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과 희망의 근거가 되시는 하나님 | 운영자 | 2020-12-1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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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과 희망의 근거가 되시는 하나님 성경 : 창세기 1장 26-28절 찬송 : 18장(없음), 406장(통464) 요절 :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 1:27-28) 주제 : 하나님은 우리가 한계점에 다다랐을 때 붙들 수 있는 마지막 끈이 되시는 분이시다. 들어가는 말 우리가 성경에서 창세기를 공부한다는 것은 삶의 밑천을 얻어내는 것과 같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런 지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지난 시간 우리는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만을 주어로 받는 동사인 ‘바라’(bara)라는 단어를 살펴보았습니다. ‘바라’는 우리가 나락에 떨어졌을 때 붙들고 늘어질 수 있는 마지막 끈입니다. 역사의 질곡에서, 건강의 한계점에서, 우리가 매달릴 수 있는 최후의 희망입니다. 오늘은 창세기 1장에서 꼭 알아야 할 몇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1. 바라(bara)의 하나님 앞에서 언급했듯이 ‘바라’는 무에서 유의 창조, 곧 절대적인 신적창조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바라’라는 주제가 성경에서 역사의 고비마다 새롭게 주제화되고 있음에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바라’의 신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바벨론 유배라는 그 억압의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당시 이들의 역사는 절단이 났습니다. 그들은 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 스스로가 ‘선택받은 백성’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자부심이 무참히 깨져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신 것은 아닐까’하는 의심마저 들었습니다. 이 절망의 상황에서 그들은 ‘처음’을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우주창조의 역사를, 곧 창세기 1장의 ‘바라’의 하나님을 기억해내게 되었습니다. 그 뜻은 이렇습니다. “그러니까 절망하지 마라. 여기가 끝이 아니다. 하늘과 땅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새 역사를 창조해내기로 작정하셨다.” 이들은 세상을 지으신 하나님을 기억함으로, 즉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바라의 하나님을 신앙함으로, 70년이라는 긴 세월을 견뎌낼 수 있었습니다. 이를 우리 개인의 삶과 연결해 보겠습니다. 건강이 상해, 사업이 망해, 갑작스레 찾아온 불행으로 생존의 기로에 있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은 바라의 하나님을 붙들고 늘어지는 수밖에 없습니다. 바라의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해내시는 분이니까, 있는데서 조금 더 만들어 주시는 것은 가능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우리의 영성이고, 신앙입니다. 2.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 하나님께서는 첫째 날, 둘째 날……, 이렇게 6일 동안 창조하시고 매번 “보시기에 좋았다”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람을 창조하고 나서 “보시기에 심히(참) 좋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영성적으로 깊은 의미를 지닙니다. 풀어 말하면 이런 뜻입니다. “지금 이대로 좋다. 뜻한 대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참 잘 작동하고 있다. 계속 그대로만 존속하거라.” 이 말씀에서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아는 축복의 말씀이 뻗어져 나왔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 1:28)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하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첫째, 창조는 완전했다는 사실입니다. 곧 창조에는 아무 하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창조가 선하였기 때문에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선하다는 것입니다. 둘째, 인간이 타락한 원인이 하나님에게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곧 인간의 타락 원인은 인간 스스로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셋째, 어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인간은 희망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보증해 줍니다. 하나님은 변함이 없는 분이기 때문에 태초에 “좋았다”고 하신 그 선언은 마지막까지 유효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이 말씀은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역사가 아무리 질곡으로 가고, 인생이 절망으로 가더라도 사람은 결코 희망을 버려서는 안 된다는 절대희망의 근거가 여기 창세기 1장에 있습니다. 3. 하나님의 형상(Image of God) 창조의 절정에는 인간이 있습니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창 1:26 참조) 여기서 ‘모양’이라는 단어로 ‘셀렘’(selem)이 사용되었습니다. 이는 겉모양이 닮았을 때 사용되는 ‘데무트’(demut)와는 달리 “본질이 닮았다”는 것을 뜻합니다. 결국 겉모양이 아닌 속 모습, 곧 특성(또는 속성)이 닮았다는 말입니다. 과연 우리는 그 분의 어떤 특성을 닮았을까요? 첫째,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적 특성을 닮았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의 전권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람에게도 어느 정도 창조의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럼으로써 자연을 인간에게 위임하셨습니다. “땅을 정복하라,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 1:28 참조). 여기서 ‘다스리라’는 말은 정치적 용어가 아닌 “잘 돌보라, 파괴하지 말고 이 창조 사업을 계속 해라”는 뜻입니다. 둘째,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을 닮았습니다. 하나님의 속성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을 주고받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왜 만드셨을까?” 이 말을 깊이 묵상해 보면 결국 “사랑 때문이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사랑하기에 만들 수밖에 없었다는 말입니다. 사랑은 자기를 나누는 것입니다. 이 나눔의 과정이 바로 창조입니다. 이 사랑의 특성을 인간이 꼭 빼닮았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공동체를 이룰 수밖에 없고, 사랑하며 살 수 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나오는 말 하나님의 형상과 관련하여 아우구스티누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내가 평생 연구하고 싶은 주제가 두 가지 있는데, 하나는 하나님이고 다른 하나는 영혼이다. 그런데 나는 한 가지에만 전념하련다. 영혼의 연구에 전념하련다. 왜냐하면 영혼 속에 하나님이 숨어 계시기 때문에…….” 얼마나 멋진 말입니까? 우리도 깨끗한 영혼을 지니기 위해 깨어있는 영성을 가질 수만 있다면 우리 안에 숨어 계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세상사에 얽혀 죄를 짓는다 하더라도 내면의 더 깊은 진실은 하나님을 닮은 거룩함에 있습니다. 그러니 기운 내서 올 한해도 멋지게 살아봅시다. 생활 속으로(학습토의) 1. 지금 여러분 안에 하나님의 형상은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2.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금주의 기도제목 1. 절망의 순간에 사람이 아닌 바라(bara)의 하나님께 매달릴 수 있는 믿음을 주옵소서. 2.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기 위해 애쓰는 삶을 살도록 인도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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