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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과 복 주시는 하나님 운영자 2020-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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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과 복 주시는 하나님

 

성경 : 창세기 111-9, 121-9

찬송 : 28(28), 288(204)

요절 :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12:1-2)

주제 : 하나님께서 주도권을 회복하실 때 사람이 복의 근원이 된다.

 

들어가는 말

성선설이 옳으냐 성악설이 옳으냐를 두고 지금까지도 논란이 많습니다. 애초에 하나님은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또는 속성)을 닮은 선한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아담이 에덴동산에 머물러 살 때 저지른 잘못 때문에 죄가 온 세상을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의 죄가 모든 사람에게 전가된 것입니다. 그래서일까요? 홍수 심판으로 인해 세상이 한 번 망했던 사실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다시는 하나님에게 도전을 하거나 죄를 짓는 일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또 다시 하나님에게 도전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처럼 사람은 본디 어릴 때부터 그 마음의 생각이 악해서”(8:21 참조) 그런 것일까요?

 

1. 문명의 야망

의인 노아를 통해서 하나님의 자비에 의해 새롭게 기회를 얻은 인류는 시간이 흐르고 흘러 또 다시 죄의 유혹에 빠집니다. 급기야 하나님의 영역까지 침범하려는 불행한 사태에 이릅니다. 인류는 땅 위에 흩어져 살라는 하나님의 명령(1:28 참조)에 역행하여 오히려 흩어지지 않고 모여서(11:4 참조) 힘을 합치려고 합니다. 그리하여 탑을 쌓습니다. 이른바 바벨탑 이야기입니다.

이 바벨탑에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배경이 있습니다. 눈치가 빠른 분은 벌써 눈치를 챘겠지만, 성경 안에서 이를 설명해 주는 단서를 찾아낸다면 이렇습니다.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11:3)

돌 대신 벽돌이 사용되고, 흙 대신 역청이 쓰였다는 것은 문명이 발달했다는 사실을 뜻합니다. 문명이 발달하면 사람들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창조보다 나의 창조를 강조합니다. 그들 역시 다음과 같이 작당하기에 이릅니다.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11:4). 이렇게 문명은 야심을 품고 하늘까지 닿아 명성을 얻고자 했습니다. 결국 바벨탑 이야기는 비극으로 끝이 났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파멸을 초래하게 되었고, 급기야는 민족들과 언어들이 갈기갈기 분열되는 파국으로 이어졌습니다.

이미 우리는 3과에서 넘지 말아야 할 선’, 곧 경계가 허물어지면 모두가 불행해 진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바벨탑은 선악과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사람의 경계를 허물고자 시도했던 인간의 무한한 욕망을 반영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신앙하는데 있어서 분명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습니다. 이를 잘 분별하여 바른 신앙을 소유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겠습니다.

 

2. 주도권을 회복하신 하나님

이제 역사는 극적인 방향으로 전개됩니다. 어느 날 갑자기 아브라함이라는 한 사람을 부르십니다.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12:1-2).

자세히 보면 이 구절은 11장에서 사람들이 바벨탑을 쌓으며 했던 말과 대조를 이룹니다. “,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11:4). 여기서 주어는 우리입니다. “우리가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즉 무엇인가를 하여, 마침내 우리 이름을 만방에 떨치자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역사의 주도권을 사람이 가지려 했다는 말입니다. 바로 이것이 죄였습니다. 삶의 주도권을 자기가 지려고 할 때 우리는 죄의 유혹에 빠지게 됩니다. 신앙에서는 모든 것을 내 뜻대로 행하려 할 때 문제가 생기는 법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을 부르시는 대목을 다시 보면, ‘우리가나는으로 바뀝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여기서 내가는 하나님이십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향해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여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라 하셨던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역사의 주도권이 인간에게서 하나님에게로 확 넘어간 것입니다. 결국 이 말씀은 인간에게 주도권이 있을 때는 바벨탑이나 쌓고 끝났지만 하나님께서 주도권을 회복하시니 우리를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3. 하나님의 약속

이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내리신 명령에 초점을 맞추어 보겠습니다.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12:1). 먼저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가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우리 신앙생활의 단순한 공식입니다.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이루려면 일단 지금의 자리를 박차고 떠나야 합니다. 예수께서도 이를 위해 다음과 같은 말씀을 던지셨습니다. “와라.” 오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떠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마지막에는 땅 끝까지 가라고 하셨습니다.

결국 아브라함은 명령에 순종하고 떠났습니다. 그가 떠난 당은 고대 문명 도시 하란이었습니다. 그는 안전한 삶의 터전을 버리고 하나님의 분부 한마디에 떠났습니다. 긴 여행 끝에 그가 도착한 곳은 생면부지의 땅 가나안이었습니다. 거기서 하나님은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7)고 약속하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은 세 가지가 되었습니다. 첫째, 큰 민족이 되게 하리라. 둘째, 땅을 주리라. 셋째, 너를 통해 사람들이 복을 받게 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 약속이 아브라함의 입장에서 볼 때 얼마나 허황된 것이었는지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아브라함의 나이는 75세였습니다. 그 때까지 자식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에 도착해보니 이미 가나안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실마리도 없이 약속 하나 달랑 붙들고 정든 고향땅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위대하다는 것입니다. 어디 걸칠 곳 한군데 없었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복이라는 게 그냥 받는 게 아닙니다. 받을 만한 자격을 갖추었기에 복을 받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복을 받기에 충분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나오는 말

예수께서는 한번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11:28-30). 이 내용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바로 이것입니다. 사람인 내가또는 우리가뭔가를 해보려고 하니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됩니다. 그런데 이 주어가 하나님으로 바뀌면, 곧 우리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겨드리면, 우리에게 전혀 다른 세상이 전개됩니다. 역사의 주도권을, 삶의 주도권을 하나님께 내어 드립시다.

 

생활 속으로(학습토의)

1. 성선설과 성악설 중 어느 것이 옳다고 생각하십니까?

2. 복은 받는 것일까요, 아니면 누리는 것일까요?

 

금주의 기도제목

1. 개인의 욕망 때문에 하나님을 거스르지 않도록 도와주옵소서.

2. 내 삶의 주도권을 하나님께 내어 드릴 수 있는 믿음을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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