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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실과 믿음사이(행27:16-32) | 하용수 | 2020-11-0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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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설교제목은 유명한 독일의 신학자인 헬무트 틸리케의 책 제목에서 따온 것이다. 이는 우리의 삶 가운데서 가장 많이 경험하는 일상의 신앙을 반영한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저는 교회가 공적 자원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교회가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해 존재하듯 우리의 교회라고 불리우는 이 공간도 가능하면 주변의 모든 사람이 함께 더불어 유용하게 사용되기를 소망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치 않다. 지난 주에도 금요일 새벽에 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술취한 이가 쏟아낸 엄청난 양의 토악질에 흠칫 놀라고 거기에다가 소변을 여러 사람이 본 흔적을 마주하게 되면 나의 작은 믿음은 현실사이에서 흔들린다. 김득남권사님이 안계시니 최근에는 많이 교회주변에 담배꽁추를 줍는일, 먹다가 남긴 음료와 쓰레기를 치우는 일도 마찬가지이다. 외부사람들에게 차량 주차를 허용하면서 우리가 겪는 일들도 마찬가지이다. 교회 공간의 개방이 이 모든 것을 있게 한다. 그러므로 현실과 믿음사이에서 무례한 사람들의 행테에 감정이 요동칠 때도 있고 생각이 잠시 흔들리면서 믿음이 살며시 금이 가기도 한다. 가만히 보면, 우리의 신앙은 늘 이렇습니다. 끊임없이 현실과 믿음 사이에서 갈등하는 것이지요. 현실과 믿음 사이에 우리가 가져야하는 신앙의 태도는 무엇일까요? 그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2. 본문속으로 들어가 보도록 하지요. 사도행전 27장은 로마로 압송되는 바울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로마의 백부장 율리오는 미결수의 신분인 바울과 몇몇의 죄수들과 더불어 배를 타고 로마로 향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항해는 순조롭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바닷바람 때문입니다. 사실, 9월15일 이후에 지중해를 항해하는 일은 위험하게 여겨졌습니다. 11월1일부터 3월10일 사이에는 항해가 아주 중지되었습니다. 9.10절의 이야기는 그 이야기입니다. ((9. ○여러 날이 걸려 금식하는 절기가 이미 지났으므로 항해하기가 위태한지라 바울이 그들을 권하여 10.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이번 항해가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를 끼치리라 하되” )) 여러날이 걸려 금식하는 절기가 이미 지났으므로 항해하기가 위태하였습니다. 금식하는 절기는 디스리 (Tishri)월 (태양력으로 9-10월경) 10일에 지켜졌던 속죄일을 의미합니다(민 29: 7-11). 브루스(Bruce)에 의하면 로마 여행 당시인 A.D.59년의 속죄일은 태양력으로 10월 5일경이었다고 합니다. 바울은 지금이 항해를 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계절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여러 차례의 여행 경험이 있었고 또한 세 차례나 파선을 당하여 위험을 몸소 체험했기 때문입니다(고후 11:25). 따라서 바울은 항해를 중단하고 겨울을 지낸 후에 다시 항해를 계속하는 것이 좋겠다는 권고하였습니다 ((“13. 남풍이 순하게 불매 그들이 뜻을 이룬 줄 알고 닻을 감아 그레데 해변을 끼고 항해하더니 14. 얼마 안 되어 섬 가운데로부터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크게 일어나니”)) 여기서 광풍(*, 아네모스 뒤포니코스)은 태풍을 말합니다. 유라굴로(*, 유라퀼론)는 동풍을 뜻하는 말과 북풍을 가리키는말의 합성어로 동북풍입니다. 이 바람은 지형의 영향으로 생기는 바람인데 남풍이 그레데섬의 한가운데 우뚝 솟아 있는 2100 Km 높이의 이다(Ida)산맥으로부터 생기는 두 반대 기류의 충돌로 생긴 태풍에 휩싸이면서 강력한 북동풍이 변하는 것입니다. 일단 이 바람을 만나면 배는 방향을 조절할 수없는 상태가 되어 속수무책으로 아프리카 방면으로 밀리다가 모래톱이나 암초에 부딪히면 파선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이 상황을 가장 보여주는 말씀은 바로 20절의 말씀이지요. 더 이상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다라는 것입니다. 풍랑으로 인해 벗어나려고 짐을 다 버리고(18절), 사흘째에는 배의 기구조차 내버립니다(19절). 그러나 여전히 풍랑의 한 가운데서 벗어나지 못하자 구원의 길이 더 이상 보이지 않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 것이지요. 삶에는 흔들림이 있습니다. 잘 나가던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청문회의 자리에 서게 되고 포승줄에 끌려갈 줄 꿈엔들 생각하였겠습니까? 우리들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열심히 살아왔지만 내가 살아가는 삶의 의지와 상관없이 하루아침에 길을 잃게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가족 가운데 누가 크게 아프기만 하여도 일상의 삶은 깨져버립니다. 열심히 일하지만 크게 진척이 없게 되면 우리는 낙심하고 상실을 경험합니다. 실업상태가 길어지고 일을 찾지 못하면 삶의 정체성이 급격하게 흔들립니다. 환절기에 공교롭게도 많은 분들이 생사를 달리하기도합니다. 최근에 부고의 소식을 여러번 들었습니다. 때로, 어떤 상황에서 참아내기만 해도 위대할 때가 있습니다. 두려움이 한 가득하지만 끝내 버티면서 그 시간을 견디는 일도 대단하기도합니다. 시인 이성복은 그래서 무한화서에서 “의심과 불안에 머물수 있는 능력을 ‘소극적 능력’이라”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신앙은 그것 이상입니다. 신앙의 길이란? 현실의 두려움을 극복하고 미래로 나아가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사이에 구원의 믿음이 존재하는 것이지요. 21절이하가 그것을 보여줍니다. 절망적인 상황의 한 가운데서 오직 한 사람, 바울은 이 상황에서 흔들리지 아니하고 담대하게 일어나 희망에 메시지를 사람들에게 줍니다. 그것은 간 밤에 바울에게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난 너를 가이사앞에 세우겠고, 너와 함께 방해하는 자들을 다 네게 주셨다라고 말씀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말씀 후에 27절에 열나흘이 지난 후에 바울의 말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도합니다. 다시 말하면 열 나흘의 시간동안 여전히 바다 위의 표류는 지속되고 있었던 것이지요. 즉시가 아닙니다. 저는 이 시간이 예수님의 죽음 후에 삼일의 시간과 비슷하다고 생각됩니다. 부활이 이뤄지기까지의 시간 말입니다. 예수님은 죽은 다음에 바로 부활한 것이 아닙니다. 삼일 후에 부활하셨습니다. 지금도 바울의 감동적인 말씀, 희망을 주는 말씀 뒤에 바로 다음 날 섬에 걸린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열나흘의 시간동안 암흑은 지속되고 있었습니다. 구원의 여망은 좀처럼 벗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열 나흘 동안 그들은 굶주렸고 폭풍우는 계속되었고 현실은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이 열 나흘의 시간을 다루지 않습니다. 그것은 무엇일까요? 여기에서 상상이 필요합니다. 영화같은 데서 보면, 보통 이럴 때 반란이 일어나든가? 요나서처럼, 제비뽑아 한 사람을 바다에 던저버리기도하는 방법을 취합니다. 열 나흘후에 섬에 걸리는 일이 일어나자 사공들이 도망가려고 거룻배를 내려놓는 것을 보면, 그들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 삶에 대한 강한 애착이 묻어나오는 것이지요. 그런데, 열 나흘의 정보를 얻을 수 없는 상황에서 이 열 나흘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저는 그것이 31절에 희미하게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11절에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믿었던 백부장이 이제는 바울의 말을 믿기 시작한 것이지요. 12절에 군인들이 거룻줄을 끊어버리지 않습니까? 군인들이 지들 마음대로 끊었겠습니까? 상관의 지시-백부장의 명령이 있었기에 그러한 일을 한 것으로 보아야하지요. 결국, 이 사건은 우리에게 삶에는 혼돈이 가득하고 두려움과 절망의 늪 속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도 많지만, 말씀에 의지하여-이것이 믿음인데-삶을 살아가고자 할 때, 끝내 우리는 구원된다는 사실을 가르쳐주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종국적으로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우리가 이 땅을 떠날 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우리가 구원받았지만, 그 구원의 마지막 순간은 우리의 육신이 이 땅을 떠날 때입니다. 그 때까지 우리는 두려움에 사로잡힐 수도 있고, 몇 번씩 무너지기 쉬운 삶도 경험할 것입니다. 한 마디로 열 나흘의 시간을 보낸다는 말입니다. 예수 믿고 찬란한 내일의 날들이 바로 펼쳐지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잊지말아야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구원 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바울에게 나타난 바울과 배에 탄 사람들을 구원하겠다고 고지하였듯이, 우리도 눈물 나는 시간들을 지나갈지라도 결국은 구원받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배에 타고 있어야한다는 것이지요. 이것이 여기에서는 믿음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으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사공들처럼 복음이 제시한 구원의 길을 저버리고 자기의 힘으로 능력으로 살아보겠다고-거룻배를 내림-하면 그것은 사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죽는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14일을 기다리는 이 믿음의 힘의 실체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버티는 것입니다. 버팀의 힘이지요. 믿음의 히브리어는 “에무나”이다. 이 말은 주로 “견딤”으로 쓰이기도 하고 “버팀으로”라는 뜻으로 사용된다. 출애굽기 17장 12절에서 출애굽하던 이스라엘이 르비딤에서 아말렉과 싸울 때 모세의 손이 올라가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이 내려오면 아말렉이 이긴 사건에서 모세의 손이 아론과 훌에 의하여 양쪽에서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한지라 여호수아가 칼날로 아말렉과 그 백성을 쳐서 파하니라"(출 17: 12하- 13)에서 "에무나"가 "끝까지 버틴다"는 의미로 "안정되게 남아있다, 확고하게 남아있다"의"remained steady"로 번역되었다. 하나님이 약속하시고 바로 이루어지면 좋은 데, 하나님의 시간이 요청되는 것이지요. 이럴 때 우리의 믿음은 두 가지로 나타나는 것이지요. 사공들처럼 자신들의 힘으로 살아보겠다고 거룻배를 내리거나 아니면 군인들처럼 거룻줄을 끊어버리거나 말입니다. 진짜 믿음은 거룻줄을 끊고 기다리는 것이지요. 이 때 그 풍랑과 파도를 견디는 것이 필요하지요. 여전히 상황은 변한 것이 없으니 말입니다. 믿음은 그래서 때로 버티는 힘이 필요합니다. 믿지 않으시겠지만, 제가 유도를 1년 정도 했습니다. 물론 고등학교에서 했습니다. 제가 다니는 학교에서는 유도가 필수입니다. 매주 한 번씩은 반드시 유도복으로 갈아있고 체육관으로 가야만 했습니다. 이 유도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버티는 것입니다. 다리에 힘을 모으고 어떤 일이 벌어져도 힘을 주고 딱 버텨야합니다. 유도가 주로 엎어치기만 멋있게 보여서 그게 주 같은데 사실 자세히 보면 그것이 이루어지기 까지 과정이 있습니다. 유도 선수들이손으로 오사락을 당기든, 다리로 상대방 선수를의 다리를 자꾸 걷어냅니다. 그러다 자세가 흔들리면 상대방 옆귀로 들어가서 엎어치기를 하든 빗당겨치기를 하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유효이든 효과이든 절반이든 한판이든 끝나는 것이지요. 그래서 유도 선수들은 손아귀의 힘과 다리 종아리가 얼마나 탄탄한지 모릅니다. 그래서 버티다고 기회가 되면 기술이 들어가 승부를 내는 것이지요. 결과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버티는 믿음의 힘을 길러야합니다. 이러한 버티는 힘을 잘 보여주는 것이 얍복강가의 야곱이 아닐까 합니다. 에서를 만나기 전, 두려운 마음에 젖어있던 야곱이 하나님의 천사와 씨름하여-기도했다는 소리이지요-환도뼈가 끊어지는 아픔을 견뎌내고 버텨서 끝내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축복의 이름으로 얻지 않습니까? 우리에게도 때로 고통으로 가득한 생활속에서도 이러한 인내와 버팀이 필요합니다. 성경은 그래서 우리에게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하였습니다. (로마서 15장 4절) 한자어로 정할 定(정)가 있습니다. 이 뜻이 굉장히 많은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일을 매조지어 질서있게 한다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다른 뜻으로는 다스려지다 조용해지다의 뜻을 갖고 있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이 말을 움직이지 않는 것. 즉, 부동으로 이해했습니다. 부동은 흔들림이 없는 것을 말합니다. 상황이나 심리적 상태 등이 요동하지 않는 것이지요. 철학적으로 애기하면 만물의 창조자앞에서 분리됨이 없이 참된 자아로 서있는 것을 말합니다. 이 말과 상통되는 것이 우리가 한번쯤 들어본 코람데오라는 말입니다. 코람데오는 'coram Deo'를 소리나는 대로 읽은 라틴어로 'coram'은 '앞에'라는 뜻을 지니고, 'Deo'는 '하나님'을 뜻합니다. 이 두 단어가 합쳐져서 ‘하나님앞에서’ 라는 것이지요. 그렇치요. 어떠한 현실앞에서도 코람데로 서있는 자들이 갖는 모습이 정할 정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져야하는 믿음이고 신앙의 실제라는 것이지요. 주어진 현실이 어떠하든 지, 인내로 소망을 가지는 일, 아마 이는 노아가 우리에게 보여주었던 일이 아닌가 합니다. 어쩌면 창세기 6장에 노아시대가 우리가 겪는 시대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합니다. 장차 다가올 소망을 이야기하며 방주를 짓는 일, 어쩌면 그것이 우리가 하는 복음의 사역이지요. 사람들은 여전히 믿지 못하고 자신들의 연락에 취해 하나님의 음성을 도외시합니다. 한번도 그들이 겪어보거나 보지 못한 방주를 보고 어리석다고 말하지요. 믿음으로 이 모든 세계가 지어진 것을 아는 노아는 한번도 보지 못한 바다와 엄청난 비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신실하게 믿음으로 지켜냅니다. 그리고 그 약속은 사람들의 조롱과 비난속에서도 수많은 세월속에서도 마침내 실현되는 것이지요. 결론입니다. 절망된 현실 속에서도 끝끝내 삶을 지속해야하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희망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만이 세상에 참된 소망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직장이 여러분의 삶을 다 책임져줄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지위가 우리가 그간 쌓아놓은 것들이 우리 삶을 지켜줄 것 같지만, 아닙니다. 삶에는 혼돈이 가득합니다. 두려운 일이 가득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진정 의지하고 바라보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물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의 대속물로 주셨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희망이고 어떠한 삶의 현실에 있든지 우리가 삶의 길을 멈추지 않고 걸어가는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주님이 주시는 평안함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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