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천교회(현 서호중앙교회) 어정교회(현 기흥교회)
이원근 전도자는 1917년 8월 11일 황해도 봉산군 사인면 만화리에서 부친 이규달과 모친 김경달 사이에 6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집안은 엄격하고 완고한 유교 가정이었으나 그는 홀로 신앙생활을 하였다. 열심히 교회에 다니면서 목사님으로부터 신앙지도를 받고, 체계적인 성경공부를 하면서 장차 목회자가 되겠다는 꿈을 꾸었다. 그러나 전통적인 유교 가정에서 목회자가 되기 위한 그의 꿈은 쉽게 이룰 수가 없었다. 부모님은 강력하게 반대하였으나, 워낙 결심과 의지가 확고하여 그의 길을 막을 수는 없었다. 결국, 부모님은 그의 목회자의 길을 허락하였다.
목회자를 향한 큰 꿈을 안고 23세 되던 해에 평양 숭실고등성경학교에 입학하여 신학공부를 시작한다. 이때는 제2차 세계대전 말기로 일본의 핍박과 착취가 극심하던 시기이다. 조선총독부에 의한 기독교 학교들의 교육과정 검색이 심하였고, 교회가 신사참배 문제로 어려움을 겪던 때이다. 결국, 본인이 다니던 학교와 기독교 학교들이 폐교하게 되면서모든 과정을 이수하지 못하고 퇴교한다. 일본경찰은 신사 참배하지 않는 목회자와 기독교인을 색출하여 감옥에 가두는 상황이 되자 신앙을 지키기 위해 만주로 피신한다. 만주에서도 못다 한 신학 공부를 독학하면서 무보수로 교회를 섬긴다. 만주에서의 생활은 영적으로는 풍요로웠지만 육신적으로는 고생이 많아 추운 날씨에 동상에 걸려 발톱이 빠지기도 하였다. 이즈음 고국의 교회들이 목회자 부족으로 예배조차 드리지 못한다는 소식을 듣자 위험을 무릅쓰고 자진 귀국한다.
고국으로 돌아와 보니 목회자들이 신사참배 거부로 감옥에 갇히고 만주로 피신하여 예배조차 드리지 못하는 교회들이 너무 많았다. 1941년부터 황해도 봉산군 신수면 장로교회를 시작으로 함경남도와 황해도에 소재한 여러 교회에서 목회 활동을 하였다. 일본 경찰의 검속을 피하여 목회 활동을 하기가 쉽지는 않음에도 죽으면 죽으리라는 신앙적인 결단과 각오로 목회를 하였다. 때로는 경찰에 구속되고 핍박을 받으면서도 자비량으로 목회의 자리를 지켰다. 드디어 1945년 해방의 감격을 맞게 되었다. 이제는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에 한껏 부풀었으나 북쪽 지역이 공산화되면서 교회에 대한 핍박이 일제 강점기보다 더욱 심하였다. 년여 동안 온갖 핍박에도 굴하지 않고 목회를 계속하였으나 교회가 폐쇄되고 생명의위험을 느끼게 되면서, 북한에서 더는 목회를지속할 수 없다고 판단되어 1947년 월남을 결행한다. 가족과 함께 월남하는 과정에 북한 경비원에게 발각되어 해주경찰서에 구금된다.유치장에 갇혀 생명이 경각에 달린 절박한 때에도 태연하게 흔들림 없이 옥중 기도를 하면서 가족들에게 하나님의 도움의 손길이 있을 것이라고 안심시킨다. 과연 그의 말대로 인근지역 옹진군 식여리 교회에서 목회할 때 함께하던 교인의 도움을 받아 일주일 만에 기적같이 풀려난다. 유치장에서 풀려난 그 밤에 지체하지 않고 안내자의 인도로 임진강을 건너 남쪽으로 피난한다. 막상 월남은 하였으나 남한에는 그 어떤 연고도 없어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할 때에 친지의 소개로 전라남도 영암군 군서면 소재 신흥교회의 목회자로 부임한다. 영암으로 내려가서 남한 생활에 적응하며, 열심히 목회하였다. 남한으로 피난 내려온 후로 전라남도 영암군과 나주시에 있는 다섯 교회에서 목회하였는데 한곳에 오래 머물러 있은 적이 없다. 길어야 3년이었고, 어떤 때에는 일 년에 사역지를 두 번씩 옮긴 적도 있었다. 그 이유는 어느교회에서 목회자가 필요하다거나 복음을 전해야 할 새로운 곳이 생기면 가족보다는 목회자의 소명을 항상 우선시하였다. 독천교회에서 성실하게 목회를 하던 중, 1950년에 한국전쟁이 일어난다. 이원근 전도자는 북한에서 공산주의에 의한 교회 핍박을 뼈저리게 경험하였기에 피난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피난길은 북한에서 월남할 때 못지않은 고행길로 이루 말할 수 없는 전쟁의 온갖 참극을 목도한다. 북한군 검문에 걸려 생사의 갈림길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으로 기적적으로 빠져나오는 경험도 하였다. 전쟁을 피하여 부산에 도착하였으나 갈데가 없어 피난민 수용소에서 생활한다. 수용소 생활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의 지옥이었다. 이원근 전도자는 이런 환경에서도 복음을 전하려는 일념으로 목회자가 부재한 수용소 근처 우암동 장로교회를 섬긴다. 피난 목회는 피난민을 경제적으로 돕고 영적으로 위로하고 희망을 열어주어야 하는 일인다역의 목회이다. 여러 가지로 여의치 못한 상황에서도 열심히 목회하던 중, 연합군이 진입하자 그해 12월에 독천교회로 다시 돌아온다.
1957년 전남 영암군 서호면 엄길 장로교회에서 목회하고 있을 때, 우연히 “그리스도의 교회는 무엇인가?”라는 소책자를 읽게 되면서 큰 충격을 받는다. 지금까지 신학교에서나 목회하면서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성경에서 말하는 교회를 접하게 되었다. 소책자의 설명에 따라 일일이 성경을 찾아 대조하면서 참된 교회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된다. 언제나 옳은 것을 알면 즉시로 실행하는 성품인지라 바로 그리스도의 교회로 환원을 결단한다. 이원근 전도자는 광주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목회하며 양로원을 운영하던 강순명 전도자와 연결되어 자주 만나 성경에서 말하는 교회에 관해 토론하였다. 강순명 전도자도 평양에서 신학교를 다녔기에 연결될 수 있었다. 그 후 그리스도의 교회 교역자 모임에 참석하여 이흥식 전도자와 최수열 선교사를 만난다. 이흥식 전도자는 이원근의 환원을 환영하고 선교사들에게 소개하였으나 선교사들은 별로 환영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 이유는 그때 전도자 한 분이 선교사의 재정적인 도움으로 세운 교회 건물을 갖고 장로교로 돌아간 사건 때문이었다. 그러나 다음 해 봄에 최수열 선교사가 교회를 방문하여 격려함으로써 오해는 해소되었다. 그 이후로 이원근 전도자와 최수열선교사의 깊은 우정은 소천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리스도의 교회로 환원하였으나 호남지역에서는 목회할 교회가 없어 본인이 개척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목회하던 지역에서 교회를 탈퇴하고 다른 교회를 개척하는 것은 신념과 용기가 필요하다. 목회하던 교회와 지역사회로부터 소외와 차별의 눈길을 극복하기도 어렵지만 당장 예배처소를 마련하는 것이 어려운 과제이다. 그런데도 성경적인 교회를 세우겠다는 일념으로 1958년 4월 13일에 가족여섯 명과 청년 한 명으로 가정교회를 시작하였다. 청년 형제가 자기 집을 예배처소로 제공하였으며, 이 교회가 첫 번째 개척한 장천 그리스도의 교회이다(현 서호중앙교회). 개척교회로 교인은 없고 가정생활은 무척 곤궁하였다. 이북에서 피난 왔기에 연고자가 없어 경제적으로 도움을 받을 데도 없는 어려운 상황이다. 자녀들은 학업을 계속할 수 없게 되었고, 동네 농사일을 도우면서 근근이 생활을 이어갔다. 이런 딱한 사정을 전해 들은 이철선 선교사가 미국교회에 도움을 요청하여 예배처소로 작은 초가집을 구입하게 되었고, 최소한의 생활비도 지원받을 수 있게 되었다. 교회가 안정되어 가자 이웃에 있는 미암면 춘동리에서 새로 교회를 개척하게 된다. 두 번째 시작한 곳은 면사무소 소재지로개척하기에는 적절한 지역이지만 연고는 아무도 없었다. 다행히 장로교인 이명옥 청년을 만나게 되고 그의 도움으로 두 번째 교회를 개척한다. 1959년 4월 그의 집에서 첫 예배를 드림으로써 미암 그리스도의 교회가 시작되었다. 두 교회를 목회하면서 교인 가정을 심방하는 것이 무척 버거웠다. 동행할 교인들이 없어 사모님과 자녀들도 여러 가정을 함께 방문하면서 심방 예배를 드렸다. 어떤 가정은 서너시간 걸어서 가야 했고, 때로는 하룻밤을 자고 와야 하는 가정도 있었다. 이처럼 거리에 상관없이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전도 활동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원근 전도자는 두 교회를 시차를 두고 목회하면서 장천교회의 전하영 형제와 미암교회의 이명옥 형제에게 성경을 가르쳐 양육한다. 두 형제에게 점차 교회를 맡기었고, 결국 각기 제2대 교역자가 되어 교회를 섬기게 되었다. 영암지역에서 두 교회를 개척하여 반듯하게 세운 후에는 경기도 수원지역으로 옮겨 세 곳에 교회를 개척한다. 세 번째는 경기도 용인시에 어정 그리스도의 교회(현 기흥 그리스도의 교회)를 개척하였다. 네 번째는 1966년 수원시 국립양로원안에 세운 그리스도의 교회와 다섯 번째는 1967년 경기도 구성읍에 상하리 그리스도의 교회를 개척하였으나, 그의 사후에 이런저런 연유로 인해 소멸하였다. 개척자의 삶이 그렇듯이 경제적으로 궁핍함을 면할 길 없는 가난한 삶의 연속이다. 이원근 전도자는 다섯 곳의 교회를 개척하면서 아무런 지원 없이 시작하였기에 사례비를 받지 못해 가족의 생활은 힘들고 어려웠다. 처음에는 이북에서 피난 내려올 때 갖고 온 패물을팔아 밀가루죽을 쑤어먹는 것이 고작이었다. 밀가루에 쑥이나 나물을 섞어 쪄먹기도 하였다. 때로는 동네에 일거리가 있으면 가족들이 나가서 도와주고 보리밥을 얻어먹기도 하였다. 가난한 개척자의 생활을 견딜 수 없어 사모님이 장터에 나가 장사를 하였으나, 이원근전도자는 장사하는 것을 반대하였다. 장사를할 수 없었던 사모님은 가족의 생활을 위해 집에서 자수와 뜨개질로 생활비를 충당하였으나 이것으로는 감당이 되지 않아 닭, 오리, 돼지 같은 동물을 사육하였다. 어느 때는 돼지 한 마리를 종돈(種豚)으로 키웠는데, 북한 반공포로가 결혼하는데 돈이 없자 그 돼지를 팔아 결혼자금으로 주었다. 자녀들은 돼지가 팔려나간 후에 어머님의 우는 모습을 보게 되었고, 그 후로는 집에서 돼지 울음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청빈한 개척자 가정의 애절한 가족사이다. 이원근 전도자는 가난하였지만 물질의 풍요로움을 쫓지 않고, 생활의 불평 없이어떤 형편에 처하든지 감사한 마음으로 자족하는 청빈한 삶을 살았다(빌 4:11~12).
이원근 전도자는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라는 말씀을 평생토록 신앙의 신조처럼 즐겨 암송하였다. 이 말씀처럼 복음전도를 위해서는 누구와도 어느 교회와도 자신을 낮추시고 협력하는 사역을 하였다. 장로교에서 목회할 때든, 환원한 후 다섯 개의 그리스도의 교회를 개척할 때든 언제나 자신을 낮추고 다투거나 원망하는 일이 없었다. 학교법인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학원 이사로 재직하면서 어떤 사안들로 의견이 대립할 때에도 화해자로서 화합의 길을 도모하였다. 언제나 다른 사람 앞에서는 말을 많이 하지 않고 성품상 조용하였다. 만일 할 말이 있으면 개인적으로 찾아가 분명하게 말씀하였다. 평생토록 자기 자신에 관한 말이나 자기 자랑을 하지 않고 겸손하였다. 이원근 전도자는 묵묵히 온갖 고난을 견디면서 주의 복음 사역에만 일생을 바쳤었다. 1978년 6월 16일 새벽기도 때마다 즐겨 부르시던 “내 평생소원 이것뿐 주의 일 하다가 이 세상 이별하는 날 주 앞에 가리라”는 찬송을 부르는 속에 조용히 소천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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