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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망적 현실과 소망적 역사(役事) | 원종호 | 2020-12-1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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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적 현실과 소망적 역사(役事) 성경본문: 요6장1절-15절 그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 바다 곧 디베랴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매 큰 무리가 따르니 이는 병자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보았음 이러라 예수께서 산에 오르사 제자들과 함께 거기 앉으시니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시니 그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가 오천 명쯤 되더라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 저희가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 두 바구니에 찼더라 그 사람들이 예수의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 Ⅰ. 들어가는 말 흔히들 오병이어의 기적이라 부르는 본문의 사건은 4복음서가 다 증거 할 정도로그 교훈과 의미가 심장한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절망적 현실과 소망 적 역사라는 주제 아래 본문이 주는 교훈을 추적하고저 합니다.
Ⅱ. 절망적 현실 주님을 따라 갈릴리 바다 건너편 벳세다 광야까지 나온 오늘 본문에 나타난 5천명 이상의 무리들이 처하였던 상황은 실로 절망적이었습니다. 그것은 곧 오늘 이 세계의 현실을 보여주는 거울입니다. 그렇다면 그 절망적 현실이란 과연 어떠한 것이었습니까?
A. 첫째로 그 곳은 빈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공관복음서가 공히 증언하는(마14장15절, 막6장35절, 눅9장10절) 이 사실은 비록 주님을 따라 간 곳이긴 하지만 그들이 처한 곳은 빈들이었다는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의 인도를 받던 길이지만 가나안 행군 길이 광야 길, 그것도 빈 광야였기에 만나를 먹어야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인생 자체가 광야의 여행이지만 그것도 빈 광야라면 얼마나 고독과 불안과 고통의 길이겠습니까? 그러나 여기 본문의 군중들이 처하여 있는 광야는 먹을 양식이 떨어진 빈들이었다는 데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아무 것도 없는 빈들! 돈이 있어도 식량을 구할 수 없는 빈들이며 들녘에 자연히 자라난 그 어떤 열매마저도 없는 빈들이었습니다. 오늘 이 세계의 현실이 바로 그러합니다. 과학문명을 자랑하는 오늘 날에도 78억의 세계 인구 가운데 절대 다수가 배부르게 먹을 수 없는, 식량이 부족한 실정에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언젠가 세계 도처에 기근이 들어 방글라데시를 비롯하여 여러 나라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기아에서 죽어간 사실을 우리는 생생히 기억을 하며 아직도 저소득 국가인 인도가 그보다 더 못사는 주변국가의 국민들이 국경을 넘어 인도로 들어오는 일이 너무 많기에 국경에다 철조망을 치는 일이 오히려 보다 큰 경제적 부담이라고 국회에서 시비가 벌어지고 있었는가 하면 미국 같은 경제 선진국에서는 애완용 강아지들을 위한 통조림이 산더미같이 쌓여 있고 그러한 동물들을 위한 식당에서 비싼 값을 주고 개가 쇠고기를 먹으며 최고급 식사를 즐기는 일은 예사로운 일이라고 하니 과연 세계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입니까? 우리나라도 경제 선진국(?)이라고 기뻐하지만 국민의 절대 다수가 중산층 이하로 떨어지고 있는 실정이라고 합니다. 단순히 육적인 양식의 문제가 아니고 나라나 이웃을 생각하는 사랑이 메말라 버린 오늘 우리 시대는 영, 육간에 양식이 떨어진 빈들임에 틀림없지 않겠습니까? 벌써 오래전에 유엔의 식량기구 사무국장을 지낸바 있는 어떤 분은 앞으로 인류가 직면할 세계 최대의 문제는 식량문제가 될 것이라고 말한바 있습니다만 다양한 공해로 인해 수질이 오염되고 자연이 훼손되며 토양이 산성화 되고 오존층 파괴와 지구의 온난화나 엘리뇨등의 현상 속에서 식량의 위기가 올 것이라는 것은 가히 짐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같은 것은 주님의 때가 가까워온다는 징조로서 일어날 말세의 현상이기에(마24장7절) 또 필히 일어날 현상인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현실의 문제는 이 같은 육적 양식 문제만이겠습니까? 아모스 선지자가 선언하였듯이(암8장11절 이하) 현대는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기갈이 아니라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입니다. "내 아버지 집에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눅15장17절)하던 탕자의 현실은 돼지우리에서 돼지 먹이로 배를 채우고자 하여도 채워지지 않던 삶이었습니다. 이 양식 굶주렸던 탕자의 현실이 오늘 우리 현실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왜? 그러면 그는 이와 같은 양식의 굶주림에 허덕여야 했습니까? 아버지 집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자신은 다 성장하였다고 판단하였기에 아버지의 슬하에서 간섭받지 않고도 즉 자력으로도 낙원을 이룩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던 그의 결과는 그 어떤 것을 가지고도 배를 채울 수 없는 현실에서 몸부림쳤습니다. 영적 존재인 인간은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받은바 영적 소유(달란트)를 아버지와 관련 없는 먼 나라에서 탕진할 때 그 어떤 것으로도 배부를 수 없는 짐승의 우리에서 짐승처럼 사는 신세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는"(사55장3절) 현대! 그러니까 명예도, 권세도, 재물도, 지식도, 쾌락도 인간에게 참된 만족과 참된 배부름을 줄 수는 없습니다. 그런 것은 인간의 양식이 아닙니다. 육적 욕구 충족은 영이 없는 돼지 같은 짐승의 먹이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주님은 썩어질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라고 하셨으며 주님 자신의 양식은 주님을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라 하셨습니다.(요4장31절-33절) 어떻든 빈들에는 양식이 없었습니다. 오늘 물질문명의 최첨단에 선 이 세계는 경제적으로도 굶주릴 뿐 아니라 인간의 가슴과 영혼이 배부를 수 있는 참 양식이 없어 공허를 느끼는 빈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B. 날이 저물어 가는 빈들이었습니다. 마가복음 6장 35절에 보면 “날이 저물어 가매”라고 하였습니다. 먹을 양식은 없고 날도 이미 저물어 가는 빈들! 이것 역시 오늘 인류의 현실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주님은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요9장4절)고 말씀하심으로써 역사의 밤이 올 것을 예고한 바 있습니다. 빛이 사라져 가는 오늘 우리 시대! 사회의 구석구석에도, 정계에도, 교육계에도, 경제계에도, 종교계에도, 과학 기술 분야나 문화 예술계에도, 심지어 스포츠계에도 그러니까 인간의 가슴에도 빛은 사라져 가고 어두움이 짙어가는 현대는 분명 역사적으로 저물어 가는 빈들인 것 같습니다. 때문에 토인비는 문명의 위기를 말하였고 앨버트 슈바이처는 현대 문명은 황혼기에 접어들었다고 일찍이 말하였습니다. 또한 바울은 "밤이 깊었다."(롬13장11절 이하)고 하였고 베드로는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다"(벧전4장7절)고 하였습니다. 확실히 오늘 세계적 양상은 저물어 가는 황혼임에 틀림없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전 세계가 고통을 겪는 현실도 그 징조가 아닐 수 없지 않습니까? 아니 밤이 깊었는지도 모릅니다. 어옇든 빛이 사라져가는 이 세계는 주님의 때가 가까워 오는, 해 저물어 가는 시점이 틀림없다는 것입니다.
C. 신앙과 사랑이 결핍된 빈들이었습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마14장16절)고 주님은 말씀하시는데도 200데나리온 어치 이상의 떡이 있어도 부족할 것인데 우리에게는 그러한 돈도 없고, 또한 그러한 돈이 있다 하더라도 여기는 빈들이기 때문에 음식을 사올 수도 없다고 할 뿐만 아니라 한 어린아이가 내어 놓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까지도 그것이 얼마나 되겠느냐고 주장하던 제자들은 확실히 논리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논리는 자신들이 처하여 있는 현재적 처지와 형편, 곧 상황에만 관심을 둔 논리였고 이미도 여러 차례 체험하였던 초자연적 이적을 행하실 수 있는 주님의 권능에 대한 믿음은 없는 자들이었으며 날은 저물었고 먹을 것은 없기에 동요를 받는 군중들을 책임지려는 사랑의 관심도 그들에게는 없었습니다. 이것이 환경적 여건과 요인에만 얽매어 살면서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은 점점 결핍되어져 가며 따라서 피차에 신뢰하지 못하는 불신풍조의 현실과 이용가치에 의한 장사잇속의 거래 적 관계만 있고 참 나와 너가 만나는 즉, 피차에 부족과 약점을 책임지려는 사랑의 관계는 점점 사라져 가기만 하는 오늘 우리시대의 현실은 “마지막 때가 되면 사람들의 사랑이 식어지리라”(마24장7절)고 하신 주님의 말씀대로 또 하나의 저물어 가는 이 시대의 역사적 현실인지도 모릅니다.
Ⅲ. 소망 적 역사 이와 같이 아무것도 없는 빈들! 양식이 떨어지고 사랑도, 신뢰도 싸늘히 식어가고 어두움이 깔려오는 저물어 가는 절망적인 이 빈들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고도 남는 이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렇습니다. 거기에는 기적이 일어나야만 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기적이 일어나야 합니다. 까닭은 거기에는 인간의 방법은 없는 절망적인 빈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그 빈들의 절망은 소망으로 바뀌어졌습니다. 이것이 소망의 역사입니다. 그렇다면 이 소망의 역사는 어떻게 하여 일어났습니까?
A. 어린아이의 헌신 이 벳세다 광야의 이적은 한 어린아이의 헌신에 근거합니다. 다섯 개의 보리떡과 두 마리의 생선! 그것은 지극히 작고 초라한 것이었습니다. 보리떡이라는 사실이 그러했고, 그것도 많지 않은 다섯이라는 숫자가 그러하였으며 생선이 두 마리지만 어린 아이의 도시락 반찬이었기에 큰 생선이 아니었을 것이 틀림없으며 더욱이나 생선의 고장인 갈릴리 호반에서의 작은 생선 두 마리는 보잘 것 없는 것임에 틀림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초라한 것이고 또한 많은 양이 아니더라도 참 믿음으로 주님께 바쳐질 때 그것을 근거로 거기에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얼마나 큰 아이였는지는 모르나 혼자서 그 광야까지 주님의 말씀 듣기 위해 나온 것으로 보면 아주 어린아이는 아닌 것 같은데 자기 먹을 도시락을 내어놓는다는 것은 자신은 굶어도 좋다는 희생적 사랑의 발로이며 더욱이나 주님을 바로 가까이에 모시고 따라다니며 신앙과 사랑의 훈련을 받은 제자들까지도 이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가 이 많은 사람 앞에 얼마나 되겠느냐고 신앙 없는 소리를 지껄인데 비하여 그러한 생각 없이 내어놓았다는 것은 그러한 생각이 있었다면 아예 내어 놓지를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전능하신 주님의 능력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절대 신앙이었으며 동시에 보리떡을 내어 놓았다는 것은 자기 집의 가난을 타인들 앞에 그대로 노출시키는 일이었기에 주저할 수도 있었을 것이나 그러한 체면도 초월하였고 또한 그 어린아이에게는 그것을 바침으로 자신이 칭찬 받겠다든지 축복을 조건부로 하는 다른 목적이 전혀 없고 오직 순수한 믿음으로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한 거기에는 기적이 일어나는 법입니다.
B. 군중들의 질서 집으로 돌아가야 할지? 아니면 거기서 굶으면서 밤을 지내야 할지? 저물어 가는 광야에서 흔들리는 군중들이 주님의 지시에 의해 50명씩 혹은 100명씩 줄을 지어서 앉았습니다. 동요하던 군중들이 이제는 주님을 주시하게 되었습니다. 앉으라면 안고 줄을 지으라면 줄을 서고, 기도하자면 하는 질서, 이것은 순종이었습니다. 전체가 주님의 말씀에 따른 일률적인 순종! 이것이 있는 곳에 기적은 일어나는 것입니다.
C.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 이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거기에 함께 계셨기 때문이라는 것을 전제합니다. 헌신이나 순종이 예수님이 거기에 없었더라면 있을 수도 없었겠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거기에 정말 없었다면 그 빈들은 영원한 절망이었을 것입니다. 어옇든 바쳐진 예물이 주님의 손에 들려지고 그것이 하늘을 우러러 하나님께 드려지는 주님의 기도는 결정적으로 기적을 만들어 낸 소망의 역사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지금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고 계십니다.(히7장25절,롬8장34절, 요일2장1절)
Ⅳ. 나오는 말 그러므로 주님을 따르는 길에는 절망이 없습니다. 여건 적으로 도저히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은 절망적 상황 속에서라도 있는 것 그것이 무엇이든지간에 그대로 바칠 때에 기적은 일어나고 절망은 사라지고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거둘 수 있는 환경으로 우리의 환경이 변화할 것입니다.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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