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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호 운영자 2024-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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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참빛 창간호 전문 구 분 : 1964. 8.1. 성 구 :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1:9)

 

-창간호-

 

11964.8 1

 

목차

논단주님의 교회와 환원 운동...................이철선...3

참빛을 내며.......................................이영진...2

참빛 발해에 붙는 글...............................동석기...5

그리스도의 교회란 무엇인가?.......................베어득...7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나의 입장......................이채화...10

땅과 하늘을 열수 있는 열쇠....................... 신성종...13

참된 종교의 필요성............................... 이영종...16

 

여성코너

참된 삶의 초상화................................. 로티 B.홉스 ...22

[수필]모순....................................... 최일용 ...27

성경개요..........................................하등 .....29

성경 문답 코너..............................................15

 

.............................참빛.............. .지흥구 ....6

우정코너......................................................21

소식란....................................................... 31

편집후기

 

참빛을 내며 편집겸 발행인 이영진

태초에 하나님이 질서를 창조하셨다. (1:2) 혼돈과 공허와 흑암을 제거하는 빛은 카오스(Chaos)를 정돈하는 신의 뜻이요 마음 이였다. 이 마음은 진이며 선이고 또한 미의 총화였었다. 그러나 신이 창조한 세계는 인간의 오만으로 그 찬란하고 아름다운 우리가 지닐 빛을 읽고 말았다. 또 다시 우리의 주변엔 어둡고 공허한 무질서만이 깔려 있다. 질식, 참으로 질식할 것만 같은 순환을 거듭하고 있다.

진정 세계는 국부적인 빛이 전체적인 어둠과 맞서고 있을 뿐이다. 어둠이 빛을 인식하기에는 아직 그 기세가 쇠잔하지 않았다.(1:5) 현대는 진리가 요청되고 있으나 만족시켜 줄 만한 자세를 취하고 있지 못하고 빛은 드리워 졌으나 가물거리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역사를 소급하여 갈보리 산상에서 빛의 아들로서 참빛을 든 주님을 인고를 실감할 수 있어야겠다. 그는 영적 소명 때문에 육체적 고통을 어두운 세계를 위한 기도로 위로 받았다. 이 소명은 주님께 강한 힘을 주었고 빛의 아들로서의 확증을 얻게 하였다. 그리고 그 빛이 세계가 상존하는 하나의 원인이 되여 주었다.

이제 우리는 빛의 후예로서 참빛을 위하고 더 밝은 빛을 비추기 위하여 함께 뭉쳐야 겠다. 더 이상 어둠을 외면할 수 없는 사명감은 여기 참빛발간으로 행동화하지 않으면 안되겠다. 우리에게 드리워진 이 참빛이 진리를 사모하는 이들의 바른 안내자가 되고 광명한 사회를 건설하는 기름이 될 것을 다짐한다. 우리는 이 소책자를 기독교계와 일반 사회의 필요성에 보답하는 동기에서 발간하는 바이다. 이제 이 "참빛"이 모든 사람이 관여해 주는 책자가 되여야만 하겠다. 아무리 귀중한 것도 자기와 무관계 일 때 그것은 가치가 상실되고 마는 것이다. 소책자나마 여러분께서 새 옷을 아끼듯 보살펴 영원히 거리지 않는 "참빛"이 되도록 노력하자.

 

논단 주님의 교회와 환원운동

이철선

그리스도의 교회는 환원운동과 함께 19세기에 생겨난 하나의 교파적 성격을 지닌 교회로서 언제나 세상 사람들은 생각하고 있다. 이러한 견해는 우리 그리스도의 교회가 위치하는 것에 직접적인 상위 점으로 그르친 생각이다. 그리스도의 교회란 즉 구원을 받고 새로운 영육의 삶을 얻은 사람들로 이루어진 몸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사도행전에 기록된 바대로 주님의 부활 승천이 있는 후 첫 번째 오순절 날에 시작한 교회인 것이다. 이것은 예나 지금이나 비교파 교회 바로 그것인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 예수를 믿고서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주님과 함께 세례에 장사지낸 사람들은 지금까지 역사의 흐름 속에 주님에 의해서 참 교회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참된 교회란 우리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어떤 기구가 아니라 주님께서 흘리신 보혈로 이룩해 주신 모든 구원 받은 사람들의 전당인 것이다.

 

환원운동은 과거 오랜 역사 속에 수없이 일어났던 것으로 이것은 우리 인간의 노력으로 오로지 성서에 따라 예배를 보고 충실한 믿음과 예식을 찾아 행하자는 시도였다. 이러한 환원 운동의 중요성은 영속성을 가지는 것이 되어야 하며 동시에 영적으로 참된 가운데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려고 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지켜져야 할 것이다. (4:23, 24)

 

환원운동이란 예수를 믿은 우리들이 신약 성경에 나타난바 대로 예배를 보며 한대 뭉치 치기를 외치는 절규운동이다. 이것은 우리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교리, 신조, 법칙등 모든 인위적인 기구를 버리고 하나님의 신성한 뜻을 지키자는 호소이다. 그러나 이 운동으로 어떤 새로운 교파를 이룩하자는 것이 아니라 모든 분파적인 특권성을 버리자는 외침이다.

 

그리스도의 교회의 주간지의 하나인 "견고한 기초(Firm foundation)"의 편집자인 로일 레몬스(Reul Lemons)는 우리의 다양한 사상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즉 그리스도의 교회란 구원받은 심령들의 혼합일체로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으로서 다시 참된 삶 곧 거듭난 사람은 이 참된 교회의 일원이며, 참된 교회에 들어온 사람은 영생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교회란 분명히 주님께서 처음부터 계획하신 대로 또 목적하신 바 그 교회인 것이다. 이 교회는 결코 변화되지 않을 뿐더러 변화될 수 없는 것이다. 하물며 지옥의 문도 이 교회를 가로막지 못하는 것이다. 또한 환원 사상에는 새로운 것이 있을 수 없다. 단지 지금까지 좀더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그대로의 노력만으로 오래 세월 속에 신약 성경에 있는 기독교인의 마음속에 다시 찾아보려는 시도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신약 교회라고 말할 수 없는 환원만이 요구되는 것이다.

 

"참 빛"발행에 붙이는 글

전도자 동석기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지으실 때에 빛을 만드시고(1:3),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세상의 빛(8:12)이라고 하시며 또 이 생명은 사람의 빛이라"(1:4)하셨으니 이 빛이야말로 세상을 비치는 참빛으로 "참빛"을 발행함은 곧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에 응하려는 것이니,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 도다(이사야 9:2)하였으니 오늘날 한국에서 흑암 속에 행하는 저들에게 대한 것이니 과연 "참빛"이야 말로 이사야 선지자의 글을 통해서 생각하건대 여러 가지 정치적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우리들에게 실로 통해서 생각하건대 여러 가지 정치적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우리들에게 실로 하나님이 베푸신 홍은 이요 주님의 성덕인 것임을 믿는 바이다. 이렇게 참빛 을 혹암의 세계에 펴 놓게된 것에 대해 먼저 하나님과 주 예수님께 감사 드리며 아울러 물심 양면으로 노력하는 종들에게 감사를 드리는 바이다. 특히 이철선 (William A. Richardson Jr) 형제의 온갖 노력에 주님의 축복이 있기를 바라는 바이다.

동양의 성현이 사랑을 해석함에 이 세상 만물 중에서 가장 귀한 인간은 그 귀함이 인간이 오륜지덕을 가졌다는 것이다. 또한 사회 윤리도덕이 허물어짐에 대한 군신유의(君臣有義)는 민주절(民主絶)이요 부자유친(父子有親)은 사상절(思想絶)이요 부부유별(夫婦有別)은 자유절(自由絶)이요 장유유서(長幼有序)는 동등절(同等絶)이요 붕우유신(朋友有信)은 모利絶이라고한 격언은 오늘 한국 사회에서 통절이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 참빛을 통하여 우리는 어둡고 험악한 사회에서 헤쳐 나가야 될 것이며 우리는 구원을 얻어야 할 것이다. 귀중한 참빛이 비치는 그곳엔 하늘의 영광이 있을 것이다. ! 참빛 참빛이여 흑함에 광명의 외침이 있으라......

 

참 빛 H. C. GIE

너희는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나니(살전5:5)

 

펼쳐진 어둠 속에

욕망과 시기에 눈먼 빛의 아들아

무지와 저주의 방탕으로

자만하며

어둠에 벗되어 빛을 잃누나.

 

영겁의 흑암 속에

무딘 너 자신의 빛을 비취려 하다니

멍텅구리!

갈보리의 빛을 떠나

절망의 밭에 씨를 뿌리다니

고집쟁이!

 

여기 참빛이 흑암에 비치나니

무딘 빛을 사랑으로 찬란히

오만의 광채를 생명의 말씀으로 채워

우리 빛의 옷을 입고

온 누리에 비추자.

 

 

그리스도의 교회란 무엇인가?

베어득

 

신약성서는 대부분이 희랍어로 기록되었다. 희합어로 교회나 불러모은다는 뜻이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이 세상의 흉악한 죄악으로부터 그리스도의 백성이 되게끔 많은 사람을 불러 모아서 이룩된 몸이다. 교회란 그리스도의 몸이다. (1:22, 1:18,19)

 

그러므로 주안에 있는 사람들은 교회 안에 있는 것이다. 또한 교회란 주님의 보혈로 사신 것이다. (20:28) 여기서 모든 구원받은 사람은 주님의 보혈의 대가임을 알 수 있다.(벧전1:18,19) 즉 모든 구원받은 사람은 주님의 보혈로 산모임, 교회 또는 주님의 몸의 개체가 되게되다. "그가 친히 몸의 구주 시니라" (5:23)

 

예수님께서 당신의 교회를 지으실 것을 약속하셨다. (16:18) 사도행전에서 우리는 처음 복음을 가르친 사실의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이 복음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부활 승천하시기 전에는 전파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복음에 있어 가장 중요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루살렘에서 첫번째 복음의 말씀이 전파되자 3천명이나 되는 무리들이 세례를 받고 모두가 교회를 이룩하는 몸으로 되었다. 신약성경에 나타난 이러한 사실로서 우리는 예루살렘에 교회가 존재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동시에 다른 곳에서도 복음이 전파되었음을 증명 할 수 있다. 신약성경에서 하나님의 백성과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은 흔히 교회 혹은 왕국이나 집 또는 건물, 가정 몸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부르게 됐다.

 

이러한 표현들은 모두 주 예수의 보혈로 구원받은 사람들에 대한 것 이였다. 우리가 교회에서 그리스도의 백성을 생각 할 때 예수님은 우리의 윗머리가 되며, 왕국으로 생각 할 때 그는 왕이며 집으로는 주추이며 가정으로 맏형이 되고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로 생각 할 수 있다. 교회는 사도들이나 선지자의 가르침으로 세워졌다. 이들은 성령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직접적인 선물인 하나님의 뜻을 아는 힘이나 영감의 힘인 예언이란 선물을 가졌었다. 역시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능력을 얻어서 가르친다는 증거로 이적을 행하는 선물을 받았다. 그들은 오랜 세월을 두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말씀하신 가르침을 기록해 둠으로서 후세의 사람들이 성경을 갖게 되었다. 예언이나 이적을 행하는 신기로운 선물은 더 이상 필요 없게 됐다.

 

그러나 가르침은 분명히 옛날 초대교회에서 우리 조상들이 영감을 통한 말을 듣고 가르침을 받은 것이나 오늘날 우리가 성서란 복음서를 통해 가르침을 알고 배울 수 있는 것이나 똑 같은 것이다. 예수님은 그의 모든 제자들(신자)로 하여금 하나가 되기를 원하시고 계시며 그리고 지금까지 그들로 하여금 한 몸이 되도록 기도 하셨다. (16:11,20,23) 사도들이나 선지자들을 통해 성령은 모든 기독교인들이 하나로 되어 어떠한 논란도 없이 똑같은 것을 가르치고 지키도록 호소하셨다. (고전1:10, 2:1-4)_이들 교인들은 인간의 이름이 아니고 주님의 이름으로 옷 입도록 가르침을 받았다. (고전 1:10-13, 3:1-4, 3:17)이로서 교회가 세워 졌는데 이것은 모두 그리스도의 교회였다. (16:16) 이 교회서는 인간들의 가르침에 따르도록 교육받은 것이 아니라 오로지 영감을 받은 자(선생)들의 가르침에 순종 하도 록 되었다.

 

그런데 우리는 똑 같은 가르침을 영적으로 쓰여진 성서에서 찾을 수 있다. 신약성서에서 성령은 오직 한 교회만을 인정 하셨다. 에베소서 44절에서 사도 바울은 "오직 몸이 하나요"란 편지를 썼다.

몸은 교회이다. (1:22,23) 이것은 거의 2천년 전에 기록된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감히 상상치 못할 교파, 분파가 있고 서로가 상위 점을 갖고 한 몸에서 갈라졌다. 그 이유인 즉 많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교회란 것을 잊어버리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이런 판이한 관념 속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갖고 있는데 이것은 언제나 변함 없이 존재하는 바로 그리스도의 교회인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변화 시킬 수 없는 교회이다. 만약 이 교회를 달리 변화시킨다고 하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닌 것이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모든 구원받은 자로 된 그리스도의 총체로 존재하는 것이다.

 

신약성서에서 명한 그리스도의 뜻을 따른 다는 것은 오늘날 우리 기독교인들의 본연의 의무이다.

이 세상에는 단순히 기독교인으로 어떤 분파나 교파 속하지 않고 이룩된 교회가 많이 있다. 이들이 목적하는 것은 주님께서 가르친 것만을 믿고 따르며 영적으로 쓰여진 성서에서 찾을 수 없는 것은 모두 다 멀리하는 것이다. 이들의 목적은 진정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교회가 되는 것이다. 신약성경만을 받아드리고 따른다는 것이 즉 교인이 되는 것, 교회의 조직 교회의 명칭, 예배등 하나님을 즐겁게 하는 생활과 모든 성경의 진실을 믿고 따른 것이었다.

 

한국의 기독교는 다른 외국으로부터 소개되었다. 그러나 기독교가 이러한 여러 나라에서 생겼다고는 할 수 없다. 기독교는 사도행전2장에서 나타난 것과 같이 예루살렘에서 시작됐다. 그러나 기독교는 긴 세월을 통해 많은 나라에 전파되었다. 이렇듯 하나이던 기독교가 인간들의 불일치한 여러 가지 교리를 만들어 가르침으로 성령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수많은 교파가 생겼다. 그러나 인간들이 만든 교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또 변화 없는 성경을 갖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성경만을 따른다면 기독교인이 될 수 있으며 또한 이들이 다같이 예배를 보고 일해 나가면 거기엔 그리스도의 교회가 있게 될 것이다.

 

참다운 교회인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인간들이 만든 모든 교리나 예식을 버리고 오로지 기독교인이 되는 것이 참다운 기독교임을 알아야 한다. (필자: 선교사)

 

예수는 정원에 계시다. 그것은 맨 처음의 인간 아담이 자기와 전 인류를 타락시킨 타락의 원이

아니고 그가 자기와 전 인류를 구하신 고뇌의 원이다. (파스칼)

 

나는 전에는 기도와 독거를 위하여 장소와 시간을 찾아 다녔다. 지금의 나는 언제나 나의 속 마

음속에서 기도하고 내가 있는 그곳에서 홀로 있을 수 있다. (텔스테겐)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나의 주장

한국기독교대학 부학장 이채화

 

기독교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면 교파교회에 속하고 있는 사람을 대 할 때마다 "당신의 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라고 묻게 된다. 이것은 일언해서 교회가 여러 가지 있다는 증거이다. 대별하면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인데 신교 중에는 성공회와 같이 전혀 카톨릭과 같은 교회라고 말할 수 없는 것 무교회과 같이 반교회의 입장을 취하는 것도 있다. 또 내용적으로 보아도 정숙한 교회와 열광적인 교회도 있고 설교의 강조 점에도 차이고 있으며 성서에 대한 해석태도에도 많은 차이를 갖고 있음을 보게된다.

 

교회는 본래 하나이며 하는데 이와 같이 분파 된 것은 여러 가지 이유와 사정이 있기는 하나 근본적으로는 인간의 죄와 사탄의 작용 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복음만이 진리임을 재인식하고 복음의 선교와 복음의 옹호를 위하여 싸워야 하는 것이다.

 

1. 하나의 신앙

성서에는 명확히 "주도 하나, 신앙도 하나, 세례도 하나"라고 선언하고 있다. (4:5) 혹 사람들

"여하한 신앙도 신앙은 좋은 것이다."라고 말하는데 이와 같은 사람은 어리석은 것이다. 이런 사람은 성도 하나님의 힘도 알지 못하는 것임으로 틀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22:29) 예수 이외에는 길도 진리도 생명도 없고 하물며 구원이 있을 수 없다. (4:21) 우리가 진실로 주의 발자취를 따라 가려면 복음의 진리에 대한 진지한 태도를 가져야 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의 계명을 잘 지켜야 하며 또 이것은 성서에 있는 그대로 믿고 순종하는데 있는 것이다. (8:33, 18, 22:18-19)

 

2.교회의 명칭

이름은 몸을 표시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이름 즉 명칭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4:12) 또 그리스도의 신부이다. (고후11:2, 5:22-32) 그러므로 교회는 주인인 그리스도의 이름을 따야 하는 것이다. 그 주인인 그리스도의 이름을 대신 해서 "루터 교회, 와 같이 어떤 사람의 이름을 붙인다든가 "메소디스트""장로교회"와 같이 교회감리의 특수한 양식을 표시하는 명칭을 부친다는 것은 곧 그리스도의 이름을 범하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성서에서 볼 수 있는 일반적 명칭은 "하나님의 교회"(고전1:2)"그리스도의 교회"인 것이다. 여기서 ""라는 말은 영어에서 "of"로 소속 또는 소유를 의미하는 접속 소유격이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교회"는 누구 누구의 교회. 또 무슨 주의의 교회가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교회임을 분명히 말하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 이외의 것에는 속하지 아니한다. 그러므로 여하한 교단, 교파등 인위적인 것에 속하지 않는 것임을 의심할 수 없다.

 

3.세례

세례는 하나라고 명기 되어있는 것과 같이 하나의 세례를 받아야 한다. 성서에 따르면 전신을 물 속에 잠그는 것이다. (8:36-38, 3:13-17) 어떤 교파에서는 물을 그릇에 담아서 그 물을 머리에 뿌려 준다고 하는데 이런 것은 성서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세례를 받을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성서에서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명령을 거역하는 것이 되고 부정하는 것이 됨으로 이간인 것이다. 그 중에는 성령의 세례를 주장하는 나머지 물의 세례를 주장하는 나머지 물의 세례를 부정하는데 이것도 그릇된 생각이다.(10:47-48, 3:5) 사도 바울은 성령을 받은 후에 세례 받았다. (9:18) "세례는 하나"라고 말할 때 성서는 물의 세례를 의미한다. 세례는 그 방법과 동시에 목적도 올바른 것 이여야 한다.

 

사도행전을 보면 예수를 구주로 믿을 결심을 한 사람은 곧 세례를 받았다. (2:41, 8:36, 16:33)

구원을 받을 결심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세례를 주지 않는 다는 것은 하나님께 불충성하는 것이다. 사탄에게 시간적인 여유를 주어서는 안 된다. 세례의 목적은 회개한자가 죄의 사함을 받기 위한 것이다. (2:38,22:16)그러므로 에테오피아의 내시의 경우와 같이 특정적인 교회에 소속되어 있지 아니할 경우에도 세례를 행할 수 있다. 또 세례를 받을 자격은 예수를 믿으면 처음 복음을 들은 사람도 곧 받을 수 있다. (8:36,16:33)

 

4.만찬

성만찬은 세례와 아울러 중요한 예식이다. 성찬은 예수님이 "세상의 죄를 제거하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써 죽으신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주께서 "이것을 행하라"고 명령해 주신 것 임을 주께서 재림하실 그 때 까지 행하여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성찬예식을 지키는 것은 주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속 하여 죽으셨다는 것을 세상 사람에게 널리 알리며 그 증인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성찬예식을 지키는 것은 주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속 하여 죽으셨다는 것을 세상 사람에게 널리 알리며 그 증인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성찬에 임할 때마다 자신을 주의 성전에서 깊이 반성하고 십자가의 사랑을 깨달으며 새롭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들의 신앙의 싸움이 끝나는 그 날까지 즉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까지 행하여야 하는 약속이다. (고전11:23-29)어떤 교회에서는 매년1회 내지 2회를 행하고 있는데 성경을 보면 초대교회에서는 "다같이 서로 교제하며 떡을 때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지냈던 것이다. (2:42-46)

 

이스라엘 민족은 구약시대에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켰으나 "피에 의한 새 계약이 나온 후부터는 매주 첫날에 모였다. 매 주일에 모이는 목적은 설교를 듣는 것보다는 떡을 떼기 위한 것 이였다." (20:7, 고전 16:2) "떡을 떼다"라고 할 때에는 그와 동시에 잔을 마시는 것을 의미한다. 초대 교회에서는 적어도 11회 이상을 같이 떡을 때면서 서로 모이는 일을 중요한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우리들은 우리자신을 이 은총에서 멀리 해서는 안되겠다.

 

5.신조

인간의 말고 지시에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헛되이 해서는 안 된다. (7:8) 그러므로 인위적인 신조 또는 교리를 만든다 는 것은 사람의 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치하는 불경을 범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신조의 필요성을 부인하는 것이다. (딤후3:17) (22:18) 이상과 같이 그리스도의 교회는 성서의 가르치심에 따라 순종하는데서 그 본래의 사명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땅과 하늘을 열 수 있는 열쇠 신성종

 

이 세상이 어떻게 생겼으며 지금은 어느 쪽으로 역사의 방향이 움직이고 있으며 장차 이 역사의 끝은 어떻게 될 것인가 라는 삼대 의문은 인류 정신사에 있어서 가장 많은 관심을 모이고 있다. 모든 시대의 현자들은 이 문제들을 풀어보려고 갖은 노력을 다 기울였었다.

저마다 하나의 해답을 남겨놓고 명을 다 하였으나 전 세기기에 새 진리이던 것이 금일에 와서는 상식 밖에서 천시 당하고 있는 실정이다. 지식에 지식을 더하고 사상 체계를 세우고 또 수정도 해보면서 정확한 과학적 해답을 찾아보려고 노력도 해보았으나 아직도 많은 학자들의 시간과 노력이 요구되고 있는 형편이다.

그러나 모든 세대를 통하여 동일한 정답이 주어져 있었다는 사실을 안다면 이 얼마나 통쾌한 일이겠는가? 조물주이신 하나님 자신이 그의 영원하신 경륜으로서 모든 역사의 시종과 안 밖과 방향을 다스리고 있음을 신앙을 통해서 깨달은 현인은 이렇게 탄복하게 된다. "모든 시대의 역사는 인간의 역사이나 이나 역사는 하나님의 섭리의 역사다." 하나님이 삼대 문제에 대하여 주시는 해답은 하나님 그 자신이다. 즉 하나님 자신을 성서의 인격 안에서 나타내 보이신 것이다. 영원한 말씀으로서의 성자(예수)는 전 우주에서 유일하신 신의 계시의 중심이며 태양이라고 할 수 있다. "만물이 주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다." 이 말은 우주 창조의 본질 즉 베일에 싸여 있던 우주의 과거를 설명해 주는 것이다.

(1:16, 1:3) "만물이 주로 말미암아 완성된다."이 말은 세상이 완성되어 가는 과정 즉 현재 역사의 방향을 설명해 주고 있다. (11:36)

"만물이 주에게로 돌아간다." (고전 15:28). 이것은 모든 세상이 종국적으로 완성되는 사실과 역사의 최후 목표를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 하나님은 모든 존재의 근본 바탕이 되는 살아 계신 그리스도 안에서 주로 나타나신 분이다. 하나님이 자기의 영원한 말씀을 역사상에서 인간에게 나타내실 때는 몇 단계의 과정을 거치셨으니 우리는 주의하여 살필 의무가 있다.

처음에는 선지자들을 통하여 구전으로 내려오고 다음에도 구전을 기록된 말로 전하시다가 마지막으로 기록된 말씀들을 모아서 성경이 되게 하셨다. 그러하므로 성경은 인류 전체의 책이며 시대를 초월해서 생명을 소생시키는 유일한 책이다. 이 땅 위해서 생기는 어려운 인생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좋은 열쇠가 있다면 바로 하나님이 인생에게 선물하신 성경 안에 있을 것이다. 우주와 세상과 인생 문제를 알고자 하는 이는 먼저 이 성경을 펼치므로 은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성경 없이는 인생은 한 점의 불꽃도 없는 암흑의 산곡에서 더듬어 헤매는 미물보다 나을 것 없다라고 탄식하던 어느 현인의 고백에 동감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인생 행로에 영원한 불이 되는 성경을 알도록 노려해야겠다. 이 위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면 할 수 록 나가는 길은 진리로 조명을 받을 것이며 그의 생활은 더 밝아질 것이며 짧은 평생은 영생으로 인도될 것입니다.(1:1,2)

 

신에게 선발을 받은 자는 자기의 덕을 모르고 신께 버림 다는 자기의 죄가 얼마나 큰가를 모른

. (파스칼)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다.

(30)

 

성경문답 코너

성경을 아십니까

여기 "성경 문답 코너"에 실린 열 가지 문제는 우리가 알고 있는 성경지식을 저울질 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해답(28페이지)을 보시기 전에 자신의 지식을 채점해 보십시오.

90-100

80-90

70-80

60-70

60 이하 좀더 공부하십시오

 

누구일까요?

1. 지으시던 일을 다하고 일곱째 날에 쉬신 분?

2.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을 마친 분?

3. 맹세하되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아니하고 마시지도 아니하겠다고 동맹한 자들?

4. 바벨탑을 지은 자?

5. 자식을 떨기나무 아래 둔 여자?

6.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신 자?

7.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 하리라"고 이브에게 말한 자?

8. 딸에게 시켜 세례 요한의 목을 요구하도록 시킨 여자?

9. 왕후 와스디를 명하여 왕후의 미모를 술취 한 방백에게 보이도록 한 자?

10. 인구조사를 하고 하나님께 죄를 범한 자?

 

참된 종교의 필요성 발행인 이영진

 

종교의 필요성을 논하기 전에 종교란 말의 올바른 개념을 밝힐 필요가 있다. 흔히 사람들은 종교적 교훈의 일부가 도덕적 교훈과 비슷한 점이 있다고 해서 그 유사점만을 생각하고서 어떤 시대와 사회의 도덕이 종교인 것처럼 생각하는 일이 있다. 또 어떤 자는 종교가 영적 세계를 다루고 있다고 해서 영적 세계를 다루고 있다고 해서 영적 세계를 다루고 있는 모든 것을 종교인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므로 필자는 종교의 필요성을 논함에 이어서 어떤 시대와 사회에 속하고 있는 사람들을 중용에 머물게 하기 위하여 인간이 구상하여 낸 도덕률이나 실제 세계를 무시하고 영만 주장하는 미신은 제외한다. 필자가 우리 인간으로서 절대 필요하다고 하는 종교는 어디까지 든디 초인간적이며 초자연적 존재를 인정하며 믿고 그의 힘을 경외하는 마음 위에 세워진 종교를 말함이다.

 

창세기 126절에서 하나님이 사람을 만들었을 때에 자기 형상대로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사람이 이 세상에 보이는 모든 피조물과 다른 점이 사람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는 사실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성품을 본 따서 지음 받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본래의 성품을 되찾으려고 옛날부터 끊임없이 노력해 왔다. 사도행전 1727절에도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 이로 되 그는 우리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하고 바울이 아덴 사람들에게 말한 기록이 있다. 이와 같은 초인간적이며 초자연적 존재를 인정한 것은 기독교로부터 시작한 것이 이거나 또는 유대인들만이 신의 존재를 인정한 것이 아니고 기독교가 오기 전 먼 옛날 인류 역사의 시작과 함께 시작된 것이며 유대인뿐만 아니라 헬라 사람, 중국사람, 일본사람, 한국사람 할 것 없이 이 지상의 모든 나라 사람들의 문화사 속에서 이 신의 조재를 인정한 내용을 엿볼 수 있다. 바울이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사도행전17:22)라고 한 말과 같이 아덴 사람만 종교성이 있는 것 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은 언제 어디서든지 종교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필자는 어떤 종교든지 가져야 할 필요성을 말하려는 것 이 아니고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든지 종교성이 있기 때문에 올바른 종교를 갖자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올바른 종교를 가려낼 수 있을까? 올바른 종교를 가려내자면 그 종교 창시자를 진위성을 밝혀야 한다. 즉 그 창시자의 하나님으로부터 왔는지 안 왔는지를 밝히고 그 가 과연 하나님의 사명감으로 가르치는지 그렇지 않으면 자기 철학을 가르치는 지의 여부를 또 밝혀야 G나다. 사도행전 538절에 보면 지금으로부터 2천년전 유대 사회의 최고 지도자의 한 사람인 가마리엘도 베드로가 전한 기독교의 진위성을 알기 위하여 아래와 같이 말하였다.

 

"이제 내가 너희들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을 상관말고 버려두라. 이 사상과 소행이 사람에 게로서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께로서 났으면 너희가 저희를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또 출애굽기 203절에 보면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고 하나님께서부터 오지 않은 여하한 종교도 하나님은 거절하고 있다. 혹자는 말하기를 불교나 기독교나 천도교나 마호멧드 교나 무엇이든지 열심히 믿으면 된다고 한다. 이것은 마치 사자 굴로 가는 길이 건 불구덩이로 가는 길던 어느 길이 건 상관치 말고 그저 길만 가면 된다는 말과 같다. 예수가 가르친 교훈을 바른 종교라고 하고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데는 그만한 이유와 확실한 증거가 있는 것이다. 예수님에 관하여는 예수님이 오시기전 훨씬 먼 옛날부터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 의하여 예언되어 왔고 기대되어 왔던 것이다.

 

그리고 이 예수님이 세상에 왔었을 때 예수님 보다 6개월전 출생하여 예수님이 세상에 알려지기 전에 유대인들에게 선지자로 존경받은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세상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증거 하여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115)고 예수님은 육적으로 나타나기 전에 벌써 영적으로 하나님과 태초부터 함께 계셨음을 증거 했다.

 

그는 또 "나는 그의 신들 메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1:27)고 예수님 인격의 완전성을 확연히 증거 했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1:29)라고 유대인들이 자기들의 죄사함을 받기 위하여 유대교에서 제물로 흠 없는 어린양을 바친 것 같이 만민의 속죄를 위하여 예수님이 희생당할 것을 예언하였다. 그 예언적 증거대로 예수님은 아무 죄없이 우리 인간들의 회심을 촉구시키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다. 세례요한은 계속해서 예수님을 증거 하여 말하기를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 인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 하였노라" (1:34) 고 예수는 하나님이 보내신 이 일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그 자격이 같은 분이심을 증거 하여.

 

또 예수님 자신의 말씀 가운데서도 세례요한이 증거한 것이 사실임을 증명하고 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14:6-10)고 세례 요한이 예수를 사람들에게 소개한 그대로 예수님은 자신에 대하여 말하였다. 이 하나님과 같은 인격을 소유한 예수님이 우리들에게 가르치기를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사람이 친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사랑이 없나니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15:12-14) 하였다. 예수님은 자기가 가르친 것을 스스로 실행하였다. 그는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사랑이 없다고 말씀한 그대로 목숨을 버려야할 가장 필요할 때에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렸던 것이다. 이로써 기독교를 희생의 종교라고도 하고 또는 사랑의 종교라고도 한다.

기독교의 중심 사상이 사랑, 봉사, 겸손인데, 이 사랑, 봉사, 겸손도 예수님의 십자가와 연관되기

때문에 그 의의가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없이는 그 사랑, 봉사, 겸손도 무의미하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요한일서3:16)고 예수님의 제자이시며 사도였던 요한이 그 옛날에 예수님이 일찍이 자기들에게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사랑이 없나니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15:13, 14)고 말할 뿐만 아니라, 그대로 예수님 자신이 그 요한과 다른 제자들과 오늘 자기를 믿는 사람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혔 음을 증거 했다. 이로서 기독교는 말로나 이성적으로만 사랑을 부르짖는 종교이기보다 사랑의 실천 종교라고도 볼 수 있다.

다음 봉사가 이 기독교 중심사상의 되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기독교의 교주이신 예수님 자신이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의를 (그 백성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20:25-27) 고 말씀하시고 또 그대로 그 당시 종들이 하는 일인 남의 발을 씻기까지 하셨다. 즉 그는 선생이시면 서도 자기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고(13:5-7)떠 만민이 그들의 죄악으로부터 구원받기 위해 그 대가로 귀중한 자기 생명을 바쳤다. (20:28) 그 뒤 이 봉사를 위한 첫 희생자로서 스데반이 있었고 (7) 야곱과 베드로와 기타 사도들 모두가 이 봉사로서 그의 생애를 바쳤다.

다음 겸손히 또 기독교 중심 사상의 하나를 이루고 있다는 것은 예수님이 이 겸손에 관하여 열심히 가르쳤고 (23:12, 14:11, 18:14) 또 그 예수님이 자신이 하나님의 본체이시면서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났으며 자기를 낮추고 죽기까지 하나님께 복종하셨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2:6-8)

 

이 사랑, 봉사, 겸손은 하나님의 성품이시며 (1:1-10), 하나님께서 사람을 자기 형상대로 만들었으니(1:26) 인간이 죄악에 빠지기 전에 소유했던 인간 본연의 성품이기도 하다. 기독교란 인간이 죄악에 빠졌기 때문에 잃어버린 이 인간 본연의 성품을 다시 찾자는 운동이다. 내세가 있으니 현세는 아무렇게나 살아도 좋다는 낙천주의적 사상이기보다 오히려 현세에서 하나님 명령에 순종하여 참되게 삶으로서 현세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뿐만 아니라 후세에서도 계속 하나님 축복 가운데서 하나님과 함께 영생한다는 사상이다.

 

신구약성서 모두가 예수님을 중심으로 하여 쓰여졌다. 구약성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사람의 혈통을 예수님을 보내실 때까지 그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어떻게 역사 하셨는가 하는 기록이고 신약성서는 자기 아들 예수를 보내실 만 한때에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보내어 이 예수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사람뿐만 아니라 그 후 인류 역사의 전 시대를 통한 세계 만민들이 타락한 죄악의 상태로부터 구원받는다는 하나님의 계신 인 것이다. 이 신약성경에 있는 하나님 계시의 약속대로 예수를 구세주로 믿고 이 구세주는 말씀에 순종하는 자는 죄악 세계로부터 구원받을 뿐만 아니라 옛날 우리 인류의 조상 아담이 조물주 하나님에게 불순종했기 때문에 실격 당한 하나님 아들의 자격을 회복 할 수 있고 하나님을 최고 영도자로 모신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사는 영광을 차지하게 된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아담과 하와의 범죄 하기 전 상태로 우리 인류를 회복시키려는 환원 운동이기도 하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 까지는 아담과 하와가 죄악에 떨어진 그 길로부터 구원받아 하나님에게로도 올 길리 우리 인류에게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우리 인류가 공자의 뒤를 다든지, 석가모니의 뒤를 따른다든지, 소크라테스의 뒤를 따른다든지, 혹은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저질은 미신을 섬기는 일까지도 그 다지 허물지 않았지만 이제 그 죄악으로부터 구원시키는 구세주 예수님이 오셨음으로 하나님께서는 어느 곳에 있는 사람을 무론 하고 모두 예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역사책을 공부하고 하나님에게로 돌아오는 올 바른길, 올바른 종교를 깨닫고서 여태까지 걸은 죄악의 길로부터 발길을 돌이켜 하나님의 길 바른 종교로 들어오라고 권면하여 또 명령하고 있다.

(3:16,17)"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 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예수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17:30,31)하고 2천년전 유대인이며 하나님의 영감을 받고 하나님의 도를 가르친 바울이 그 당시 어느 나라 사람들보다도 문화 수준이 높은 헤라 사람들에게 말씀하였다. 헬라 사람들은 이 바울과 다른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하나님을 알지 못했을 때 걸었던 옳지 못한 길로부터 그들의 발끝을 돌이키고 하나님 길로 들어와사 이 기독교 운동을 전개하여 기독교가 세계에 퍼지게 하였다. 오늘 우리 동양 사람들도 하나님의 도를 올바로 가르쳐 기독교의 길로 행하지 않으면 우리의 퇴폐적인 생활은 영원히 청산하지 못할 것이다.

 

우정코너

 

주님의 교회에서 취미를 통해 사귈 수 있는 우정란을 만들었사오니 여러분의 많은 이용이 있기를 바

랍니다. (: 펜팔을 원하는 사람은 성명, 주소, 성별, 연령, 취미등을 관제 엽서에 적어서: 영등포

우체국 사서함6호 우정 코너 담당자 앞으로 보내 주십시오.)

 

홍민자 서울 특별시 성동구 신당동 368-78. . 21. 우표수집.

이양회 영등포구 등촌동 등촌 중학교. . 23. 미화.

이향숙 영등포구 양평동 415. 17. 모험.

황영해 영등포구 양평동 647. 16. 음악

서혜자 영등포구 공항동 106. 16. 독서

이양순 영등포구 공항동 56. 16. 음악. 독서

권영구 영등포구 화곡동 207. 18. 감상. 독서

김은자 영등포구 화곡동 383. 15. 감상. 독서

김현근 영등포구 화곡동 232. 15. 독서

최덕배 영등포구 방화동 568. 15. 독서

고길상 영등포구 등촌동 221. 27 . 웅변, 산책

 

참된 삶의 초상화 로티 B. 홉스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인류역사의 중심인물이 되어왔다. 바퀴는 수레를 떠나서 존재할 수 없는 것과 같이 예수와 성서는 인류역사에서 항시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인류가 죄악의 함정에서 허덕이고 있을 무렵 갈보리 산상에서 돌연히 찬연한 빛이 비취었으니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빛이었던 것이다. 이 빛이야말로 금일에 이르기까지 수세기 동안 우리 인간에게 변함 없는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사랑의 구원을 비추어온 것이다. 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고독한 삶이 마침내 인류 역사의 방향을 완전히 전환 시켰고 세상의 지축을 진종시키었다.

한 귀여운 아기를 낳고 여러 면으로 바라보노라면 그의 개성을 이루고 있는 모습이 각기 다른 것과 같이 우리인류 생활에서 지금까지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예수님이 아름다운 삶을 발견 할 수 있다. 곧 마태는 예수님을 유대인에게는 한 왕과 그의 왕국에 관한 분으로 나타냈으며 마가는 기적을 행하신 신기한 사람으로 보았으며 누가는 인간을 예찬하는 희랍인들의 이상형으로 요한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의 구세주로서 하나님의 화신으로 오신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여 시편기자는 "내가 여호와께 칭하였더면 한 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리니" (27:4)라고 기록하고 있다. 인간은 항상 하나님을 만나 보기를 갈망하여 왔다. 한 소녀는 "하나님, 제가 기도할 때에 하나님을 뵙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하였다. 구약시대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었으나 하나님의 얼굴을 본 일은 없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여 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다. 나사렛 예수의 아름다운 생활을 바라볼 때에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모습을 더듬을 수 있다. (14:9) 예수 그리스도의 생활이 우리에게 증명해 주는 것이 하나 있다. 즉 인간이 타고난 외모적이 특성 여하를 막론하고 인간은 참스런 미를 성취할 가능성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외모적이 모습에 대하여 기록에 남은 것은 없다. 그러나 이사야3:2에서 보면 흠모 할 것이 없다고 한 것을 보아 많은 사람들은 그가 미남은 아니였으라고 생각하고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내적인 미를 압도 할 만한 것은 지금까지 이 세상에서는 하나도 없는 것이다.

목적이 있는 생활 예수님은 죄인을 구속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 그리하여 그의 생활은 모름지기 이 영화로운 목표를 중심한 생활이 없으며 그밖에 행하신 일들을 자연히 따르게 된다. 부수적인 일이었다. 이 뚜렷한 목표는 그에게 영적 태세를 갖추게 하였다. 거치른 세파에 요동치 않고 승리를 거둘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였던 것이다. 예수님에게도 유혹이 있었으며 고독과 슬픔, 피로함, 불 의한 지도자들, 거짓형제들 종교적 차이들이 있었으나 이런 것들이 그의 평생의 푯대를 조금도 좌우하거나 거룩한 사업의 균형을 잃게 하지는 못했다. 그리스도가 소개한 그 풍성한 삶은 그의 추종자들에게 주려고 한 것인데(10:10) 이것은 그저 정처 없이 떠다니든가 사소한 일에 자신을 소모시키는 생화로서는 도저히 이를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우리생활에서도 그 목표가 의롭지 못할 때는 성취될 수 없는 것이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니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 지어다. 이것이 사람이 본분이니라"(12:13)

 

이 전도자의 말은 인생의 올바른 푯대를 말해두고 있을 뿐 아니라 그 풍성한 삶의 공식을 요약 해놓고 있다. 우리에게 삶이란 단 한번 밖에 부여되지 않고 있다. 고로 우리는 있는 지혜를 모두 동원하여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생의 목표를 재검토하여 이 세상에서 우리의 모든 수고가 좋은 결과를 가져 올 수 있도록 긴 안목을 가지고 내다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권위를 존중하고 순종하심

누가복음 251절에 보면 예수님은 부모님께 순종하였다. 어떤 상전 주인이 구인 광고를 냈는데 [소년을 구함 부모에게 순종하는 소년이 여야 됨]이란 내용이었다고 한다.

 

이 순종하는 교훈을 어렸을 때 배운 사람은 마음의 평안과 기쁨을 쉽사리 얻을 수 있을 것이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마음이 초조하고 처세하기 곤란할 것이다. 왜냐하면 권위에 순종하여야 한다는 원칙은 모든 분야에 다 미치기 때문이다. 즉 학교 당국자에게, 민법에게, 손위 사람에게, 남편에게, 고용주에게, 더욱이 하나님에게 복종하여야 하는 것이다.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왔나이다." (10:9) 예수님은 그의 전 생애를 통해 하나님의 권위에 복종하고 따랐다. 그는 친히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었으며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 명령에 복종하여야 된다는 것을 가르치셨다. (5:8,9)

 

동정과 온유

다만 허약한 인격자만이 잔인하다. 우리 주님은 참으로 강한 분이 이었으므로 온유 겸손할 수 있었다. 그가 어린이들에게 부드럽게 대하시고 (18:15-17) 죄인과 버림받은 사람들은 사랑하신 것을 보아서 알 수 있다.(7:36-50, 4:7.30) 예수님은 슬퍼하는 자들과 같이 슬퍼하셨다. 그의 심정은 그을 배척하는 사람들까지 협조해 주시고 더구나 예루살렘의 구원받지 못한 수많은 영혼을 위하여 탄식하신 일도 있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너희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 하였도다. (13:34) 예수님이 세 번 울기까지 하셨다는 성서의 기록은 예수님이 충심으로 남의 행복에 대하여 염려 하셨다는 자비한 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눈물이란 성스럽게 되는 것이고 약한 것보다는 강함을 나타낸다.

 

확신과 불굴의 자세

예수님은 사랑이 충만하고 온유하신 분 이였으나 하나님의 진리 문제를 가지고도 전하여 왔을 때 그는 유다의 사자라고 불리웠다. 우유부단한 것을 예수님의 정신인 것 같이 생각하는 사람도 있으나 이것은 전혀 그르친 생각이다. 예수님께서는 진리는 확고하고 불변한 것이라고 가르치셨고 그 진리에 복종하여야 할 것을 촉구하셨다. 이 같이 강직하고 타협하지 아니하는 교훈을 예수님이 친히 말씀 가운데서 찾아보면 이런 것들이 있다.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가운데서 죽으리라" (8:24)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14:6)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13:3)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라" (7:14) 이 아름다운 본보기를 따르려면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를 옹호하기 위하여 분연히 일어날 용기가 있어야 할 것이다.

"선생님 당신의 교훈은 너무나 이해 곤란하고 정말로 편협합니다."라고 말할 사람이 오늘날 많이 있을 줄 안다. 그러나 아무런 큰 유혹이나 압력이라도 예수님을 유혹하여 비 진리와 타협하게 하지는 결코 못하였던 것이다.

 

남에게 기쁨을 나누어주는 그는 슬픔의 사람이었다. 사람이 무거운 짐을 운반하는 것을 보고 그 사람의 힘을 측정할 수 있는 것과 같이 영적이 힘도 그 사람이 어디까지 참을 수 있는 가를 보아서 알 수 있다. 예수님의 그 파란 많은 생애가 그 부당한 죽음이 오히려 우리에게 오랜 세월을 두고 영웅적인 본을 보여 줌으로 고통과 핍박과 낙망에 떠는 수 많은 사람들에게 어려운 세파를 극복해왔다.

가시 면류관에 피로 물드리신

당신의 아름다움은 지니신

슬픔에 비길 수 없나이다. ~. . 랜킨~

 

이 장엄한 기쁨은 극심한 고통을 당해 본 사람만이 이해 할 수 있는 것이며 따라서 슬픔으로 깊은 상처를 입었던 사람들이 참 행복을 차지할 수 있는 것이다. 음악이나 문학등 위대한 예술 걸작품들을 상한 마음에서 품어진 것이 많다. 그리스도 자신은 슬픔의 사람이었으나 그가 가져다준 이 기쁨은 인류가 처음 배운 참 기쁨으로 그는 제자들에게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권고 하셨던 것이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 역시 심히 무거운 십자가의 짐을 지고 있으면서도 그들의 이름이 하늘 나라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기쁨을 줄 수 있는 원인이 될 수 있다.

 

하나님과의 친근한 교제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교제하여야 할 것을 아시고 주 기도하셨다. 즉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신 후 사도들을 택하시기 전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십자가상에서 각각 기도하신 사실을 볼 수있다. 우리는 스스로 서기에 떨릴 때에는 무릎을 끊고 기도를 하여야 하겠다. 가장 강직한 사람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지하는 사람을 말한다. 미국의 대통령 아브라함 링컨은 "나는 아무데도 도움을 갈곳이 없음을 알고 몇 번이고 무릎을 끊고 기도 할 수밖에 없었다."하였다. 하나님의 존재를 항상 인식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계속적인 보호하심과 임재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인생이란 우리 스스로 다루기에는 너무나 벅찬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을 능히 보호하실 수 있고 즐거이 보살피신 다는 것을 우리가 알 때 위안이 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참새 한 마리 떨어지는 것에서 들에 백합꽃을 옷 입히시는 것등 이 세상에 만물을 주관하시고 계신다.

 

살아 있는 문자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1:1) 이것은 헬라어의 첫자와 끝자이다. 그처럼 예수님은 처음과 끝이 되시고 그 사이에 있는 모든 것을 포괄하신다는 뜻이다. 이 훌륭한 사상은 역시 우리의 이해력으로는 미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섭리하시는 것 중 그리스도를 중심하지 않은 것은 없다. 인간의 영적 육적 욕망도 예수님 안에서 채워지지 않을 것이 없다. 우리에게는 그리스도가 세워주신 그 모범으로 족한 것이다. "그리스도 너희를 위하여 곤란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벧전2:21, 22) 고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유대 나라의 한 소년이 랍비(선생)에게 이런 질문을 하였다고 한다.

"우리 메시야가 오신다고 하면 나사렛 예수보다 어떤 탁월한 것을 지니셨겠습니까?" 물론 당치도 않은 질문이고 예수님 외에 메시야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 글에서 예수님에 대하여 몇 가지 그의 아름다운 점을 생각해 보았으나 다음 기회에서는 그의 거룩함을 여러 면에서 생각해 보기로 하겠다.

예수님은 메사야였다. 오직 한 분밖에 없는 구세주였다. 그의 진리가 구원의 말씀과 우리를 도와 주고 위로해 주시겠다는 언약의 말씀이 예수님의 깨끗한 마음에서 흘러나왔다. 그는 "다니면서 선을 행하셨다." (10:38)는 것이 그의 전기인 것이다. 우리가 가장 찬양하는 사람은 아름다운 인격자인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되는데는 이 세상에 있는 그 무엇보다도 참된 인간성이 요구되는 것이다. 우유 부단한 사람은 이 같은 인력을 가질 수 없는 것이다.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히 육체로 거하신다" (2:9)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었고, 샤론의 장미가 되었고, 골짜기의 백합화 나는 새벽별 생명의 떡, 선한 목자가 되셨다. 또한 그는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시며 생수가 되신다.

 

인간의 작은 그릇에다 끊임없이 흐르는 물을 채워 보려고 한다면 그 물은 끊임없이 흐르고 그 근원은 다하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은 세상의 빛이시고 부활이며 생명인 것이다. 이 예수님을 통하여서 만이 죄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고 고달픈 인생에서 휴식을 얻을 수 있다. 이런 신기한 분이 우리 인간에게 친구가 되어서 교제하자고 하시며 그 분의 능력을 우리에게 허락하시겠다고 하시고 그의 아름다움을 본받으라고 우리를 초대하시고 계시는 것이다."볼찌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3:20)

 

수필 모순 최일요

 

"가는 강의 저편에 살고 있다" 파스칼

뜻하지 않던 휴교가 있던 고향에 내려가 그간 헤어졌던 벗들을 만날 우의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벗이란 막연한 사이여서 구김 없이 담소할 수 있어서 좋았다. 모든 것이 시원스럽게 유쾌한 대화였다.

그러나 S라는 벗에게 들은 이야기만은 내 마음에 잊혀지지 않고 심각한 여운을 남기고 있다. 내용인즉 그 벗이 담당하고 있는 교회에서 얼마 멀지 않은 곳에 험악한 돌산이 있다는 것이다. 사변 직후 공비의 만행이 한창 치열할 때 토벌 작전에 나섰던 경찰1개 소대가 전멸 당했다는 얘기였다. 그 벗은 그 가파른 고개를 넘을 때마다 전쟁이 남기고 간 슬픈 사연 속에서 애증의 모순을 생각하게된다는 것이었다.

 

아무튼 그 비극을 적나라하게 기록할 수 없지만 전쟁의 경험을 치르고 난 우리는 그 참상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현대인은 모두 전재의 비참 앞에 무기력해진 사람들이다. 아무런 이유를 찾지 못한 채 죽어야하고 죽임을 당해야 하는 게 현대인에게 강요되는 유형적인 제도요 법칙이다. 파스칼은 사람이 죽임을 당하는 이유를 "강의 저편에 살고 있기 때문"리고 말했다. 가 이쪽에 있는 사람을 죽였다면 살인자가 되지만 저쪽에 있는 사람을 죽였을 때는 용사이며 정의의 인간이 된다고 말하고 있다. 법은 특정한 사회의 전통과 사상 그리고 습관에 따라 심판의 기준을 세우고있다. 몇 백만 유대인을 학살한 하이만은 "나는 국가의 명령을 수행한 일개 하수인에 지나지 않는다."고 자기의 행위를 변명했다.

그는 전 세계인의 증오의 눈총을 한 몸에 지닌 채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지만 당당한 나치스의 용사요, 정의의 수행인 이었음에 틀림없다. 역사의 제반 사건은 그것이 발생한 사회적 여건에 따라 선이 될 수도 있고 악이 될 수도 있다. 이것은 확실한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념의 해협에서 애매한 죽임을 당했는지 알 수 없다. 인간은 법을 제정하고 또 그 법안에 갇혀 사는 모순을 연출하고 있다. 그러나 이에 반하여 성서는 행위(사건)자체로서 선악을 판가름한다. (벧전1:!7, 16:27, 2:6, 34:11, 62:12) 그리고 모순된 세상에 법엔 용서가 없지만 성서는 가장 공정한 입법이면서도 죄를 용서하는 기독교를 기초하고 있다.

 

오늘날 기독교는 이 모순을 제거하기 위해서 공헌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해와 용서로 엮어진 반복 없는 세계가 곧 "하늘 뜻이 땅에 이루어진 세계"일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실현성 없는 꿈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이 허구의 꿈이 되지 않기 위해서 노력해야만 한다. 불가능을 가능케 믿는 것이 종교요 기독인이 신념과 불굴의 의지여야만 한다.

 

 

성경문답코너 해답

1. 하나님 (2:2-3) 2. 그리스도 (10:4)

3. 40명이 상의 유대인 (23:12-13, 21) 4. 인간의 자손 (11:4-5)

5. 하와 (21:12-16) 6. 하나님 (3:9)

7. (3:4) 8. 헤로리아로 (14:6-11)

9. 아하수에 (1:10-12) 10. 다윗 (삼하 24. 대하21)

 

아더.리브스 홀론 형제 별세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해 활약하시던 홀톤 형제가 지난 88일 미국에 있는 자택에서 영민 하

셨습니다.]

 

성경개요 하딩(Daniel Hardin)

성경은 66권의 여러 책이 합하여 하나의 완전한 책을 이룩한 것인데 약 2000년이란 긴 세월동안 여러 사람들에 의해서 (하나님의 감동으로)쓰여진 것입니다. 이렇게 방대한 분량의 서적이 한 권의 책으로 엮어져서 서로 완전한 조화를 이룬다는 것은 사실 기적이라고 할만합니다. 이렇게 책이 완전하고 서로 모순됨이 없다는 것은 비단 성경책의 내용에서뿐만 아니라 역사적 사실과도 부합됩니다. 이러한 완전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은 오직 하나님 자신만이 가능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 안에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관계를 이야기하고 있으며 또한 인간에게 주실 하나님의 위대하신 축복의 약속에 관한 것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만드신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과 같은 완전한 분이 이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만드시지 않았다고 하면 모순과 혼란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만드신 것은 모순 없는 정연한 것으로서 하나님은 이 성경을 통하여 그의 오직 하나되고 조화된 사실을 통하여 나타내었습니다.

 

구성

다음부터 창세기의 첫 장부터 나오는 여러 가지 연극의 무대가 전개됩니다. 하나님은 변하시지 않으시며 언제나 일정하여 시간에 대한 아무런 제한을 받지 않으십니다. 이는 이 세상에 오셔서 여러 가지 위대한 일들을 남겨놓으신 그의 아들 예수도 꼭 같으십니다. (1:1-7, 17:24, 벧전1:20, 13:8)

첫째날, 창세기 1:1,2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혼돈이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 하니라, 땅과 하늘이 창조 되였습니다. 다만 서로 구별 없이 혼돈하였습니다. 형체도 없이 서로 혼합하여 섞여 있습니다. 왜냐하면 빛이 없고 서로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무형체로 부터 모든 것은 시작되었습니다. 또한 이 무형체 속에 유성과 지구가 생겨날 가능성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창세기 1:3,4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그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하나님은 빛을 창조하신 다음 그 빛을 어둠으로부터 분리 시켰습니다. 빛이 어둠 속에 섞여 있을 수 있겠습니까?

둘째날, 창세기 1:6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누게 하라 하시고, 하나님께서는 또 무형체와 공허로부터 하늘과 땅을 분리 시켰습니다. 하늘과 땅 사이에 나중에 새들이 날아다닐 창공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1:20)

셋째날, 창세기 1:9,10 "하나님이 가라사대 천하의 물이 드러나라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창하시고 물을 바다라 칭하시니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잠시 창공 위에 머물러 있던 물을 하나님께서 처음으로 형체를 갖춘 땅 아래 모이게 했습니다. 창조되어진 땅은 이제 형체를 갖추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지구와 물이 더 좋은 형체를 가지고 분리되었습니다. 이제 모든 것은 아름다운 풍경을 창조할 수 있도록 되었습니다.

창세기 1:11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풀과 씨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열매맺는 씨가 과목을 내라 하시매 그대로 되어" 하나님께 서 이 땅위에 처음으로 식물을 지었습니다. 식물은 스스로 번식하고 또 스스로 영속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교회

치정 그리스도의교회

김포 국제 공항에 연해 자리잡은 치정교회에서는 지난 714일부터 5일간 효창교회 신성종 형제를 모시고 부흥집회를 갖었다. 8백여명이 참석한 이 집회에서 주님의 은총의 힘으로 42명이 세례를 받고 한 식구가 되었다. 이 교회는 2년전 파스리 형제가 세운 교회로 얼마전 동 교회 권영국 형제가 기증한 20여평에 아담한 현대식 건물을 마련하고 현재 약 65명의 교인으로 한국 기독교 대학에서 수학중인 김송차 형제가 시무하고 있다.

 

제주도로 간 최치덕 형제

행정 대학원 졸업반이며 고시에 합격한 최형제는 오랫동안 효창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통역으로 수고하는 중 지난 71일 제주도 방송국 방송 과장으로 발령을 받고 부임하였다.

 

박규헌 형제소식

도미 유학중인 전 효창 그리스도의 교회 전도사이며 한국 기독교 대학 교수로 수고하는 박형제는 이 반 학기 방학을 맞아 지난 6월에 귀국한 기독교 대학 이사인 최수열 형제와 미국 전국에 전도 여행을 떠났다고 한다. 이번 전도 여행은 한국 그리스도의교회 현황을 미국 형제들에게 소개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이웃돕기 운동

이웃돕기 운동이 날로 무르익어 가는 요즘임 효창 그리스도의 교회 학생회에는 유근수 형제의 지도 하에 효창 고등공민학교 학생들에게 백 여권의 서적을 모아서 전달함으로 학구열을 북돋아 주는 따뜻한 미담이 되고 있다.

 

국경을 초월한 약혼

지난 76일 한국회관에는 색다른 약혼식이 리철선 선교사의 주례 하에 이루어 졌다. 현재 한국 기독교 대학에 대학중인 수 빈 판분 태국 학생과 동 대학 김인규 자매와의 이 약혼은 동대학 유학으로는 두 번째로 갖은 것으로 졸업 한 후에 결혼하여 귀국할 것이라고 한다.

 

한국을 이해하려는 분들

716일 부터 일주일간 한국 기독교 대학 맥더밑 자매와 미쎄스 알렌은 동 대학 김융자 자매를 대동코 부산, 울산, 충주, 대구, 부여등지를 돌아보았다고 한다. 이번 순회 목적은 한국교회 현황및 실정을 파악하기 위한 것으로 성공리에 마쳤다 고한다.

 

주한 미군 그리스도의교회

수 없는 미국 형제들이 한국 땅을 밟고 그들의 신앙을 지속하기 힘들게 됨에 뜻 있는 형제들의 노력으로 삼각지에 약 13.000불에 달하는 대지를 구입하여 주한 외국인을 위한 현대식 교회 건물이 세워질 것이라고 한다.

 

편집후기

턱을 치받는 삼복 더위에 참빛이 산실엔 기쁨과 바쁨에 더위 마저 잃는다. 이렇게 감쪽같이 새로운 신앙지 참빛을 어둠에 내놓게 됨은 바로 영광 그것이다. 숨막히는 어둠에 대한 우리의 절규이다......

창간호라고 법석을 떨어가며 잔치를 벌이고 십진 않았다. 단지 있는 그대로 마련한 것이, 우선 그리스도의 교회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였다. 이에 효창동 교회 베어득형제의 글을 실리면서 이채화 선생의 그리스도인으로서 나의 주장과 본지 편집겸, 발행인인 이 전도자의 옥고를 실렸다. 특별히 반가운 것은 한국 기독교 대학장인 다니엘 하딩 형제의 삽화로 된 성경 개요로 이는 분명한 성경 지식에 샘터가 될 것을 믿어 마지않는다.

 

영광의 잔을 위해 어둠 속에 빛의 씨앗을 심어 보려는 우리의 노력에 오직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만을 바라는 것이다. 참빛이 있는 그곳에 광명이 있음을 마음속에 누비며 힘차게 첫발을 어둠 속에 내딛어 본다.

 

참빛 창간호 제1

1964725일 인쇄 (10)

196481일 발행 6개월 50

1100

 

편집겸 발행인: 이영진

인 쇄 인: 정홍구

발 행 소: 참빛사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등촌동 산 61번지 영등포구 우체국 사서함 6호 전화3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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