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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그리스도의교회 조영호 2021-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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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경북 영양으로

 내 나이 29세였던 1978, 지금부터 42년전 일이다. 그 당시 나는 부산 신학교(현 경성대학교 신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인 신학생이었다. 어느 날 청학동교회에서 열린 교역자협의회 영남지방회에 부산 성지교회 원종호 목사님을 모시고 함께 가게 되었다. 그날 회의 때에 교역자 파송에 대한 안건이 있었다. 왜관교회의 교인인 한 형제가 국립대학교인 대구의 경북대학교 사범대 체육학과를 졸업하고 경북 영양 중·고등학교에 첫 발령을 받았다.

이 형제가 주일마다 성만찬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왜관까지 왕복하다가 너무 멀기도 하고,영양에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웠으면 하는 마음으로 학생들 몇 사람과 성경공부를 하면서 모임을 하다가 전도자를 보내 달라고 영남지방회에 요청하였다는 것이다. 마침 현재 세종시에 있는 서바울 목사가 가기로 하였으나, 사정이 생겨 못 가게 되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 의논을 하는 것이었다. 그때 원 목사님 곁에 있던 필자가 제가 가면 안 되나요?” 하고 끼어들었다. 모든 분이 자네가 왜?” 하며 물었고, 나는 갈 사람이 없다 하시니 말씀을 드렸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결국, 내가 개척전도자로 지방회 파송을 받아 1978113일에 영양으로 가게 되었다.

 

1) 장춘상회 2층에서

 

그 당시 경북 영양은 울릉도, 봉화, 청송과 함께 공무원의 첫 발령지로 날만큼 급지가 낮은 열악한 깊은 산골이었다. 필자는 부산에서 2.5톤 트럭에 이삿짐을 싣고, 3살배기 큰 딸인 시온이를 안고 세 식구가 하루종일 달려서 영양으로 갔다. 그 당시는 비포장도로에다가 차도 좋지 않아서 가는 시간만 하루 종일이었다. 옛날 유배 가는 사람들이 이런 길을 갔을 것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녁나절에 드디어 영양에 도착하니까, 김충기 선생님(현 경산교회전도자)과 학생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김 선생은 이제 전도자가 오셨으니까 본격적으로 개척을 시작한다.’라고 영양 시장에 있는 장춘상회를 얻어 놓았다. 예배처소로는 2층에 소재한 약 15평 정도의 장소였다. 매월 25천 원의 월세를 내기로 한 것으로 기억된다. 그리고 우리 집은 영양제제소 옆에 부엌이 딸린 단칸방을 얻어 두었다. 물론 이 모든 일은 전부 김충기 선생님의 열정과 희생으로 진행되었다. 그 당시의 개척 구성원들은 지금도 각지에서 중요한 일을 담당하고 있다. 김충기 선생님이 묵었던 집의 차점선 자매는 지금 영양교회권사이며, 그의 조카인 차수영은 청기 토굴에서 영양읍으로 나와서 학교에 다녔는데 얼마 전에 일산교회에서 직임을 받았다. 막냇동생 차무철은 지금 서울 용산에서 중요한 일을 맡고 있으며 땅끝 선교회의 후원자이고, 그 아버지는 현재 울산교회의 차현갑 장로님이다. 그당시 학생이었던 이진우는 그리스도(KC)대학을 나와서 베트남 선교를 하고 있고, 원치국은 현재 창원의 평화교회 목사이다. 이렇게 필자는 김 선생과 학생들을 중심으로 하여 영양교회 개척을 시작하였다.

 

2) 마음껏 예배할 수 있는 장소

1978년도 늦가을인 113일에 영양으로갔는데, 약 두 달 뒤에 송구영신 예배를 드리려다가 황당한 일을 당한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장춘상회 2층에 있는 예배당에서 찬양하고 기도하고 있는데 주인이 올라와서 제사를 지내는데 이것이 무슨 짓인가?”라고 야단을 치며 나가라는 것이다. 이 일 이후 우리는 예배당의 필요성이 절실해졌다. 어쨌든 우리는 새해를 맞이했다. 2월의 어느 주일에 아브라함 설교를 하면서 이제부터 여러분들은 김치만을 먹으면서지낼 각오 해라면서 작정 헌금을 시켰다. 그주일에 작정된 헌금이 23만 원인가 되었는데 지금 돈 가치로 하면 한 열 배인 230만 원 정도가 되지 않나 생각된다. 그때 우리 집사람도 결혼 패물을 모두 내놓았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예배처소를 마련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마침 3월 초에 부산 구덕산 기도원에서 그리스도의 교회전국 목회자 기도회가 있다는 공문을 받았다.

 

3) 구덕산 전국 목회자 기도회

나는 기도회에 참석하면서 첫날부터 금식하였다. 그 당시 나는 신학교 3학년으로 1년이나 더 다녀야 하는 막내였다. 기도회 프로그램은 식사한 후에는 모두 기도원 마루에 둘러앉아서 신약성경을 통독하였다. 당시 영남지방 교회들은 열심히 있어서 목회자들을 대접한다고 저녁에는 닭을 튀겨오고, 과일을 상자로 사 오고, 먹을 것을 풍성히 가지고 주의 종들을 섬겼다. 그즈음 고성주 목사님은 결혼을 막 하고 기도회에 참여하였는데 선배들이 결혼 턱으로 칠면조를 잡으라는 농담을 하기도하였고, 강남교회 김희만 목사님이 총무로 섬기고 있을 때였다. 그러나 나는 물 주전자를 들고 다니며 심부름을 할 뿐 금식을 하니 그 풍성한 음식은 그림의 떡이 아닐 수 없었다. 이렇게 하다 보니 모든 목회자가 영양교회의 사정을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월요일 오후부터 시작된 기도회가 수요일이 되었을 때였다. 설교 순서를 맡으셨던 이흥식 전도자님이 설교 도중에 갑자기 서면교회 김관평 전도자에게, “너는 어린 주의 종이 개척을 나가서 지금 예배처소를 위해서 첫 날부터 굶으면서 기도하고 있는데 그 고기와 과일이 목에 넘어가느냐?”고 호통을 치셨다. 순간 분위기가 완전히 얼어붙었다. 예배를 마치자 대선배 전도자님들이 나를 찾아와서 우리가 어떻게 해 주면 좋겠냐?”고 물으셨다. 나는 각교회에서 말씀을 전할 시간을 달라고 했다. 그 기도원을 내려오기 전에 영남지방 11개 교회에서 주일 낮과 저녁 예배에 말씀을 전할 일자를 선배들께서 확정해 주셨다. 첫 방문은 부산 청학동교회였는데, 나는영양에서 주일예배를 마치고 점심도 못 먹고1230분 버스를 타고 월전, 영덕으로 와서 다시 포항으로, 포항에서 부산으로 가서 가까스로 영도 청학동교회에 도착하였더니 저녁예배 찬송 소리가 들렸다. 30세도 채 안 된, 아무 경험도 없는 나는 성경 갈라디아서 66~10절을 읽고 때가 되면 거둡니다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면서, 여러분들이 마음 써주시고 정성을 모아 주시면, 영양에 교회가 하나 세워질 것이라고 담대히 전했다. 마치고 나서 사택에 오니, 박경동 목사님 사모님이 끼고 계시던 2.5돈 금반지를 나에게 주시면서 교회개척에 쓰라고 하셨다. 조금 있으니 재정부에서 25만 원 정도의 헌금이 들어 왔다고 알려주셨다. 나는 이때 한번 방문하는 교회가 25만 원이면 11개 교회면 일이 잘되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 후 울산, 강남 등 영남지방에 있는 교회들을 다 돌고 나니 300여만 원이 모금되었는데 이것은 기적이었다. 그때까지는 이렇게 모금을 해서 개척이나 건축을 하는 일이 우리 그리스도의 교회에서는 없었던 일이었다. 나는 땅 한 평을 사더라도 장래성이 있는 곳을 사야겠다는 생각으로 군청에 가서 지적도를 열람하는 등 나름대로 알아본 후, 당시 논이 있던 곳으로 어떤 선생님의 땅 80평을 310원에 매입했는데, 그때가 개척전도자로 지원해 간 이듬해 봄이었다.

 

2. 교회당 건축

이렇게 영남지방 교회 모금으로 땅을 구입하고 난 후에 그 땅에 기도할 수 있는 우리만의 공간을 위해서 24인용 군용 텐트를 사려고 부산 국제 시장에 갔는데 의외로 값이 만만치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또 그것을 영양까지 가져오는 일도 그 당시의 교통상황으로는 보통문제가 아니었다. 그래서 깊이 생각한 결과텐트 구입하는 돈으로 벽돌 몇 장이라도 쌓고, 슬레이트 몇 장이라도 올려놓자라고 마음을 굳혔다. 이번에는 서울에 있는 좀 규모가 있는 그리스도의 교회들 9 교회에 편지를 썼다. 그리고 봉투를 붙잡고 간절히 기도한 후 발송하였는데, 내용은 땅을 구입한 경위와 여기에 교회당을 지으려 한다는 말과 함께 모월 모일에 그교회를 방문하겠다고, 일방적으로 방문할 날을 적어 넣었다. 만약 원치 않으시면 연락을주시고, 그렇지 않다면 허락해주신 것으로 알겠습니다. 이렇게 편지를 보냈는데 화곡교회 한 곳에서 오지 않아도 특별헌금을 해서 보내주겠다라고 연락이 왔다. 그리고 놀랍게도 반송이 되어 오거나, 오지 말라고 한 교회는 없었다. 첫 번째 모금 교회로 수요일 오후 성산동교회를 물어물어 찾아갔는데, 공삼열 전도자님께서 갑자기 무슨 일로 왔느냐며 물으셨다.그래서 편지를 못 받으셨느냐고 하였더니 받기는 한 것 같은데 잊어버렸다고 하시면서 왔으니 저녁 시간에 말씀을 전하라고 해서 서울서 첫 모금 설교를 하였다. 이렇게 영양에서 서울로 모금을 다니면서, 동시에 교회 건축을시작하였다. 안동에서 구입한 모래를 8톤 트럭으로 시장통에 부려놓고 학생들과 손수레로 교회부지로 옮겨와 벽돌을 찍었다. 그해 6월에 김충기 선생님이 군에 입대하였지만, 그 당시 김은숙 학생(현재 대구 대명교회 사모)의 아버지 김기호 씨가 건축 일을 맡아 주었다. 그렇게 하여 학생들, 차점선 자매와 그 조카들, 박성진 형제와 함께 그해 가을에 기적적으로 30평의 예배당과 사택을 완공하고 바로 헌당예배를 드렸다. 이것은 아마 그리스도의 교회 역사상 가장 짧은 시간에 땅을 사서 예배당을 지은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고 대구교회의 심희선 전도자님을 모시고 헌당 기념부흥회를 열었다. 이것은 19791119~22일에 있었던 일이며, 내가 그곳으로 부임한 지 딱 1년 만에 이루어진 일이다.


 

1) 건축보다 힘든 전도

부산과 서울 교회 모금으로 기적적으로 땅을 사고 건물까지 지어 놓았으니 이제 남은 일은 전도해서 교회를 부흥시키는 일이었다. 축호전도를 한다고 집집마다 방문도 하고, 날마다 가방을 옆에 끼고 집집을 찾아다니면서 사람을 만나고 복음을 전했다. 그러다가 어떻게한 사람을 인도하여 데려오면 교회에는 어른 한 둘에 학생들뿐이니 한번 나왔다가 다시는 나오지 않았다.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너무 괴로워서 당시 영주 가는 길에 있던 갈분기도원에 가서 울며불며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였지만, 특별한 능력도 받지 못하고, 교회는 별로 부흥도 되지 않았다. 때 우리들은 매주 금요일마다 한번은 교회 앞의 통일동산에 올라가서 산 기도를 하고, 또 다음 금요일에는 현동 강가에서 강 기도라는 이름으로 번갈아 가면서 학생들과 기도운동을 하며 건축 후 3년이란 시간이 흘러갔다. 그때 나는 건축보다 어려운 것이 전도요, 사람을 채우는 것이라는 것을 몸으로 체험하였다. 그 시절 한번은 아무리 전도한다고 다녀도 새로 오는 사람이 없자 무력감에 빠지고 낙심이 되어서 서재 골방에 드러누웠다. 기도를 작정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실망이 되어 아무것도 먹지 않고 드러누웠다. 한 주간, 두 주간이 그렇게 흘러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정신은 말짱했다. 몸은 처졌고 계속 먹지 않으면죽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는데 그때 카세트로 선명회 합창단의 찬송 시편 23편을 들었다.순간 하나님이 나의 목자신데 내가 이렇게 낙심에 빠져있어서 안 된다라는 생각이 들어다시 기운을 차렸으나, 여전히 교회는 달라지지 않았다. 그런데 그 시기에 내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새벽기도는 아침 해가 떠오를 때까지 하였고, 성경을 참 많이도 읽었다. 그 시기에 약 20여 번을 읽은 것 같다. 그리고 신학교 다니면서 사놓았던 책이 한 5~6백 권이 있었는데 그것을 몽땅 다 읽었다. 당시는 크리스천 신문한 부 외에 책 한 권 사볼 형편이 되지 않았기에 가지고 있던 책과 성경을 읽고 또 읽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시기의 하나님은 내가 당신의 종이 될 수 있는지, 3년 달아 보시면서 내공을 쌓는 훈련을 시키신 것 같다.

 

결론

 

에피소드를 하나 말씀드리며 이야기를 마치려 한다. 당시 사택을 교회 뒤편에 붙여서지었는데 문을 열면 바로 바깥이었다. 하루는 자고 일어나보니 누군가가 내 구두를 훔쳐 가버렸다. 급한 대로 흰 고무신을 사서 신었는데 그때가 한겨울이어서 발이 시렸지만 아무렇지 않은 듯이 지냈다. 얼마 후 집사람이 영양읍 내의 오일장이 서는 날에 나가서 발목에 털이 붙어있는 할아버지들이 신는 신을 사 왔다. 구두는 살 수 없고 한겨울에 고무신은 추우니 배려를 한 것이었다. 얼마 후에 영남지방 교역자 모임이 있어서 그 털신을 신고 부산에 갔더니 박경동 목사님께서 보시고 당신의 구두를 한 켤레 주셨다. 내 발에는 좀 컸지만, 그 구두로 한겨울을 보냈다. 그 후 나는 42년이나 지난 지금까지 흰 고무신을 한 켤레 사 두고 신는다. 지금도 그때를 잊지 않고 살려고 신발장에는 흰 고무신 한 켤레가 지금도 있다. 그때를 생각해 보면 지금의 나는 큰 부자다. 구두도 몇 걸레나 된다. 나는 오늘도 새벽에 영양교회를 위해서 기도하였다. 하나님은 아무것도 모르는 천둥벌거숭이 같은 나를 영양에서 4년 동안 다듬으시고, 빚으셔서, 40년 사역을 하게 하셨다. 아마도 그 시절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앞으로 기회가 된다면 내가 신학을 하게 된 일이나, 어떻게 22년씩이나 선교를 계속하게 되었는지 그 사연과 성령의 역사를 말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싶다. 모두에게 평안이 가득하시길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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