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인예배 설교 | 운영자 | 2021-01-0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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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발인예배 설교 1) 제목: 승리한 인생 - 성경: [디모데후서 4:6]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 [7]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8]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1. 오랜 세월 정든 분이 떠나시는데 왜 슬프지 않겠습니까? 울 때는 우셔도 됩니다. 그동안 많은 분들의 장례식을 집례하다 보니 처음 대하는 분일지라도 “이 분은 평소에 고인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또는 “이 사람은 거짓으로 울고 있다” 하는 느낌이 옵니다. 어제 입관할 때에 유족들께서 참 많이 슬퍼하셨습니다. 많이 우셨습니다. 특히 부인되시는 〇〇〇 여사께서 고인의 유해에 얼굴을 맞대고 통곡하는 모습을 보고 “이 분은 남편을 정말 많이 사랑하셨구나, 이 분은 평소에 남편 위해 최선을 다 했다” 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따님 한 분이 아버지의 얼굴을 뵈면서 “아빠, 최선을 다했어요. 아빠 살리려고 정말 최선을 다했는데 안 됐어요. 아버지 미안해요”라면서 흐느끼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아드님이 어머니의 건강을 염려하여 진정시키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면서 많은 것을 생각했습니다. 고인은 가족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두고 가셨으리라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지금 고(故) 〇〇〇 선생의 발인(發靷)을 앞두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발인이란 말은 “상여(喪輿)가 집에서 떠난다”는 뜻입니다. 그러기에 세상 사람들은 이 예식을 영결식(永訣式), 즉 “영원한 결별의 시간”이라고 말합니다만 하나님을 섬기는 교인들은 발인을 영결식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시간과 장소를 바꾸어 다시 만나기로 기약하고 잠시 헤어지듯이,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이 땅 아닌 더 좋은 곳에서 다시 만날 수 있는 희망을 안고 잠시 헤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오늘 이 예배를 통해서 고인과의 헤어짐을 슬퍼하기 전에 어떻게 하면 다시 만날 수 있을지를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도대체 인생이 무엇이기에 이렇게 슬픈 이별을 해야 하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는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지 성경에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창세기 47장 9절에서 “야곱이 바로에게 고하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일백삼십 년이니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라고 기록되었듯이 인생은 “나그네의 길”과 같습니다. 야곱은 자기의 인생을 일컬어 “내 나그네 길”이라고 말했습니다. 나그네란 “제 집이나 고장을 떠나 다른 곳에 임시로 머무는 사람”입니다. “임시로 머무는 사람”이란 말에서 볼 수 있듯이 나그네가 현재 머무는 그곳은 그들의 목적지가 아닙니다. 어딘가로 가야합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은 이 땅에 영원히 머물지 않고 어디선가 왔다가 어디론지 갑니다. 그곳이 어디입니까? 전도서 12장 7절에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고 했듯이 우리의 육체는 흙에서 왔으므로 흙으로 가고, 우리들의 영혼은 하나님께로부터 왔으므로 반드시 하나님께로 갑니다. 그러므로 승리한 사람이란 보냄 받은 하나님께로 반드시 성공적으로 되돌아가는 사람입니다.
둘째, 야고보서 4장 14절에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했듯이 인생이란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와 같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온 사면이 안개로 가득하여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기세가 등등하던 안개도 뜨거운 태양이 떠오르면 자취도 없이 사라집니다. 여기서 안개 같다는 비유의 핵심은 “내일을 알지 못한다”에 있습니다. 인생이 그렇습니다. 강한 것 같아도, 대단한 것 같아도 그저 한 순간입니다. 내일은 차치하고 눈앞의 일도 못 봅니다. 그러나 절망적이지는 않습니다. 안개 같은 인생에서 승리하려면 희망찬 내일로 밝게 이끌어 가시는 분 앞에 겸손히 머리를 숙이면 됩니다. 그 분이 누구십니까? 바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다스리는 알파(Α)와 오메가(Ω)의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셋째, 시편 90편 10절에는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했듯이 인생이란 날아가는 존재, 즉 화살이나 총알과 같습니다. 우리의 연수는 쏜 살 같이 지나갑니다. 어느 분이 10대(代) 때에는 속도 10으로, 20대 때는 20으로 50대 때는 50으로 인생의 속도가 빨라진다고 말씀하셨는데 옳은 말씀 같습니다. 우리 인생은 잠깐입니다. 그런데 이런 날아가는 인생도 시편 90편 12절에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 라고 기록했듯이 우리의 날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면 승리합니다. 넷째, 베드로전서 1장 24, 25절에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25]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고 기록했듯이 인생은 풀이나 꽃과 같습니다.
자신의 아름다운 자태를 마음껏 뽐내던 꽃들도 시간이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시들어 땅에 떨어지고, 늘 푸를 것 같던 풀들도 찬이슬 내리면 삭아집니다. 이처럼 우리의 인생은 잠깐 푸르다가 소멸하는 꽃이나 풀과 같기에 인생 존재의 이유가 너무나 재미없습니다. 그러나 승리할 수 있습니다. 영원히 소멸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 승리의 삶이 있습니다. 세상 창조의 근원적 힘이었던 주님의 말씀은 세세토록 우리에게 힘을 주고 능력을 주고 감싸주기 때문입니다.
다섯째, 고린도전서 9장 24절에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했고, 히브리서 12장 1, 2절에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하셨듯이 인생은 “달음질하는 경주(競走)”와 같습니다.
달음질하는 사람은 상 받기 위하여 잘 달려야 하고, 목표를 향해 달려야 하며, 정정당당하게 달려야 합니다. 무거운 짐인 죄를 벗어야 할 이유도 우리가 인생의 경주를 잘 달리기 위함입니다. 그래야 상이 있습니다. 그래야 승리합니다. 그 짐을 벗겨 주시기 위하여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2. 디모데후서 4장 6절 이하 8절을 보니 바울 사도는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 [7]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8]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고 고백했습니다. 그가 지혜로운 이유는 자신의 인생을 잘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기가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와 같은 존재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을 위하여 자기 일생을 말씀에 투자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인생이 “날아가는 존재, 즉 화살이나 총알과 같이 빠르게 나그네 길을 가는 경주자”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목표를 정하여 달려갔는데 힘들어 그가 도착하기를 소망한 곳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그는 자기라는 존재가 “풀이나 꽃과 같이 곧 시드는 존재”임을 알았고, 죽음 당하기 직전의 제물(=관제)과 같이 자기의 수명이 다했음을 깨달았을 때 그는 세 가지를 승리했다고 기뻐했습니다. 그 첫 번째는 “선한 싸움을 싸운 것”이고, 두 번째는 달려갈 길을 다 마친 일이었으며, 세 번째는 믿음을 지킨 일이었습니다. 그의 영적 전쟁은 참으로 치열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예수의 이름으로 승리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승리했을 때 그에게 주어진 상급은 영원히 썩어지지 않을 의의 면류관이었습니다. 감사하게도 이 면류관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여러분들도 천국 향한 달려갈 길을 마치고, 성령의 힘으로 싸우는 선한 싸움 싸우고, 끝까지 믿음을 지켜서 의의 면류관 얻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제목: 주 안에서 죽는 자는 복이 있다 - 성경: [요한계시록 14:13]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누구든지 사람의 육체는 흙으로 돌아갑니다. 본시 육체는 흙에서 나왔기 때문에 흙으로 돌아갑니다. 육체가 흙으로 돌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이기에 그것은 저주가 아닙니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모든 육체가 흙으로 돌아가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결과가 똑같지는 않습니다. 그 뒤에 하나님의 심판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진지하게 두 가지를 질문해야 합니다. 하나는 나는 “어떻게 살았는가?”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어떻게 죽었는가?”하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말씀은 “주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다” 했는데, 여기에서 주안에서 죽는다는 말은 사실 죽음에 대한 말이 아니라 그 동안 그가 살아 온 삶의 과정을 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안에서 죽었다는 말은 주님의 뜻대로 살다가 때가 되어 죽은 사람이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안에서 죽는 사람은 살아 있을 때에 그가 주님의 뜻 안에서 주님과 함께 살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주안에서 죽는 사람은 “너는 어떻게 살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하여 “예, 저는 주님과 함께 살았습니다” 하고 영광스럽게 대답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주안에서 죽는 사람은 복이 있다”고 말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 주안에서 죽는 사람이 복이 있는 이유는 수고를 그치고 쉼이 있기 때문입니다. 쉰다는 것은 참 좋은 일입니다. 뜨거운 뙤약볕에서 땀 흘리며 그을린 사람이 차가운 물 한 컵을 마시고 시원한 그늘에서 산들바람을 맞는 행복을 누려보지 못한 사람은 잘 모를 만큼 달콤합니다. 그러나 그 쉼은 잠시의 휴식입니다. 그러나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하신 마태복음 11장 28절의 예수님 말씀처럼 주안에서 죽는 사람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은 예수께서 영원히 받아서 쉬게 해 주십니다. 그래서 복이 있습니다. 인생이 진 가장 큰 짐은 죄의 짐이며 죽음이라는 짐입니다. 그 짐을 주님이 받아 주십니다. 그래서 복이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죄의 짐을 주님 앞에 풀어놓고 주안에서 죽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수고가 그치고 눈물이 닦이며, 영원하고 참다운 평안의 쉼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둘째, 주안에서 죽는 자들이 복이 있는 이유는 “행한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은 일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받을 상은 고사하고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이 있는 음부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됩니다. 그러므로 행한 일이 있다는 것은 그에 대한 상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심은 대로 거둡니다. 일하지 않고 상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좋은 것을 심으면 좋은 것을 거두고 나쁜 것을 거두면 나쁜 것을 거둡니다. 주안에서 죽은 사람들은 주님과 함께 영적인 씨앗을 심었기 때문에 영(靈)의 열매를 거둡니다. 그래서 주와 함께 죽으면 복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주를 위하여 열심히 일하여 착하고 충성된 종이 되셔서 주님의 영원한 즐거움에 동참하시기 바랍니다.
셋째, 주안에서 죽는 사람이 복된 이유는 그 사람은 주님과 함께 죽고 주님과 함께 다시 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수많은 사람이 왔다 갔어도 죽었다가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스스로 살아난 사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한 사람도 없습니다. 로마서 6장 4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했듯이 주님과 함께 죽는 사람은 다시 사신 주님과 함께 그들도 다시 살아납니다. 찬송가 407장에 “구주와 함께 나 죽었으니 구주와 함께 나 살았도다. 영광의 기약이 이르도록 언제나 주만 바라봅니다.” 했듯이 주님과 함께 죽으면 주님이 우리를 영광스러운 부활의 몸으로 살려 주십니다.
정리하겠습니다. 주안에서 죽는 사람은 수고를 그치고 쉼이 있기 때문에 복이 있습니다. 주안에서 죽는 사람이 복이 있는 이유는 그들은 상 받을만한 거룩한 행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안에서 죽는 사람이 복이 있는 이유는 주와 함께 다시 살기 때문에 복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모두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혼은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창조자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뜻대로 살다가 주안에서 죽은 사람이 되어 주님과 늘 함께 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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