들에게는 별로 의미가 없고 오직 먹고 마시며, 낚시, 관광, 사냥 등의 여가를 즐기고 환락에 젖어 술과 섹스에 자신을 던지는 현실입니다. 내용보다는 형식을 추구하는 현대는 오히려 내용이 공허하기에 형식을 더 장식하려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실로 다양한 칼라로 꾸며진 빌딩의 숲에서 현대인은 물질적 풍요와 문명의 편리를 만끽해보지만 가슴은 참 만족이 없고, 불안과 허무와 고독이 깊어가기만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깊은 데로 가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이 같은 현상은 생의 의미를 조용히 물으며 인간성을 개발하고 자기 진실을 추구하는 일은 거의 없고, 육체적인 행복만을 근거로 한 물질적이며 실리적인 가치에 얽매어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필연적인 현상입니다. 즉, 인간의 본연인 영의 문제에는 전혀 관심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깊은 데로 간다는 것은 형식보다 내용을 추구하는 것이며, 육보다 영을 추구하는 것이며 상실한 인간성을 되찾는 일인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하나님 은혜의 세계에 깊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만물이 하나님의 창조이기 때문에 그 만물의 존재 의의와 가치는 하나님에 의하여 규정된 것이고, 또한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아는 것이 만물 즉, 우주의 의미를 아는 것이 되는 것이므로 그분의 세계를 추구하며 그분의 은혜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이 깊이 있는 삶, 곧 깊은 데로 가는 삶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실 현대의 불행은 깊으신 하나님께 나가는 일 즉, 하나님의 은혜의 바다에 깊이 뛰어드는 일보다는 과학기술, 철학적 깊이, 또는 역사를 통한 인간의 경험을 더 의존하는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깊은 데로 간다는 것은 세상을 멀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까닭은 바다에서의 깊은 데로 간다는 것은 육지 곧 이 땅에서 멀리 떠나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 (Ⅱ) 그렇다면 어떻게 깊은 데로 갈 수 있습니까? (A) 첫째로 주님이 찾아 오셔야 합니다. 깊은 데로 가므로 실패의 베드로가 성공자로 바뀌어 지던 일은 가장 우선적으로 주님이 찾아오시는 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만약 주님이 찾아오시지 않았다면 깊은 데로 가는 일 자체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코로나로 말미암은 처절한 실패의 밤이 지나고 새해의 새아침이 동터오는 미명에 실의에 찬 베드로에게 주님은 찾아오셨습니다. 보통 내가 성공하고 잘 될 때에는 대문이 불이 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지만 내가 실패하고 잘 안될 때에는 나의 주변에서 사람들이 떠나가는 것이 세정입니다만 우리 주님은 실패와 좌절에서 몸부림치는 외로운 자를 찾아오십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병들고 불의와 불신이 물결치며, 각종 환란의 바람이 거치른 바다! 이 세상에 찾아오셨으며, 세리와 죄인의 친구가 되셨고, 어둡기만 하던 베드로의 마음에도 찾아 오셨던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다 세상이라는 바다에 그물질이나 낚시질을 하여 거기서 얻어지는 것을 가지고 살아가는 어부 인생 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때문에 여기서 말하는 어획이란 물론 이 세상에서 얻어지는 모든 것 즉 물질이나 권세와 명예나 학력이나 부귀영화나 그 이외의 모든 것의 유무와 다소에 따라 성공과 실패가 평가됩니다. 따라서 바다(세상)에 대한 풍부한 지식과 경험이 있어야 하고 고기 잡는 기술과 풍세에 따라 배를 다루는 기술이 능숙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조건들을 완벽하리만큼 갖추었던 바다의 베테랑 베드로같은 사람도 실패하였듯이 아무리 세상에 대한 풍부한 경험, 많은 지식, 능숙한 처세술이 있어 정치바람, 증권바람, 부동산 투기 바람, 올림픽 바람 같은 풍세에 따라 처신 잘하는 자라 하더라도 반드시 그러한 처세술이 성공의 근거가 될 수 없고 얼마든지 실패하는 때도 있다는 것을 오늘 우리 본문이 시사하는 교훈의 하나입니다. 이와 같이 인간은 아무리 완벽한 자라도 언제, 어디서, 어떻게 실패하려는지 모르는 자기를 신뢰할 수 없는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런데 이 주님은 우리가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찾아오시는 분이심을 베드로를 찾아오신 주님에게서 우리는 발견하는 것입니다. (B) 둘째로 자신과 소유를 드려야 합니다. 주님께서 요구하시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주님의 이 요구에 응하지 않았더라면 깊은 데로 갈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찾아오신 주님은 인간들에게 그 소유와 자신을 내놓으라고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성경 본문에서도 베드로의 동의를 묻지도 않고 "그 배에 타시고는 육지에서 조금 떨어지게 하라"(눅5장3절)고 까지 하심으로서 베드로의 배를 요구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 빈 배를 요구하십니다. 일차적으로 베드로의 소유를 내놓으라는 이 요구는 특히 빈 배를 요구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고기가 많이 잡힌 성공의 베드로에게가 아니고 실패한 베드로에게 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불가능한 일일 뿐 아니라 주님이 너무하시는 것 같습니다. 사랑의 주님이 그토록 산산이 깨어진 베드로를 위로하고 감싸주며 같이 울어주지는 못할망정 거기다 대놓고 배를 내어 놓으라니 정말 보통이 아닌 주님이십니다. 생업 수단의 전부인 그 배를 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사렙다 과부가 엘리야의 요구에 응하여 자기와 아들의 최후의 양식을 갖다드려 주의 종을 공궤하였던 것처럼 오늘 베드로도 아무 말 없이 주님 앞에 자기의 소유를 내어 놓았습니다. 그랬더니 사렙다 과부가 다른 여인들은 남편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낳은 아기까지 잡아먹어야 했던 그 무서운 3년 반 동안의 기근 속에서도 베 곯지 않고 살 수 있었던 것처럼 베드로도 엄청난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실패했습니까? 오히려 주님께 당신의 소유를 내놓으십시오. 아무 것도 없는 빈 배입니까? 바로 그것을 주님이 요구하십니다. 당신은 가난합니까? 십일조를 드리십시오. 하나님은 사렙다 과부에게 양식이 떨어져 간다는 사실을 아셨기 때문에 엘리야를 그녀에게 보내셨습니다.(눅4:25) 주님은 베드로가 실패하였기에 그에게 찾아오셔서 그의 소유를 요구하십니다. 까닭은 물론 그를 축복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의 소유가 무엇이든지 곧 명예나, 권세나 지식이나, 자질이나, 젊음, 미모, 건강, 생명까지라도 주님이 필요로 하실 때 거절하지 마십시오. 결코 허비가 아니며, 그것이 곧 당신이 깊은 데로 가는 길이겠기 때문입니다. ㉡ 베드로 자신을 요구하십니다. 다음으로 빈 배를 요구하신다는 이 의미는 바로 베드로 자신을 요구하신다는 것입니다. 만약 베드로가 자기의 배를 드리기를 거절하였다면 그것은 곧 자기 자신을 주님께 드리기를 거절하는 행위와 같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자신을 드렸습니다. 자기의 소유인 배를 내어 놓았을 뿐 아니라 그 배에 주님과 함께 타고 노를 저어 배를 육지에서 조금 떨어지게 하였다는 이 사실이 바로 자신을 주님 앞에 드리는 헌신이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것이 주님이 요구하셨던 바입니다. 이미 언급되었습니다만 주님은 이와 같이 빈 배를 쓰기를 원하십니다. 만선의 개선가를 부르는 성공의 배가 아니고 실패한 빈 배를 쓰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빈 배는 곧 베드로 자신을 가르킵니다. 즉, 자력으로서 아직도 무엇을 할 수 있다고 믿는 베드로가 아니고 지금까지 거기에 의존하고 살아 왔던 자신의 기술, 경험, 지식 같은 모든 것이 더 이상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을 느끼는 베드로를 주님은 쓰시기를 원했습니다. 베드로는 그러한 것들에 보기 좋게 걷어 채이고 배신당했던 것입니다. 인간들이 의존하고 살아가는 지식이나, 과학시술이나, 명예나, 권세나, 재물 같은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믿을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러한 것을 의존하다가는 언젠가 그러한 것들에 걷어 채이고 마는 쓰라린 실패와 허무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모든 것을 소유하였다 하더라도 그러한 것들에다가 자신의 생을 걸지 않는 자, 즉 그러한 것에 포로가 되지 않고 그러한 것을 의존 하지 않는 자는 빈 배와 같은 자입니다. 따라서 그런 사람은 여하한 경우에도 그러한 것들을 내세우거나 거기에 등을 기대고 교만에 빠지는 일은 없습니다. 있으나 없는 것으로 여기는 자의 마음은 빈 배라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생사, 화복의 근거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빈 배란 그 안에 아무 것도 들어있지 않는 빈 마음, 순수한 마음, 깨끗한 마음을 뜻합니다. 어떤 사람은 실제로 아무 것도 없는 가난뱅이지만 그 안에 명예나, 권세나, 지식이나, 재물 같은 것을 강렬히 동경하며 그런 것에 생을 거는 자들이 있는데 이런 자는 빈 마음, 순수한 가슴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것을 아무리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런 것에 얽매이지 않는 즉, 그런 것은 있어도, 없어도 좋은 사람들은 그 가슴이 그런 것으로 차 있지 않으니 빈 마음입니다. 거짓도, 사욕도, 미움도, 시기도, 궤계도 들어있지 않은 마음, 곧 빈 마음을 주님은 요구하십니다. 그러한 가난한 마음에라야 천국이 깃들겠기 때문입니다.(마5장3절) 이와 같이 자기와 그 소유를 주저 없이 주님의 요구 앞에 내어놓은 것이 또 하나의 깊은 데로 가는 길인 것입니다. ㉢ 왜 빈 배를 요구하십니까? 우선, 주님이 그 배에 타시기 위해서입니다. 실제로 주님은 베드로의 배에 오르셨기 때문입니다. 만약 고기가 많이 잡혀서 아직도 그 배안에 고기가 많이 담겨져 있었다면, 그리하여 고기(물질) 비린내로 가득 차있는 배였다면, 그러한 배는 주님이 요구하지도 않았을 것이지만 설령 요구하였다 하더라도 베드로 쪽에서 거절하였을 것입니다. 고기로 돈을 만들기 위한 관심으로 그 가슴이 가득차서 다른 것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까닭은 생선이란 그것을 빨리 처분하지 않고 시간을 지체하면 부패하여져서 어획의 수고가 수포로 돌아갈 확률이 크기 때문입니다. 또한 다른 측면에서 고기가 잡혔다면 곧 빈 배가 아니고 그 배에 비린내 나는 고기가 차 있었다면 그것은 아직도 바다에 대한 자신의 지식이나 기술을 믿을 수 있다는 의미가 됨으로 주님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즉 아직도 자신이 덜 깨어진, 자기 것이 남아 있는 완전한 빈 배가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어옇든 주님은 빈 배 곧 고기도 비린내도 없는 순수한 가슴에 들어오시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을 영접할 수 있는 마음은 빈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 말씀 운동을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주님은 그 배에 오르셔서 바닷가에 서 있는 무리들에게 말씀을 가르쳤으며 주님과 함께 그 배에 타고 있던 베드로 역시 더욱 분명하게 주님이 가르치시는 말씀을 들었을 것이기에 주님은 그 배를 말씀 운동의 거점으로 사용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곧 순수한 가슴이나 순수한 재물을 통하여 주님은 말씀 운동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말을 바꾸면 우리와 우리의 소유, 그것이 어떤 것이든지 곧 명예, 권세, 지식, 기술, 자질 등을 통해서도 복음은 나타나야 하고 말씀 운동은 확장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에게 드려진 베드로나 그의 소유 빈 배는 말씀 운동, 복음 운동, 진리 운동의 거점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배안과 밖을 다 포괄하는 말씀 운동이었기에 안과 밖, 영과 육, 시간과 영원, 현세와 내세, 나와 너, 전부를 살리며 복되게 하는 말씀 운동이며, 생명 운동이며, 축복 운동이었던 것입니다. 즉 주님과 함께 그 배안에 있었던 베드로와 배밖에 서있던 무리들에게 공히 말씀을 전하셨기 때문에 안과 밖을 모두 커버하는 말씀 운동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현대인들이여 그대들을 비우시라! 아니 어차피 인생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므로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할 것이니까"(딤전6장7절) 빈 것으로 왔다가 빈 것으로 가는 빈 배가 아니겠습니까? 그리하면 참 생명 운동이, 참 평화 운동이, 참 사랑 운동이, 참 축복 운동이 그대의 안팎을 누릴 것입니다. (C) 말씀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베드로의 배에 오르셨던 주님은 증거하시던 말씀을 마치시고 이제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고기를 잡으라 하셨습니다. 이 때 베드로는 “고기잡이”라면 나사렛 목수 요셉의 아들인 예수님보다 자신이 훨씬 더 우위라고 주장하고 주님의 그 명령을 거절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자신이 밤새도록 어로 작업을 하였어도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겠다고 대답하고는 깊은 데로 갔습니다. 베드로의 이 같은 태도는 어로에 있어 최고의 기술자 격인 자신도 실패를 했으니 주님의 말씀이야 정말 몇 푼어치의 가치도 없다고 일축해 버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기술로는 실패하였으니 이제는 진정으로 말씀에 의지하는 신앙적 태도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또 한 번 자기가 깨어지는 자기 부정의 고비를 우리는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에 의지하는 길을 지금까지 세상에 뿌리를 박고 자라온 자신과 자신의 것이 깨어지는데서 부터 시작됩니다. 즉, 말씀에 자기 생을 거는 삶은 전통적 경험이나, 과학적 기술이나, 세상 적 지식 같은 것을 넘어서는 삶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모험적 결단 없이는 실현될 수 없는 삶입니다. 창조적 삶에 언제나 모험적 결단이 따르는 것처럼 신앙인생의 여정은 모험의 연속이여야 합니다. 깊은 데로 간다는 것은 안전해 보이는 육지를 멀리 떠나가는 것이기에 모험적 결단이며, 깊은 데란 자기의 두 다리로 설 수 없는 곧 자력으로써 설 수 없는 곳이기에 믿음의 길이고 더 큰 풍랑이 있는 곳이기에 십자가를 지는 각오 없이는 갈 수 없는 길입니다. 그러나 깊은 데에로의 길은 참 축복의 길이며, 참 행복의 길이며, 참 생명의 길입니다. 당신은 말씀에 당신 자신을 전폭적으로 걸고 삽니까? 말씀에 의지한 정치, 말씀에 의지한 경제, 말씀에 의지한 교육, 말씀에 의지한 문화, 말씀에 의지한 사회가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예배도 헌금도, 찬송도, 기도도, 봉사도, 사랑도, 말씀에 의지할 때 디베랴 바닷가의 기적은 당신의 것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직장 생활도, 가정생활도, 교회생활도 그리고 사회생활도 곧 인간의 모든 삶은 말씀에 의지하여 하여야 합니다. 오늘날 말씀의 범주를 떠나는 자들뿐 만 아니라 말씀에서 어떤 것을 약화시키거나 부정하는 일들은 실로 슬픈 일입니다. 인류의 타락도 말씀의 가감에서 왔으며(창3장3절-4절) 인간에 대한 궁극적 심판도 말씀이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요12:48) (Ⅲ) 그러면 이제 깊은 데로 간 결과는 어떠하였습니까? (A) 넘치는 어획의 축복이었습니다. 바다에 대한 최고의 기술로도 전혀 불가능했던 어획이 깊은 데로 가는 말씀의 항진으로 말미암아 자기 배만 아니라 이웃 어부의 배까지 두 배가 물에 잠길 정도로 만선의 넘치는 어획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말씀에 의지하여 순종하는 믿음의 결과로 나와 주변까지 축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나의 경험이나 기술이나 지식을 의지하고 나 혼자 하던 어로 작업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한 어로 작업의 결과였습니다. 말씀을 마치신 주님이 배에서 내리지 않고 깊은 데로 가라 하신 즉 주님께서도 그 배에 함께 타시고 깊은 데로 갔고 함께 그물을 내렸던 결과라는 것입니다. 세상이라는 바다에 행하는 당신의 어로작업은 과연 주님과 함께 하는 곧 이 세상에서의 당신이 하시는 생업이나 기타의 모든 사업은 과연 주님을 동업자로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아직도 나 자신의 기술이나, 경험, 지식 등에 의하여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말씀에 의지하십시오. 오늘 우리의 성경본문은 말씀에 의지하는 것이 물질적으로도 넘치는 축복을 받는 길임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어떤 신자들은 우리의 영은 말씀에 의지하여 살지만 우리의 육신은 자신의 재주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영도, 육도, 말씀으로 삽니다. 까닭은 물질도 말씀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모든 물질세계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발생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날도 역사하십니다. 그러므로 말씀에 전폭적으로 의지하고 그 삶을 결단하십시오. 그러면 당신도 넘치는 물질적 축복까지도 누릴 수 있습니다. (B) 주님을 알고 나를 발견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와 같이 만선의 어획이 되었으면 춤을 추든지 주님 앞에서 계속 감사드려야 상실일 터인데 베드로는 오히려 주님의 발 앞에 그대로 엎드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8절)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주님이 누구인지를 정확히 발견하였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나사렛 한 촌마을에 태어난 목수의 아들로 알았는데 이제 보니 바다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마음대로 주관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전혀 시간도 때도 아닌 곳에서 잡혀진 어획을 보고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주님의 초자연적 권능에 부딪친 것입니다. 실로 그분은 자기의 지식, 기술, 경험으로는 측량할 수 없는 그러한 범주를 넘어서 계시는 자연을 다스리는 자연과 만물의 주라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랬더니 자신은 그 앞에 너무도 초라하고 볼품없는 존재, 곧 죄인이라는 것을 또한 발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때문에 그는 자신은 감히 주님과 함께 설 수 없는 것을 깨닫고 주님을 떠나달라고 간청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배척이 아닙니다. 우리는 여기서 또 한 번 베드로라는 인간 자신이 결정적으로 깨어지는 순간을 봅니다. 인간은 이와 같이 하나님 앞에 설 때라야 자기를 곧 인간 자기의 참모습을 보게 됩니다. 자아발견입니다. 인간이 자기를 바로 안다는 것은 놀라운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계를 움직이려거든 먼저 자기를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자기를 정확히 안다는 것은 어떤 일에든지 50프로 이상의 성공을 하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축복은 이처럼 물질적인데서 자기를 깨닫고 주님을 체험하는 영적인 데로 더욱 깊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주님을 아는 것은 영생입니다.(요17장3절) 하나님을 알고 만선의 축복을 받고... 실로 대단한 축복입니다. (C)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는 축복이었습니다. 한평생 갈릴리 호반에서 생선 비린내와 싸우면서 살아갈 뱃사람 베드로를 주님은 사람 낚는 어부로 부르셨습니다. 주님을 바로 알고 자신을 알 때 즉 자신은 죄인이기에 감히 주님과 함께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참으로 깨닫는 자를 주님은 오히려 부르셔서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십니다. 마치 애굽의 학술을 다 배워 능한 말재주와 행사로(행7장22절)하려고 할 때에는 실패를 하였고 그러기에 나는 입술이 둔하고 혀가 뻣뻣하고 하면서 자기의 무능을 주장하던 자기 부정의 모세를 가시떨기 불꽃 가운데서 부르셔서 사명을 주시던 모습을 연상케 합니다. 어옇든 고기 잡는 어부에서 천하보다 더 값나가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된다는 것은 엄청난 축복입니다. 세상이라는 바다에는 고기(물질)도 있고, 사람도 있습니다. 고기는 낚으면 내 것이 되고 사람은 낚으면 하나님이 것이 됩니다. 그런데 사람을 미끼로 삼아서라도 고기만 낚으려는 현대 사조는 언제나 정상적인 궤도에 올라서려는지? 경제 대국을 반대할 자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 경제대국이 인간을 그 미끼로 하고 얻어지는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을 낚는다는 것은 인간을 인간으로 낚아 올리는 것을 말합니다. 이질화되고 변질되었던 인간을 인간으로 회복시키는 것을 뜻합니다. 때문에 인간이 기계나, 상품이나, 동물 취급되는 사회를 만들어 가면서도 경제 대국으로 가기만 하면 된다는 사고방식이나 가치관은 무서운 비극이 아닐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 낚는 일처럼 소중한 일은 없습니다. 베드로는 바로 이 대열에 서게 되는 축복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 부름에까지도 응하는 베드로는 아비와 잡힌 고기와 그물까지도 다 버리고 주님을 따라 떠났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 낚는 어부의 길은 모든 것을 버립니다. 오직 주님만 따릅니다. 오직 주님만 의존합니다. 다른 것을 의존치 않습니다. 주님만이 인간을 인간으로 구원해 내는 구주이기 때문입니다. Ⅳ나오는 말 깊이를 잃은 세대! 깊은 데로 가십시오. 축복은 당신을 기다립니다. 성공 자가 되기 원하십니까? 깊은 데로 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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