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목회(은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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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목회(은퇴)
나의 소중한 목회 추억 참빛-고봉환 2023-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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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기 목회자 소명과 교육전도자 훈련(1975-1981)

고등학교 2학년 때 열정적인 신앙생활을 하면서 장래 목회자가 되겠다는 결심을 하고 대한수도원에서 금식하며 기도했다. 절벽의 소나무가 부러질 정도로 부여잡고 밤새도록 간절히 기도하였다. 부친에게 신학교에 가겠다고 말씀을 드렸으나 흔한 이야기로 북청 고씨 가문 도장손(都長孫)이라 안 된다는 것이었고, 직업을 갖고 가난한 살림을 보태야 한다며 반대하셨다. 그러나 작정 기도하면서 결심한 것을 막을 수 없는 확신이었기에, 부친은 마지못해 꼭 신학교에 가겠다면 친척 할아버지되시는 청량리 그리스도의 교회 이흥식 전도자님을 찾아가 말씀드리고 도움을 청하라고 하셨다. 청량리교회는 어릴 때 자주 갔던 교회이기에 낯설지 않았다. 이흥식 할아버지께 신학 공부를 하여 장래 목회자가 되겠다고 말씀드렸더니, 어떤 의도이신지 우선 서울성서신학교로 가라고 하셔서 1975년에 입학하였다. 그 후에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사역하려면 아무래도 그리스도신학대학에서 공부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되어 1979년에 2학년으로 편입학하여 졸업하였다.

청량리교회에서는 교육전도자로 봉사하면서 학비 지원을 받았다. 이 시기에 학생부, 청년부를 열정으로 지도하였더니 부흥하여 별도로 예배를 드리게 되어 학생부는 주일 아침 9시에, 청년부는 토요일 저녁에 모였다. 학생부 지도를 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당시 문학을 꿈꾸던 학생들에게 시와 음악, 찬송을 마음껏 펼치게 ‘문학의 밤’을 개최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용산공고 밴드부를 불러 협조케 하였더니 이흥식 할아버지에게 악기를 사용한다는 이유로 야단을 맞았으나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청량리교회에서 3년여 동안 봉사한 후에, 여러 교회에서 교육전도자 훈련과 경험을 받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되어 그 후로 효창 그리스도의 교회, 인천 주안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교육전도자로 사역하였다.

제2기 청량리 그리스도의 교회 목회(1982-1984)

1982년 초에 갑자기 청량리교회 김희만 목사가 사임하면서 필자에게 교회 담임을 맡으라는 요청이 왔다. 처음에는 아직 이흥식 전도자님이 계시는데 감당할 수 없다는 생각에 사양하였으나 할아버지의 요청을 거부할 수 없기에 겸손한 마음으로 부임하였다. 청량리교회 목회의 책임을 맡으면서 열정과 충성으로 목회를 하였더니 1983년 여름에는 출석 교인 숫자가 190명까지 되는 기록을 남겼다. 교회의 미래는 젊은 세대에 있다는 믿음으로 청년부와 학생부 지도에 각별한 관심과 열정을 쏟았다. 학생부에는 ‘물맷돌’, 청년부에는 ‘실로암’이라는 신앙회지를 만들었는데, 인쇄 시설이 미약한 때라 등사기로 밤새워가면서 출판하였다.

청량리교회에서 이흥식 전도자님으로부터 배운 것은 ‘오직 교회, 오직 성도’라는 목회 신념이었다. 할아버지는 성도들의 신앙생활을 위해 기도하시고, 그리스도의 교회의 정신과 방향을 유지할 수 있도록 노력하셨다. 그 당시에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가정이 많았는데, 할아버지는 성도들의 가정생활에도 깊은 관심을 갖고 많이 도우셨다. 어느 날은 대 심방을 마친 후에, 필자를 불러서 “혹시 심방 중에 개인적으로 받은 헌금이 있는가?”라고 물으면서, 헌금은 교회에 그대로 내놓으라고 하셨다. 그 이유는 어렵게 사는 교우들의 헌금을 헛되이 쓸 수 없다는 것이었다. 물론 개인의 목회 활동을 위해 따로 받은 것이지만, 성도들의 모든 헌금을 교회에서 유용하고 바르게 사용하는 것이 맞는다고 동의하고 할아버지 말씀대로 하였다.

당시에는 ‘그리스도의 교회’하면 이흥식 전도자님을 생각할 정도로 깊은 영성과 출중한 리더십으로 교계를 이끌어 가셨다. 오죽하면 “전도자님 감기로 기침하시면, 전국 그리스도의 교회가 들썩거릴 것이다”라고까지 하였다. 그만큼 그분의 역량이 크셨고, 그리스도의 교회 신앙을 철저히 지키셨고 사랑하셨다. 할아버지의 이러한 목회 방침과 확고한 환원운동 정신을 많이 배웠으나, 그분만큼의 그릇이 되지 못해 그분의 모든 것을 담지 못해 늘 부끄러움을 느낀다. 세월이 많이 지난 지금, 그리스도의 교회를 바라보면서 이흥식 전도자님의 빈자리가 너무 큼을 절실하게 느끼게 된다.

지금에서 고백하지만, 그 당시 필자의 나이 겨우 28살로 너무 어리고 미숙했다. 목회가 뭔지도 모르고 그저 존경하는 할아버지 곁에서 청량리교회를 섬긴다는 자만심만 컸다. 그러다가 부족하고 미숙함이 나타나고 더는 할아버지에게 부담을 드려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아무런 준비도 없이 청량리교회를 떠났다. 많은 시간이 지나서 돌이켜 보니. 만약 그때 ‘결혼이라도 했다면 가정에 대한 책임감으로 쉽게 교회를 떠나지 못했을 것이고, 어쩌면 오랫동안 청량리교회에서 할아버지의 신앙 유산을 이어가지 않았을까?’라는 생각도 한다.

세월은 빠르게 지나서 35여 년 만에 청량리교회 70주년 기념 예배 오후 설교자로 초빙받아서 강단에 서게 되었다. 남다른 감회가 무척 컸다. 20대 청년 때에 사명감만으로 방방 뛰고 다니며 사역하였던 일들이 하나하나 떠올랐다. 예배 후에 60세에 갓 들어선 주부 성도들이 달려와서 “선생님, 저 누군지 아시겠어요?” 한다. 선생님이라고 부르니, 그렇다면 내가 신학생 시절에 학생이었던 그 자매인가? 저들에게는 내가 목사가 아니라 여전히 지도교사로 각인 되었구나!’라고 생각하니 무척 반가웠다. 청량리교회를 담임하는 동안에 매우 미숙하였으나, 반면에 순수한 열정과 충성심이 넘쳤던 첫 목회지였다.

제3기 난산 그리스도의 교회(1986.1 – 1999.10)

교역자회(당시 회장 심희선 전도자)에서 제주도 난산 그리스도의 교회는 현운천 집사(당시 가마교회)가 아들을 교통사고로 하늘나라로 떠나보내면서 받은 보상금으로 세운 교회라고 하면서 목회자로 추천하였다. 교역자회에서 매월 선교비로 5만 원을 지원하겠다고 하면서 내려갈 것을 독촉받고, 가시밭길인지도 모르고 32살 나이에 무조건 나섰다. 1986년 1월 15일, 난산 그리스도의 교회(제주도 서귀포시 성산읍 난산리 340-1)에서 교역자협의회 주관으로 취임예배를 드리고 부임하였다. 그 당시 난산교회는 교인이 전혀 없었으며, 마당은 진흙으로 되어 있어 벽돌로 진입로를 겨우 만들어서 다닐 수 있는 열악한 환경이었다. 사택도 없어 예배당에서 지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제주도 내려가기 바로 전날에 중매로 만난 자매와 결혼하기로 약속해 놓았다. 1986년 2월 13일 얼굴을 6번째 보는 날에 이흥식 전도자님의 주례와 동역자들의 축하를 받으면서 결혼하였다. 우리는 제주도 목회에서 “둘이 하나가 되어 열심히 복음을 전도하자”라고 약속하였다. 그러나 막상 아내와 같이 살 신혼집이 마련되지 않아 급하게 예배당 뒤편을 3평 정도 방으로 꾸며 살게 되었다. 제주도에서 맞이한 신혼 첫날 아침, 아내가 다급하게 부르더니 교회 마당에 김치 항아리가 있다고 한다. 아내는 신혼 첫날 아침에 받은 이 기적 같은 일에 감사하여 지금도 자주 이야기한다. 몇 년이 지난 후에 마을 주민 오승찬의 엄마가 결혼한다는 소식을 듣고 반찬으로 준비해주었다고 한다. 이렇게 난산교회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채워주심으로 시작되었다.

초기에 교인은 중고등학생 2명, 주일학교 75년생 여자아이 7명, 장애인과 그의 가족이 나왔다. 그들이 1986년 8월 15일에 신산리 해수욕장에서 침례를 받고, 여학생들이 중학생이 되어 주일학교 보조교사로 일하자 나름 소소한 재미가 있었다. 하지만 이들이 고등학생과 대학생이 되면서 제주시에 나가 살게 되었다. 이에 매 주일 이른 아침, 또는 토요일 저녁에 제주시(왕복 130km)에서 그들을 데리고 들어와 주일학교를 돕게 하고, 오후 예배를 마치면 다시 제주시로 데려다주었다. 그렇게 애를 썼음에도 청년들이 제주시에서 대학을 다니다 보니 난산리에는 거의 올 일이 없어지게 되어, 제주시의 기독교 커피숍 ‘로드 스페이스’에서 주일 오후 예배를 드렸는데 이는 제주지역 문화 사역의 시초가 되었다.

목회 중에, 제일 중요하게 여긴 것은, 주보를 발행하고 매주 친지들에게 주보를 발송하여 선교비 지원을 요청하였다. 이 주보가 사실상 난산교회를 살리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목회신학」에서 뽑은 전국교회 10대 주보에 선정되기도 하였다. 주보를 발행하면서 더욱 좋은 글을 쓰기 위하여 아내와 같이 제주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 1기로 공부하고 「월간 문예사조」에 1999년 함께 등단하였다.

<난산 교회 주보>

교회에 사택이 없어 너무나 불편하여 목수에게 사택 건축을 요청하면고, 그 비용은 할부가 많이 남은 승합차를 넘겨주기로 하였다. 목수는 처음에는 좋다고 약속하였지만, 첫 비용이 350만 원에서 800만 원이 되자 난색을 표하며 현금으로 달라고 한다. 큰일이다 싶어 별수없이 하나님께 간구하였으며 주님께서는 일하는 자에게 멍에를 씌우지 않으시고 엘리야의 까마귀를 보내셨다. 그렇게 해서 3년 만에 겨우 주방 1평, 보일러실 1평, 살림방(8평), 이층 조립식 8평의 사택을 마련하였고, 마당은 콘크리트로 포장하였다.

제주도 복음화를 위해 주변 목회자들과 초교파 ‘제주동부목회자연합회(동목연)’ 창립에 주력하였다. 내가 동목연의 기틀을 놓기까지 총무를 연속 맡았고, 제주도를 떠나기 직전에 겨우 회장을 맡았다. 동목연 창립 배경에는 제주도에서 낯설어하고 때로는 이단교회가 아니냐고 오해하는 상황에서 ‘그리스도의 교회’를 바로 알리려는 목적과 제주 복음화가 있었다.

제주도 한라산 중산간 100가구도 안 되는 작은 마을에 있는 난산교회가 부흥은 안 되고, 가정생활은 어렵고, 그야말로 영적·재정적·육체적으로 삼중고를 겪으면서 대안을 찾기 위해 고민했다. 마침 난산보건소장 간호사가 교회에 출석하면서, 보건 공무원이 되면 좋을 것이라는 조언에 아내는 40세에 입시 공부를 시작했다. 41세에 한라대학 간호과에 입학, 졸업하고 간호사 국가 면허를 취득하였다. 그런데 막상 보건진료소 발령을 기다리는데, 뜻하지 않은 소식이 들렸다. 정부가 보건진료소 운영을 줄이고 인원을 감축한다는 것이다. 희망이 무너지는 소식에 제주도를 떠날 때가 되었다는 하나님의 뜻으로 믿고 목회 15년 만에 1999년 10월 제주도를 떠났다.

제3기 군 선교와 병원 선교 (2006.03 – 2015.10)

군 선교는 그리스도신학대학교 박신배 교수의 소개로 양구 군인교회에서 시작하였다. 군 선교는 가두리양식장 전도요, 전국구 목회라고도 하지만 민간인 목회자가 자기 비용으로 섬겨야 하는 특수사역이다. 당시 천안에서 양구 군인교회까지 자가용으로 왕복 750km로 7시간 정도가 걸렸다. 그래서 하나님이 특별히 주신 성정동 아파트를 아내의 승인 없이 처분하고, 그곳을 다닐 경비와 승용차를 마련하였다.

양구에서 군 선교하는 동안(2006.03 –2012.11), 포병 연대 부대에 군종 목사 배정이 중단되면서 대안으로 필자가 민간인 목사로는 처음으로 연대본부 목사가 되었다. 연대교회(고방산 충성교회)는 마침 예하 대대 밖에 있어서, 그곳에서 생활하고 식사는 교회 앞에 있는 예하 대대에서 병사들과 같이하였다. 초기에 군인교회 설교가 병사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는지, 어느 병사는 “자신의 20대에 갑자기 뛰어 들어온 전설”이라고 하였다. 특히, 아직 군 선교 체계가 잡히지 않아서 ‘한국 군선교회연합회’에서 민간 목사들에게 군 선교교육원 과정을 의무적으로 마치게 하였다. 이에 필자는 군선교교육원 1기로 들어갔다.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당시로는 유일한 군 선교사였다.

양구에서 6년을 목회하면서 초급 장교와 병사들이 말씀의 은혜를 받고 믿음이 깊어지면서 목회자가 된 이들도 있다. 또 가장 잘한 일로는 두 개의 교회당을 건축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고,한 곳은 외부의 도움을 받아 교회당을 직접 건축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하지만 점차 나이가 들고, 병사들과 세대 차이에서 오는 한계를 느끼고 자리를 내려놓았다. 그렇게 양구를 떠난 후에 마침 영동에 있던 육군학생군사학교가 괴산으로 이전하게 되어 그곳 문무대 교회 협동 목사(2013.1-2015.10)로 섬겼다. 당시 담임이었던 정비호 군종 목사(현재 군종감, 대령)의 배려로 명예롭게 정년은퇴를 하였다,


끝맺는 글

33년간 목회하면서 4명의 목회자를 양성하였다. 그들은 졸업 논문에 필자를 통해 참 목자의 모습을 보았고, 믿음의 아버지였다는 감사의 말을 써주어 위로를 받았다. 그러나 막상 은퇴하고 목회현장을 돌이켜보니 현대의 신학이 교회 현장에서는 별로 적용되지 않는 학문이 아닌가 하는 평가를 하게 된다. 먼저, 강서대학교에 제안하고 싶은 것은 신학과 학생들에게 복수 전공을 해 자격증을 취득할 기회를 주었으면 한다. 가령, 유아교육 교사 자격, 사회복지사, 심리상담 등등, 학업을 마치고 개척할 때, 자격증이 있으면 개척교회를 하면서 크게 도움이 될 수 있다. 또한, 일할 수 있는 나이에 은퇴하게 되면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다. 교계에는 은급 제도나 목회자의 생활, 의료, 은퇴 후에 대한 대책을 좀 더 고민해 주기를 제안한다. 다른 교파 교단에서는 농촌목회만 하다가 은퇴하여도 생활할 수 있는 은급비를 받는다. 목회하는 동안에 개 교회가 자체적으로 은퇴비를 적립하는 방안도 있을 것이고, 교역자협의회에 은급 부서나 복지 부서의 제도를 정착시키는 방안도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의 교회 동역자들에게 남기고 싶은 것은, 그동안 충분한 형제의 교통과 사랑을 나누지 못한 점을 아쉽게 생각한다. 청량리 그리스도의 교회, 인천 주안 그리스도의 교회, 효창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교육전도자로 사역할 때는 신학대학에서 공부하고 개 교회에서 주어진 사역에 집중하다 보니 항상 시간에 쫓겼다. 난산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목회할 때에는 개척교회의 고달픔이 너무 커서 정신적 여유가 없었다. 그 후로 양구에서 군 선교를 할 때는 군대라는 특수한 환경에서 자유롭게 외부활동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부족한 종으로서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해 크게 이바지하지 못한 것 같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교회 신앙에서 한치도 벗어난 적이 없으며, 그리스도의 교회 목회자로서 긍지를 잃지 않고 우리가 믿고 실천하는 신앙 정신 구현에 진력하였다. 그리스도의 교회 성장과 발전을 위해 귀퉁이 한 자락이라도 들어 올렸음에 자부심을 갖는다. 그럼에도 부족하였음을 고백하면서 사도 바울의 말씀을 남긴다.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롬 1:14)

고봉환 목사/ 난산(제주) 그리스도의 교회 목회하였으며, 고방산 충성교회에서 군 선교를 한 후 은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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