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14:8~14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오늘의 내용도 믿음을 강조하고 계시지만 무엇보다도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같은 분이심을 믿으라는 당부의 말씀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신비에 대하여 당시의 주님을 반대하고 대항하던 종교지도자들은 물론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조차 아직은 이해하지 못했던 것을 이 빌립의 질문으로 시작하고 그것에 답하시는 주님의 대화에서 엿볼 수 있다.
믿음에 있어서 어떤 것보다도 이 부분이 육신을 가진 우리 사람들이 이해하기에 쉽지 않은 부분임이 사실이다. 앞에서도 계속 나누어 왔던 말씀이지만 당시에 아직 영적인 깊이를 갖지 못했던 제자들이었기 때문에 어쩌면 이렇게 묻고 있는 것이 더 정직한 자세이기도 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 안에 계셔서 말씀하시고 일 하시고 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으라 당부하시면서 결국 그 아버지와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할 제자들 역시 놀라운 일들을 하게 될 것인데 역시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속의 역사를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시기 때문임을 가르치신다.
제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주님께서 이 땅에 세우시려던 교회를 완성하고 복음을 이스라엘 밖으로 가지고 나갈 것에 대한 예언을 하시는 데 이 모든 일들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이름으로 은혜와 능력을 구함으로 성령과 더불어 가능하게 될 것이라 말씀하신다.
Ⅰ. 예수님을 보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를 보는 것이다(8~9)
앞에서 도마는 확인하지 못하면 의심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면 이 빌립은 대단히 계산적이고 논리적이다. 그의 이런 성격은 6:7에서도 볼 수 있었다. 5천명이 넘는 군중의 먹을거리를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말한 바 있다.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7)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는 이러한 사실적인 논리를 중요시하는 빌립에게는 별로 호소력이 없었던 것 같다.
그런 이유에서 드리는 요청이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8)라고 요청하기에 이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은 영적인 아버지와의 교통을 말씀하시지만 아직 육신적일 수밖에 없는 제자들에게나 빌립에게는 당연히 실감이 나지 않았던 것이다.
주님의 입장에서는 언제나 하나님 아버지를 나타내고 보여주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어떤 상황에서나 나타나는 일들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통해서 일하시는 것이라고 가르치시지만 보고도 믿지 못하고 손에 쥐어 줘도 깨닫지 못하는 불신의 신앙은 그 한계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거나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즉,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보았다면 그것이 곧 하나님 아버지를 알고 본 것이지만 저들에게는 실감이 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미 하나님 아버지를 나를 통해서 보았다.” 말씀하시는데 “아니요 우리는 아직 아버지를 보지 못했으니 보여주십시오.” 서로의 관점과 기대가 다르다. 이것은 그때 제자들과 빌립 뿐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시대에도 마찬가지이다.
그 많은 인생의 여정 속에서 역사해 오신 하나님의 사랑을 자녀들에게 경험한대로 들려주고 말해줘도 ‘그 아버지 어머님께 역사하셨다는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들에게 도 그렇게 하도록 해 보셔요.’라고 오히려 의심의 질문을 해오면 거기에 답변은 쉽지 않다.
거기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좀더 가까이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9f) 결국 약 3년동안이나 예수님을 보아왔고 그 모습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모습이라고 하는데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다.
즉, 여기서 하시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행동을 보면서 하나님을 보지 못했다 하며 모른다고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지 못했다고 모른다고 부정하는 것과 같다는 말씀이다.
다시 한번 더 확인하시기를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9b) 안타까워하시지만 지난 주에도 인용한 1:18에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는 요한 사도의 고백도 같은 말씀이다.
사실 빌립이 이 말씀을 주님께 드리고 있을 때 이 복음서를 기록하고 있는 요한도 당연히 그 자리에 있었을 것이지만 그때까지는 적어도 같은 입장이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그러나 예수님의 예언대로 오순절날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고 깊은 영적체험을 하고 나서는 비로소 실감이 났을 것으로 이해된다.
그런 체험을 하였기 때문에 요한은 그의 서신서를 쓰면서도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요일1:1)고까지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눈으로는 하나님을 뵈면 살 수 없다고 OT에서도 여러 번 증거하신 바 있다. 대표적으로 하나님께서 직접 대면해서 말씀하셨다(민12:8)고 하시는 모세에게도 “또 이르시되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출33:20). 그런 이유에서 예수님 당시까지 하나님을 직접 뵌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다만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영적인 존재들을 만난 것을 하나님을 만났다고 표현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사람으로서 볼 수 없었던 하나님을 비로소 볼 수 있게 오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의 삶에 나타난 절대적인 공의와 사랑과 긍휼과 용서와 진리가 바로 하나님의 속성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6)라고 선포하셨던 증거가 바로 하나님으로서 의 선언이었던 것이다.
모든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부어 주신 성령으로 충만하여 이미 육신으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저주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영광으로 다시 들어가신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 아버지를 보고 듣는데 어려움이 없는 …
Ⅱ. 하나님 안에 계신 예수님, 예수님 안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10~11)
이 말씀은 이해되지 않는다고 보여 달라고 하는 빌립에게 말씀하셨던 v9의 내용을 좀더 넓혀서 해석하시는 말씀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실 하나님 아버지지와 우리 표현을 빌리자면 동고동락(同苦同樂)을 하심을 증거하시는 표현이다.
“나는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10f) 예수 그리스도의 매일 매순간의 삶은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고 증거하시는 것이다. 여기에 “아버지 안에, 내 안에”라고 말씀하신 “안에[ἐν]”라는 표현은 아버지께나 예수 그리스도께나 양쪽 모두 같이 사용되었다.
그리고 이 “안에[ἐν]”라는 표현은 바울사도가 옥중서신에서 수없이 사용했던 “그리스도 안에[ἐν Χριστῷ]”라는 표현과 꼭 같은 낱말이다. 그러면서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하신 것인데 v11에서도 “믿으라!”는 말씀을 반복하신다. 영적인 이치는 [앎]이라는 지식적인 부분 보다는 [믿음]의 관계가 먼저임을 여기서도 가르치시는 것이다.
이제는 그러한 충분한 증거를 선언하시기를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10b) 이러한 말씀은 언제나 지속되어 왔던 예수 그리스도의 고백이었다.
대표적인 내용이 5:19 말씀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또 하나 지나칠 수 없는 것은 여기에는 앞에서 아버지와 아들 서로 간의 “안에[ἐν]”라는 표현과 다른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라는 내용을 볼 수 있다. “계셔서[μένω, 머물다, 거하다, 계속하다]”는 “안에[ἐν]”라는 표현보다도 더 밀접한 관계를 설명하고 계시는 내용이다.
그렇기 때문에 주시는 당부가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11f) 이러한 믿음을 갖지 못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따른다 고 할지라도 주님의 역할이나 가치는 물론이고 하나님 아버지를 가까이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이 말씀은 당시의 빌립을 비롯한 제자들뿐만 아니라 주님을 믿고 섬긴다고 하는 우리는 물론이고 오늘 새롭게 믿음을 시작하는 사람에게도 같은 이치일 수밖에 없다.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11b) 만약에 전반절의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는 내용이 믿어지지 않는다면 이것을 통해서라도 믿으라는 당부의 말씀으로 이것이 그만큼 중요함을 당부하시는 것이다.
“믿지 아니하느냐, 믿으라, 믿으라!”는 안타까운 주님의 요청이 아직 성령의 도움을 입지 못했던 당시의 제자들은 이해하기 어렵고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았겠지만 지금은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구속의 완성으로 순종하고 거듭난 사람들에게는 나 스스로의 결단만이 아니라 성령의 중보의 기도와 함께 이해하거나 받아드리는 것이 어려운 내용이 아니다.
그런 이유에서 이 예수 그리스도의 당부는 오늘 우리에게 더욱 호소력 있는 교훈이며 확신이다.
Ⅲ. 이것을 믿는다면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다(12~14)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의 교통은 성령과 더불어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내는 것은 여기에 사람을 참여시키심으로 확대하는 내용을 이 부분에서 보게 된다. 하나님의 죄인 된 인류구원은 결국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셔서 구속의 역사를 이루시고 여기까지는 사람이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지만 이제 완성된 복음은 사람을 통해서 확산되고 이루어질 완성을 제자들에게 맡기심을 보게 된다.
이 사실의 중요성을 역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12ff)라는 표현으로 강조하신다. 이것은 확실한 하나님의 약속이며 당연히 제자들이 감당해야할 부분임을 확인하신다.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12m) 사람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하신 일 즉,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당시에도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주님께서 자신을 믿고 순종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함께 감당해 갈 것이라는 엄청난 사실을 증거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 모든 사람이 아니라 “나를 믿는 자는,” 이라는 단서가 붙어 있다.
여기에 한 걸음 더 나아가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12b) 하셨는데 과연 예수 그리스도의 하신 일보다 큰 일이 무엇일까! 여러가지 이론이 있을 수 있지만 주님의 말씀과 성경이 증거하는 것들을 볼 때 두가지 정도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당시에는 아직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로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말씀하셨지만 아직 이 땅에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선포하지 않으셨음을 볼 때 오순절 이후에 성령께서 임하시고 세워질 교회의 완성을 사도들이 감당할 것이라는 것이 그 하나이다. 왜냐하면 이 약속이야 말로 구속의 완성으로 이루어질 약속이기 때문이다.
두번째로는 예수님 당시에는 “이스라엘의 잃어진 양들을 찾으러”(마10:6, 15:24) 오셨다는 말씀과 함께 아직 이방인에게는 복음이 공식적으로 허락되지 않는 부분을 이해하게 되는데 이 역시 구속의 역사가 완성된 후에 라야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복음을 완성하신 후에야 비로소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28:19~20f)는 명령을 제자들에게 주셨고 역시 제자들이 사마리아를 넘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확산시킨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일들이 사실 제자들을 통해서 이루실 놀라운 일들이었지만 이 일들 역시 제자들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것들이었고 성령께서 오셨을 때 가능하게 되었음을 역사속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런 일이 가능하기 위해서 반드시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12b)는 구속의 역사를 이루셔야 만했던 것이다.
이러한 역사(役事)들을 위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의 역사를 구해야만 가능했고 거기에 대한 약속이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13f)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14) 라고 반복적으로 말씀하고 계시지만 이 귀한 약속은 15:16, 16:23~24에서도 확인하고 계시다.
아무리 죄에 대한 사슬이 풀리고 자유함을 누린다고 하여도 어느 사람의 이름도 하나님 앞에 인정받을 만한 인물은 없다. 다만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인 죄를 친히 해결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아래에서만 응답하실 수밖에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 즉, 천국을 위한 일을 위해서도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수 있는 복되신 이름이자 복의 통로가 되는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
그리고 그렇게 응답하시는 이유조차도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13b)고 확인해 준다.
그러므로 기도는 통로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며 최종적인 목적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는데 목적이 있기 때문에 육신의 정욕적인 기도는 이 범위에서도 인정될 수 없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참고로 앞에서 거론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드려야 하는 기도의 약속을 보면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15:16) 하여 영적인 신령한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서 응답하시겠다 하셨다.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16:23~24)
이 약속의 확인은 하나님께 받고 그 받은 사람의 기쁨이 넘치게 하기 위해서 응답하시리라는 말씀을 본다.
기도는 무엇보다도 하나님 나라 천국의 확장을 위하여 허락하신 것이고 우리 개개인의 의나 공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되신 중보의 희생을 통해서 받는 것이기 때문에 영적인 것이 되어야 함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오늘 나같이 무익하고 부족한 사람의 기도도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쓰신다는 사실에 감격을 갖고 주님의 말씀대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는 명령에 순종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려 드리고 신령한 성령의 열매를 맺으며 기쁨이 충만한 기도생활이 되어야 할 것이다.
시간과 공간의 3차원적인 이해를 가진 사람으로서는 하나님과 아들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께서 한분이라는 사실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다. 특히 아버지께 대한 순종이나 거기에 대한 상급을 거론하는 빌립보서 2:5~11 같은 말씀들도 분명히 주고 받는 다른 객체로서 가능한 일들이다.
그럼에도 성경은 한번만이 아닌 수없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께서 같은 분이심을 말씀하고 있다. 성경은 인간의 이해의 개념을 넘어서는 책으로 기록하신 하나님의 성령의 감동으로만 바른 이해가 가능하다. 그런 이유에서 하나님은 거듭남을 명령하시는 것이다.
그럼에도 모든 성경은 죄인이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있도록 보통사람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한계를 넘어 계시는 하나님의 존재와 역사도 사람들의 한계에 맞추어 기록하게 하신 것이다.
이런 양면(兩面)에서 우리는 이해될 수 없는 3차원 이상의 논리는 장래에 완벽하게 이해하게 될 것이라는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13:12)는 바울과 같은 믿음으로 순종하고 가감(加減) 없이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
오직 믿음의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깊은 이해에 앞서서 하나님께서 하라고 명령하시는 것을 순종하는 것일 뿐이다. 그럴 때 이해되고 감사하게 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을 위한 구속의 역사와 함께 무엇보다도 하나님 아버지를 사람들에게 보여주시기 위해 오셨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안에 계시고 하나님께서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시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오늘도 세상의 일반적인 이해가 아니라 믿음으로 이해되는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서 구원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실 때까지 세상에 확산되고 증거되는 것이고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그런 역할을 감당할 수 있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지금도 같은 하나님이신 성령으로 함께 역사하신다. |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