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을 믿는 사람이라 | 신성호 | 2021-06-0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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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 믿는 사람이라 (마 14:13~21)
1. 오병이어의 이적 오병이어의 이적이라고 알려진 본문은 내용 자체를 설명할 필요조차 없을 만큼 잘 알려져 있습니다. 신약성경의 사복음서 모두에 빠지지 않고 관련 기사가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만큼 제자들은 물론 믿음을 구하는 그 당시의 사람들과 이 기사를 접하는 현대인들에게도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세례 요한의 죽음 이후에 군중들의 관심은 나사렛 예수에게로 집중되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많은 고을의 무리가 예수께로 모여들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치유의 사역에 감동하여 그분의 주변을 떠나지 못했습니다. 로마로 대표되는 세상의 힘, 돈, 권력의 질서에 편입된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외치는 예수님의 말씀과 치유의 사역은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영적 시각에서 비늘이 벗겨지고, 새 하늘과 새 땅의 소망을 가슴에 담았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소망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오병이어의 이적 때에 예수님의 가장 최측근들이었던 사도들조차 그리스도의 능력을 확신하지 못했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많은 군중이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나아왔습니다. 말씀을 듣고 예수님의 능력 혜택을 입기 위해서였습니다. 저녁이 되자 그들을 먹일 식량 문제가 대두되었고 제자들은 이 일로 근심하였습니다. 그 많은 능력을 보았으면서도 그리스도를 통한 소망보다는 현실적인 문제로 받아들입니다.
2. 우리의 해결법과 예수님의 해결법
“저녁이 되매 제자들이 나아와 이르되 이곳은 빈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 먹게 하소서”(마 14:15)
세상 적으로 사는 방법에 민감한 그들은 텅 빈 들판과 몰려오는 어둠이 큰 도전이요, 시험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제는 무리를 흩어 보내어 저들이 사 먹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라는 것이 제자들의 문제 해결 방법이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소망의 말씀과 도전을 받았다고 하지만 육신을 가진 우리에게는 현실의 문제를 피할 수 없습니다. 사실 이러한 사고방식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무리를 보내어 사 먹게 하자는 제자들의 이야기는 일면 매우 합리적이기 때문입니다. 잘못도 아니고 불신앙이라고 말하기도 어렵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의견에 대하여 말씀하신 예수님의 분부는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제자들의 문제 해결 방안에 대해 아니라고 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마 14:16)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현실의 문제에 있어서 합리적인 판단을 비(非)신앙적이라거나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간혹, 아니 때때로 주님은 지극히 상식적이고 합당한 우리들의 생각에 대해 ‘그것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실 때가 있습니다.
3. 예수님을 대하듯이 주님의 말씀과 판단이 항상 우리들의 생각이나 합리적인 상식과 늘 일치 한다면 믿음이 필요 없습니다. 그런 생각은 누구나 할 수 있고 지혜롭다고 인정되는 이들의 의견을 구하면 됩니다. 하지만 신앙이 판가름 나는 때는 이렇게 가끔, 아니 때때로 주님께서 우리의 상식과 합리적인 생각을 넘어서는 진단이나 명령, 말씀하실 때라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을 마을로 보내어 사 먹게 하자는 제자들의 제안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십니다. 합리적으로 본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이 분부는 이해하기도 받아들이기도 쉽지가 않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당신만의 의도와 계획이 있으셨습니다. ‘한 끼 굶는 것 그것이 무슨 문제인가?’라고 지극히 작고 사소한 일로만 특정하지 않고 이 일을 통해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을 나누려 하셨습니다. 동화작가 권정생 선생이 쓴 「우리들의 하느님」에 이러한 내용이 있습니다. 권 선생이 어느 날 가까운 시내에 나갔다가 돌아오려는데 버스비가 모자라 할 수 없이 완행 기차를 탔답니다. 그런데 기차 안에 있던 어떤 아주머니가 자리를 비워주면서 앉으라고 권했다고 합니다. 두 정거장만 가면 내리기에 괜찮다고 사양을 했지만, 아주머니는 기어코 앉기를 권해서 자리에 앉았습니다. 권 선생은 자리에 앉아 아주머니께 ‘혹시 교회 나가시는 분이 아니시냐?’고 무심코 묻습니다. 그러자 아주머니는 금방 반색을 하면서 어떻게 알았는지 신기하다면서 묻지도 않은 자신의 이야기를 합니다. 아주머니는 의성의 어느 시골교회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있었는데 십여 년 전에 이상한 체험을 했답니다. 어느 날 아주머니가 집안일을 하고 있는데 거지가 구걸하러 왔습니다. 정신없이 일에 몰두하고 있던 아주머니는 자기도 모르게 귀찮아서 퉁명스럽게 지금은 바쁘니 다른 데나 가보라고 거지에게 박대하며 내쫓았습니다. 그런데 그 거지가 돌아서 나가는 뒷모습을 힐끗 보니 놀랍게도 틀림없는 예수님 모습이더랍니다. 깜짝 놀란 아주머니는 하던 일을 그만두고 허겁지겁 쌀을 한 대접 떠서 달려나가 보니 거지는 그새 어디론지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습니다. 혹시나 해서 옆집으로 또 옆집으로 샅샅이 찾아보았지만 역시 허사였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아주머니는 주저앉아 통곡합니다. 그때부터 이 아주머니 눈에는 그 어떤 사람이라도 예수님으로 보이게 되었다고 합니다. 사람들을 예수님처럼 대하기 시작했고 그 이후 지금까지 만나는 사람들 모두를 예수님으로 알고 대접합니다. 이야기 끝에 아주머니가 한 마디 덧붙여 말합니다. “세상 사람이 다 예수님으로 보이니까 참 좋아예.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해드리고 싶어예.” 예수님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삶의 작은 부분, 아무리 작은 문제일 리도 무가치하게 여기거나 무심하게 흘려버리는 분이 아니십니다. 육신을 입고 살아가는 우리들의 현실 문제를 귀하게 여겨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인 우리도 같은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사랑하라고 보내주신 우리의 이웃을 탐욕 때문에 무심하게 대한다면 그것은 믿음을 저버리는 행위가 됩니다. 하나님은 자비로운 공급자이십니다. 예수께서도 “하나님은 자애로운 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오병이어 이적을 통해서 ‘주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새롭게 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모든 것이 되는 분이시며 우리와 늘 함께하십니다.
4. 너희가 주어라 앞에서 말했듯이 주께서 우리의 경험과 상식으로 불가능한 것을 우리에게 가끔 요구하실 때는 분명한 계획이 있으심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러한 일들을 통해 우리의 믿음이 더욱 자라도록 도우십니다. 성장하고 성숙하게 하시고 순종과 헌신에 따른 새로운 은혜를 경험하게 해 주십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니이다”(마 14:16-17)
예수님은 이 문제를 대하는 제자들의 생각과 판단, 현실 인식을 깨닫게 하려고 중요한 분부를 내리십니다. 제자들은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에 비추어 자신들이 가진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라고 보고합니다. 믿음의 분량은 비록 작더라도 조금만 더 진중했더라면 “저희가 가진 것은 현실보다 너무나 작습니다.”였겠지만 제자들은 아직도 믿음이 작았기에 이렇게밖에 대답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조금 더 직설적으로 표현한다면 “이것은 불가능합니다.”가 제자들의 현실적 시각이었습니다. 작은 차이인 것 같지만 실상은 다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치 판단이 ‘있으나 마나다.’라는 자조적인 판단과 토설은 생명의 가치를 죽이고 인생을 좀 먹습니다. 함부로 정죄하고 판단하고, 단정 짓는 것은 생명을 해치는 일입니다. 만약 그 대상과 상황이 “상한 갈대, 꺼져가는 등불”이라고 한다면 그 위험성은 더욱 증폭됩니다. 미미하고 작은 것 안에서 생명의 기운을 복 돋아 주시는 분이 주님이라는 사실, 항아리 안에 남은 마지막 밀가루 한 줌으로도 새로운 은혜의 세계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이런 말은 하지도 말고, 품지도 말아야 합니다. 일부 호기로운 사람들 가운데는 ‘이까짓 것 가지고 무엇을 하겠나? 내가 알아서 할 것이니 치워버리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의 가르침은 그렇지 않습니다. 과부의 두 렙돈을 귀하게 받으신 주님을 기억하십니까? 겨자씨 만한 믿음을 칭찬하시는 분이 우리 주 예수이십니다. 소년 다윗의 손에 들려있던 물맷돌은 거인 골리앗을 쓰러뜨린 도구였으나, 그 의미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이스라엘의 믿음 없음을 고발하는 증거품이었습니다.
5. 비록 나의 것은 작지만
이르시되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 하시고(마 14:18a) 저는 이렇게 작은 것을 가지고도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는 주님의 모습이 참 좋습니다. 제 메모 책에 기록되어있는 노방 전도 후에 기록했던 메모 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대전에서 하나님을 섬길 때 있었던 일입니다.
오늘은 화요일. 전도지와 휴대용 티슈를 들고 성도들과 함께 교회 주변으로 전도를 나가는 날이다. 비래동 은행 앞의 노점에는 채소를 파는 할머니와 차량에서 튀김을 파는 아저씨가 나란히 장사하고 있다. 그런데 전도를 마치고 오후 늦게 집으로 가는 도중 장을 보기 위해 다시 그 앞을 지날 때였다. 장사를 끝내고 귀가 준비를 하던 채소 장사 할머니에게 튀김을 파는 아저씨가 만 원 지폐를 건네시는 모습을 보았다. 할머니는 한사코 받지 않으려 했고, 아저씨는 기어코 주머니에 넣어 드리려고 가벼운 실랑이를 한다. 할머니가 말했다. "안 받아. 내가 왜 이 돈을 받아?" 그러자 아저씨가 다정한 목소리로 답을 한다. "에이, 할머니 오늘 장사 공쳤잖아요. 난 그래도 오늘 튀김 좀 팔았으니 괜찮아요. 집에 갈 때 그냥 가지 마시고 손주 과자라도 사서 가세요." 결국, 할머니는 못 이기는 척하며 지폐를 받아 주머니에 넣었다. 집으로 가는 길에 우연히 그 장면을 본 나는 콧등이 시큰해졌다(2016년 6월 ).
예수님은 크고, 화려하고, 힘 있는 것을 들어 축사하신 것이 아니라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축사”(마 14:18b)하셨습니다.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작은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작은 것이 주님의 손에 들려졌을 때 이것을 드린 어린 소년의 마음은 감격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축사를 마치고 나누어진 떡과 물고기는 그곳에 모인 모든 이들의 필요를 채우는 양식이 되었습니다. 이 은혜를 경험한 이들은 교만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가진 것은 우리의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해 주지 못하지만, 주님의 손에 들려지면 나눔의 성사가 됩니다.
6. 예수님과 함께 도대체 나에게 무엇이 있기에 저들을 먹일 수 있을까요? 이백 데나리온의 돈은 적은 돈이 아니기에 대부분 사람은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겐 나사렛 예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잊고 살 때가 많습니다. 늘 현실 논리에 빠져서 현실과 상황을 넘어서는 생각을 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짚고 넘어갈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은 이웃들이 가지고 있는 결핍에 대해 해답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5)
생명의 떡으로서 영원한 양식을 주시는 예수님을 우리가 모시고 있듯이 그 예수님의 이름으로 나눔을 베풀어야 합니다. 해 저문 빈들에 있는 사람들, 그들의 양식은 주님의 능력이었습니다. 생명의 떡이신 주님이 우리의 갈급함을 해결하는 양식이 되셨습니다. 생명의 양식이 된 주님을 모신 이들은 그 생명의 양식을 또 다른 사람들에게 나눌 생각과 의지를 갖춰야 합니다. 각자의 문제는 각자가 해결하도록 하자는 세상의 논리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분명 이에 합당한 능력과 도우심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 찬송가 96장에는 민로아(F.S Miller) 선교사가 작사한 ‘예수님은 누구신가’가 있습니다. 1절에 ‘예수님은 누구신가 우는 자의 위로와 없는 자의 풍성이며 천한 자의 높음과 잡힌 자의 놓임 되고 우리 기쁨 되시네’가 있는데, 이것은 우리의 신앙고백이며 희망 사항입니다. 우리가 주님으로 모신 분은 ‘우는 자의 위로와 없는 자의 풍성이신 분’이십니다.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셨지만 정작 이들을 먹이신 분은 주님이셨습니다. 그러기에 이 역사는 처음부터 주님이 하실 생각이셨고, 우리에게서 믿음을 보고 싶으셨습니다.
끝을 맺겠습니다. 죽음이 두려워 많은 이들이 전전긍긍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주님과 함께 살면서 죽음을 각오하면 발길도 가볍게 기쁨으로 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답게, 예수님처럼 살기를 각오하면 세상의 가치와 풍조를 넘어선 사랑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손과 발이 되기를 각오하면 주님이 함께 일해 주십니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금과 은이 아니라 나사렛 예수입니다. 그분만이 우리의 진정한 힘이십니다. 우리의 미미한 믿음조차 귀하고 아름답게 쓰시는 분임을 확신하여 의지한다면 분명히 복이 있습니다. 그분의 마음을 소유합시다. 그리고 그분을 위해, 또한 ‘너희가 주라’고 주께서 가리키시는 사람들을 위해 우리의 손과 발을 내어드리시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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