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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 가지 신앙 유형 | 원종호 | 2020-12-0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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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마16장1-4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궃겠다 하나니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저희를 떠나가시다. Ⅰ,들어가는 말 여기 예수님을 찾아와서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보여주기를 요구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당시 유대나라에 양대 산맥을 이루고 있던 뚜렷한 두 사회 계층으로서 내세도 부활도부인하며 현세 주의적이고 동시에 헬라의 철학과 문화의 영향 아래에 있던 사두개인들에 비해 바리새인들은 율법 주의적 유대 전통을 고수하려는 자들이어서 그들 상호간에도 피차에 상면 조차도 꺼려하는 사이였습니다. 더욱이나 헤롯 임금을 중심으로 로마 정권에 등을 기대고 있었던 사두개인들이 국수주의자이었던 바리새인들에게 좋게 보일 리 없었지만 언제나 예수님의 일을 훼방하고 넘어뜨리려는 데에는 연합 전선을 폈습니다. 오늘 우리의 본문도 그들 두 파 사람들이 야합하여 주님에게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 즉 초자연적인 표적을 요구하였습니다. 그것은 메시야로서 즉,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증거를 보여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물론 그 같은 요구는 주님을 구주로 받아 드리겠다는 의도가 아니라 주님을 시험하고자 함이었습니다. 하여튼 우리는 이 본문에서 세 가지신앙 유형을 발견할 수 있음으로 또다시 코로나로 말미암아 어려웠던 한해를 보내면서 어떤 신앙이 가장 건전하고 이 시대에 필요한 신앙인가를 살피는 중에 하나님께서 은혜 베푸시기를 바랍니다. Ⅱ, 표적 형 본문에서 표적을 구한 것은 내세나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개인들이고 보기 보다는 바리새인들도 그러하였다고 생각됩니다. 까닭은 하나님께로서 온 사람 즉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반드시 초자연적 표적이 뒤따라야 한다고 바리새인들은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바리새인들에 대해 사두개인들이 가만히 있는 것은 그것이 예수님을 공략하려는 공동전선이었기에 묵인하고 있을 뿐이라고 판단됩니다. 이 같은 표적 구하는 신앙 유형은 오늘 우리시대에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신유나 초이성적 기적이 있어야 크고 하나님이 함께하는 신앙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좌우간 표적을 구하며, 이적 있는 곳으로만 밀려다니는 신앙 유형이 있음을 우리는 아무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동시에 우리는 기독교 신앙세계에 신유도, 초자연적 기적도 있을 수 있다는 사실, 아니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또한 부인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기적만이 하나님이 함께하는 즉, 하나님의아들이라는 증거라고 하는 태도는 지양되어야 합니다. 까닭은 전도 여행에서 돌아온 제자들이 귀신들이 자기들에게 항복하더라고 기뻐하는 것을 보시고 주님께서는 귀신들이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즉, 신유나 이적으로 기뻐하지 말고 오직 너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눅10:19~20)고 하였기 때문이며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으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한 자들도 마지막 날에 주님으로부터 외면당할 자들이 있기 때문이고(마7:21~23) 말세에는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고 사탄의 일꾼도 의의 일꾼으로 자기를 가장하며(고후11장14절-15절)또한 그 같은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로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라도 미혹하겠기 때문입니다.(마24장24절) 그러므로 이적은 필요하고 기적을 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적만을 추구하는 것은 건전한 신앙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Ⅲ, 지식형 이것은 바리새인들 편이 아니고 사두개인들이 추구하는 유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초자연적 이적보다는 현세 그것도 철학적 내지는 자연과학적 지식에 의해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본문에서 표적 구하는 그들에게 동문서답 같은 주님의 대답은 의미심장한 바 있습니다. 즉 주님의 대답은 표적을 보여주겠다든지 아니면 할 수 없다든지가 아니고 전혀 관계없는 이야기를 하는 것 같습니다만 그것은 천기분별을 할 수 있으면서도 시대의 표적을 분별치 못함을 책망하시는 말씀이니까 아마도 지적 의식 수준을 추구하는 사두개인들에게 하신 것이라 생각됩니다. 여기 천기분별이란 기상관측을 말하며 그것은 더 나아가서 우주과학을 말하는 것임으로 천체의 운행을 측정하고 기상 상태를 예보하고 달나라 탐색을 넘어서 우주 정복의 꿈을 실현시킬 만큼 우주과학 적 지식은 풍부하지만 현대인은 하나님의 오메가 포인트를 향하여 질주하고 있는 이 시대와 역사의 이면에 흐르고 있는 시대의 표적을 분별할 수는 없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날 우리시대를 특징 지우는 것은 지식입니다. 이성적 두뇌의 발달! 그래서 지혜와 지식이 없는 자는 side로 밀려나야 되는 머리 경쟁의 시대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많이 배우고 명문대학에서 공부하기를 그토록 갈망합니다. 그러나 현대 지성은 가슴을 상실했습니다. 마음이 없는 기계들처럼 생산 도구로서 전락해 가고 있습니다. 때문에 공허를 느낍니다. 기계 문명이 짙어 가면 갈수록 더욱 인간의 가슴은 허무와 불안에 쌓여 갈 것입니다. 더욱이나 그러한 사람들의 가슴에 역사의 저변에 흐르는 하나님의 섭리가 깨달아질 리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지혜와 지식만을 추구하는 신앙이나 신학은 건전한 것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사람의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고(고전1장21절) 선언합니다. 성경적 지식을 비롯하여 그 어떤 지식이든지 우리에게는 필요합니다. 그러나 지식 위주가 되는 생은 참된 삶이 될 수 없습니다. Ⅳ, 십자가형 주님께서는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니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다고 하십니다. 즉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증거로 보여줄 것은 요나의 표적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요나의 표적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마태복음12장 39절-40절에서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처럼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속에 있어야 한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같이 십자가의 사건을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구주성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서 완성되었습니다. 신앙생활이란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마16장24절)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삶은 의당히 십자가를 지는 삶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가장 건전한 신앙이며 이 시대에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증거로 보여 주어야 할 표적 곧 증거인 것입니다. 표적이나 지식을 무시하거나 부정하지는 않습니다만 삶의 초점이 십자가에 동참하는 것이 십자가형의 신앙인 것입니다. 십자가의 의미는 주님 자신은 흠 없는 의인이면서도 죄인의 죄와 허물을 위해 자신을 희생의 제물로 바쳤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자신은 의롭게 살아야하며 의롭게 살기 때문에 죄인들을 멸시하고 외면할 것이 아니라 나의 의를 바쳐 죄인의 허물을 책임져 주는 삶이 십자가의 삶인 것입니다. 나의 부와 지식, 권세와 명예를 드려 가난한 자와 무식자와 천민들의 모든 부족과 연약함을 담당해 주는 삶만이 이 시대에 보여주어야 할 우리들의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이 같은 삶은 자기 부정이 없이는 즉 자기의 희생 자기의 죽음이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자신의 의를 죄인의 죄를 위해 바친다는 자체가 바로 자기죽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신앙유형이란 한마디로 나와 나의 모든 것을 인류와 역사를 위해 내어놓는 삶을 뜻합니다. 이기적 타산에 사로 잡혀있는 현대인들에게는 이 같은 삶은 미련하게 보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렇게 자기를 내어놓을 때에 다시 삽니다. 참으로 삽니다. 파선의 위기에 직면했던 풍랑이 자기의 연고라고 자신을 바다에 던질 것을 요구하며 죽음 앞으로 나섰던 요나를 하나님은 다시 살리셨고 온 인류의 부족과 죄와 질고와 가난을 책임지기 위하여 죽음을 자원했던 우리 주님도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 더욱이나 나를 위해서 “자기 생명을 잃는 자는 얻을 것이요 얻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라”(마16장25절 전후)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기독자의 삶은 사는 것으로 사는 삶이 아니라 죽는 것으로 사는 생 즉 죽어서 사는 생인 것입니다. 때문에 바울 사도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장31절) 하였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날마다 죽는 자는 날마다 살고 달마다 죽는 자는 달마다 살며 년마다 죽는 자는 일 년에 한번 밖에 못사는 자인 것입니다. 동시에 완전히 죽는 자는 완전히 살 것이며 50프로 밖에 죽지 않는 자는 50프로 밖에 살지 못할 것입니다. 주님은 하늘로부터 오는 초자연적 표적을 요구하는 자들에게 이 십자가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 시대는 이 표적을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Ⅴ,나오는말 이 세대에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습니까? 선비가 어디 있으며 변사가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닙니까?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입니다.(고전1장20절, 25절) 광명한 새 아침은 필히 어두운 하나의 밤을 거쳐야 오는 법입니다. 부활의 영광과 승리는 반드시 십자가의 수난이 통과되어야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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