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우정을 만들어가는 길 | 하용수 | 2021-01-1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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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상 23:14-18 참된 우정을 만들어가는 길 1. 교회생활하면서 가장 큰 기쁨 중에 하나는 하나님안에서 좋은 동역자를 만나 함께 우정을 나누는 일입니다. 저는 많은 권사님들과 집사님들 그리고 모든 교우들과 신실한 믿음안에서 좋은 우정 만들어가길 소망합니다. 시인 구상 선생님과 화가 이중섭의 우정도 많은 사람에게 회자될 만큼 유명합니다. 그 중에 한 일화가 있는데, 어느 날 구상 선생이 병원에 입원해 있는데, 이중섭이 병문안 오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다른 사람은 다오는데, 이중섭만 안오는 것이었다. 그러자 섭섭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아주 늦게 이중섭 선생이 찾아왔답니다. 구상선생이 섭섭한 마음을 감추고 왜 이렇게 늦었냐고 핀잔을 주었습니다. 그러자 이중섭선생이 미안하네. 내가 빈손으로 올수가 없어서, 하면서 말끝을 흐리면서 손에 들고 온 것을 구상에게 내밉니다. 이것이 무엇인가? 한번 풀어보게. 구상은 이중섭이 내민 꾸러기를 풀자 눈이 휘둥그래졌습니다. 그것은 천도 복숭아를 그린 그림이었습니다. 어른들 말씀이 이 복숭아를 먹으면 무병장수한다고 하지 않던가? 그러니 자네도 이걸 먹고 어서 일어나게나. 구상은 한동안 말없이 말을 잊었다고 합니다. 사실, 그 때 이중섭은 과일 하나 사먹을 돈이 없었던 어려운 시절이었습니다. 과일대신 과일그림을 그려오느라 늦게 왔다고 생각되니, 가슴이 저려 온거죠. 그리고는 살며시 이중섭의 손을 꼭잡은 것이지요. 가난한 화가 이중섭과 시인 구상의 우정이 뼈저리게 느껴지는 순간이지요. 2. 오늘 우리가 생각 해 볼 성경은 믿음의 사람들이 가져야 할 참된 우정이란 어떤 것인가를 잘 보주는 이야기입니다. 성서본문의 배경은 이런 것입니다. 다윗이 사울의 눈을 피해 유대 전역으로 떠돌아다니는 비참한 상황 가운데의 이야기입니다. 본문에는 그것을 14절의 광야의 요새에도 바위산에도 머물렀었고 십광야-사람들이 잘 살지 않는 헤브론 남쪽의 산지비탈의 초원지대, 도망자들이 쉽게 숨을 수 있는 곳-에도 머물렀다고 보도합니다. 한 마디로 가련한 상황인 것이지요. 그런데 다윗이 사울 왕의 아들인 친구 요나단을 십광야 수풀에서 만납니다. 이 때 요나단이 다윗을 위로한 이야기가 오늘 본문의 정황입니다. 사실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을 생각해볼 때, 다윗보다 요나단이 훨씬 더 멋진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두 사람의 우정은 요나단에 의해 유지된 측면이 훨씬 많아 보입니다. 무엇때문입니까? 생각해봅시다. 일단 요나단은 현직 왕의 아들입니다. 요나단은 가만히 있기만 해도 왕위 일순위입니다. 요나단의 입장에서 보면 가만히 있어도 자기가 왕이 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도망치는 다윗과 우정을 굳이 쌓을만한 이유도, 도와줄 이유도 없는 것이지요. 한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한 나라의 왕이 되는 권력에 대한 욕구도 있을 수 있는 것이지요. 요나단은 기브아에 있는 블레셋 사람들의 수비대를 물리친 일로 -삼상13:2-에 처음 언급됩니다. 그 뒤에는 무기당번과 함께 기브아에 있던 사울의 군대를 이탈하여 믹마스에 진을 치고 있던 블레셋 군대의 초소를 빼았었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뒤를 따라서 블레셋 사람들을 공격하여 물리칩니다. 이런 정황으로 보면 요나단도 다윗과 같은 용맹을 가진 왕의 아들이었음을 증거합니다. 이런 요나단이 지금 아버지 사울이 죽이려는 다윗을 십 광야 수풀에 직접 찾아가는 것이지요. 요즘 세상에서는 물질, 권력이나 자리에 대한 욕심 때문에 비정하게 오랜 시간 함께 하였던 친구들이나 동료를 내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사실 과거 우리 역사속에서도 궁중암투 같은 것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성경에도 자리 때문에 모반과 배신으로 인해 얼룩진 역사가 북이스라엘 가운데 얼마나 많았습니까? 권력에 대한 욕구는 무시할 수 없는 인간의 가장 큰 욕망입니다. 거창하게 정치권력뿐 아니라 삶 가운데서 작은 힘이라도 타인을 억압하고 짓누려는 갑질의 형태가 얼마나 많은 지 모릅니다. 니체는 이런 권력에의 의지가 사람이 가지는 가장 큰 욕구라고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더 나아가 짜라투스투라는 말했다에서는 “생명에의 유지, 나는 그곳에서 항상 권력의 의지를 발견하였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이런 근본적인 욕구를 가진 인간의 모습속에서도 요나단은 너무나 다르게 멀리까지 찾아가 은둔하며 목숨붙이며 간신히 사는 다윗에게 다가가 네가 장차 이 나라의 왕이 될것이라 말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하나님앞에서 우정의 언약을 맺지 않습니까? 너무나 멋진 모습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바라보면서 우리에게 참된 우정을 갖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기 원합니다. 첫째, 참된 우정에는 반드시 믿음의 격려가 필요합니다. 본문을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성경으로 읽어보면 이렇습니다.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호레스(히브리어 나무, 숲의 지역)로 다읫을 찾아와서 하나님안에서 그를 위로하며 말했다. ‘절망하지말게 내 아버지 사울은 자네에게 해를 입힐수 없네. 자네는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이고 나는 자네 곁에서 도울 것이네 네 아버지고 그것을 알고 있다네 그리하여 두 사람은 하나님앞에서 언약을 맺었다. 다윗은 호레스에 남고 요나단은 집으로 돌아갔다”라고 말합니다. 위기에 처한 다윗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아마도 격려와 위로 일 것입니다. 그래서 요나단이 다윗을 만나자마자 처음 한 말이 두려워하지 말라라는 말이었습니다. 다윗이 가장 듣고 싶은 말이 이것이 아니었을까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방안에 모여있던 제자들에게 하신 처음의 말씀이 평안하라입니다. 같은 위로의 말씀이지요. 두려움에 떠는 자에게 던지는 위로의 말은 이런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는 위로를 착각하면 안됩니다. 위로의 말은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리고 거기에 알맞은 말을 해야하는 것이지요. <말기암환자들을 돌보는 호스피스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대상은 의과대학생, 간호학과 학생, 내과전문의, 외과전문의, 암전문의, 정신과의, 간호사였습니다. 환자가 나는 이미 손을 쓸 수 없는 상태입니까? 라고 묻는 다면 의료전문가인 당신은 어떻게 대답할 것 입니까? 다섯 개의 선택지 가운데 하나를 고르시오. ① “그런 말씀 마시고 조금만 더 힘내세요”라고 격려한다 ② “그런 것까지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라고 말한다 ③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라고 돼 묻는다 ④ “그 정도로 많이 아프시면 그런 생각도 들 수 있어요”라고 동정한다. ⑤ “이미 끝났어 이런 기분이 드시는군요”라고 대답한다. 정신과 전문의를 제외한 의사와 의대생 대부분은 1번을 간호사와 간호학과 학생 대다수가 3번을 선택했다 그러나 정신과 의사들은 거의 대부분 5번을 선택하였다 5번은 얼핏 보면 응답자가 환자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이것이 환자의 말을 가장 확실하게 받아들였을 보여 주는 대답이라는 것입니다. ‘듣기’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귀를 기울이는 단순한 행위가 아니다 말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듣기를 본다면 다른 사람이 자신의 말을 받아들였다는 확실한 사건이다. 이 과정을 거쳐야 환자는 입을 열기 시작 한다 그리고 환자는 자신을 감싸고 있는 정체모를 불안감에 실체가 무엇인지를 듣는 사람 즉 의사에게서 찾기를 바란다. 원인을 확실히 밝혀내는 것만으로도 불안이 해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만약 그렇지 않더라도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내는 경우가 많다. ‘듣기’ 타자의 말을 받아들이는 것이 말하는 이에게 자기의 장을 열어주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가만히 이야기를 들어주는 일 그 행위에서 어떤 힘을 느끼게 된다. - <듣기의 철학> 가운데서 본문에서 다윗은 요나단의 말을 듣기만 하지요. 다윗의 이야기는 소개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요나단의 말이 불투명한 자신의 삶에 실망하고 좌절이 깊어지는 상황에서 이 말을 들음으로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의 언약으로 까지 나아가게 된 것이지요. 더 나아가 하나님 앞에서 요나단이 준 격려의 실체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너의 삶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음을 알게 해 준 것입니다 17절에 말이 그런 것입니다 내가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 속에는 요나단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는 것이죠 그런 친구인 다윗이 먼저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점 양해 표현으로 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자기 민족의 역사속의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그 손길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세우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꿰뚫고 있었던 것이지요. 다윗이 블레셋에 장수 골리앗을 물리치자 사람들은 어린 다윗의 위대함을 찬양하였습니다. 심지어는 자기 아버지 사울 보다 더 큰 사람으로 칭송 합니다. 또한 사무엘상 18장 5절에 보면 다윗은 사울이 보내는 것마다 가서 지혜롭게 행함에 사울이 글을 군대의 장으로 삼았더니 온 백성이 그를 합당히 여겼고 사울의 신하들도 합당히 여겼다라고 보도합니다. 그냥 골리앗 한번 물리쳐 왕이 된 것이 아니지요. 요나단은 이러한 사실들을 목격하면서 자기 아버지 서울처럼 기분 나빠 하기보다는 그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와 왕궁에서 교제하다가 아마도 그의 됨됨이를 알고 하나님의 깊으시고 선하신 뜻을 알게 된 것이죠. 그래서 기꺼이 다윗에게 왕위를 양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요나단에게 이러한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지혜가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런 뜻을 몰랐다면 이런 결정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왕이란 쉽게 양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양보한다고 되는 것도 아닙니다. 나중에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지만 서울과 요나단이 죽은 뒤에도 처음부터 이스라엘 전역의 왕이 되지 못합니다. 사울왕의 가문과 추종자들이 다윗의 왕됨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한참 싸웠습니다 사무엘하 3장 1절에 보면 사울과 다윗의 집 사이에 전쟁이 오래매 다윗은 점점 강하여지고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하여 지니라 보도합니다. 다윗이 30세에 유다의 왕이 되지만 완전하게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된 때는 서른 일곱 살입니다 7년 동안 싸운 것이죠. 요나단은 이 모든 것을 생각하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그것은 다윗의 삶이 하나님의 섭리 속에 있음을 안 것이죠. 그리고 지금의 이 모든 어려움을 뚫고 너는 왕이 될 것이다 라고 격려 한 것이죠. 우리의 격려는 이렇듯 믿음 안에서 이루어져야합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선하신 역사를 알기에 우리는 격려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격려의 근원이 그래서 내가 아니라 하나님인 것이죠.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섭리를 알고 있기에 요나단은 눈앞에 권력의 욕심보다는 친구 다윗과 우정을 택하고 그에게 격려를 보내는 것이죠. 오늘 어려운 삶의 형편에 처해 있는 분들 갑작스런 아픔을 겪는 이들에게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도록 용기를 주고 격려해 주시기 바랍니다. 작가 조지 애덤스는 격려를 영혼의 산소라고 하였습니다. 생명 있는 삶은 믿음의 격려가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두 번째, 참된 우정을 쌓아가는데 필요한 것은 서로가 신의 있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본문 속에서 두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언약을 맺습니다. 그 언약은 다윗이 왕이 될 것이고 자기는 그 다음이라는 것이죠. 여러분 다윗과 요나단의 나이 차이가 얼마나 될까요? 이스보셋이 사울의 둘째 아들인데 그는 40세 왕이 되었고(삼하2:10) 같은 시기에 다윗은 헤브론에서 30세에 왕에 되었다고 말합니다(삼하5:4). 그렇다면 이스보셋의 형인 요나단과 다윗 의 나이차는 보여 주는 것만으로도 따지면 11살 이상이 된다는 결론이 나는 것이죠.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은 세상에 관습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사무엘상 18장 34절에 보면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여 더불어 언약을 맺었으며 요나단이 자기가 입었던 겉옷을 벗어 다윗에게 주었고 자기의 군복과 칼과 활가 띠도 그리하였더라”고 소개합니다. 정리해볼까요 요나단은 다윗보다 나이가 많을 뿐만 아니라 옷과 무기를 넘겼습니다. 옷은 고대 사회에서 신분을 나타내는 중요한 표시입니다. 왕자가 신하와의 형제를 맺는 것도 드문 일입니다. 무엇이 요나단으로 하여금 이런 일들을 가능케 한 것일까요? 무엇이 이러한 다윗과의 우정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일까요 저는 요나단의 다윗이 대한 신의라고 밖에 설명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주 배우 송강호가 로카르노 영화제에서 공로상격인 ''엑설런스 어워드'(Excellence Award)를 받았다. 올해로 72회를 맞은 로카르노영화제(8월 7일~17일)는 스위스 이탈리아어권인 로카르노에서 개최되는 행사로, 이 영화제에서 아시아 배우가 이 상을 받는 건 송강호가 처음이다. 송강호는 인사말에서 “특히, 여기까지 같이 해준 나의 한평생 영원한 동지이자 친구이고 대한민국의 자랑스런 위대한 예술가 봉준호 감독께 이 트로피의 영광을 바친다”라고 인사했다. 그러자 봉감독은 "항상 형님의 어떤 영화적 에너지에 의지해서 영화를 찍어왔던 것 같다"며 "4편의 작품을 함께 할 수 있었던 기쁨과 영광이 있었는데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 번 감사드리고 싶고, 아까 화면에도 나왔지만 그 4편의 작품들이 강호선배가 없었다면 완성할 수 없었던 영화들이어서 너무 감사를 드리는 마음이고, 오늘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드린다"라고 전했다. 1997년 당시 무명의 연극배우였던 송강호는 영화 제작사 우노필름(현 싸이더스의 전신)의 사무실을 찾게 되었다. 영화사가 준비중인 차기작의 단역 배우를 뽑는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달려온 것이다. 어려운 경제적 상황에서 단역 역할이라도 간절한 상황. 초조하게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던 송강호에게 영화의 조감독이었던 한 남성이 수줍게 다가와 인사를 건냈다. "<초록물고기> 잘 봤습니다, 선배님!" 송강호는 연극배우로 활동하며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초록물고기>의 조연으로도 출연했는데, 특히 <초록물고기>에서 송강호가 연기한 양아치 판수는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조연 캐릭터중 하나였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대중과 영화 관계자들에게 덜 알려진 그였는데, 먼저 자신을 알아봐 준 젊은 조감독의 인사가 너무나 고마웠다. 하지만 송강호는 그날 오디션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지만 관계자들이 보기에 부족했다는 점도 아쉬웠지만, 가장 서운한 점은 그 아무도 탈락의 사유를 이야기해주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당시 영화판에서는 그러한 인식이 부족했다. 그 때문에 무시당했다고 생각하며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그에게 장문의 삐삐 녹음이 도착한 것을 확인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떨리는 마음으로 메시지 내용을 확인하게 된다. 메시지의 주인공은 회사에서 자신에게 인사를 건넨 조감독으로 자신의 연기를 정말 인상 깊게 봤다는 말과 함께 어떠한 이유로 함께 작업하지 못하게 되었는지 송강호에게 차분하게 설명했다. 그리고 메시지의 마지막에 다음과 같은 평생에 남을 말이 담겨져 있었다. "언젠가 꼭 좋은 기회에 다시 뵙고 싶습니다." 어찌 보면 형식적인 인사일 수도 있지만, 송강호에게 그의 메시지는 너무나 신선한 충격이었다. 한낱 오디션에 탈락한 단역 배우에 불과한 자신에게 진심 어린 메시지와 인사를 전한 그 젊은 조감독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송강호는 다음에 출연한 작품 <넘버 3>로 충무로의 기대주가 되었고, 얼마 안 가 국민 배우로 등극한다. 여전히 무명시절 당시 자신에게 메시지를 남겼던 조감독을 잊지 않았던 그는 3년 후 <플란다스의 개>를 만든 봉준호가 바로 그 젊은 조감독임을 알게 되어 반갑게 인사를 한 것이고, 그로부터 2년 후 그가 보낸 시나리오를 받고 출연을 결정하게 된 것이다. 아무도 알아봐 주지 않았던 시절 자신에게 깍듯이 예의를 갖춘 그 젊은 조감독은 인성 뿐만 아니라 훌륭한 예술적 감각까지 지닌 천재적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송강호는 5년 전 그가 자신에게 남긴 마지막 메시지의 끝 문장에 응답해야 할 때가 왔다고 결심하며 그의 작품에 출연을 승낙한 것이다. 그 작품은 바로 2003년 최고의 흥행작이자 역대 한국 영화 최고의 작품으로 손꼽히는 <살인의 추억>이었다. 2019년 <기생층>을 통해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이라는 역사적인 순간을 탄생시켰다. 상패를 받은 봉준호 감독은 당시 전 세계 언론이 보는 가운데 송강호 앞에 무릎을 꿇고 그에게 상패를 건냈다. 길었지만, 절망스럽고 힘든 상황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깊이 위로하고 함께 그 시간을 보낸 친구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힘과 소망이 되며 신의가 쌓여지는 것이지요.” 요나단의 우정이 믿음과 신의 안에서 기억 되어져야 하는 것은 그는 하나님의 섭리와 뜻을 바탕으로 우정을 만들어갔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그로 하여금 욕심내지 않고 진실 되게 삶을 살아갈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결국 그러한 선택이 훗날 자기 아들을 다윗으로 하여금 평생동안 왕의 식탁에서 밥을 먹을 수 있도록 하는 우정의 배려를 베풀게 하는 것이죠. 무엇보다 요나단은 하나님 앞에서 다윗과 두 번이나 신의를 약속합니다. 요나단과 다윗이 18절에 하나님 앞에서 언약을 합니다. 이 언약은 요나단이 자기가 다윗의 신하가 될 것을 맹세한 것이고, 왕세자라는 지위를 포기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두 사람의 우정을 궁극적으로 지켜주시죠. 다윗이 요나단에게서 아무것도 훔치치(왕위) 않게 되었고-그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죽임을 당하였다-요나단은 다윗에게서 아무것도 시기 하지 않았던 것이죠. 언약, 약속은 자기에 의해서 지켜간다고 생각하면 착각입니다. 우리는 보통 사람이면 누구나 다 약속을 지키려 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부득불 여러 가지 이유가 생겨나게 되고 그 이유 앞에 우리가 굴종 하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날에는 약속을 귀히 여기지 않습니다. 마음에 담아 둔 약속이 아니라 그냥 자기의 목적과 이익을 위해 가치 없이 쏟아낸 말일 때가 많습니다. 다윗과 요나단이 약속 증서를 주고 받은 것입니까?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서 언제나 구두로 약속합니다. 그러면 그것을 생명처럼 여깁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무엇으로 창조 하십니까?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말은 곧 인격입니다 히브리 사상에는 말이 곧 생명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한 약속은 반드시 지켜 줘야 하는 것이고 언젠가는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하나님의 약속의 책이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구약과 신약이라는 말이 영어로 옛 약속, 새로운 약속 이렇게 불립니다. 약속은 하나님의 아킬레스건이다라고 어느 성경학자가 이야기했습니다. 멋진 말입니다. 약속하신 하나님은 자기 이름 때문에 그 약속을 반드시 지키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사람의 약속과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약속을 내 의지로만, 내 마음으로만 지키려고 하다 보니 무너지는 것입니다. 의지와 마음, 이런 것이 고정된 것이 아닙니다, 젊을 때는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나이가 들면 마음도 약해지고 의지도 약해집니다, 약속을 할 때는 자신도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마음이 바뀝니다, 시간의 검증을 이기지 못하는 것이죠. 다윗은 그래서 하나님 안에서 약속합니다. 언약을 믿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우정을 보증하는 유일한 길임을 알고 있는 것이죠. 결론입니다. 마더 테레사 수녀가 멋진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당신이 할 수 없는 일을 하고 당신은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함께 큰일을 할 수 있다.” 춘천교회안에서 저와 여러분, 그리고 믿음의 형제와 자매들간에 주님안에서 멋진 우정 만들어가길 주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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