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종호-설교

  • 홈 >
  • 원로목회자 >
  • 원종호-설교
원종호-설교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 원종호 2020-12-02
  • 추천 1
  • 댓글 0
  • 조회 251

http://cochrist.kr/bbs/bbsView/50/5830647

 

. 들어가는 말

이 비유도 앞선 부분인 누가복음181-8절의 비유처럼 기도에 대한 비유입니다. 전자는 기도를 하되 항상 즉 계속적으로 하여야할 것을 교훈하며 본 비유는 기도를 하되 솔직하게 즉 부족과 허물을 통회하여야 할 것을 교훈해 주므로 기도에 대한 태도를 두 비유는 공히 보여줍니다. 이와 같이 기도를 하는 자세는 곧 하나님께 대하는 태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본 비유에 나타나는 바리새인과 세리는 각기 기도하는 태도가 즉 하나님께 대하는 그들의 자세가 완전히 달랐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그들에 대한 태도도 완전히 달랐습니다. 본비유의 초점은 이점을 지적하고자 함이며 동시에 자기를 의롭게 여기면서 타인을 멸시하고 하나님께 대하여 자신들의 부족을 깨닫지 못하던 바리새인들의 그릇된 태도를 책망하고자 함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왜? 세리는 바리새인보다 더 의롭다함을 받았는지, 바리새인의 잘못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본문을 추적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은혜 베푸시기를 바랍니다.

 

. 바리새인의 기도

A. 따로서서 기도하였습니다.

서서기도하는 것은 당시 유대인들의 풍습이었기에 문제될 것은 없습니다만 따로라는 기록은 확실히 바리새인의 교만을 시사해 줍니다. 정말 깊은 기도를 하기 위해 은밀한 곳이나, 골방에 들어가는 따로이라면 오히려 장려해야할, 칭찬받아야 할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기도하는 이곳은 성전 안이기에 은밀한 장소가 별도로 있을 수 없음에도 따로섰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자세였습니다. 까닭은 인간의 하나님께 대한 태도는 겸손이 근본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는 만인이 평등하기 때문입니다.

 

B. 기도의 내용

한 마디로 감사의 기도였습니다. 흔히들 하는 것처럼 자기의 요구조건만을 늘어놓는 그러한 기도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얼핏 생각하면 대단히 차원 높은 기도 이었다고 생각 할수 있습니다.

()토색도 불의도 간음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사실이었습니다. 이만큼 도덕적 측면에서도 흠이 없을 만큼 선한 사람이었습니다. 과연 자신을 의롭다고 믿을만한 사람이었습니다.

() 뿐만 아니라 신앙적 차원에서도 소득의 십일조를 바치는 사람이며 한 주간에 두 번씩 정기적으로 금식함으로 경건에 힘쓰는 자였습니다.

도덕적으로나 신앙적으로나 이 정도로 훌륭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니까 자신을 의롭다고 생각해도 아무도 부정할 수 없을만한 자 이었음에 틀림없었습니다. 때문에 그는 자기의 이 같은 생활을 어찌 감사치 않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의 기도는 바로 이 감사를 하나님께 돌린 기도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C. 그러나 이 의는 어디까지나 다른 사람과의 비교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본문에 보면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한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기는 자신의 내적 세계에서 나온 의가 아니고 외적인 비교, 즉 도덕적인 차원에 속하는 의이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비기독교 사회에서는 두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기독교인들까지도 다른 사람들과의 비교에서 자신을 정당화하는 즉 타인과 비교해서 부족하지 않고 좀 더 우월하다고 생각되면 자기를 의롭게 여기며 교만해지는 자들이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타인과 나를 비교하는 나의 관점에서나 타인이 나를 보는 다른 사람들의 관점에서 우리의 인격이나 생활이 평가되어질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관점에서 평가되어져야 할 것입니다.

까닭은 내가 나를 보는 눈이나 다른 사람이 나를 보는 눈은 불완전하기 때문입니다. 미움을 살인과 동일시하는(521-22) 즉 외적으로 나타나는 행위보다 그 마음 밑바닥에에 흐르는 동기를 이미 행위와 똑 같이 취급하시는 하나님의 눈앞에서는 어느 한계선을 넘지 못하는 토색, 간음, 불의를 하지 않을 정도의 도덕적인 선행이 자랑꺼리가 될 수 없는 것이며 금식이나 십일조 생활 같은 신앙적 행위도 그 동기에 있어서는 불순할 수도 있는 것이고 또한 진정한 동기로서 행하여 진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는 의의 근거가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더욱이나 타인과 비교하면서 말입니다. 까닭은 우리들로서는 마땅히 하여야할 일을 한 것뿐이기 때문입니다.(1710) 만약 기독교가 추구하는 것이 자신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타인과 비교하여 더 선하면 되는 정도라면 그것은 결코 윤리의 범주를 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러한 면에서 볼 때 이 바리새인의 감사마저도 진정한 감사라 할 수 없습니다. 까닭은 감사란 전적인 은혜에 대한 표현이어야 하는데 여기 바리새인은 타인과 같지 않은 생활이 자기의 노력의 결과인 것처럼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내세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의롭게 되는 것은 인간 자신의 공로가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인 그리스도로 옷을 입는 것에 있습니다(1314, 327, 321절 참조). 남에게 얻어 입은 옷을 자랑하는 자처럼 불쌍한 자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타인과 우리 자신을 비교할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에 비교해야할 것입니다. 이것이 곧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신앙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D. 연대 의식의 결핍

이미 언급되기도 하였습니다만 이 바리새인은 자신을 타인과 비교하는 것을 넘어서 타인을 멸시하였습니다.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하다하여 세리 같은 사람은 자기와는 상대도 되지 않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와는 상종도 할 수 없는 자신이라고 자기를 내세웠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은 그와 도저히 비교되지 않는 의인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와는 전혀 무관한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즉 소득의 십일조를 드린 것으로 보아 자기 소유의 신앙적 관리도 알고 축복의 비결도 알았으며 또 의롭게 살면 하나님께서 자신을 좋아하신다는 것도 알았으나 다른 사람에 대한, 그것도 소외당한 자들에 대한 하나님 앞에서의 자기의 사명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즉 전적인 은혜를 통한 갚을 길 없는 사랑을 받은 자로서 바로 그 사랑을 타인에게 주어야할 자신이 하나님 앞에 진 빚은 생각지 않았던 것입니다. 오히려 그들을 멸시 했습니다.

마치 의롭게 살았기에 아버지의 소유는 다 자기의 것이 되어야 하고 의당히 자신이 더 큰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하며 탕자는 버림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던 형이 돌아온 동생에 대한, 용서도 사랑도 책임의식도 없고 오히려 용납한 아버지의 처사에 불만을 가지던 것처럼 여기 바리새인도 분명히 세리 보다는 의롭게 살았지만 세리에 대한 연대의식이 그에게는 전혀 없었습니다. 주님은 의인이시기에 죄인을 외면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의로 죄인들의 죄를 책임져 주셨습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근거인 십자가의 사역입니다. 그러므로 약자를, 없는 자를, 낮은 자를, 병든 자를 책임지는 것이 십자가의 행군입니다.

 

. 세리의 기도

A. 성전에 기도하러 나온 세리

세리라는 세무관리가 유대인들 사회에서 그토록 소외를 당하는 것은 유대인으로써 로마 정권에 등을 기댄 관리라는 점과 대개의 경우 세금을 토색하여 치부하는 일들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유대인들로부터 외면을 당하는 자들이었으며 성전에 나오는 것조차 달갑게 여기지 않는 대상이었으나 여기 이 세리는 성전으로 찾아 나온 것입니다.

이것은 그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그의 양심의 독촉을 이기지 못한 결과였을 것입니다. 비록 바리새인들처럼 규칙적으로 하나님께 기도드리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이 환경적 요인 때문에 신앙에서 조금 멀어지게 되면 아예 신앙생활을 완전하게 못할 바에는 차라리 그만둔다는 아주 깨끗하고 솔직한 태도같이 여겨질 수도 있겠으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까닭은 자신이 가장의 소임을 다 못한다 해서 아버지나, 남편 됨을 포기할 수는 없겠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이 완전무결한 사람도 없을 것이지만 부족하다고 포기하는 것은 참 신앙의 자세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상한 갈대도 꺾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아니하시는 분이 바로 우리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귀신들린 딸을 위하여 주님의 일행을 뒤따라가며 부르짖었으나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던 주님을 포기하지 않고 기어코 따라갔더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옳지 않다 하심으로서 자신을 개 취급하시는 주님을 거기서도 포기하지 않고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하여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믿음대로 되리라하시는 주님의 칭찬과 그 딸의 고침까지 다 받았던 가나안 여인에게서 배워야할 바 큰 것입니다(1521-28).

 

B. 멀리서서 기도했습니다.

바리새인의 따로 기도했다는 말씀과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것은 교만을 나타내지만 여기 멀리 섰다는 것은 겸허한 자세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규칙적으로 하는 바리새인의 기도는 습관화되기도 쉬울 뿐만 아니라 교만해지기도 쉬우나 가끔 하지만 뼈아픈 삶의 부족을 느끼면서 드리는 기도야말로 참기도일 수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멀리서서 하는 그의 기도는 확실히 겸손의 자세입니다. 겸손이란 하나님을 대하는 가장 기본적인 자세이며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시발점이 되는 것입니다.

 

C. 얼굴은 감히 들지도 못했습니다.

이것은 그 어떤 사람에게 부끄러워서가 아닙니다. 다만 양심이 부끄럽고 하나님 뵈옵기가 부끄러워서 입니다. 중죄를 범하고도 남이 모른다고 하여서 아니 다른 사람이 안다고 해도 부끄러움을 느낄 줄 모르는 화인 맞은 양심들과 철면피들이 얼마든지 있는 현실 속에서 이 세리의 태도야 말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만한 아름다운 믿음의 행위인 것입니다.

 

D. 다만 가슴을 쳤습니다.

양심의 고통을 표시합니다. 자신이 지금까지 걸어온 삶에 대한 양심의 고통을 억제할 길 없는 태도입니다.

그는 바리새인처럼 내세울만한 선행도 없고 자랑꺼리도 없었으며 아무리 많은 죄를 범한 자와 설령 자신을 비교해 본다고 해도 자신이 가장 큰 죄인으로 느껴졌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아무런 다른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가슴을 치면서 외쳤습니다.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고 말입니다. 양심이 죽어버린 시대! 그러나 양심이 고통을 느낀다는 것은 그 양심이 살아있다는 증거이기도 한 것입니다.

성경은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사람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믿음에 대하여는 파선하였다(딤전119)고 함으로 양심을 떠난 신앙이 파선한 배와 같기 때문에 신앙과 양심은 불가분리임을 확증하여 줍니다.

 

. 의롭다 함을 얻은 자

이 사람 즉 세리가 의롭다함을 얻었다고 하였습니다. 어떤 면으로 보던지 실제로 바리새인이 훨씬 더 의로운 것이 사실인데 왜 세리가 의롭다함을 받았습니까?

이미 살펴 왔듯이 믿음이 없는 의는 하나님 앞에서 의가 될 수 없습니다. 인간은 다 죄인이기 때문에 의가 없는 것입니다. 즉 율법의 조항들을 다 지키다가도 어느 하나를 범하면 다 범하는 것과 꼭같은 율법을 범하는 죄인이 되기 때문이며 또한 인간은 자력으로 자기의 죄의 세력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럴 수도 없지만 어느 한 순간에 율법을 완전히 지켰다 하더라도 그것이 지속되지 못하면 역시 죄인으로 남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의롭게 되는 것은 인간의 의로운 율법적 도덕적 행위에 있을 수 없기 때문에 다만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자기에게는 의가 전혀 없다는 것을 자인하고 고백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울부짖음은 내 세울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기에 빈손 들고 하나님의 처분에 나의 전체를 맡기면서 하나님의 의만을 전적으로 구하는 태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은 자기의 의가 있는 줄 알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를 구하지 아니하였습니다. 때문에 자기의가 있는 줄 아는 자 하나님의 의를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다만 자신은 의가 없고 전적인 죄인인줄 알고 자백하는 자에게 "의인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오신"(913)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는 축복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 나오는 말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풍성합니다. 자기의 의만 내세우면서 회개할 줄 모르는 자는 은혜 받을 수 없습니다. 회개의 깊이만큼 깊이 은혜 받고, 회개의 넓이만큼 넓게 은혜 받을 것이며 회개의 높이만큼 은혜를 높이 받을 것입니다. 자기 가 있는 줄 아는 자는 하나님의 의를 얻지 못하고 자기에게는 의가 없는 줄 아는 자라야 하나님의 의를 얻습니다. 목숨을 잃는 자 얻을 것입니다.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추천

댓글 0

자유게시판
번호 제목 작성자 등록일 추천 조회
이전글 세 가지 신앙 유형 원종호 2020.12.09 1 173
다음글 받은 용서와 하는 용서 원종호 2020.11.22 1 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