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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주님의 십자가 김영덕 2021-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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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는 말

사람은 저마다 영생을 갈구합니다. 누구나 영원히 살고 싶어 합니다. 죽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스스로 생명을 끊은 이들 역시 죽고 싶어서 죽은 것이 아닙니다. 사실은 그들이 더 살고 싶은 몸부림으로 죽은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죽어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규정하셨기 때문입니다(히 9:27. 창 3:19. 시 90:3. 전 3:20). 그러나 죽음 후에는 소망이 있습니다. 다시 살아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죽음은 다시 살아나는 영생으로 향하는 길목입니다. 성경은 주님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다고 말합니다(계 14:13). 이는 주님 밖에서 죽는 자들은 복은 고사하고 저주를 받을 것임을 시사합니다(마 25:41. 고전 16:22. 갈 1:8~9).

우리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아담 이래로 모든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부활하지는 못했습니다. 일시적으로 다시 살아난 사람들이 있으나 결국은 다시 죽고만 것입니다. 오직 주님만이 다시 살아 나셨습니다. 그래서 죽음은 부활의 과정을 여는 신호인 것입니다. 부활이란 일시적으로 살아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죽지 아니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주님의 죽음은 우리에게 영생의 길을 열어주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 시간 주님께서 짊어지신 십자가를 떠올리면서 그 십자가가 내포하고 있는 내용 및 의미를 마음 속 깊이 되새겨보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십자가는 수난과 멸시를 내포함.
빌라도가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말하기를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고 합니다. 이에 “백성이 다 대답하여 말하기를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라고 합니다. 빌라도는 무죄한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수하들에게 넘깁니다. 십자가형은 고대 이방세계에 있어서의 사형집행의 형구(刑具)였습니다. 로마시대에 이르러는 로마시민권을 가진 자에게는 이 십자가형은 행해지지 않았는데 그 잔혹함 때문이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십자가의 유래에 관하여는 다양한 견해가 있습니다만 구약성경이 이에 관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이 나무가 단지 나무기둥인지 십자가를 가리키는 것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이 사형도구는 당시 유대인사회(유대사형법은 돌로 쳐서 죽이는 것임-출 8:26. 레 20:2, 27)가 아닌 이방인 세계에서 사용되었던 것으로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명령하신 내용을 최초로 하여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아이성을 함락시키고 아이성의 왕을 나무에 달았던 사실 및 에스더서에 언급하고 있습니다(신 21:22~23. 요 19:31. 행 5:30. 갈 3:13. 수 8:29, 10:26~27. 에 2:21~23. 5:14, 6:4, 7:9~10, 8:7, 9:13~25).

예수님의 죽으심은 예삿일이 아닙니다. 로마의 군병들에 의하여 난폭한 취급을 받을 것입니다. 그들은 무죄한 예수님을 죄인처럼 모멸할 것입니다. 주님은 억울한 누명을 쓰고 사형수가 됩니다. 홍포를 입히고 머리에는 가시 면류관을 씌워 자칭 유대인의 왕으로서 희롱을 받습니다. 온 몸은 서른 아홉 대의 채찍에 으깨어지고 그 몸으로 무거운 십자가를 운반해야 합니다. 골고다를 오르는 발걸음은 자국마다 피로 범벅이 되게 합니다. 벌거벗긴 몸으로 십자가에 높이 달리십니다. 정오의 태양은 뜨겁게 내려 쪼입니다. 사해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은 가히 살인적입니다. 그 뜨거운 기운이 갈증을 유발합니다.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는 고통이 짓누릅니다. 피범벅이 된 온 몸은 사슬처럼 조여옵니다. 뜨거운 태양열에 모든 수분은 증발해 버리고 터지고 할퀸 상처들은 불길에 종이 장이 말려가듯 사지를 뒤틀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들은 육체적인 고통일 뿐입니다.

그분의 내면의 세계는 더욱 황망해 집니다. 첫 사람 아담 이래로 범죄한 모든 사람의 죄들이 지옥의 아귀처럼 그의 영혼을 물고 늘어집니다. 과연 한 사람의 희생으로 만민의 죄가 용서될 수 있을런지요. 눈을 들어보아도 구원자는 없습니다. 하나님마저 눈을 돌리셨습니다. “나의 아버지여 나의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울부짖는 소리는 멀리서 들려오는 해조음(海潮音-조수가 흐르는 소리. 또는 파도 소리)보다 더 아득합니다. 수 없는 절망과 허탄한 심정만이 반복됩니다. 예수님도 인간이십니다. 하늘을 우러러 도움 받을 길을 찾지 못한 주님은 겨우 실눈을 뜨고 동료들을 가늠해 봅니다. 약 3년 동안 양육했던 제자들은 스승을 떠나 버린지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모친 마리아를 비롯하여 가여운 여인들 몇은 위협으로 인하여 십자가에 접근하지 못한채 마냥 슬퍼하며 울고 있습니다. 그 사이로 아귀다툼 같은 조롱과 수많은 비난의 낱말들이 폭죽 같이 터져서 온 몸을 휘감습니다. 참아내기 차마 어려운 순간들입니다. 육체와 정신과 영혼으로 감내하기 어려운 그 수난을 면전에 두고 죄와 사망의 질곡을 걷고 계시는 예수님이십니다.        

둘째, 십자가는 애매히 고난당함을 내포함.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은 멸시와 천대를 감수한 고난의 죽음입니다. 교권주의자들에게 업신여김을, 여우같은 헤롯에게 무시를, 빌라도의 우유부단한 조치로 인하여 로마 군병들에게 희롱과 핍박을, 친 백성이었던 유대인들에게는 멸시를 당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왜 이러한 고난을 겪으며 죽음을 당하셔야 했습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의 죄를 처리하고 사단의 손에서 건져내기 위함입니다. 우리의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 원칙을 분명히 함은 첫 사람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후 죄의 몸으로 영생을 하게 될까봐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을 그룹과 화염검으로 차단함에서 그 원인을 발견하게 됩니다(창 3:22~24).

옛사람이 처리되지 않는다면 여전히 가식적인 삶을 살게 될 것이며, 이는 사악한 행위가 되기 때문입니다. 반성할 줄 모르고 개선의 기미가 없는 사람을 사회에서 격리함과 같은 이치입니다.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하고 임의대로 행하는 자는 여전히 자신은 깨닫지 못한 가운데 사단에게 종노릇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십자가로 우리 옛 사람을 처리하여 주셨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은총으로 흑암의 권세(죽음-사망)에서 벗어나 새사람이 되었고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입니다(고후 5:17. 히 10:20).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의 내면은 각축장이 되어 성령의 법과 사망의 법이, 성령의 소욕과 육체의 소욕이 서로 치열하게 다툽니다(갈 5:17. 롬 7:5~25).

사도바울은 성령을 따라 살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을 것이며,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 비결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 옛사람을 처리하기 위하여 대신하여 이방인의 손에 의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육체의 고통을 당하신 것입니다(마 27:34~37. 갈 5:24. 빌 2:8). 아울러 가룟유다의 배신, 제자들의 흩어짐, 로마군병과 유대인들의 희롱과 조소로 인한 정신적인 고통은 더욱 심하였으며(마 27:39~44. 시 22:6~13), 그보다 더욱 큰 충격인 아버지께 버림을 받았다는 절규에 담긴 영적고뇌는 말로 형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마 27:46. 시 22:1~2). 주님은 그분 자신을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습니다(히 5:7~9). 사도베드로는 오순절에 복음선포에서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으나(행 2:23)”라고 말하였는데 여기서 십자가의 형극을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예언의 성취입니다. 유대인들이 이방인의 손을 빌어 구주 예수를 죽게 할 것임을 성경은 미리 말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시 22:12~21).

셋째, 십자가는 무죄한 죽음을 내포함.
주님의 죽으심이 무죄한 죽음이었다는 사실을 성경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당시 예수님을 죽이는데 앞장을 섰던 대제사장을 비롯하여 유대 최고 의결기구인 산헤드린의 불의한 행위들을 비롯하여, 빌라도의 손을 씻는 행위 및 증언, 그러한 현장을 목격한 다수의 증인(사도들 및 주님을 따랐던 무리)들이 주님의 무죄성을 입증하고 있는 것입니다(벧전 2:22). 주님의 무죄를 증거하는 가장 큰 증거는 주님을 사망에서 다시 살리신 하나님의 능력입니다(행 2:24. 고전 6:14. 고후 1:9~10, 13:4). 주님께 죄가 있었다면 그는 다시 살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은 사망을 거쳐 지옥에 멸하십니다(마 10:28. 눅 12:5. 계 20:14, 21:8). 범죄한 자는 흙으로 돌아가게 규정하셨습니다(창 3:19. 시 104:29, 146:4. 전 3:20).

주님은 영원 전부터 자존하셨습니다(요 1:1~2, 8:25). 하나님의 말씀으로 존재하셨습니다. 만물이 그분에 의하여 창조되었고 그분을 위하여 창조되었습니다(골 1:16).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동등됨으로 여기지 않고 자신을 비어 종의 형체인 미천한 사람과 같이 되신 것입니다(빌 2:7). 창조주의 위치에서 피조물의 위치로 자신을 낮추신 것입니다. 이를 가리켜 주님의 겸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왜 이렇게 하셨습니까? 죄인을 위하여 죽으시려는 것이었습니다(벧전 2:24).

과거 신분제도가 있었습니다. 그러한 신분은 대물림이었습니다. 주인이 면천(免賤)하여 주지 않으면 평생 미천한 신분으로 살아야만 했던 철칙(鐵則)과 같은 것입니다. 범죄하면 죄의 종입니다. 죄의 나락으로 빠져 들어가면 다시는 이전 밝은 곳으로 나올 수가 없습니다. 모든 인류는 자신들의 의지로 하나님의 뜻을 따르며 그분을 영화롭게 하기보다는 자신들의 의지를 욕심을 채우는데, 사용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아닌 사단을 따른 것입니다. 이렇게 범죄한 인류는 결국 사망 아래 놓이게 됩니다. 그러한 흑암의 권세 아래 있는 인류를 구원하여 인권을 회복시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고자 주님께서 기꺼이 사지(死地)로 향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무죄할 뿐만 아니라 죄가 무엇인지 조차 알지 못하는 분이십니다(히 4:15. 고후 5:21). 이는 선악을 구분할 줄 모른다는 것이 아닙니다. 죄와 무관하며 죄를 초월해 계신다고 이해함이 타당할 것입니다(히 7:26. 요일 3:6). 죄가 없으시며, 하나님의 본체요 형상이신 존귀한 분(빌 2:6)이 죄인들의 손에 죽으신 것입니다(행 2:22~23). 주님은 적대자들의 소행(피를 요구하는 악행)에 묵묵히 순응하였습니다. 주님은 그러한 죄인들을 대신하여 스스로 죽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죄와 세상에 대하여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은 존재들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이로 인하여 주님과 함께 살 것이라는 소망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믿고 주님을 경외하여야 할 것입니다.

넷째,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을 내포함.
주님은 죽음의 문턱에서 비굴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자세와 태도로 일관한 주님이시기에 죽음은 전혀 두려움이 되지 못합니다. 주님의 죽으심은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능력이 수반된 것입니다. 아울러 주님께서 다시 살아나심 역시 하나님을 증거하는 능력인 것입니다(고전 1:18). 하나님의 능력은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나타났는데 예루살렘 성전 내 지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갈라진 것입니다. 이는 더 이상 구약 하에 시행되던 율법의 제도가 주님의 죽으심과 함께 기능을 상실함을 뜻합니다(엡 2:15. 골 2:14~15. 히 7:18, 10:9). 주님께서 성육신으로 이 땅에 오실 때도 볼 수 없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표현하셨습니다. 33년 6개월의 생애를 통해서 하나님의 실존하심을 증거하셨습니다. 말씀과 삶을 통해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최종적으로는 부활하심으로 영존하시는 아버지를 드러내신 것입니다.

과거 구약에서 죽음을 맛보지 않은 인물 중 에녹과 엘리야가 있습니다. 그 역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죽음의 과정을 거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죽음이 주는 의미를 간접적인 경험을 통해서 이해는 하겠으나 완전한 이해는 못할 것입니다. 하늘의 천사들 역시 하나님의 실존을 증거하지만 그들 역시 죽음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 역시 그렇습니다. 죽음을 아직 직접적으로 경험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렇다고 죽음을 경험하려고 생명을 저버리려고 하지 마십시오. 자신 및 타인의 생명에 위해를 가하는 것은 생명을 주신 하나님을 경시하는 행위이며, 범법행위인 것입니다.

사도바울의 생애가 그 좋은 본보기가 되는데 그는 평소에 죽음을 경험한 듯합니다. 아니 어쩌면 실질적인 죽음을 맛보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는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을 하였고, 핍박으로 인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졌다(고전 15:31. 고후 1:8)는 그의 고백은 고난으로 점철된 사도요 傳道者로서의 삶의 여정이었음을 시사하는 것입니다. 물론 사도바울이 고난을 자청한 것은 부득불 해야만 하는 소임임을 강조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추구하는 가운데 부활에 이르려고 했기 때문입니다(고전 7:16. 빌 3:10~14).

다섯째, 십자가는 부활과 승리를 내포함.
여러분의 시야에는 지금 성경(복음서)을 통해 육신의 몸을 입고 세상 가운데 홀로 처하여 질고를 겪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보입니까? 우리는 주님 자신의 처지를 먼저 살펴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쓰라린 번민과 고통을 목전에 두고 계십니다. 우리는 당장에 다가올 일도 알지 못하므로 방심하기 쉽지만 주님께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예루살렘 입성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아셨습니다. 갈릴리에서부터 이미 한 가지 일을 위하여 예루살렘에 오셨습니다.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에게 고난을 받고 죽임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입니다. 과거 살아났다가 다시 죽은 ‘예’들이 있습니다(마 27:52. 행 9:34~35, 20:9~12. 왕상 17:18~24. 왕하 4:29~37). 그러나 사망을 이기고 살아나신 주님은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는 주님을 주장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남으로 이러한 주님의 부활생명을 약속받았습니다. 이 생명을 스스로 거절하지 않는 이상, 주님의 약속은 영원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독생자가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순간에도 여전히 침묵을 하셨습니다. 서서히 주님을 향한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징조가 나타납니다. 제 육시로부터 구시까지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계속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독생자로부터 등을 돌리셨음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직감을 하십니다. 극한 두려움입니다. 큰소리로 외칩니다. “엘리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절규를 합니다(마 27:46. 막 15:34). 아버지께 버림을 받았다는 사실은 생명의 끈을 놓을 수밖에 없는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슬픔인 것입니다. 그 슬픔은 간간이 잇는 생명줄을 마지막으로 놓게 합니다.

그러한 처지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아버지를 경외하는 가운데 의지합니다. “아버지여 나의 생명을 아버지 손에 맡기나이다(눅 23:46)”라고 간구하십니다. 그리고는 ‘다 이루었다(요 19:30)’라고 말씀하시고 운명을 하십니다. 하나님의 손에 그분 자신을 맡긴다는 신뢰의 말씀은 부활을 암시하는 것입니다(행 2:24). 사도베드로는 주님의 신뢰에 관한 이러한 사실을 강조하였습니다(벧전 2:23~25). 첫 사람 아담의 범죄로 시작하여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재현될 모든 죄를 십자가에 처리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에 달린 독생자를 통해 인류의 죄를 용서하신 것입니다.

유일한 독생자를 외면하고 인류의 죄를 아들로 대신한 그 하나님의 사랑을, 그 아버지의 심정을 헤아려 볼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아들에게 인류의 죄에 대한 책임을 묻고 심판하심으로 용서하셨습니다.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이렇게 표현되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인류가 깨닫고 사실을 믿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시대를 보십시오. 무지한 인간들은 역사적인 사실을 애써 부정하여 성경을 신화로, 설화로 취급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욕되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합니다. 여전히 사단을 추종합니다. 정치, 사회, 문화, 종교적으로 자의적 숭배로 점철된 죄악 된 사상이 난무합니다(골 2:23). 참으로 개탄스러운 현실입니다. 이렇게 무지하며, 불신하는 세대를 위하여 우리를 먼저 부르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향해 나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그리스도와 그분의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는 노력을 기울이며, 성경연구에 심혈을 기울여야 하겠습니다(요 5:39, 17:2~3. 벧전 1:11).  

주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은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고 주님께서 부활하실 것을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주님은 사망에 갇혀있을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발적으로 일어나실 수가 없으십니다. 주님께서 나사로를 살릴 때 말씀의 능력이 수반되었던 것처럼(요 11:41~44), 과거 마른 뼈들이 선지자에스겔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함으로 하여 군대를 이루었던 것처럼(겔 37:1~12), 주님의 부활도 하나님의 능력이 수반되지 않으면 불가합니다. 주님께서 다시 살아나실 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성부하나님의 고유권한이십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머무실 때도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 생명의 원천이 아버지이심을 말입니다(요 5:26). 하나님께서 그분의 독생자를 살리신 목적을 성경은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행 17:31). 사도바울 역시 하나님의 능력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셨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롬 1:4. 고후 13:4).

여섯째, 십자가 위에서 말씀하심
주님께서 적대자들에 의하여 십자가에 달리셔서 멸시와 조롱을 겪으며 고난을 당하는 가운데 운명하시기까지의 말씀하신 것이라고 하여 가상칠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가상팔언(十字架上八言)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시기 직전 크게 소리를 지르신 것은 단지 외마디 비명이라고 치부하기보다는 비록 알아들을 수가 없으나 이 또한 주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사복음서는 십자가의 주님에 관하여 이렇게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내용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제 1언-눅 23:34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제 2언-눅 23:43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제 3언-요 19:26~27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시니이다” 제자(요한)에게 “보라 네 어머니라”
제 4언-마 27:46. 막 15:34 “엘리 엘리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제 5언-요 19:28 “내가 목마르다”
제 6언-요 19:30 “다 이루었다”
제 7언-눅 23:46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제 8언-마 27:50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

닫는 말
주님의 십자가가 여러분 곁에 어떻게 다가섭니까? 그 참혹한 십자가는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을, 죄인에게는 하나님의 사죄의 은총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에는 그 무엇으로도 제거할 수가 없는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짙게 배여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고난과 죽음을 감내하시고 하나님의 진노를 온 존재로 감당하신 것은 전적으로 우리를 사랑하심 때문이라고 할 것입니다(요 15:13. 갈 1:4).

의례적이며 습관처럼 입술로만 외치는 사랑, 자신의 명예를 위하여 회칠하는 거짓된 사랑, 사람들이 나름대로 사랑이라고 정의하여 나열하는 세상에 만연된 그러한 사랑이 아닌, 하나님 자신만이 지니고 있는 거룩하고 숭고한 사랑을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증명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고난의 죽음을 당하신 목적에 관하여 성경은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는바, 사도베드로는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 2:11b)”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상에서 죽으신 주님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죽음을 이기고 무덤에 묻힌지 사흘만에 다시 살아 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지금도 살아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십니다(행 7:56. 히 10:12, 12:2~3). 성경은 교회를 촛대로 묘사합니다. 주님께서 오른 손에 그 촛대를 들고 모든 사람들을 그분의 몸 된 교회로 부르십니다(계1:12~20. 요 12:32). 우리 각자의 마음에 십자가의 흔적 즉 주님의 죽으심이 심비에 각인되었으면 합니다(갈 6:14~17). 그 결과 십자가의 은총이 우리의 각 심령에 일생일대의 변화를 가져다주는 계기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주님의 십자가가 우리 각자에게 주는 의미를 깊이 되새겨 보는 한 주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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