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5장에서는 교우 지체들 간의 관계를 6:2에까지 정의하는데 그것은 나타나 보이는 표면적이고 실제적인 면이라고 하면 이 4장에서는 좀 더 내면적인 교회의 성숙을 당부하는 내용이었다. 첫 부분(1~5)에서는 건전치 못한 신앙의 경계했다면 중간(6~11)에서는 경건의 훈련을 지속할 것의 당부를 지난 시간에 나누었다.
오늘 다루는 교훈은 연령이나 신앙의 연륜이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사람들 간에 모범이 되도록 권면하고 가르치라는 당부가 첫째이고 하나님께 받은 은사를 잘 활용하여 서로 신앙 성숙을 나타낼 것을 당부한다. 이렇게 신앙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여 지도하는 사람은 물론 신앙의 지도를 받는 사람 모두가 구원을 누리게 하라는 권면이다.
또 가족처럼 자연스러운 지체 간의 관계는 이런 내적인 성숙이 이루어질 때 자연스럽고 사랑스러운 가족 구성원들이 될 것이기 때문에 역시 이어지는 5장의 내용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앞에서도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여금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지를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3:15) 한 것처럼 교회는 단순한 어떤 종교집단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버지로 예수 그리스도를 맏형으로 둔 가족 공동체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 4장을 시작하면서도 지적한 바 있지만 이것이 사역을 위한 디모데 개인을 향한 당부만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모든 교회 구성원들을 바울이 기대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라시는 신앙의 경지에 이르기를 원하심이라는 이해로 접근한다면 더욱 바람직한 교회들의 성숙이 될 것이다. 단순히 디모데 한 사람을 위한 권면이었다면 하나님께서 이 서신을 성경에 남겨두지 않으셨을 수도 있음을 생각할 수 있다. 말씀을 시작하면서 조금 염려스러운 것은 실제적인 행동이 더러 있기 때문에 짐짓 도덕강의(道德講義)가 될까 봐 조심스럽지만 이런 모든 결과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으로 사 주신 삶이기 때문에 구속의 은혜를 더욱 감사하는 자세로 들어줬으면 한다.
Ⅰ. 믿는 자에게 본이 되라(12~13)
어떤 사회에서나 원로들이 존경을 받고 귀하게 여겨지는 것은 그들이 가진 인생 속에 터득된 삶의 지혜 때문일 것이다. 율법에서나 지혜서들이 모두 이것을 가르치고 있다. “너는 센 머리 앞에서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레19:32)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 의로운 길에서 얻으리라”(잠16:31)
실제로 원로들의 자문이 아니라 어린 자기 또래들의 조언을 들었다가 위기를 당하는 북조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던 르호보암의 역사(왕상12:6~20)는 이러한 성경의 권면을 무시한데서 당한 어려움이었음을 역사서는 기록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중요한 결정은 주로 성문(城門)에서 원로들의 자문에 의해서 이루어 지는 것들을 성경의 여러 부분에서 보여주고 있다(룻4:7~12). 이것은 비단 성경에서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민족이나 나라들 속의 일반적인 관행일 것이다.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12) 그럼에도 오늘 첫 부분에서 바울의 권면은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12f)라는 당부를 볼 수 있다. 이때 디모데의 연령을 추측해 본다면 35~40세 정도였을 것으로 여겨지고 디모데는 개인의 사견이나 입장으로 교회를 사역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 된 말씀으로 섬기고 있다는 데서 그 말씀을 가르치게 하신 하나님의 권위에서 증거하는 데서 업신여겨서는 안될 것이다.
앞에서 원로들에 대한 당부를 언급한 바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 가지 별명으로(율법, 증거, 법도, 율례, 교훈, 계명, 도, 법, ) 증거하고 있는 시편119:100에서는 “주의 법도들을 지키므로 나의 명철함이 노인보다 나으니이다” 라는 증거도 읽을 수 있다. 그럼에도 여기에도 경계는 ‘주님의 말씀을 들음으로’가 아니라 “주의 말씀을 지키므로”라고 하나님의 진리를 지키는 사람의 명철은 인간적으로 터득된 노인들의 지혜와 비교될 수 없다고 하는 고백이다.
또 여기 쓰인 연소함은 단순히 나이에 국한하지 않고 신앙 연륜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인데 믿음생활한 것이 많지 않은 아직 영적인 성장보다는 천방지축하는 꽃 열심이 있는 사람들도 물론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주님의 가르치심 대로는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마19:30; 막10:31; 눅13:30)하신 것을 보면 오히려 처음 신앙하는 사람들이 타산적이지 않고 순수한 열심을 갖는다면 타성에 젖어 있는 오래된 사람보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더 아름답게 볼 수 있기 때문에 역시 신앙 연륜이 적다고 업신여기거나 함부로 대해서는 안됨을 생각하게 된다. 때로는 오히려 오래 믿음 생활하는 사람 중에 ‘그렇게 많은 세월동안 진리된 말씀을 듣고 읽어 왔다면 진리에 대한 확신이나 삶의 변화가 가능할 때도 됐는데?’ 라는 안타까움을 갖는 경우도 없지 않다.
그럼에도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12f)라는 것은 스스로의 주장으로는 불가능하고 오히려 믿음 속에서 존경을 받을 수 있는 이유를 연이어 기록하고 있다.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12) 여기 거론되는 5가지의 덕목에서 본이 될 것을 지적하지만 이 모든 것은 신앙으로 인한 전체적인 삶의 자세들이다. 또 한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나타나야 하는 모습들이라고도 할 수 있다.
사실 이런 신앙의 모든 분야에서 모범이 된다면 나이나 연륜에 관계없이 업신여김이 아니라 존경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자세나 삶은 말처럼 쉬운 것도 아니다. 여기서 모범이 되라는 덕목들을 간략하게 살피고 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말”은 복잡할 것이 없는 언어생활로 사람들 앞에 강의하는 것이나 일상에서 튀어나올 수 있는 언어생활이다. 바울은 옥중서신 두곳에서 믿음의 언어생활에 대한 당부를 준 바 있다.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엡4:29)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골4:6)
이어지는 “행실[ἀναστροφή, 생활 방식, 행동, 처신]” 역시 의미하는 것처럼 상처보다는 위로와 격려를 끼치는 믿음으로 인한 행동양식이다. 특히 앞의 이 2가지는 의도치 않은 믿음의 사람들의 자세라는 데서 의미하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사실 이 2가지만 덕스러워도 어느정도 현 사회에서는 모범이 될 수도 있고 존경받을 수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살 수 있을 것이다.
여기 “사랑”은 인간적인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의미하는 ἀγάπη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죄진 사람을 불쌍히 여김으로 사랑하는 자세로 동료 지체들과 사람들을 대하는 자세를 의미한다. 또 “믿음[πίστις]”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신앙의 자세를 의미함으로 이런 구별된 삶의 이유가 된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 “정절[ἁγνεία, 순결성, 정숙, 깨끗함(5:2)]”은 계산되지 않은 이익을 따지지 않는 이성관계나 물질거래에 청결한 성품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들이 보여주는 것은 세상에서는 어울리지 않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OT의 에녹 같은 삶의 모습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럼에도 여기 이런 것에서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했는데 세상 속에서는 찾을 수 없는 모습으로 교회 속의 성도들; 하나님의 백성들은 서로의 이런 덕스러운 신앙의 삶으로 도전을 받고 서로 ‘나도 저 사람과 같이 살아야지!’를 각오하고 격려하는 교회이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나는 절대로 그렇게 살 수 없다’고 지레 절망해 버릴 수도 있는데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주님과 임마누엘을 산다면 그렇게 어려운 과제는 아니다.
“본[τύπος, type, mould, 자극, 흔적, 원형, 모형, 거푸집, 주형, 틀]”이 되라 했는데 몇 개를 찍어내도 꼭 같은 모양이 나오는 우리의 본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다. 그 주님을 따라 산다면 또 다른 사람의 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도전을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13)하였지만 우리 모두는 만 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역사에 다시 오실 때까지 이러한 도전은 계속되고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평생동안 지속되어야만 한다.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13) 여기 마음을 써야 할 것도 이미 4:11에서는 경건의 훈련을 “너는 이것들을 명하고 가르치라” 하였지만 여기서는 3가지로 당부하고 있다. “읽는 것”은 성경을 읽는 것(NIV, NASB)이다. 오늘날 복음을 증거하는 사람들 속에 다른 것이 바쁘다는 핑계로 성경을 읽는 것을 잘 하지 못하고 있다. 읽는 것이 중요한 것은 진리의 확인이다. 언제나 성경을 읽으면서 권하고 가르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합당한가를 점검하는 것이다.
“권하는 것” 주님의 백성들의 삶이 하나님의 뜻에 맞도록 권하는 것으로 이 권면은 OT의 바벨론에 포로 되어 가 있는 심히 패역한 족속이라고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너는 내 말로 고할지어다”(겔2:7, 5, 3:11)하신 것을 보면 그러기 전의 백성들에게는 권하는 것이 더욱 중요함을 생각할 수 있다. “가르치는 것” 이 디모데서에서 경계하는 그릇된 사상에 미혹되지 않고 진리를 바탕 한 믿음위에 튼튼히 서도록 권하는 것이다.
교회안에서 연령이나 믿음생활의 연한에 관계없이 사랑은 말과 행동으로 표현되고 믿음은 사랑에 근거를 둠으로 이런 덕목을 서로서로 격려하고 도전하며 가르침이 진리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늘 성경을 읽으면서 그리스도인의 삶에 합당하도록 권하고 가르치는 일에 마음을 써야 할 것이다.
Ⅱ. 은사로 받은 것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14~15)
이 두번째 당부의 내용이 지켜질 때 어쩌면 앞의 권면이 가능할 수 있을 것이라는 데서 이 말씀의 이해가 중요함을 생각하게 한다. 디모데가 어느 장로의 회에서 안수를 받았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마치 사울이 다메섹의 아나니아에게 안수를 받을 때 “네가 그를 위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네가 보고 들은 것에 증인이 되리라”(행22:15, 9:17)고 사명을 주셨던 것과 같이 디모데가 안수를 받을 때 특별한 은사와 함께 받은 예언을 쉽게 생각하지 말고 그 예언에 따라 주신 사명에 마음과 힘을 다하라는 권면이다. 이 말씀 역시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시는 당부이기도 하다.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받을 때에 예언을 통하여 받은 것을 가볍게 여기지 말며”(14) 우리가 쉽게 이해하는 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믿고 거듭난 모든 사람들에게는 각자 꼭 같지 않은 선물 즉, 은사들이 주어졌다. 이 은사들은 어느 것이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 것이 없이(고전12장) 그것이 소소하게 여겨지는 것일지라도 하나님께서 거저주신 선물이라는 데서 대단히 중요하다.
또 그 선물을 받는 과정도 디모데는 장로의 회에서 안수받을 때에라고 하였지만, 모두 다를 수 있고 고린도전서12:8~10에서는 같은 한 성령으로 주어지는 은사가 7가지로 나타나지만 이것은 성령의 열매들과는 또 다른 것으로 심지어는 믿음까지 은사로(9f) 나타난다.
디모데가 받은 은사를 여기 나타나는 대로 예언을 통하여 받은 것이라고 하였다. 받는 과정을 디모데에게는 안수받을 때라고 했는데 이스라엘의 안수는 과거 OT의 족장 시대부터 오랜 기간을 가지고 내려왔고 NT에도 복을 전달하는 축복할 때(막10:16)나 병을 고칠 때(눅4:40), 성령의 오심을 빌 때(행19:6)나 직책을 맡길 때(행6:6) 나타나지만 꼭 그렇지 만은 않은 일들이 더 많다. 예를 들면 12사도는 안수받은 기록이 없고 뒤의 5:22f에서는 오히려 디모데에게 경계하기를 “아무에게나 경솔히 안수하지 말고…”라는 당부도 나타난다.
중요한 것은 이런 영적인 것들을 “…가볍게 여기지 말며”(14)라는 경계가 주어지고 있다. “가볍게 여기다”[ἀμελέω, 소홀히하다 (α + μέλω, 관심을 가지다, 돌보다, 걱정하다, 염려하다, 괴로워하다)]는 믿음 생활하면서 받은 것이 어떤 것이 되었든지 그것을 소홀히 하거나 가볍게 여기지 말고 다른 사람이 경험하지 못한 나만의 선물이라면 그것을 근거로 더욱 열심히 충성되게 섬기는 것이 중요하다. 마치 마태복음25:24~27에 나타나는 한 달란트 받았던 자와 비교될 수 있다. 다른 사람보다 적게 받았다고 생각한 나머지 소홀히 여겨 땅에 묻어뒀던 사람처럼 하는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나는 은사 같은 것은 받은 바 없는데요?’ 할 수 있지만 앞에서 말한 대로 믿음(고전12:9f)조차 은사라고 하였고 따지고 보면 믿음 조차도 모든 사람이 가진 것은 아니라는 데서 소중히 여겨야 할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 주어진 것들이 사람의 보기에는 다른 사람 것과 비교할 때 하찮은 것처럼 보일지라도 나에게는 귀한 것임을 인식하는 데서 “이 모든 일에 전심 전력하여 너의 성숙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15)시는 주님의 당부를 듣게 된다.
“이 모든 일”이란 앞에서 당부하고 권면한 영적인 과제들이고 “전심 전력하여”라고 하는 것은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라는 말씀이기 때문에 마치 하나님을 사랑하는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막12:30)라는 가르침과 다르지 않다.
그렇게 할 때 나타나는 결과는 “너의 성숙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는 결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항상 어떤 결과를 만나든지 특히 영적인 일에 있어서는 우리 주님처럼 “최선을 다 했는가?”만이 중요하다. 사실 우리가 눈에 보이는 것의 결과보다는 하나님께는 이런 자세가 더 중요하다. 그리고 어떤 결과에 든지 승복할 수 있어야 한다. 아니 최선을 다했다면 그런 사람은 하찮은 결과에도 감사할 수 있고 하나님의 상 주심을 기대하게 될 것이다.
Ⅲ. 자신과 듣는 자를 구원하라(16)
오늘의 말씀의 마지막 부분도 역시 자신에게 로 되돌아온다. 늘 강조하는 것이지만 신앙에 있어서 자신이 중요한 것은 아무리 좋은 것에서도 나 자신이 함께 하지 못한다면 적어도 나에게는 전혀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훈계하고 천국을 보낸다고 해도 거기에서 자신이 제외되면 의미를 잃게 되기 때문에 항상 어느 시간 어느 장소에서나 어느 예배, 어느 모임에서나 바울이 디모데에게는 네 자신이라고 하였지만 우리 각자에게는 나 자신이 점검되고 나로 인하여 다른 사람이 구원되도록 항상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런 이치에서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살펴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16)는 당부를 우리 자신 각자의 입장에서 들어야만 한다.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살펴 이 일을 계속하라…”(16f) 교회 속에 신앙은 “피차”나 “서로” 즉, 상대 지체 간의 관계를 위해 헌신할 것은 히브리서를 비롯해서 NT성경은 자주자주 권면을 주고 있다. 그럼에도 “나 자신”도 또한 다른 사람에 의해서 보다도 자신 스스로도 늘 살펴야 한다. “살펴[ἐπέχω, 굳게 잡다, 주목하다, 지체하다]”는 연결되는 말씀과 함께 계속적으로 지속해야 하는 시제의 형태와 함께 “너 자신에게 관심을 계속해서 가져라”는 의미가 된다.
바울의 이런 당부는 이미 고린도 교회를 향한 자신의 고백 속에서 확인할 수 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9:27) 그 살피고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가르침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미 앞에서도 성경을 읽는 것이 자신의 권면이나 가르침이 진리에 부합되는가를 확인하는 것으로 지속해야 할 과제라고 증거한 바 있다. 이러한 신앙의 과제는 완료될 수 없고 자신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가 아니면 주님의 재림의 때까지 지속되어야만 할 과제가 되기 때문에 “이 일을 계속하라!”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여기에서 다가 아닌 것은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16b) 한 것이다. 이 말씀을 거꾸로 표현하는 내용이 우리 주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주신 경계의 말씀과 대조해 볼 수 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마23:13)
하나님 사랑의 최고 절정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은 내가 확신과 구원을 얻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나의 구원을 통한 다른 사람의 구원이 함께 연결되고 있다. 그런 이유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딤후2:2) 구원과 가르침은 한 사람에게서 끝나지 않고 계속 확산되어 가는 것이다. 앞의 v12~14의 권면과 당부들을 결론적으로 “이것을 행함으로”라고 하는 것이고 그러므로 여기 행함으로는 깨닫고 전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 모두를 의미하는 것이다. 앞에서 지적한 대로 이 귀중한 과제는 이 일을 계속하라 하셨기 때문에 지상에 있는 교회과 성도들이 이 역사의 문을 닫을 때까지 진행해야만 하는 사명이요 과제이다.
나이가 아직 어린 것이나 신앙의 연륜이 짧은 것이 업신여김을 받을 이유는 아니다. 오직 지체들 서로를 향한 덕스러움과 순결함이 피차 간에 모범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우리 각자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또는 주님께서 이 역사에 마지막으로 다시 오실 때까지 지속되어야 할 것임으로 피차 권하고 가르치는 데 마음을 써야만 한다.
각자는 자신이 주님을 믿음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받은 선물을 소홀하지 말고 받은 은사와 주신 사명을 다하여 성숙함의 진보를 주님과 지체들에게 나타내도록 해야 한다.
이런 서로의 영적 성장을 힘쓰면서도 자신 속에 신앙적용을 항상 점검하여 힘쓰므로 스스로의 구원의 확신과 주변의 서로 도전하는 지체들이 함께 구원을 얻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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