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평그리스도의교회 | 박상철 | 2020-12-2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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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제주는 실제 역사와는 별개로 자체적인 개국신화를 가지고 있다. 제주 토착민들에게는 이런 신화적 접근이 역사보다 가깝고 훨씬 더 그들의 삶과 맞닿아 있다. 제주시에 위치한 삼성혈(사적 제134호)은 제주 원주민의 발상지로 고을나. 양을나, 부을나의 세 신인(神人)이 솟아났다는 웅덩이다. 기록에 따르면 세 신인은 가죽옷을 입고 수렵생활을 하며 살았는데, 어느 날 자줏빛 나무함이 동쪽 바닷가에 떠밀려와 열어보니 벽랑국의 세 공주와 송아지, 오곡 씨앗이 들어 있었다. 세 신인은 공주를 하나씩 취하여 연못에서 목욕을 하고 혼례식을 올렸고, 오곡 씨앗을 심어 농경생활을 시작했다. 그 나무상자가 발견된 온평리 바닷가를 ‘쾌성개’라 부르고, 상자가 떠오른 곳을 황금노을이 내렸다 하여 ‘황루알’이라 하며, 목욕을 하고 혼례를 치룬 곳을 ‘혼인지’(제주기념물 제17호)라 칭하여 신당을 세웠다. 온평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흔히 ‘혼인지 마을’로 불리는데 주민들의 의식 속에 혼인지가 미치는 정서적 의미가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혼인지에서는 매년 성대한 유교식 제의가 시행되고 있고, 제주자치도는 공적 지원을 통해 2010년부터 ‘혼인지 축제’를 제주의 대표적 문화행사로 격상 시켰고, 올해까지 9회를 치루는 동안 행사규모와 재정적 지원은 지속적으로 확대되고 있는 실정이다.
온평 그리스도의 교회의 역사 신화, 제의, 뿌리 깊은 우상적 토양, 토착민들의 정서적 기반 등... 어느 것 하나 녹록치 않은 현실 위에 복음의 침투가 시작되었다. 1971년 7월10일~20일, 말콤 E.파수리 선교사가 대표로 있던 ‘그리스도의 교회 선교회’ 주체로 온평국민학교(현 온평초등학교)에서 전도와 성경을 가르치는 복음전도대회가 개최되었고 이것을 계기로 제주에 첫 그리스도의 교회가 설립되었다. 뿌리 깊은 우상의 땅 온평리에 복음의 씨앗이 떨어진 첫날을 기념하여 온평 그리스도의 교회의(이하 온평교회) 공식 설립일은 7월 10일이다.
교회 설립 초기에는 사정상 담임교역자 없이 순회전도자들의 도움을 받아 예배를 드렸고, 3개월이 지난 1971년 10월 10일에서야 인근 시흥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사역하던 양경주전도자가 부임하여 초대교역자로서 6개월간 사역하였다. 이어 1972년 4월 13일 박보민전도자가 2대교역자로 부임하여 1년 7개월 동안 사역하였고, 이 시기에 1973년 5월 4일 ‘제주도 남제주군 성산면 온평리 819번지’(현 교육관) 농지(田) 20평(66.12㎡)을 매입하게 된다. 이때 당시 초등학교 6학년으로 주일학교에 출석하기 시작한 강영란 자매는 현재까지 46년 동안 교회를 지키며 온평교회 역사의 산 증인이 되었고, 연애시절 교제하던 현 남편을 전도하여 지금은 장로의 가정으로 본교회의 신실한 신앙의 본이 되고 있다. 교회는 1973년 12월에서 1976년 6월까지 약2년6개월 동안 담임교역자가 없는 어려운 처지에 놓이기도 했는데, 이는 당시 제주지역교회의 전도자 수급과 재정적 여건이 매우 열악했음을 보여주는 가슴 아픈 현실이기도 하다. 그러나 오창건전도자와 오익환전도자 등 이웃했던 교회 전도자들의 순회설교와 헌신으로 위기상황을 잘 견뎌낼 수 있었고, 어려운 여건에서도 성도들은 1974년 6월 24일 기존 매입했던 농지 위에 18.5평(61.16㎡) 규모의 작은 예배당을 신축하여 봉헌했다(현재는 리모델링 공사 후 교육관으로 사용). 그 후 1976년 6월 30일에서 1977년 7월까지 조병근전도자가 3대교역자로 부임하여 사역하였고, 1977년 9월에는 정영진전도자가 4대교역자로 부임하여(이임 기록 없음) 사역했다. 이어 1978년 1월 30일에서 1979년 6월까지는 조순호전도자가 5대교역자로 부임하여 사역했고, 1979년 9월에는 전성엽전도자가 6대교역자로(이임 기록 없음), 1981년 11월에서 1983년 4월까지는 전성철전도자가 7대교역자로 부임하여 사역하였다. 이어 1984년 8월에는 김권태전도자가 8대교역자로(이임 기록 없음) 부임하여 사역했고, 1985년 4월에서 1987년 5월까지는 김옥성전도자가 9대교역자로, 1987년 12월 7일에서 1997년 8월 31일까지는 임학균전도자가 10대교역자로 부임하여 약 10여 년간 사역하였다. 이 시기에는 1989년 11월 6일 임학균전도자를 초대위원장으로 하는 ‘교회의 사택 건축 추진 위원회’가 발족되었고, 그로부터 약 5년여 만인 1994년 8월 17일 ‘제주도 남제주군 성산읍 온평리 822-1번지’(현 위치)의 대지 194.8평(644㎡)과 동 대지상의 주택 20평(66.12㎡), 창고용 건축물 3개동을 매입하는 계약을 체결하게 된다. 당시 해당 토지와 건물의 매입금액을 교회 형편상 일시금으로 처리할 수 없어 약 4차례에 거쳐 지불하게 되었는데, 1995년 1월 26일 등기 이전을 완료하기 까지 약 5개월 동안 담임교역자와 성도들이 감내했던 눈물어린 기도와 헌신은 오늘 온평교회의 귀한 영적자산이 되고 있다. 해당 토지에 예배당이 건축되기까지는 7년이 더 소요되었는데, 11대교역자로 부임한 전신호전도자(1997년 9월 21일~2004년 4월 6일까지)를 중심으로 2002년 4월에 30평의 새 예배당을 건축하기로 결정하고 당해 5월 21일에 공사를 시작하여 7월 23일 감격적인 입당예배를 드리게 된다. 그 시간과 과정 속에서 담임교역자와 성도들이 함께 인내하며 나누었던 눈물과 수고에 대하여 일일이 기록하지 못함이 아쉽지만, 이 모든 일을 주관하시고 허락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으로 갈음한다. 그 후 2004년 4월 8일에서 2009년 4월까지 하봉오전도자가 12대교역자로, 2009년 4월부터 2014년 1월 26일까지 조진현전도자가 13대교역자로 부임하여 사역했다. 2014년 1월 26일부터 현재까지는 박상철전도자가 14대교역자로 부임하여 사역하고 있다. 온평그리스도의 교회의 사역 온평그리스도의 교회가 설립된 70년대는 교회가 지역사회에 해줘야 하고 또 할 수 있는 일도 많았다. 80년대와 90년대를 거쳐 2000년 초반까지만 해도 그랬다. 교회는 성경학교를 통해 재미있고 이색적인 프로그램을 제공하여 마을의 아이들에게 다가갔고, 어르신들을 초청하여 식사와 달란트를 제공하는 자리에는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졌다. 어려운 형편에도 온평초등학교에 매년 보냈던 소정의 장학금은 그들에게도 귀했다. 현재 온평리 마을 ‘열운이축구회’는 온평교회의 축구모임으로부터 시작됐을 정도로 교회는 마을에 줄 것이 많았고, 농사와 바닷일 외에는 관심 둘 여유조차 없던 이들에게 진심으로 다가갔던 교회와 성도들의 수고와 헌신은 오늘까지도 마을 내에서 교회에 대한 좋은 인식으로 그들 속에 남아있다. 그렇게 얻은 열매는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귀하다. 지금은 어떨까? 야심찬 성경학교의 프로그램으로 스마트폰과 게임에 쏠린 아이들의 관심을 되찾아 오기에는 역부족이다. 스마트폰과 게임의 세계에는 도시와 농촌의 경계가 없다. 식사를 대접하고 달란트를 제공해도 사람들은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온평교회가 위치한 제주 동부지역의 교회들에는 각 교회마다 한 해에만 서너 팀의 대형교회 단기선교팀이 방문하는데(많을 때는 10개 팀도 온다), 그들의 주요사역이 마을봉사와 식사대접을 통한 전도와 교회 알리기다. 해당 교회의 목회자들을 만나 대화해 보면 이제는 더 이상 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는 반응이 지배적이다. 이유는 교회가 아니라도 시골마을에 잔치와 봉사를 해 주는 기관과 봉사단체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미 교회보다 더 부유하고 우리보다 더 많은 것들을 누리며, 이런 식으로 섬김 받는 것이 체화되어 있다. 이런 현실적 문제를 진단하며 온평교회의 사역은 보다 본질적인 측면에 중점을 두고 있다. 교회가 그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것은 지양하는 대신(그동안 해왔던 장학금지급, 마을행사 지원, 교회 자체적 ‘형제들의 모임’을 통한 마을 청소 등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성도들의 영적성장을 도모하는 일에 우선적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의견에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구원의 확신 없이, 구원의 영광과 기쁨도 모른 채 전도행사에 참여하는 이들이 있었기에 그 행사를 중단하는 대신, 성도들을 말씀으로 성도답게 세우는 일에 더 집중했고 5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여전히 진행 중이다. 비록 더디긴 하지만(5년이 되어가지만 실제 매우 더디다) 성도들의 삶에는 분명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구원을 알고 구원에 합당한 삶을 위해 각자의 자리에서 자기의 분량만큼 애쓰고 분투하는 일에 우리는 함께 기도하고 서로 응원하며 자라가고 있다.
성도들의 삶에 작은 변화들이 시작되자 그들 손에 이끌려 교회에 출석하는 이들이 생겨났다. 확신하건대 부족하더라도 변화가 시작되자 이웃을 향한 전도의 문도 열렸다. 구원의 영광과 가치를 알고 확신하는 성도가 한 영혼을 향한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게 되었을 때, 자원하여 가장 가까이 만나는 이들의 영적안위부터 걱정하게 되었고 그들의 구원을 위한 수고를 기꺼이 실천했다. 더딘 현실에 지칠 때면 하나님은 당신의 방식대로 전도대상자들을 보내 주기도 하셨는데, 불심이 지극했던 어떤 부부를 보내셔서 2015년 6월 7일 침례를 받은 이후 3년 만에 교회의 헌신적 일꾼으로 세우기도 하셨다.
온평교회는 해마다 바뀌는 표어가 없다. 대신 로마서 1장 16절 말씀이 그 자리를 채우고 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교회의 교회됨, 성도의 성도됨 외에 다른 목표를 설정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몇 명을 전도하고 우리 교회가 몇 명을 달성하고...’ 신약교회 성도들에게 그런 식의 성장목표와 선교 전략 같은 것은 없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했고 사랑하고 섬겼다. 복음에 합당한 그들의 삶은 세상에는 없는 것이었고 그것이 곧 복음의 전략이 되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사도행전 2장 44~47절) 하나님은 복음과 잘 어우러진 그들 삶을 토대로 하나님 자신의 교회에 믿는 자들을 더하셨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본질에 대한 관심과 돌이킴에 있어 항상 선구자적 위치에 있어 왔다. 그럼에도 우리의 규모가 작은 것은 다만 세상에 가려 사람들이 그것을 외면했기 때문일 것이다. 충성했다면 작은 것은 흠이 아니라 그것 또한 상급이다. 사람들의 인기를 얻어 많은 사람들을 모으기 위해 본질을 떠나 노선을 변경하는 것이 어리석은 것임을 그리스도의 교회 모든 지체들은 알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좁고도 협착한 길을 자원했다. 하나님의 손에 쥐어진 복음의 능력을 믿고 복음의 본질에 더 집중한다면 뒷일은 하나님께 맡길 일이다. 더디더라도 그 길을 가야하고, 드러나지 않아도 그 길은 외면할 수 없는 길이다. 교회가 할 수 있는 역량은 다 하되 보다 본질에 집중해야 하고, 마땅히 해야 할 사명은 다하되 결과는 제발 하나님께 맡겨야만 한다. 처음 20명이 채 되지 않았던 온평교회의 출석인원이 지금은 30명이 채 되지 않는다. 어떤 이들에게는 적은 변화이겠지만 그 시간동안 하나님은 분명 우리와 함께 하셨고, 우리 가운데서 당신의 능력을 행하셨다. 더 좋은 시설과 프로그램을 좇아간 어떤 이들의 수평이동으로서의 부흥이 아니라,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살리는 성경적 성장을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셨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하다. 약 10여분 거리에 이웃해 있는 교회 중 하나는 건축을 통해 성장한 교회가 있다. 젊은 목회자가 시골교회에 부임하여 교회를 번듯하게 건축하고 편의공간을 그럴듯하게 마련하자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속을 들여다보면 육지에서 이사 온 교인들의 수평이동이 대부분이다. 안타깝게도 그 목회자는 지금도 공공연히 ‘교회 건물이 전도 한다’는 주장을 확신 있게 내세운다. 이웃의 또 한 교회는 젊은 목회자 부부가 11년간을 헌신적으로 사역했으나 장년 성도는 5,6명에 불과하고 어린아이들과 학생들 중심으로 어렵게 목회사역을 감당하고 있다. 재정적 자립은 아직도 요원하지만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책무가 있기에 감사가 있고, 자라나가는 아이들이 있기에 꿈이 있다. 그들은 어려운 여건에서도 변함없이 황소걸음을 걷고 있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 짐이라 하신지라”(고린도후서 12장 9절) 하나님께서 온평교회에 요구하시는 분량의 크기를 다 알 수는 없지만 우리 교회가 감당해야할 본질적 사명에 충성을 요구하셨기에 변함없이 성도들과 함께 그 길을 계속해서 걸어가리라 다짐한다. 2017년 5월 14일 온평교회는 교회설립 46년 만에 두 명의 장로를 세웠다. 제주지역 그리스도의 교회 역사에 이름을 올린 첫 장로직이기에 감격스러운 일이지만, 뒤집어보면 제주지역 9개 그리스도의 교회가 성경이 말하는 장로의 직분을 얼마나 신중하고 귀하게 여기고 있는가를 대변해 주는 대목이다. 30명이 안 되는 교회에서 장로 두 분을 세운다고 하니 타 교단 여러 목회자들이 의아해 한다. 그들의 교회는 교단법에 따라 30명당 1명의 장로를 세울 수 있고, 2명의 장로를 세우려면 50명 이상은 되어야 한단다. 그런 법이 성경에는 없고, 성경은 교회에 복수장로를 명하셨다 하니 더 이상 질문하지 않는다. 타 교단 목회자들과 교제할수록 내가 여기 그리스도의 교회에 있다는 사실이 고맙다. 성경을 해석하는 관점이 우리 안에서도 조금씩 다를 수 있지만 그래도 우리는 본질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아브라함을 만나셨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하나님은 ‘온평’이라는 생소하고 이름 없는 우상의 땅에 교회를 세우셨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창세기 12장 2절) 하나님이 세우신, 오직 하나님만이 완성하실 수 있는 이 위대한 약속 위에 우리는 서 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이 2000여년의 시간을 지나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 것처럼, 이제 고작 46년을 걸어온 온평교회의 여정은 앞으로 가야할 분량이 더 많다. 온평교회의 46년의 여정 가운데 우리는 외적으로 강했던 적이 한 번도 없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일꾼들을 외면하신 적이 없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우리가 서 있는 강단에서 성도의 삶이 세상에서는 나그네라 소리쳐 외치면서도 정작 나그네처럼 살지 못하는 우리는 이제 참된 나그네의 옷을 입어야 한다. 10만 명 모이는 교회나 10명 모이는 교회나 똑같이 충성했다면 상급은 같다. 달란트를 맡긴 자에 대한 책망은 불충에 대한 것이지 다섯이냐 둘이냐 하나냐의 문제가 아니다. 주의 영광된 사명을 맡은 우리가 힘든 것은 어쩌면 다섯에 대한 우리의 헛된 동경 때문이 아닐까. 하나라도 괜찮다. 바울은 에바브로 디도 편에 서신을 써 보내며 빌립보교회를 향해 이렇게 전한다.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바울은 목회의 현장에서 비천함과 배고픔을 경험했으나 동시에 자족함이라는 영적 풍요를 누렸다. 억지로 품은 마음가짐에서 얻은 자기 위로가 아니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를 붙들었던 그의 삶의 실제였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에베소서 1장 3~6절) 바울은 감옥 같은 현실에서 복음의 본질을 붙잡은 자답게 현실을 넘어 그걸 하고 있었다. 그리스도의 교회의 토양은 외적으로는 작고 협착해 보이지만 자족함이라는 영적 측면에서 본다면 보다 가능성 있고 풍요로울 수 있다. 희망은 어둠속에서 보는 것이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본질을 향한 애씀이 있다면 거기 희망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 온평교회와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불러 세우신 이 자리에서 하나의 달란트에 하나를 남기기 위한 충성에 매진할 것이다. 그것이 우리교회의 사명이며 세상이 아닌 오직 우리만이 감당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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