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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정히건 전도자 이준 2024-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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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히건 전도자의 생애와 사상

 

                                                         김 명 복 (정히건 전도자 장학회)

 

 1. 들어가는 말

 

  시편 90편은 모세의 기도이다모세는 이 기도에서 하나님께 인자와 긍휼을 간구하기 전 하나님을 가리켜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나이다’(2)라고 찬양한 후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셨다고 밝힌다(3창 3:19). 창조주 하나님에 의해서 만물과 사람이 복스럽게 창조되었으나 그 근원된 티끌()로 돌아가게 된 것은 첫 사람 아담이 하나님의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명령을 거스리고 불순종한 죄의 결과로 초래된 하나님의 형벌 곧 죽음을 의미한다결국 모든 인생은 죽음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롬 5:12). 1-12절에서 모세는 유한(有限)한 인생의 무상(無常덧없음)함을 토로하고 있다이 세상에서의 삶이 짧아 주의 목전에는 천년이 지나간 어제 같고 밤의 한 경점(更點밤 시간의 구분 단위, 3-4시간순식간같으며 잠깐 자는 것과 같이 평생이 순식간(瞬息間)에 다하였으며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迅速)히 날아간다고 고백한다.

 

 

  그런데 만일 모세의 기도가 이상과 같이 인생의 덧없음의 탄식으로 끝났다면 인생은 분명히 허무한 것으로 아무 소망없이 종결되고 말았을 터인데다행히 모세는 13-17절에서 계속 기도하기를 우리의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시고 주의 인자로 만족케 하시며 우리의 평생의 곤고와 화를 당한 연수대로 즐겁고 기쁘게 하시고 주의 영광을 자손에게 나타내시고 하나님의 은총을 임하게 하시어 우리의 행사를 견고하게 해달라고 청원하고 있음을 볼 때 우리는 새로운 인생의 소망을 갖게 된다(시 90:12-17). 모세의 이런 기도가 응답되어서 인지 모세는 자기가 예측한 칠 팔십의 인간 수명을 훨씬 넘는 일백 이십세까지 살면서 눈이 흐리지 아니하고 기력이 쇠하지 않은 건강과 장수의 복을 누린 위대한 신앙의 인물이 되었다(신 34:7).

 

 

  고 정히건 전도자의 일생은 어쩌면 모세와 유사점이 있어 보인다모세가 묘사한 바와 같은 짧고도 수고와 슬픔이 가득한 이 세상에 살면서도 마치 모세가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受侮)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긴 것은 하나님의 상급을 바라보았기 때문이었듯이’(히 11:24-26), 고인도 하나님의 부름받은 종으로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80평생을 자신을 위한 세상의 영화를 버리고 오로지 하나님이 맡겨주신 생명을 구원하는 복음증거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온갖 고통과 죽음을 마다하지 않고 최후까지 충성하실 수 있었던 힘은 모세나 사도 바울과 같은 신앙의 위인처럼 내세에 더 좋은 것으로 예비하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확신 때문이었을 것이다(히 12:40). 결국 믿음의 승리는 전능하시고 살아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철저한 신뢰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결론을 우리들에게 제시하고 있다이제 필자가 고인의 제자 중 한 사람으로 평생을 비교적 고인을 오랫동안 가까이 모시며 배우고 따랐던 과거의 추억을 더듬고 밝혀진 자료를 참고하여 고인의 아름다운 삶의 이야기와 빛나는 사상과 교훈이 무엇인지 추모의 마음가짐을 가지고 살펴보며 우리도 고인의 삶을 본받고자 이 글을 쓴다.

 

 

2. 고 정히건 전도자의 생애

 

  고인은 1920. 5. 1 평북 신의주에서 태어나서 사시다가한국동란전인 1947. 3. 5 가족(부인 정송일장남 득선조카 김신호)과 함께 월남하여 서울에 정착하였다. 1950년도 한국동란을 만나 부산에서 피난 생활 중 그리스도의 교회를 개척하여 섬기며 전도하시다가 상경하여 1953년도에 서울 냉천동에서 서대문 그리스도의 교회를 개척하여 1976년까지 이 교회를 섬기며 복음 전도사역을 전개하였다서대문 교회를 시무하며 활동하신 일 가운데 잊을 수 없는 일은 1964년도부터 1969년까지 서대문교회 예배당에서 바울성서신학교를 세워 제자를 양성하신 일이다이때 가르침을 받은 제자는 공삼열박길재고길상김명복 등이었다고인이 친히 교장으로서 신구약 성경 중 공관복음사도행전바울서신환원운동사목회학설교학 등을 직접 엄격히 지도하며 특히 중점적으로 경건생활을 훈련하셨다.

 

  필자는 1958년부터 효창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며 고등학생때 미국인 세계적 부흥사 밥 피얼스로부터 약식세례를 받았으나 재침례에 대해 의구심을 갖고 여러해 동안 고민하던중 고인을 스승으로 모신 후 열띤 성경토론후 고인의 명쾌한 성경교리에 감동되어 1964. 1. 14 추운 겨울 한강물에 침례를 받게 되었고그 후 어머니와 아내도 고인의 주례로 침례받아 우리 가정이 복음화 되고필자가 효창교회를 섬기는 일꾼이 되도록 키워준 평생 신앙의 은사(恩師)이시다.

 

  1965년도 필자가 교파를 초월한 여러 신실한 형제들과 함께 신앙의 교제와 봉사생활을 하는 양우회’ 회장으로 일할 때에 고인을 지도교역자로 모시고 매월 설교말씀을 들었으며은혜와 감동을 받고 고아원을 방문하고 불우이웃의 자녀를 위한 장학사업 등 봉사활동 사역에 함께 동참했다이 당시 이지호형제가 이 모임에서 명예회원으로 봉사하다가 도미하여 나중 박사학위를 받고 금의환향하신 후 한국인 최초의 그리스도대학교 학장이 되셨고현재 그리스도대학교 대학원장(후일 5대 학장, 2대 총장 취임)으로 계신 기준서형제도 회원으로서 모임의 특강과 회지 발간 등에 협력하며 봉사하던 일꾼이었다고인이 전파한 생명력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많은 젊은이들에게 소망을 주는 멧시지가 되어 당시 봉사하던 젊은이들이 지금 모두 충실한 그리스도인 지도자의 성숙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좋은 결실이라고 여겨진다.

 

  1967년에는 박순영형제부부 중심으로 창립한 선한 사마리아인들의 모임'(Good Samaritan's Meeting)에서 사회의 그늘진 이웃들을 위해 비누와 화장지 등을 팔며 얻어진 수익금으로 양식을 공급하는 봉사사업을 하였는데고인이 이 모임의 지도교역자로 정신적인 지주의 역할을 하셨다필자가 이때에도 서기를 맡아 고인의 은혜와 감동이 넘치는 설교를 노트해서 보존하고 있다.

 

  1967년도 3월 고인은 성경통신교육원(BCC)에서 일하시며 강원도 정선 등 벽지까지 복음을 들고 순회전도를 하시며 많은 결실을 맺기도 하셨다. 1968년도에 본 연구원내에 동계대학을 설립하여 운영하시고, 1969년부터 1976년까지 전도부장과 부원장 직무를 수행하셨다.

 

  1971. 8. 16에 고인은 그리스도의 교회 목회자 사모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목회자부인대학을 설립하여 학장으로 봉직하시며 작년 2000년도까지 무려 30년간 25(연 1)의 개강을 통해 사모학과 연 600, 8회의 제직부인학과(1991년 모집 잠정보류 조치연 188명을 수료시켰다.

 

이 학교의 운영경비를 위하여 20여년간 미국에 살고 계시면서도 매년 빠짐없이 백여만원의 후원금을 모금해 오시고직접 책임운영을 해 오셨다고인은 이 학교야 말로 평생 졸업없이 공부할 수 있는 세계의 유일한 대학이라고 자랑하시었다그리스도의 교회 목회자 부인과 제직부인 등 교회를 위한 여성지도자의 재교육과 그리스도의 교회의 정체성을 구현해 오신 것은 고인의 괄목할만한 공헌이라 여겨진다.

 

  고인은 1952년부터 1976년까지 15개 교회를 개척하시며군부대 및 교도소를 방문하여 특수전도 활동을 하시며유창한 일본어를 구사하여 일본인 교회를 위한 전도활동을 매년 전개하시었다. 1973년부터 1986년까지는 한국 성서 번역회의 부의장으로 활약하시던 중장래에 더 큰 소망과 원대한 이상을 실현코자 가족과 함께 도미하시었다도미하신 후 고인은 1978년도에 미국 켈리포니아주의 산타아나 한인 그리스도의 교회를 개척하시고 그곳 노인을 대상으로 장수대학을 설립 운영하시어 산타아나 시장으로부터 감사패를 받으셨다.

 

 

  1982년부터 그리스도의 교회 교역자 자녀 장학회(일명 송아지 장학회)를 창설하시어 한국의 농어촌교회 교역자 자녀를 위한 장학기금을 모금하여 도우셨다초창기에는 실제로 송아지를 사서 어미소로 키워 판 소득으로 장학금이 되게 도와 주었으나 나중 현금으로 장학금을 돕기도 하였다.

 

 

   이 사업은 고인이 도미하여 한국의 농어촌 교역자 자녀를 위한 장학사업으로 미국내에서는 10한국에서는 13,000일본에서는 1,200엔을 1인당 연회비로 한번만 헌금하여 가장 보람된 일을 할 수 있는 장학사업으로 추진되어 왔다이렇게 고인이 미국에서 모금하신 장학금과 한국의 장학위원들이 모은 월회비를 수입 재원으로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중 지방 미자립교회 교역자 자녀를 위한 학비보조로 송아지 장학금을 지급하며 수년간 송아지장학회를 운영하여 왔으나 재정 부족으로 부득이 장학사업을 중단하고향후 대책으로 몫돈 기금을 조성 후 원금의 소실(消失)없이 거기에서 나오는 이자 수입으로 본 장학회의 장학 사업을 재개하기로 기본 방침을 결정하였다.

 

  현재 기금이 약 2,200만원이 조성되어 있다지난 2001. 2. 6 고인에 대한 추모예배를 마치고 유족대표와 송아지 장학회원이 모인 장학회의에서 향후 대책을 협의한 결과 당분간 기금을 더 조성하고 송아지 장학회의 명칭을 고인의 업적을 기리는 의미에서 정히건전도자장학회로 개명하기로 결정하였고본회의 대표(청지기)로 김명복 전도자를 추대하여 관장하도록 결의하였다추모예배를 마친 후 유족 대표의 뜻에 따라 추모예배시 수납된 부의금 잔액 190만원에 유족이 10만원을 더 보태어 200만원을 정히건전도자장학회에 장학금으로 기부하여 현재 기금이 약 2,200만원이 예치되어 있다.

 

  현재 본 장학회가 보유하고 있는 장학기금 규모로는 앞으로 장학사업을 원활히 추진해 나가기 턱없이 부족한 상태임을 누구보다 고인이 잘 아시는 터이기에 기간이 좀 걸리드라도 일정 수준의 장학 기금이 조성될 때까지 장학사업을 중단하고 당분간 기금 마련에 총력을 다하자고 당부하신 고인의 생존시 고견이 반영된 결과이다어려운 상황 속에서 복음전도의 일선에서 수고하는 교역자 자녀들의 학자금을 돕는 이 귀한 사업이 앞으로 교계의 뜻있는 분의 기도와 후원으로 계속 발전하여 개교회와 전국 그리스도의 교회 발전에 디딤돌 역할을 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그러나 장학 사업이란 기금이 준비되지 않고서는 계속할 수 없으므로 기금 모금에 최선의 노력을 경주해야 할 것으로 사료된다반드시 주님이 길을 열어 주실 것을 믿는다.

 

  1999년도에는 고인이 정들었던 산타아나를 떠나 벨훌라우어로 이사하여 팔십을 넘긴 고령에도 직접 교회를 계속 섬기며다년간 자신의 설교를 꽉 채운 교회 주보를 직접 타자를 치시고 우표를 부치어 세계 여러 나라 심지어 북한에도 내 설교가 주보를 통해 들어간다고 자랑하실 정도로 패기가 넘치셨다.

 

  고인이 50세가 넘은 중년에 많은 난관을 각오하고 미국에 거너 가신 중요한 목적중의 하나는 그리스도의 교회의 참모습을 눈으로 목격하고 깨달아 그 진리의 진수(眞髓)를 바로 전하여 이 땅에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도록 힘쓰는 것이었다그래서 고인은 젊은 시절 국내에서 1955년 서울성서신학교를 졸업하시고 1961년 경희대학교 법대를 졸업하심으로 축적된 조직적 사고와 남다른 정신력을 가지고 도미후 만학을 시도하여 1977년 하딘대학원에서 수업을 받으시고, 1984년도에 L.A 성서신학대학에서 신학석사 학위를 취득하셨으며최종적으로 L.A 그리스도신학대학교에서 영예로운 박사학위를 취득하셨다. 1990년부터 1992년 까지 이 대학교에서 신학부장을 역임하시었으며, 1993년도에는 퓨리탄 주립대학교에서 교수로 강의하셨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고인과 가족이 도미로 인하여 많은 고생을 겪었지만 복음전도를 위해서나 자녀 양육을 위해서 도미하신 일은 아주 잘 하신 것 같다감사한 일은 비교적 3남 1녀의 자녀들이 모두 건실하게 성장하여 믿음의 생활을 잘하고 있으니 하나님이 종의 가정을 복주신 것이다필자가 바울 성서신학원을 다니며 공부할 때 정송일 사모님은 어려운 환경속에서도 우리 학생들을 돌보고 대접하며 부엌일을 하시면서도 늘 기쁨으로 찬양하고 봉사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이러한 자애로운 어머니의 모습과 복음전도 생활에서 오는 시련을 불굴의 용기로 굳굳하게 이겨나가시는 강인한 아버지의 모습을 지켜보며 자란 자녀들의 마음속에 신실한 부모의 신앙이 그대로 전수될 수 밖에 없었을 것으로 확신한다마치 디모데의 어린 심령에 외조모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의 진실한 믿음의 씨앗이 뿌려져 장성한 후 사도 바울의 발탁으로 훌륭한 복음의 일꾼이 되었듯이고인의 자녀들은 지금 모두 훌륭한 믿음의 일꾼이 되었다이제 남은 것은 귀한 자녀들(장남정득선차남정일선, 3정 선정화선)과 사위와 자부들이 고인을 보필하며 평생 수고하신 연로(年老)하신 어머니(정송일 사모)를 편히 모시고 효성을 다하며 아버님의 유지(遺志)를 받들어 복음 전도와 이웃을 잘 섬기고 있는 복된 가정을 이루고 있음은 실로 하나님이 내리신 은혜로 감사할 뿐이다.

 

  1991.8.15 고인이 목회자부인대학을 위해 한국에 들어와 계셨을 때 그리스도교역자회 주최로 가화부페식당(화곡동)에서 고인의 목회사역 40주년 및 고희연 축하 기념예배를 를 드렸다이 때 필자는 이 기념예배의 기도에서 다음과 같이 기도하였다.

 

“... 고인이 한평생 복음을 전하며 보통사람으로는 수행하기 어려운 여러 가지 하나님의 사역을 잘 감당하도록 성령의 능력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며앞으로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종을 붙들어 주셔서 더욱 큰 은사를 힘입어 잘 감당하도록 도와 주시기 바라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아멘

 

  또한 1993년도에는 그리스도신학대학교 출판부에서 발행한 고인의 설교집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출판기념예배의 축도에서 필자는 이렇게 하나님께 기도를 올렸다.

“...옛날 다윗이 기록한 마지막 시편 145:7에서 주의 크신 은혜를 기념하여 말하며 주의 의를 노래하며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후세에 전한 것 같이 하나님의 구원과 복된 영감의 말씀으로 펴낸 이 설교집의 출판을 기념하여 기쁨으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사랑하는 종이 증거한 복음을 듣고 읽는 뭇 심령마다 굳게 닫힌 마음 문이 열려 회개와 순종으로 주 앞에 나와 참 생명을 얻는 복을 누리며 하나님의 평화가 충만하게 하옵소서이제는 진리의 원천이 되신 선지자요 희생과 용서의 제물이 되신 대제사장이시오 우리 삶의 주인과 왕이 되신 그리스도 우리 주 예수님의 은혜와독생자를 아끼지 않으시고 세상에 보내시고 인류를 죄와 파멸에서 구원하시려고 영생을 주신 하나님의 무궁한 사랑과무지몽매하여 늘 넘어지고 세속에 물들어 고난받고 방황하는 인생에게 좋은 길잡이로 인도하시는 성령님의 역사하시는 능력이 사랑하시는 종의 남은 생애와 고귀한 역할위에평생 내조하시는 사모님과 가정위에 오늘의 기쁨을 나누는 모든 동역자들과 내빈위에 그리고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 위에 함께 하시기를 그리스도의 귀하신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아멘

그리고 2000. 8.10 그리스도신학대학교 마가홀에서 교역자회(전창선 회장)가 주최하고 목회자부인대학이 주관하는 고인의 팔순축하만찬” 생신을 한국에서 맞이하시며 교계의 많은 동역자와 성도들이 고인의 만수무강을 기원하였다이날 만찬 음식은 목회자부인대학에서 준비하였고다음 날 8.11 25회 목회자부인대학 수료식이 있었다.

 

  이상과 같이 한국과 일본에서의 모든 전도 일정과 주요 행사를 마치고 미국에서 생활하시던 중 평생에 쌓인 수고로 인한 피로의 누적과 노쇠로 심장과 위의 결함이 발생하여 두 차례의 대수술을 받으시고 요양하시던 중 사랑하는 가족과 성도들의 간곡한 회복을 바라는 기도에도 불구하고 2001.1. 24 하나님은 고인의 생명을 하나님의 품으로 인도하심으로 이 땅의 모든 수고와 슬픔을 쉬시고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되셨다.

 

  고인이 평생에 남기신 유고는 인류문제와 성서(1956, 서울인쇄소), 개인전도학듣는 자는 살아나리라(1993, 그리스도신학대학교 출판부), 하나님과 하느님 칭호에 대한 논문(기독교사상 1971년 4월호등이다특히 인류문제와 성서는 필자도 청년시 애독하여 그리스도의 교회 신앙 정립에 많은 도움을 받은 책인데 아쉽게도 절품되었다.

  

  고인을 평생동안 알고 좋은 인간관계속에서 사귄 많은 동역자들과 제자들과 친지들이 많이 있다한국에 오시면 꼭 친지들의 명단을 기록한 두꺼운 카드 묶음을 휴대하시었다두터운 교우관계를 맺으며 후원을 받은 헌금을 공적 기금으로 다시 내놓으셨던 투명성으로 많은 사람들은 신뢰를 갖고 고인의 전도사역을 도왔다사도 바울이 그랬듯이 고인도 평생 복음전도를 함에 있어 가까이 물심양면으로 교제하고 협력한 많은 동역자와 성도들이 있었기에 고인이 큰 힘을 얻어 평생을 복음전도에 전념할 수 있었다여기에서 지면관계로 몇 분만을 소개드리기로 한다.

 

  먼저 우리 교계에서 살펴 본다면 이미 고인이 되신 고 전계선 전도자를 먼저 손꼽을 수 있겠다이 분은 목회자부인대학이나 송아지 장학회 등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고인을 정성을 다해 도우신 전도자이시다목회자부인대학도 사실상 전계선전도자의 노고속에 계속 건실히 운영되어온 것을 간과할 수 없다.

 

 오봉식 목사도 오랜 정의를 가지고 변함없이 고인을 가까이 존경했던 분이다오목사는 지난 해에 한국에 계실 때 고인에게 양복 한 벌을 선물로 드렸는데 고인이 미국에 돌아가신 후 몸이 불편하신 중에도 그 옷을 그렇게 즐겨 입으셨으며결국 그 옷을 천국에 가시는 장례 예복으로 입고 가셨다고 한다.

 

  또한 서대문 교회에서부터 고인을 존경하고 도왔던 유경용 집사(현재 장로) 부부도 고인을 물심양면으로 도운 분들이다그 외의 교역자들로서 원영희 전도자양상용 전도자주정철 전도자김진산 목사조영호 목사박영순 전도자 등 여러분이 고인의 사랑을 받으며 많은 협력을 아끼지 않은 분들이다.

 

  그다음 고인이 지도하던 봉우회라는 봉사단체의 정석호 목사를 비롯한 여러 회원들이 있다이들은 아직도 모임을 유지하며 매년 고인의 평생 복음전도사역에 물심양면으로 도운 단체의 회원들이다또한 한마음교회를 오랫동안 시무하시고 현재 한기총 총무로 활동하시는 박영률 목사가 계시다박목사는 고인이 강원도 전도시 만나 침례를 주고 가르친 제자이며 복음의 동역자였다매년 고인이 서울에 오시면 빠짐없이 한마음교회를 방문하여 설교를 하시곤 했다.

또한 인천 일심교회의 김연신목사와도 친숙한 관계를 맺고 있어 서울에 오시면 인천으로 자주 말씀을 전하러 가셨다이와 같이 고인은 많은 친지들과 끊임없는 교제와 연합 활동으로 오직 주님의 영광을 위해 섬기며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한 오락이나 여가도 없이 일평생 굳은 믿음의 절개를 지키며 수없이 많은 활동을 쉬지 않고 최선을 다 하시었다.

 

어쩌면 고인에게 있어 인생 팔순은 하고 싶은 일을 다 하시기에는 너무 짧은 세월이었다생전에 다하지 못하시고 남기신 복음전도 사역은 바로 유족되신 가족과 고인의 사랑하는 제자와 믿음의 권속인 우리들이 감당하여 이어가야 할 몫일 것이다.

 

 

3. 고 정히건 전도자의 사상

 

  필자는 과거 청년시절 1965년부터 3년간 고인이 개척한 서대문교회 내에 개설한 바울성서신학교(교과목성경실천목회환원운동역사 등 여러 학과로 구성된 신학교 3년 과정)에 입학하여 교장(고인)의 직강을 들으며 학문적 가르침과 목회와 선교 실천 등 3년 교육 및 훈련 과정을 이수하였다이 교육과정의 교육 훈련 경험이 후일 전도자로 부름받을 때 큰 영향력의 기반이 될 수 있었던 것을 생각하며 직접 가르쳐 주신 스승의 은혜에 크게 감사를 드린다.

 

  고인은 끝까지 필자를 제자로 변함없이 사랑해 주셨고필자가 아직 전도자로 취임하기 전부터 행사때 마다 중요한 부분을 함께 의논하셨으며 필자도 제자로서 최선을 다하며 협력을 위해 노력하였다마치 사도 바울이 디모데와 디도를 믿음의 아들과 동역자로 택하여 부르신 것처럼 고인은 필자를 제자로 부르셨고 직접 가르치고 훈련시키셨던 것을 생각하면 결코 우연이 아닌 필연적인 만남의 과정이었던 것을 생각하고 부르심과 택함의 과정 속에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이 있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이말은 부모없이 자식없고스승없이 제자없으며선배없이 후배가 없다는 말과 일맥상통한다이 세 관계로 가정과 사회가 구성되는데 상호간 성실과 신뢰의 기본 바탕이 확립되고 상호의 역할이 각자의 위치에서 효과적으로 제기능을 분담하여 발휘되거나 작용하지 않고서는 연합과 성장의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없다사랑이 보이거나 만져지지 않으나 분명히 느껴지고 확인되듯보이지 않는 인간관계에 성실과 신뢰는 분명히 보이지 않는 손으로 작용되어 효력을 증대시키는 결과를 창출하게 된다.

 

  고인의 신학과 환원관은 무엇이었나그것은 그리스도의 교회가 주장하는 신약교회의 순수한 성경적 신앙으로 돌아가 말씀으로 일치하는 것이었다. 1967년 3월 2일 고인이 강원도 순회 전도를 마치고 돌아와 선한 사마리아인들의 모임에서 설교한 내용에 의하면 강원도 골짜기까지 수많은 종파가 스며있어 교회가 온전히 하나로 뭉치지 못하고 있다며각 교파가 합일되기 위해서는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만을 토대로 하여 가르치고 배워야 한다고 역설한 일이 있었다.

 

  여러 교파로 분열된 현대 교회가 성경의 하나되는 원리에 따라 초대교회로 환원하자는 것이 환원운동가들이나 고인의 중요한 환원 사상이었다고인이 필자에게 늘 강조하여 가르치신 성경 말씀은 딤후 3:15-17, 딤후 2:15, 롬 1:16 이었다인간을 구원하고 온전하게 하는 성경(복음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는 능력있는 일꾼이 되라는 것이었다필자는 이 말씀의 본문을 당시에 노트에 적어 놓고 외워 지금도 잊어버리지 않고 암송하며 삶의 좌표로 삼고 있다최근년 목회자부인대학에서나 교회초청의 설교시간에는 한결같이 확고하게 성경적 교리를 주장하심으로써 고귀한 그리스도의 교회 정통성을 이어 오셨다.

 

  아무튼 분명한 것은 고인이 소위 세속교회와 같이 여러 가지 현실적 상황과 전통에 따라 타협하고 편승하여 인위적 교리를 복음처럼 각색하여 증거했다면 아마 본래의 원형적인 복음의 진리는 중도에 퇴색되어버리고 말았을 것이다고인이 평소에 자기 별명은 펄 정(Paul Chung) 이라고 소개하였듯이고인은 평생 사도 바울이 명령한 교훈을 따라 상대방이 누구이든지 상관없이 듣던지 말던지 복음을 전하는” 복음전도자로 일관했다는 점이다이런 의미에서 고인은 사도 바울을 닮은 열정적인 전도자였음을 자타가 공인하며 존경하는 것이다.

 

  바울이 고전 9:19에서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고 말한 대로 그리스도인들은 너무 획일적이고 단편적인 신앙을 벗어나서 바울같이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나누어 주고 친구가 되어 주므로서 잃어 버린 자를 구원할 수있도록 어떤 처지와 환경을 상관하지 말고 나와 다른 그들의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적응력이 뛰어난 일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그래서 고인은 바울이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으로의 전도 방식을 채택하여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했던 것 처럼 여러 사람에게 교리를 뛰어넘은 구원의 복음을 몸소 사랑을 실천함으로 전하였다하나님의 나라는 결코 선포되는 말에 있지 않고 선포된 말이 삶속에 사랑으로 실천 적용될 때 참 복음의 능력이 되는 것을 고인은 잘 알고 실행하여 우리에게 보여 주었다.

 

  고인은 그리스도의 교회가 성장이 침체되어 있는 사실에 대하여 성경에서 말하는 초대교회의 모습이 바로 그와 같이 취약한 상태였던 것 같이 합리화시키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성경이 말하는 교회의 진정한 모습은 복음과 성령의 권능으로 말미암아 크게 성장하는 교회 형태임을 늘 마음에 그리어 꿈꾸며 언젠가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은사를 최대한 도구로 사용하여 많은 사람에게 기쁜 소리를 방송하는 기회를 주실 것으로 염원해 왔다비록 평생 목회하는 교회가 소규모의 틀을 탈피하지 못하는 그리스도의 교회의 공동운명체적인 상황에서도 결코 불평하거나 실의에 좌절하지 않고 일생을 적극적인 정신자세’(positive mental attitude)와 계획을 세우면 바로 실천하기’(PD) 등 진취적이며 열정적인 투혼을 가지고 일관한 신념의 사람이었다고인은 낙후된 그리스도의 교회의 모습을 그냥 바라만 보고 있는 안주(安住)의 신앙보다는 새로운 미래를 향한 도약의 열린 성장 마인드를 지니고 최후까지 분투하신 분이다.

 

4. 나가는 말

 

  서두에 언급한 바와 같이 모세는 애국 애족의 정신으로 민족을 구하기 위하여 자신의 영화를 거절하고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 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더 좋아하고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하나님이 상 주심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11:24-26). 그러기에 스스로 예측한 인생 칠 팔십의 수한을 넘어 실제 장수의 복을 누렸다.

 

 

  그는 좋은 후계자를 세워 자신이 다하지 못한 대업을 맡기고 절대적으로 하나님 앞에 복종함으로써 인생의 무상함을 달래며 자신을 조절하며 여생의 평강을 찾았다그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하나님의 복을 받은 자로 인생의 날을 계수하는 지혜를 하나님께 배우며 평생을 가치있게 실현한 활동적이고 창조적인 하나님의 종이었다.

 

  바울도 그리스도를 발견한 이후부터 과거의 모든 세상적인 자랑을 배설물 같이 다 버리고 오직 예수와 성령의 이끌림을 받아 새사람으로 변화되어 이방의 빛으로 어두운 죄악 세상에 빠진 백성들을 건져 구원하기 위하여 온갖 시련과 환난을 극복하며 자신의 생명을 아끼지 않고 복음을 전하며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킴으로써 장래 그를 위해 예비된 의의 면류관을 얻을 확신을 가지고 천상의 기쁨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승리의 삶을 살았다(딤후 4:7-8).

 

  고인이 모세나 바울과 같이 그렇게 격동과 고난의 한평생을 살면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팔순이 지나도록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열정과 최선을 다 하시다가 이 땅의 남은 사역과 수고를 그치고 영원한 하나님의 안식과 평화를 누리고 계신다.

 

  이제 고인의 빛나는 생애를 통해 그가 행한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우리에게 보이셨으니예수님이 너희도 이렇게 하라는 말씀과 같이 우리들도 그렇게 살겠습니다라고 고백하며 다짐할 뿐이다.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들에게 임할 면류관을 얻기까지.. ”(딤후 4:8)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계 2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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